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의 벅찬 기쁨 담아 희망찬 내일 맞이
- 해 / 박두진
- 2014. 06. 15 16:29 입력 | 2014. 06. 15 16:46 수정
해 /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대화합으로 사랑·평화가 충만하길…“서정시가 이룰 수 있는 절정을 노래”
‘상아탑’ 6호(1946. 5)에 실린 박두진의 이 시는 그의 첫 시집인 ‘해’의 표제시이기도 하다. 일제 암흑기의 어둠을 몰아내고 8·15 광복을 맞은 벅찬 기쁨과 민족의 염원과 이상을 ‘해’를 통해 상징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해’는 생명의 근원이며 경이롭고 희열적인 존재로 에덴동산처럼 밝고 희망찬 ‘청산(靑山)’에서 평화로운 낙원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둠·달밤·골짜기·칡범·짐승 등은 악(惡)과 추(醜), 강자(强者)의 이미지를, 해·사슴·청산·꽃·새는 선(善)과 미(美), 약자(弱者)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시인은 이들의 대화합을 추구하며 사랑과 평화가 충만한 이상 세계, 즉 모든 생명이 서로 갈등 없이, 두려움 없이 한자리에 모여 평화롭게 공존공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고운 날’을 꿈꾼다. 이 시는 조국 광복의 기쁨을 이상향의 추구로까지 발전시킨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의 면모까지 보이고 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문학평론가인 조연현은 이 작품을 가리켜 “한국 서정시가 이룰 수 있는 한 절정을 노래했다”라고 평하고 “박두진은 이 한 편의 시로 유언 없이 죽을 수 있는 인간이 됐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이어령은 우리는 신라시대부터 ‘찬기파랑가’ 등 해보다는 달을 찬미하는 이태백 문화권에서 살아왔는데, 이 시에서 처음으로 ‘달밤이 싫어’라는 달빛 부정의 선언을 듣게 됐고 그 대신 앳된 것, 고운 것,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으로 향한 대낮의 화살표를 보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문화 기층을 이룬 십장생도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달이 아닌 해인데, 그러한 시점에서 보면 박두진의 이 시는 한국시에서 해를 복권한 시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평한다. 또 이 시에서 ‘솟아 있는 해’가 아니라 ‘해야 솟아라’라고 말함으로써 화자의 욕망 속에 잠재해 있는 해로, 광복 전에 초고가 쓰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박두진(1916~1998)의 호는 혜산(兮山). 경기도 안성 출생이며 박목월·조지훈과 함께 청록파 시인이다. 초기에는 그리스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자연을 읊다가 차츰 사회현실을 노래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1939~40년 ‘문장’에 시 ‘묘지송’ ‘낙엽송’ 등으로 등단했다. 이화여대와 연세대 교수를 역임했다. 시집으로 ‘해 박두진시선’ ‘사도행전’ ‘수석열전’ ‘불사조의 노래’ ‘청록집 이후’ 등과 수필집 ‘시인의 고향’, 시론집 ‘한국현대시론’ 등이 있다. 아세아자유문학상, 서울특별시문화상, 3·1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김민정 시조시인·문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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