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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경의선, 통일을 꿈꾸다

by 시조시인 김민정 2013. 8. 5.

   강동문인회 2012 가을문학기행은 파주쪽이었다. 통일전망대, 반구정, 임진각, 화석정, 이율곡 유적지등이었다. 전재동 고문님을 비롯한 40여명의 우리는 먼저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전망대내의 여러 가지 전시물과 북한과의 대치장면들과 임진강을 바라보며 통일에 대한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기원해 보았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같은 민족끼리 대치하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 참 슬픈 민족이란 생각이 든다. 국토방위에 쏟는 돈을 다른 곳에다 쓴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잘 사는 민족이 될 텐데 말이다. 우리는 통일전망대를 내려오며 기념촬영을 하고 시간이 예상외로 많이 걸려 임진각 구경은 생략한 채 반구정으로 가기로 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

 

황희정승의 반구정

 

      반구정은 조선시대 명재상으로 유명한 황희정승의 생가터와 반구정이란 정자가 있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청렴하기로 유명한 분이라 늘 그 정신을 이어받고 싶었었는데 오늘 그 생가터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황희정승은 사람들의 의견을 ‘너도 옳다, 너도 옳다’라는 말을 하여 모든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려 노력하신 분인 것 같다. 그런 분이 정승으로 있는 동안은 왕은 조금 편했을 것 같다. 반구정은 조촐한 정자였지만, 임진강을 바라보는 곳이라 시원하고 눈 앞에 막힘이 없이 트여 좋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반구정과 황희정승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잠깐 쉬다가  황희정승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왔다.

 

화석정

이율곡이 8세 때 지은 시

 

      식사후에는 화석정을 보러갔다. 이곳은 유명한 일화가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을 가기 위해 이 강을 건너려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장마비로 칡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강을 걱정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이 곳 정자에 불을 붙여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길로 강을 무사히 건넜다는 것이다. 임금의 몽진길을 도운 이 정자는 율곡 이이가 세운 정자로 율곡 이이는 왜란을 미리 짐작하고 앞을 내다보고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고, 또 이곳에 화석정을 짓고 기름칠을 계속하게 하여 선조가 임진강을 다 건널 때까지도 비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계속 불길이 타올라 오래 갈 수 있게 하여 무사히 피난할 수 있게 충성심을 발휘했던 것이다.

 

 

화석정에 앉아 설명을 들으며

 

비 내리는 임진나루

칠흑 어둠 몽진 길을 

 

불꽃으로 타오르며

가던 길을 밝혀 주던

  

만고에

지지 않을 꽃잎

단애 위에 우뚝 서다          

 

- 화석정,  김민정 -

 

   단시조 작품을 한 편 써서 화석정의 충성심을 뇌어 보았다. 하지만 정자야 무엇을 알겠는가. 그 정자를 그런 용도로 쓰일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한 이율곡의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겠는가? 화석정을 둘러보고 율곡의 사당이 있는 자운서원으로 향했다. 이율곡과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을 생각하며 초가을의 경치를 둘러보며 걷고 있었다. 이제 막 단풍들기 시작하는 가을산과 황금들판은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과 어우러져 멋진 한국의 가을한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율곡이 출생하던 날 밤 어머니 '신사임당'의 꿈에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들어와 서렸다고 하여 아명을 현룡이라 하였다. 산실을 몽룡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20세에 하산하여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 겨울에 별시에서 천도책을 지어 장원하였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이라 일컬어졌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48세에 십만양병을 주청하였고 49세에 서울 대사동에서 돌아가셨다.

이율곡에게 있어서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이 아니었다. 그가 항상 강조한 것은 시세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실공’과 ‘실효’를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고 하였다. 이율곡은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왕에게 ‘시무육조’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신사임당은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생가이다. 신사임당은(1504~1551)은 강원도 강릉 태생으로 그의 생가 오죽헌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사임당의  형제 중에는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 중에서 둘째 딸이었다. 그는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행동과 재주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본명은 신인선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호도 가졌다고 한다. 1522덕수 이씨의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여 강릉에서 서울로 이사했으며 4남 3녀를 두었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그렇다면 파주는 이율곡의 아버지의 고향인가 보다. 문득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오면서 대관령에서 강릉의 고향집을 내려다보며 지었다는 신사임당의 시와 사친(思親)이란 시가 생각났다.

 

대관령에서 친정을 바라보며 (踰大關嶺 望親庭)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慈親鶴髮 在臨瀛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身向長安 獨去情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回首北村 時一望
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내리네     白雲飛下 慕山靑

어머님 그리워 (思親)

산첩첩 내고향 천리연만은           千里家山萬疊峰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歸心長在夢婚中
한송정가에는 외로이 뜬 달          寒松亭畔孤輪月
경포대앞에는 한줄기 바람           鏡浦臺前一陣風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모이락     沙上白鷗恒聚散
고깃배들 바다위로 오고가리니     海門漁艇任西東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何時重踏臨瀛路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更着斑衣膝下縫

 

   어려서 많이 외우던 시다. 여자가 천대받던 조선시대에도 시서화에 능했던 신사임당, 문득 그녀가 그리워졌다. 아니 갑자기 그녀가 부러워졌다. 그녀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일까. 그녀가 남긴 아기자기한 그림은 참 재미있어 보인다. 작은 것에도 애정을 가질 줄 아는 섬세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새삼 그녀의 관찰력과 셈세함과 그리고, 그토록 아들을 잘 길러낸 그녀가 어머니로서 한없이 존경스럽다. 

