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시학, 김민정 작품론>
이미지, 혹은 역사와 시간의 향연
황 치 복(고려대교수, 문학평론가)
1. 내면의 이미지, 혹은 이법의 이미지
김민정 시인은 1985년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래 『영동선의 긴 봄날』을 비롯하여 『사랑하고 싶던 날』,『지상의 꿈』, 『나, 여기 눈을 뜨네』등의 시집을 상재한 바 있다. 시조 창작의 이력 또한 30여년에 접어드는 중견 시인으로서 그동안 참신하고 문제적인 시조 작품들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그녀의 시조 작품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이미지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서 특정한 정서와 사상을 환기하는 작품 경향이 시인이 지닌 시조 창작의 근본적인 추동력인 셈이다. 새롭게 발표하는 신작 중에서 아무렇게나 뽑아 본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아도 이러한 경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웅크렸던 붉은 울음/수면 위로 떠오른다(「백비」)
는개비/어둠을 걷고/네가 일어설 때까지(「백비」)
연두빛 발을 담근 오십천은 더 푸르고(「죽서루 편지」)
파릇한 햇살 속에서 숨바꼭질 한창이다(「죽서루 편지」)
붉어진 배롱나무 기대어선 선사시대(「움집의 내력」)
반짝이는 언어도 언어이지만,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할 수 있을 것 같은 선명한 색채 이미지의 향연이 아름답다. 하지만 김민정의 시조가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단순히 자연의 풍경이나 경치를 담아내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붉은 울음”이라는 표현이나 “파릇한 햇살” 등의 표현들은 시적 이미지들이 단순히 풍경의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어떤 정서적 울림이나 사상적 깊이를 함축하고 있음을 웅변해주고 있다.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품을 통해서 그러한 이미지의 함축적 효과에 대해서 다가가 보자.
왈칵,
바다를 열자
찬바람이 뺨을 갈긴다
군마가 달려간 자리 뽀오얗게 이는 포말
언덕 위 썬크르즈가 그 속으로 빠져 든다
천지의 자궁문이 조심스레 열린다
신의 손이
밀어 올리는
저 싱그런 햇덩이!
뚝, 뚝, 뚝
듣는 황금물 온 바다가 환하다
청춘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자리
너와 나 달려가야 할 붉은 이유 거기 두고
신년호 닻을 올린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아침, 정동진」, 전문
정동진에서 해돋이의 광경을 관찰한 감상을 선명한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아침”, “정동진”, “썬크르즈”, “햇덩이”, “황금물” “청춘” 등의 어휘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새해 아침에 새로운 해가 돋는 장면과 그 장면을 보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내면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체로 붉은 빛의 색채적 심상이 중심적인 이미지로 부조되지만, 그 이미지의 주변으로 푸른색의 색채와 차가운 촉감이 포진하여 대비를 이루면서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하지만 붉은 색채와 푸른 색, 그리고 차가운 촉감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대비를 이루면서 새로운 한 해를 맞는 희망찬 감정, 그리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인의 신선하고 강렬한 의지를 표상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선명한 이미지와 그 효과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은 둘째 수이다. “천지”, “자궁문”, “신의 손” 등의 어휘들이 천치장조의 태고적 신비를 재생하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데, “싱그런 햇덩이”라는 심상에 그러한 원초적 신비의 정서가 집약되어 있다. 또한 “뚝, 뚝, 뚝/듣는 황금물”이라는 이미지는 막 태어난 새로운 생명의 신선함과 광채를 환기함으로써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는 효과를 달성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둘째 수에 구축된 다양한 이미지들은 새롭게 시작되는 천지,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새로운 한 해에 대한 시인의 놀라움과 경건한 자세 등을 표출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미지가 단순히 풍경의 묘사에 그치지 않고, 시인의 경이와 의지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펄펄 끓는 흰 눈발이
자작나무 숲에 얹혀
귀 대이고 부푼 고요 적막의 성을 쌓아
거대한 신운의 무게 말문의 벽 허문다
작은 길 오솔길에 숨어든 작은 짐승
새끼들 건사한 채
속삭이는 뜨거운 사랑
겨울숲 까마득한 벼랑 뚝뚝 꺾인 실가지
바람이 거센 밤은 꿍꿍 산이 울었다
눈보라 뿌연 비상 나무 끝에 맺는 흰꽃
저 깊은
화엄의 썰물
태어나는 돌부처
―「겨울숲 인상」, 전문
앞서 분석한 「아침, 정동진」이 확산과 상승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펼쳐졌다면, 이 작품은 수렴과 하강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다양한 심상들이 연관되고 있다. 또한 앞의 작품이 색채와 촉감에 의지한 이미지의 구축이 중심적인 경향이었다면, 이 작품은 뜨거움과 차가움이라는 온도 감각과 고요와 굉음의 청각 심상이 중심적인 모티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고 대립하면서 역동적인 시적 공간을 생성하면서도 그러한 자질들이 서로 화합하여 어떤 통일된 시적 정조를 형성해 준다는 점이다.
