달빛이 비추는 낙동강 정경에 ‘흠뻑’
- 현대시 달 밤 / 이호우
- 2014. 06. 29 16:15 입력
달 밤 / 이호우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淨化(정화)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이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한 폭의 수묵화 보는 듯한 달밤 정취 원근법·동작적 심상 조화시켜 표현
이 작품은 1940년 이병기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발표된 작품이다. 낙동강의 나루에 빈 배가 떠 있는 고적한 모습을 감흥 있게 표현했다. 낙동강에 달빛이 흘러드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처럼 묘사돼 있다. 특히 정형률을 담은 시조인데도 문맥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가락으로 달밤의 정취를 잘 표현해내고 있는 작품이다. 현대적 감각과 정서를 잘 조화시킨 시조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호우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원근법과 동작적 심상을 잘 조화시켜 정감을 드러내고 있다. 1연에서는 달밤의 상황 제시를, 2연에서는 달밤의 정경을, 3연에서는 동심의 세계를, 4연에서는 간절한 염원을 나타내고 있다.
화자는 ‘무엔지 그리운’ 달밤,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평화로웠던 옛날을 회상하며 달빛처럼 맑은 숨결로 가득 찬 세상이 오기를 기원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쓴시들에서 ‘밤’은 일반적으로 어두운 시대적 상황을 뜻하는데 이 시조에서의 밤은 어둠의 밤이 아니라 평화로운 ‘달밤’이다. 달빛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평화로운 공간으로 회상된다. 또한, 달빛은 온 세상을 ‘정화(淨化)’시켜 ‘사랑’의 숨결로 가득 찬 세상, ‘그림’ 같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날이 새면 ‘미움’과 ‘더러움’ 세상이 현실로 다가올 것이기에, 그는 차라리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달밤인 이 밤이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라며 이 밤이 더디 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호우(李鎬雨, 1912~1970·호는 爾豪愚)는 경북 청도에서 출생했다. 의명학당을 거쳐 밀양 보통학교를 마쳤으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신경쇠약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929년 일본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學)에 입학했으나 신경쇠약에다 위장병까지 겹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1940년 이병기의 추천을 받아 시조 ‘달밤’ 등이 ‘문장’ 지에 발표돼 문단에 나왔다. 8·15 광복 후에는 잠시 대구일보사를 경영했으며, ‘대구매일신문’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을 지냈다. 1946년 ‘죽순’ 동인, 1968년 ‘영남문학회’를 조직했다. 이어 발표한 ‘개화’ ‘휴화산’ ‘바위’ 등은 감상적 서정 세계를 넘어서 객관적 관조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1960년 4·19 이후에는 시조 창작에만 전념했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노래하고 영탄하던 종래의 시조와는 달리 평범한 제재를 평이하게 노래했으며 후기에는 인간의 욕정을 승화시켜 편안함을 추구하는 시조를 썼다. 작품집으로 1955년에 펴낸 ‘이호우 시조집’ 외에 누이동생인 시조시인 이영도(李永道))와 함께 1968년에 펴낸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가 있으며, 유명한 작품으로는 ‘살구꽃 핀 마을’ ‘개화’ 등이 있고, 이호우·이영도 문학관이 청도군에 있다.
6개월 동안 1950년 이전의 유명 시를 25편 정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애독해 주신 장병 여러분 감사합니다.
<김민정 시조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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