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에세이>
‘꿈 너머 꿈’
宇玄 김 민 정
1981년 중앙일보에서 시조붐을 일으키기 위해 독자란을 만들고 시조에 대한 투고를 하게 했던 때가 있었다. 그 때쯤 나는 여성중앙이란 잡지를 가끔 사서 보았는데 『겨레시짓기 운동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란 글귀와 함께 시조작품 실린 것들이 나와 있었다. 이런 정도의 시조쯤은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어 투고를 하게 되었고, 퇴고도 없이 보낸 작품 「봄비」가 1981년 여성중앙 4월호에 박경용 선생님의 평과 함께 독자란 제일 첫머리에 실린 것이 내가 시조시인이 된 계기가 되었다.
대학 4학년 때인 1985년 시조문학창간25주년 기념 지상백일장 장원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시조를 시작한 지 5년만의 결실이라 나는 기뻐하며 대학에서 유일한 시인이며 시론을 강의하시던 김구용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김구용 선생님은 『시조문학』이란 잡지가 너무 시조시인들만의 좁은 잡지라 생각하셨는지, 내게 편지 한 통을 써 주셨다. 그것은 『현대시학』전봉건선생님께 보내는 나에 대한 추천서였는데, 나는 “나를 장원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과 잡지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말씀을 김구용 선생님께 드렸더니 선생님은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 결국 나는 그 편지를 전하지 않은 채 지금껏 내가 고이 간직하고 있다. 가끔 내가 너무 고지식하고 어리석은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그 순간은 그것이 바른 행동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 당시 나는 『현대시학사』에 자주 갔는데, 김구용 선생님이 원고를 직송하는 심부름을 내게 시켰기 때문이다. 삐꺽이는 나무계단을 올라 서대문 『현대시학사』2층에 가면 전봉건 선생님이 혼자서 원고 교정을 보고 계실 때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시를 쓰고 싶어하는 나에게 일부러 잡지사에 심부름을 시키곤 하셨는데, 그 때 나는 그 뜻을 미처 깨닫지 못했고, 3,4학년 때는 교사가 되기 위한 순위고사 공부를 하느라 또 한 번 창작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시조를 제대로 창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 3학년 여름방학에 윤선도의 유배지였던 보길도에 가게 되었고, 그 곳 <예송리>라는 해변에서 경험한 것을 시로 써보고 싶었다. 자갈해변인 관계로 짜르륵 짜르륵하며 모래가 아닌 돌 구르는 파도소리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무도 없는 밤바다의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짜르륵짜르륵 하는 파도소리는 자연 앞에선 나를 너무나 숙연하고 왜소하게 만들었다.‘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리고 내가 죽은 후에도 저 파도소리는 계속 들리겠지….’내가 유한한 생명을 가진 한 인간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생을 더욱 뜨겁게,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나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 때의 생각들을 살린 작품이 「예송리 해변에서」로 탄생되었고 나의 등단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시조시인 윤선도님의 유배지를 보러 가서 윤선도님이 내게 준 선물을 톡톡히 받아온 셈이다.
1985년 봄에 등단을 하고 그 해 가을, 대학 4학년 때 나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순위고사 공부에 파묻히고, 교사로 발령 받아 두 딸을 낳고 교사 생활에 바빠 시조와의 인연도 끊고 생활 속에 파묻혀 세월만 보냈다. 그러다가 1998년 봄에 첫시조집을 묶게 되었다. 등단 13년만이었다. 시집을 냈더니 그 동안 나를 알던 시인들이 너무나 반겨주었다. 절필한 줄 알았더니 시집을 냈다며 옛 나래동인들은 물론이고, 알고 있던 모든 시인들이 축하를 해 주었고, 첫시조집, 『나, 여기에 눈을 뜨네』로 한국공간시인 본상과 성균문학상 우수상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시를 다시 열심히 쓰겠거니 하고 나에게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엉뚱하게 박사과정 공부를 시작했고, 2003년 여름에 김상옥, 이태극, 정완영 세 분 선생님의 작품을 연구하여 『현대시조의 고향성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2005년에는 두 번 째 시조집 『지상의 꿈』을 발간하며 정완영 선생님의 귀한 서문과 이지엽 교수님의 귀한 발문을 받아 인상적이었고 행복했다.