첫째 수와 둘째 수는 기본적으로 아이러니의 방법에 의해 이미지들이 구축되고 있다. 첫째 수의 “펄펄 끓는 흰 눈발” 속에 이러한 아이러니의 방법이 집약되어 있는데, 뜨거운 비등(沸騰)의 이미지와 차가운 동결(凍結)의 이미지가 “흰 눈발”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 또한 “부푼 고요 적막의 성”과 “말문의 벽 허문다”는 표현 또한 역설적인 구조를 띠고 있는데, 지극한 고요가 미세한 소리를 살아나게 하는 역설적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수의 “뜨거운 사랑”과 “겨울숲 까마득한 벼랑”이나 “뚝뚝 꺾인 실가지” 등의 표현들도 대립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뜨거운 사랑은 그야말로 따뜻한 온기의 생명을 환기하는데 반해 뒤의 두 구절들은 생명의 접근을 거부하는 냉기의 죽음을 환기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의 가장 중심적인 심상은 동결과 응축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자작나무 숲에 얹힌 흰 눈발은 “적막의 성을 쌓”고, “거대한 신운의 무게”를 이룬다. 그리고 비상하던 눈보라는 나무 끝의 흰꽃으로 응결된다. 이러한 동결과 응축의 이미지는 “화엄의 썰물”과 “태어나는 돌부처”라는 이미지로 집약된다. 화엄(華嚴)의 의미를 한 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는 일이지만, 범박하게 말해서 현상 세계의 개개의 사물들이 겉으로는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개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이 다 같이 서로 원인이 되는 무한한 연관관계를 갖는다는 주장쯤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화엄의 썰물”이란 서로 연기(緣起)의 원리로 결합되어 있는 삼라만상들이 현상세계에서 빠져 나가는 움직임을 형상화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겨울숲을 구성하고 있는 뜨거움과 차가움, 생명과 죽음, 고요와 소음 등의 다양한 자질들이 서로 연관되어 세계를 형성하면서 무대에서 사라지는, 즉 서서히 동결되고 응결되는 상태를 묘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완결되었을 때, 겨울숲은 하나의 “태어나는 돌부처”가 된다. 겨울숲의 온 세계가 돌부처로 응축되고 만 것이다. 물론 이 돌부처는 봄이 오면 다시 녹아 사라지고 화엄의 밀물이 밀려들어 봄숲을 형성할 것이다.
이상에서 분석한 것처럼 김민정 시인이 구축한 이미지는 결코 자연의 풍경이나 사물의 외관에 대한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시인의 이미지는 외적 풍경뿐만 아니라 자아 내면의 풍경과 자연 내면의 풍경, 즉 자연의 이치와 순리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김민정 시인의 이미지를 우리는 ‘깊이의 이미지’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2.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
시절가조(時節歌調)로서의 시조 양식의 장점이 동시대의 삶의 현장을 진단하고 비판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많은 시조시인들이 지금, 여기의 삶의 현장을 문제삼고 있으며, 이처럼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은 궁극적으로 역사적 지평으로 연결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김민정 시인 또한 이러한 삶의 현장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접근하는 시인에 속할 것이다.
웅크렸던 붉은 울음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역사의 소용돌이
부유하는 그날들이
아득히
사월을 부르며
저물어만 가는데
제주들녘 물길들은
어디쯤서 다시 만나
저릿저릿 떨려오는
목울대를 적시울까
는개비
어둠을 걷고
네가 일어설 때까지
―「백비」, 전문
제주도 민중항쟁인 4.3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조 작품은 시인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역사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현실을 다룬 이 시에서도 여전히 이미지는 빛을 발하고 있다. “붉은 울음”이라는 심상도 4.3사건으로 희생된 제주도민의 억눌린 울분과 한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해주고 있지만, 더욱 문제적인 심상은 제목인 “백비”라고 할 수 있다.