 

 

   오천원 짜리에는 아들이, 5만원 짜리에는 어머니가 나란히 실려있는 우리의 화폐를 보며 우리민족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의 사당에 와 있다는 생각에 흐뭇했다. 관리실에 가서, '저희 왔다  갑니다'라는 묵념만 드리고 갈 줄 알았는데 갑자기 한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해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얼떨결에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정영기회장님을 비롯한 남성 회원 몇 분이 한복으로 갈아입고, 여성들 중에는 유일하게 나만 한복으로 갈아입고 사당인 문성사(文成祀)로 올라갔다. 나머지 한복을 입은 여성 두 분은 그곳에서 봉사하는 분들이었다. 이곳 이율곡 사당인 문성사(文成祀)에 강동문인회가 왔음을 고하는 제를 지냈다.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나도 많은 호기심이 생겼다.

 

 

   여자들이 하는 일이란 제사를 지낼 분이 경건하게 대야에다 손을 씻으면 닦을 수 있도록 수건을 갖다 드리는 일이었다. 특별히 하는 것이라고는 그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이 드는 건 아마 한복으로 갈아입고 예를 다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음으로써 마음가짐을 가지런히 하고 예를 다하려는 마음, 정성이 깃드는 마음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예를 갖추는 격식차리기를 좋아하는구나하고 이해가 되었다. 평소에 격식을 싫어하는 나였지만, 격식을 차리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경험으로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이율곡의 사당인 문성사 앞에서

 

  문학기행을 와서 옷까지 갈아입고 정식으로 우리가 왔음을 고하는 예식은 처음 가져보는 특별한 행사였다. 종교를 떠나 조상을 섬기고, 존경하는 인물을 섬길 줄 아는 겸손한 마음가짐이 인간으로서 중요하지 않겠는가. 평소에 존경심을 갖고 있었던 황희정승, 이율곡, 신사임당 등 우리 민족이 존경하는 위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들의 향기 나는 삶을 본받고, 본보기가 될 만한 마음가짐을 배운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 나의 단점을 고쳐 조금은 훌륭하게 가꾸어 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은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날 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경의선 전철을 처음으로 타 볼 기회를 얻었다. 아침에 남편이 장염이 있는지 계속 화장실을 드나들며 속이 안 좋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매번 모임에 빠질 수 없어 한편으로 걱정하면서도 그냥 기행에 따라왔다. 그런데 평소에 그러지 않던 남편이 아직도 배가 아프다며 올 때 약을 사오라며 전화를 한 것이었다. 오늘 따라 딸들도 모두 약속이 있다며 외출한 상태고, 어머니는 약 사러 나갈 형편도 못 되니 내가 빨리 집에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중요한 행사인 문성사의 알현 행사를 끝내고, 서둘러 낭송을 하고 부랴부랴 모임을 빠져나왔다. 회원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서울까지 오자면 문산까지 나와야 차가 있다. 문산까지 나오는 차가 없냐고 걱정을 하니 사당관리하는 분이 문산역을 지나 댁으로 가신다며 문산역까지 태워다 주셨다. 문산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정류장을 들르지 도 않고 서울행 버스 한 대가 지나갔다. 그 버스를 놓치고 나니 30분이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있다가 문득, 경의선 전철로 갈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의선이 개통된 지 만 3년이 지났지만 경의선 복선전철 개통일에 '경의선 기적소리여!'라는 축시만 써 주었을 뿐,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마침 잘 됐다, 기회는 이때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문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전철을 타기로 하자!’

   넓고 시원한 전철 안은 문산역이 출발지라서인지 사람도 별로 없다. 한가하게 앉아 넓은 차창을 통해 가을경치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창이 넓어 시원스러웠고, 벼가 익어가는 파주벌판의 가을경치는 아름다웠다. 오다보니 어느 새 조금씩 사람도 많아지고 전철은 지하철이 되어 땅속으로 들어오고, 나도 피곤했는지 가끔 졸기도 하면서 서울역까지 오게 되었다. 그 동안 가졌던 경의선 전철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2009년 7월 1일 경의선 복선전철 개통을 축하하는 시를 썼고, 그 시를 코레일 아는 분께 보냈더니, 임원회원에서 임원들이 돌려보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전철 개통 다음 날엔 《국방일보》에 그 시가 실렸다. 통일이 되어 경의선전철이 이름처럼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나아가 유라시아 대륙까지 연결되기를 바라면서 썼던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오늘 강동문인회의 가을문학기행으로 조선시대 청렴결백했던 황희정승의 반구정, 임진란 때 선조의 몽진을 도왔다는 임진나루의 화석정, 이율곡과 신사임당의 사당인 문성사와 자운서원, 통일을 기원하는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둘러보고, 그리고 경의선타기를 경험하면서 나의 조국이 하루빨리 평화통일 되기를 꿈꾸어 본 아름다운 하루였다. (2012. 0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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