2006년, 현대시조 100주년이라고 시조단에서는 행사를 크게 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현대시조 100주년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개인 단시조 100편을 묶어 내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단시조 100편을 묶은 『사랑하고 싶던 날』이 탄생되었다. 문무학 시인님이 정성껏 발문을 써 주셨는데,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내 시의 의미를 99%이상 집어내셨다. 해설해 주신 작품 중 단 한 작품만 내 생각과 조금 차이가 있고 다른 작품은 내 뜻과 100% 일치하는 평이었다. 놀라운 평론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 시집을 지인들께 돌리고 난 며칠 후, 한양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하시고 강동문인회 초대회장을 하신 전재동 박사님이 잠깐 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 때도 정신없이 바빠 잠깐 학교로 오시라고 했더니, 시집을 읽고 감명받아 평을 쓰셨다면서 읽어보라고 주셨다. 컴퓨터를 할 줄 모르신다며 깨알 같은 친필글씨를 전해주시며 컴퓨터로 쳐서 계간『문예사조』잡지사에 보내라고 하셔서 그 때 또 한 번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일부러 부탁드린 일도 없는데 시집을 읽고 감동받으셨다며 평론을 써 주신 경우이다. 강동문인회 모임에서만 뵈었을 뿐 직접 차 한 잔 사 드린 일도 없거늘…. 이 시조집 『사랑하고 싶던 날』에 실린 「도솔암 적요」라는 작품으로 나래시조문학상도 받게 되었으며, 현존하는 최고의 시조시인 정완영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상패를 받아 더욱 영광스러웠다.
그리고 2008년 네 번째 시조집 『영동선의 긴 봄날』은 영동선 철로변에 사셨던 아버지의 일대기를 쓴 서사시조집인데, 이 시집을 출간하고 코레일 강원본부에 보냈더니 얼마 후 그곳 박춘선 본부장님으로터 연락이 왔다. 너무나 감동 깊어서 두 번이나 자세히 읽었노라며, 시간날 때 와서 코레일 간부들에게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이셨다. 나는 흔쾌히 응낙했고, 방학 중 가서 간부들 80여 명 앞에서 시조창작에 관한 강연을 해 드렸다. 강연이 끝나자 본부장님은 본인도 시조창작을 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며 나를 격려하셨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사람이 그리운 날엔 기차를 타라』라는 수필집 간행도 하게 되었고, 대전역, 청주역, 천안아산역, 제천역, 태백역 등에서 시화전과 작가사인회를 크게 개최하기도 하였고, 코레일로부터 전우상 강원본부장의 감사패와 강해신 부산경남본부장님으로부터 공로패와 〈철도시인〉이란 명명까지 받았다. 또 독자들에게 〈철도시인〉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중부내륙관광열차 내부천장에 ‘영동선의 긴 봄날 1’이란 작품이 실리게도 되었다.
시조계를 위하여 조금은 도움을 주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은, 2004년부터 2011년까지 7년간 국방일보에 시를 연재하면서 시조를 많이 소개하였다는 점이다. 7년 동안 350여 편 정도 소개하였는데 80% 이상이 시조였으며, 독자들로부터 ‘국방시인’, ‘국민시인’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2010년에 한․몽 수교20주년을 기념하여 한․몽 국제 심포지엄 및 전통시 낭송회를 주관하여 개최한 것도 내게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큰 행사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으로 1차 년도인 2010년에는 몽고 울란바토르에서, 2차년도인 2011년에는 서울에서 개최함으로서 한분순 이상장님이 재임할 때, (사)한국시조시인협회에서는 처음으로 외국과의 정식 문학적 교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몽고의 유명시인들이 참가한 행사였기에, 올해 몽고에서 도서전시회를 할 때 그 행사 때의 작은 번역시조집이 몽고인들 사이에서 인기와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나는 학사, 석사, 박사논문을 모두 시조로 썼으며, 시조가 국민문학이 되어 국민 모두가 알고 짓고 사랑하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천 년 후에도 남을 아름다운 작품 단 한 편이라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시조창작 쪽에 눈을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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