백비는 글씨를 새기지 않고 세운 비석을 뜻하는 백비(白碑)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맹탕으로 끓인 물을 뜻하는 백비탕(白沸湯)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전자를 의미한다면 ‘백비’의 이미지는 아무런 죄 없이 죽어간 이름 없는 민중들의 억울하고 한스러운 생애를 환기하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고, 후자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역사인식과 올바른 역사적 방향성의 정립을 위해 노력하는 살아남은 자들의 분노와 열정을 표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가 대체로 “물”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상기해 보면, “백비”는 끓는 물을 표상하는 백비탕의 의미에 좀 더 가까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시인의 애달픔과 안타까움의 정서를 감지할 수 있는데, 그러한 정서적 효과를 산출하는 것 역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를 지배하는 주된 이미지는 “물”의 이미지에서 유래하는 유동의 이미지, 혹은 무정형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뭐라고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유동적이며 불투명한 이미지들이 시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수면 위로 떠오른 “붉은 울음”의 이미지도 그렇지만, 특히 소용돌이치고 있는 역사, “부유하는 그날”, 그리고 “는개비”. “어둠” 등의 이미지 등이 규정되지 않은 채 유동하고 부유하는 어떤 상황과 흐름을 대변해주고 있다.
결국 이러한 유동의 이미지, 무정형의 이미지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부유하고 있는 제도도 4.3사건에 대한 시인의 안타까움을 표상해 준다. 이러한 안타까움은 제주도 4.3사건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인식과 평가,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올바른 역사적 전망과 방향성이 설정되기를 바라는 시인의 역사의식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3. 태고의 시간, 영원회귀의 시간
김민정 시인의 이번 신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 또한 시간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삶의 현장에 좀 더 밀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순수한 시간에 대한 관심과 차이를 지닌다. 시간에 대한 김민정 시인의 관심은 태고의 시간, 혹은 시원의 시간에 대한 관심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앞서 살펴본 「아침, 정동진」이나 「겨울숲 풍경」에서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요소이다. 태고의 시간에 대한 관심은 신화적 세계에 대한 관심과도 통한다는 점에서 김민정 시인의 시조 세계에 새로운 상상력의 깊이를 부여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연두빛 발을 담근 오십천은 더 푸르고
바위도 앉은 채로 놓여있는 누각에는
한 천 년 받쳐 든 시간 망울망울 부푼다
양지귀 물들이는 산수유 눈을 뜨고
첫마음 못 다한 말 홍매화 옅은 기침
파릇한 햇살 속에서 숨바꼭질 한창이다
돌을 찧어 구멍 내며 소원을 빌었다던
옛사람 그 손길이 뜰에 아직 남았는데
절반은 눈물꽃 맺혀 그렁그렁 피어있다
하늘 향해 돛을 단 관동별곡 가사 터엔
송강의 푸른 노래 봄볕 속에 새순 돋고
오십천 아침을 연다 햇살무늬 반짝인다
―「죽서루 편지」, 전문
강원도가 고향인 시인이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누각인 죽서루를 감상하면서 느낀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서루는 삼척시의 서편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자리잡고 있는데,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자연친화적인 건축양식을 사용한 누각이라고 한다. 봄날 시인은 죽서루에 올라 그 경관을 조망하면서 감회를 노래하고 있지만, 시인이 묘사하는 이미지들이 또한 자연의 풍경 묘사에 그치지는 않다. 이 시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첫째 수 종장에서 “한 천 년 받쳐 든 시간 망울망울 부푼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죽서루라는 누각을 보고 있지만 사실은 시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시인이 보고 있는 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조응(照應), 혹은 상응(相應)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천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죽서루의 누각에 봄이 오자 “산수유는 눈을 뜨고”, 홍매화는 “옅은 기침”을 한다. 또한 “돌을 찧어 구멍 내며 소원을 빌”던 “옛사람 그 손길”은 현재에도 여전히 뜰에 남아 있으며, 과거에 만들어졌던 그 구멍은 현재 “눈물꽃 맺혀 그렁그렁 피어있다.”
이처럼 이 시에서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은 공존하면서 서로 조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넷째 수에서 절정에 이른다. 즉 “송강의 푸른 노래”가 “봄볕 속에 새순”으로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 송강의 관동별곡이라는 가사를 “푸른 노래”라고 표현하는 대목도 예사로운 것은 아니지만, 송강의 가사가 봄볕 속에서 새순으로 돋아난다는 표현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경지라고 하겠다.
