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강동문인회와의 만남, 그리고 문학기행

by 시조시인 김민정 2013. 8. 5.

 

 

강동문인회와의 만남, 그리고 문학기행

 

우현 김민정

 

  결혼하고 나서, 서대문구와 은평구에서 살면서 서부교육청내의 학교선생으로 생활하다가 집 아이들이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 남편의 의견으로 강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남편은 직장이 원주라 출퇴근하기에 좋고, 아이들을 위해 학군도 서부보다는 강동쪽이 좋지 않냐는 남편의 설득으로 나의 직장생활에는 여건이 조금 불리하였지만, 이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2002년에 강동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도 나는 1년에 한 두 번은 은평문인협회에 나가면서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조시인협회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시조시인이신 이광녕 선생님이 강동으로 이사를 왔으니 강동문인회에 나오라고 권유를 하셨다. 나는 망설이다가 은평문인협회에는 모임 한 번씩 가자면 1시간 반 이상을 가야하고, 그러다 보니 행사 등의 모임에 참석하기도 힘들어 가까운 곳에 사는 강동문인들과 사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강동문인회에 가입을 하게 되었던 것이고 이것이 현재의 강동문인회와의 만남이었다.

  이 때가 아마 2005년경이었던 같은데 그 해는 『강동문학』에 원고 보내는 것도 몰라 작품도 싣지 않았고, 『강동문학』에는 2006년부터 작품을 싣기 시작했던 것 같다. 늘 바쁜 생활을 하게 되어 매달 한 번씩 하는 시낭송회에도 빠질 때가 많았다. 모임이 싫다거나 소홀히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공부하는 것이 있어 대학원을 다니던 중이라 야간에 매주 이틀씩 강의도 있고, 숙제도 빠짐없이 해 가야했고, 직장인 학교생활에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늘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문학을 하는 일은 내 개인이 좋아서 하는 사적인 일이라 생각되어 늘 가까운 발등의 불부터 끄기 바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정생활을 정상으로 하면서 시를 쓴다는 것은 늘 아쉬움이 너무 많은 생활이다. 차라리 모두 그만두고 문학에만 전념하면 좋을 텐데…. 늘 그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현실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러기도 힘든 상황이다.

   강동문인회는 무척 활발하게 움직이고, 회원들 간의 단합도 잘 되고 열심히 하는 문학모임이라 보기도 좋고 자랑스런 단체이다. 벌써 문학회를 만든 지 22년이나 지났으니 그 뿌리도 깊고, 나무둥치도 꽤 큰 상태이니 말이다. 강동문인회에서 일 년에 봄가을로 가는 문학기행도 참 배울 것이 많고 보람 있는 행사라 생각된다. 매번 참석은 못했지만, 그래도 한 번씩 참석할 때마다 배우는 것도 많고, 멋지고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억나는 곳도 많다. 작품 ‘향수’의 정지용 고향인 옥천과 속리산 일대를 찾아보고 돌아올 때 전재동 교수님께서 해 주신 정지용 시인에 대한 말씀과 '향수'에 대한 설명은 문단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금은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던 기행은 작년 봄에 갔던 화양계곡과 화양서원이었다.송시열선생님이 은거했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서 조선시대 학자들의 모임 장소였으며, 만동묘는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옛터가 잘 남아 있다. 또한 주변에는 송시열의 묘소와 신도비, 암서재, 읍궁암 외에 암서재 주변의 암벽에 충효절의 비례부동 등이 새겨져 있어 반청애국사상이 담겨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화양서원은 조선 성리학을 계승하고 완성한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님의 애국사상과 청나라의 무력에 굴하지 않는 민족자존이 깃든 곳이라고 한다.

 

   송시열 선생님이 만드셨다는 금사담 암서재는 너무 내 마음에 들었다. 맑고 아름다운 계곡의 물가 암벽에 암자를 세우고 풍류를 즐기며 공부를 하던 옛 선인들의 그 여유와 멋이 정말로 좋아 보인다. 시간이 많다면 물가에 앉아 족욕을 즐기며 며칠 쉬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만드는 계곡이었다. 이런 곳에 서재를 만들고 공부를 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유도 조금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지금까지도 잘 보존된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했다.

 

  요즘은 평소에 개방을 안 하는 암서재였지만, 정영기 회장님의 적극적인 추진 덕분에 이곳에서 우리 강동문인회는 시낭송회를 할 수 있었다. 이 멋진 곳에서 낭송을 해 보는 것도 우리에게는 커다란 축복이고 오랜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의 여왕 오월, 화창하고 멋진 하루를 이곳에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내 추억 속에, 강동문인회원들의 추억 속에 남을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하여 열심히 회원들의 사진을 찍어드렸다. 물론 함동진 선생님이 열심히 사진을 찍으시고 계셨지만, 나두 옆에서 열심히 찍었다. 하찮은 이 일들도 먼 훗날에는 멋진 기념이 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이 시간들을 그리워하게 될 거야. 사진 중에 몇 장은 잘 나오지 않을까? 내 작은 일이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이기를 소박하게 바라면서…. 예상대로 그런 대로 사진들이 나와서 열심히 카페에 올려주었다. 필요한 분은 가져가시도록…. 절벽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고, 서재 안의 마루에 앉아 낭송을 들었던 시간들, 그리고 내려와 우리는 다른 곳으로 향하기 위해 냇물을 건넜다. 깊지 않는 물이었지만 정강이까지 오는 곳도 있어 몇 몇 분이 회원들을 업어서 건네주기도 했다.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웃으며 물을 건넌 그 푸른 오월이 내 마음속에 지금도 출렁이고 있다.

 

 

  다음으로 둘러본 곳은 충북 괴산 동부리에 있는 벽초 홍명희 생가였다. 그의 필명은 가인(假人·可人)·백옥석(白玉石)·벽초(碧初)였으며 1888년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출생하였다. 일본의 다이세이[大成]중학에서 수학했으며, 귀국 후 휘문고보 교사, 오산고보 교장, 연희전문 교수를 역임했다. 《시대일보(時代日報)》사장으로 있다가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면서 부회장으로 참여했으며, 1930년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으로 일본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일제하 민족운동의 지도자적 인물이던 그는 단 1편의 소설 《임꺽정(林巨正)》(1928∼1939)으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는데, 이 작품은 《조선일보》에 10여 년에 걸쳐 연재된 당대 최대의 장편 역사소설이었다. 조선 명종(明宗) 때의 도적 임꺽정의 이야기를 허구화한 이 소설은, 천민계층의 반봉건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생활양식을 다룬 데 그 특징이 있다. 또한 봉건 귀족을 우월성의 존재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천민계층을 이상화함으로써 계급의식집단의식을 현저하게 드러냈다. 그는 역사소설을 통해 계급의 관점에서 식민지적 모순보다는 자본주의적 모순을 겨냥하는 특수한 역사의식의 시야를 노출시켰다. 8.15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 월북했다. <두산백과 참조>

  그의 생가를 돌아보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홍명희의 아버지와 홍명희 본인과 홍명희의 아들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또한 작가란 어떤 사상과 신념을 가지고 작품을 써야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어떤 것을 우위에 두고 작품을 쓰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유명한 작가일수록 독자들의 기대도 크므로 사고와 행동도 조심할 필요가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우리는 중원 미륵사지에 갔다. 고려 초기에 지어진 사찰이 있던 절터이다. 사찰은 지금 소실되어 모습을 볼 수 없으나, 석상, 석탑 등 유물이 몇 가지 있었다. 보물 96호 미륵리 석불입상, 도지정 유형문화재 33호 미륵리 3층 석탑, 도지정 유형문화재 19호 미륵리 석등 등 국보물급 유물이 잘 보존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워서 온통 연등이 미륵석불을 감싸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종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한 인간이 선택해야하는 가치는 참으로 많다. 올바로 선택하기 위하여, 자기자신의 길을 잘 가기 위해서 우리는 공부를 하는 것이겠지….

  문학이든, 종교든, 직업이든 모두 자신의 가치로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길이다. 선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강동문인회에 가입하여 함께 활동하는 것도 나의 중요한 선택이었음을 생각하고, 이제는 이사를 가더라도 계속적으로 이곳에서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번 봄 강동문인회의 문학기행이 의미있는 여행이었음을 생각해 보는 하루였다. (2012년 봄 문학기행 단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