결국 이 시조를 지배하는 주된 이미지는 발아(發芽)와 개화(開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데, 발아하고 개화하는 대상이 과거의 시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시간이 오늘날 싹이 트고, 꽃이 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죽서루가 품고 있는 천년의 시간이 봄이 되자 꽃이 되려고 “망울망울 부풀”고 있다. 옛사람들이 돌을 찧어 만들어 놓은 구멍(실제로 이를 성혈(性穴)이라 한다)은 눈물꽃으로 피어있다. 그리고 송강의 가사는 봄볕 속에 새순으로 돋아나고 있다. 과거의 시간과 과거의 유물, 유산 등이 오늘의 시간에 싹이 되고 꽃이 되어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거의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시인을 더욱 먼 시간으로 데려 간다.
몽촌의 봄기별이 꽃 피듯 건너오는
붉어진 배롱나무 기대어선 선사시대
투명한 살결만 같은 그 내력을 읽는다
아리수 물굽이로 경계들은 무너지고
흘러가는 시간 속을 흘러가는 사람들이
해 돋는 강동마을로 덩굴손을 뻗는다
햇살 따라 얼키설키 엮어가는 역사의 장
그 속에 피던 사랑 배롱꽃에 어리는지
이 아침 한강변 어귀 옛사람의 숨결 깊다
―「움집의 내력」, 전문
몽촌토성에 자리잡고 있는 움집을 보면서 떠오르는 상념을 작품화하고 있다.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시의 주제라고 하겠다. “몽촌”, “아리수”, “움집” 등의 시어들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중첩되는 현상을 내포하고 있다. 백제시대인 3~4세기경에 축조된 몽촌토성은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여전히 현재 존재하고 있으며, 고구려시대에 아리수라고 불리었던 한강은 여전히 현재에도 서울의 한 복판을 흐르고 있다. 그리고 선사시대인들이 살았던 거주지인 움집은 몽촌토성 안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어휘들을 따라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는 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아리수 물굽이로 경계들은 무너지고”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간의 혼재 현상을 지적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움집은 원시인들의 삶의 거주지로서 태초의 인류의 조상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시적 구도에서 그 움집 옆에는 배롱나무가 한 그루 기대어 서 있는데, 시인은 그 배롱나무를 보고서 움집의 후손들이 살아가면서 꽃피웠던 사랑이 배롱꽃에 어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배롱꽃에서 “옛사람의” 깊은 숨결을 읽어낸다. 붉은 빛으로 아름답게 피어있는 배롱꽃에는 옛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새겨져 있으며, 그들의 사랑이 담겨 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 분석했던 시적 논리로 바꾸어보면 원시인들이 삶의 모습과 사랑이 배롱꽃으로 피어났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주목되는 대목은 둘째 수에 있다. 앞서 언급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는 대상인 몽촌토성과 아리수, 그리고 움집 등이 있는 곳이 강동마을이다. 그런데 시적 공간에서 강동마을은 해가 돋는 곳으로,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 속을 흘러가는 사람들이” “덩굴손을 뻗는”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해가 뜨는 곳은 생명이 비롯되는 곳이며, 역사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시원의 시간이 발원하는 곳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시적 구도에서 그 곳에는 몽촌토성과 아리수와 움집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강동마을이란 시원의 시간이 발원하는 곳, 태고의 시간이 고여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시간 속을 흘러가는 사람들이 그 곳을 향해 덩굴손을 뻗는다고 진술한다. 덩굴손은 다른 물체에 감겨 붙어서 자신의 몸을 유지, 안정시키도록 변태한 식물체의 부분을 지칭하는데, 시적 의미에서 그것은 생명의 의지처이자 지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덩굴손을 뻗는 시간 속의 사람들에게 강동마을은 곧 삶의 의지처이자 지반이 되는 셈이다. 강동마을이란 시적 논리에서 시원의 시간, 혹은 태고의 시간을 의미한다고 할 때, 이 시의 메시지는 분명해진다. 시원의 시간은 반복해서 재생되고 복원되는 시간으로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살아갈 자양분을 제공하는 의지처이자 지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민정의 시조 세계는 그 표현적 층위에서부터 문학적 정서와 사상의 층위에까지 결코 만만치 않은 성과와 깊이를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짝이는 이미지의 향연을 통해서 시적 구상성을 획득함은 물론 사상의 깊이까지 침투해 들어가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기만 하다. 더구나 정제된 형식의 시조를 통해서 이와 같은 표현의 미학과 사상의 깊이를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가치가 있다. 김민정 시인은 현대시조가 오늘날 우리 시대의 표현 욕구와 사회적 도전에 대해서 충분히 응전할 수 있는 문학적 양식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주는 하나의 증거로 제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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