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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동해를 향한 빗속 질주 - 2013 한국여성시조문학회 강릉-삼척 기행

by 시조시인 김민정 2013. 10. 5.

동해를 향한 빗속 질주

-2013년 한국여성시조문학회 강릉-삼척 기행

 

                                                                                        김 민 정

2013년 7월 22일, 한국여성시조문학회에서 강릉-삼척으로 기행을 하기로 한 날이다. 그런데 장마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6월말에 시작되는 장마가 올해는 왜 이렇게 오래 끌면서 비가 계속 내리는지….

강원도 지방엔 마른 장마라 하던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기행을 가기 전날에는 전국적으로 밤새 비가

내리더니 아침에는 더 많은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밤에 이것저것 걱정을 하느라 잠이 안와 뒤척이다

늦게야 잠들었는데 2~3시간을 잤을까?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늦으면 절대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부랴부랴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나섰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어 회원님들이 제대로 올까 걱정을

하면서 택시를 잡아타고 사당역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버스가 저만큼 보이는데 그 비속에 아직 버스

를 타지 않는 몇 몇 회원분들이 입구에서 반겨주셨다. 그리고 어느 버스냐고 물으셨다. 나도 우리차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버스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여, 버스가 와서 대기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기에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뛰어갔다.

우형숙 사무국장님과 함께, 오신 회원분들 명단을 챙기고 도시락과 물을 챙기고 하다가 보니 몇몇 분이

안 오셨고 급하게 연락을 해 보니 안 받으시는 분도 계시고, 오고 계신 분도 계셔서 조금 더 기다렸다. 전

화 안 받으시는 분은 전화기가 꺼져 있어 못 오시나 보다고 생각을 했고, 너무 늦게 도착하신 분은 기다

릴 수가 없어 그대로 출발을 해야만 했다. 강릉에서 10시 28분발 바다열차를 타기로 예약을 해 놓은 상

태라 늦지 않게 가려는 생각에서였다. 출발 전에 도시락과 물을 드리고, 사무국장님이 알뜰하게 준비해

온 간식까지 드렸더니, 다들 너무나 성찬이라며 좋아하셨다. 여행가면서 이런 아침을 주는 곳은 처음 본

다며…. 간식은 사무국장님의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깨끗이 씻은 체리와 방울토마토, 아이스크림처럼 뚜

껑있는 컵에다 하나씩 넣어 드렸더니 모두가 함박웃음….

비가 오고 있어 출발에서부터 차가 밀리기 시작하고 서울을 벗어나는데만도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그런

대로 잘 달리던 버스가 어느 구간에서부터인가 거북이 걸음으로 가기 시작했다. 이유는 산사태 때문이었

다. 사태가 난 곳을 피해 가느라 차들이 겨우겨우 빠져나가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그곳을 겨우 무사히 통과했지만, 버스 기사님은 이대로 가면 도저히 그 시간 안에 못 갈 거니까 미리 전

화를 하라고 하셨다.

9시 반까지 강릉역에 마중 나오기로 한 구금자 회원이 생각나서 얼른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역 가까이

와 있다고 했다. 역장님께 사정 얘기를 하고 어떤 방법이 있느냐고 여쭤보라고 했더니, 2시표가 남아 있

어 한 사람 정도 입석이고 나머지는 다 앉아 갈 수 있다고 했다. 신이 도우셨나 보다. 다행이다 싶어 무조

건 OK 했다. 반환비용이 들긴 했지만 다행한 일이었다. 오늘의 목표는 일단 바다열차를 타 보는 것이었

으니까…. 한 달 전에도 예약해도 표가 없다고 하여 아슬아슬하게 예매를 했다. 바다열차를 해결하고 나

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조급하게 달리지 않아도 되어서 안심이 되었다. 무사히 강릉역에 도착하니 11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조금 기다리니 따로 오신 이일향 선생님도 강릉역에 무사히 잘 도착하셨다. 우리

는 기차표를 받은 뒤 시간이 남아 오죽헌 등을 둘러보고 나서 바다열차를 타고 삼척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결정했다. 마침 구금자님이 감자를 쪄 왔기에 회원들은 한 두 개씩으로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었

다. 강릉에 사시는 김기옥님도 오셔서 합류했다.

1. 오죽헌

 

회원들은 우산을 쓰고 오죽헌을 둘러보았다. 비 오는 날의 낭만도 있었다. 빗속에서 사진도 찍었다. 오

죽헌은 신사임당의 생가이다. 신사임당은(1504~1551)은 강원도 강릉 태생으로 그의 생가 오죽헌은 지

금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사임당의 형제 중에는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

중에서 둘째 딸이었다. 그는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행동과 재주가 남달랐

기 때문이었다. 본명은 신인선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

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호

도 가졌다고 한다. 1522 덕수 이씨의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여 강릉에서 서울로 이사했으며 4남 3

녀를 두었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오죽헌을 돌아보며 그가 그린 그림들을 살펴보며 우리는 그의 관찰력과 표현력에 감탄했다. 자상하고 섬세한

여성의 모습을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헌을 둘러보며 신사임당의 모습도, 그리고 그

녀가 그린 그림도 감상하면서 사진도 찍으면서 잡담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문득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오

면서 대관령에서 강릉 고향집을 내려다보며 지었다는 신사임당의 시와 또 다른 시 사친(思親)이란 시가

생각났다.

 

대관령에서 친정을 바라보며 (踰大關嶺 望親庭)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慈親鶴髮 在臨瀛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身向長安 獨去情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回首北村 時一望

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내리네 白雲飛下 慕山靑

어머니를 그리며 (思親)

산첩첩 내고향 천리언만은 千里家山萬疊峰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歸心長在夢婚中

한송정가에는 외로이 뜬 달 寒松亭畔孤輪月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鏡浦臺前一陣風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이락 모이락 沙上白鷗恒聚散

고깃배들 바다위로 오고 가리니 海門漁艇任西東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何時重踏臨瀛路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更着斑衣膝下縫

어려서 많이 외우던 시다. 여자가 천대받던 조선시대에도 시서화에 능했던 신사임당, 문득 그녀가 그리

워졌다. 그녀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오천 원짜리에는 아들이, 오만 원짜리에는 어머니가 나란히 실려

있는 우리의 화폐를 보며 우리민족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인 그녀가 부러웠다. 파주에 가면 이

율곡과 신사임당을 기리는 문성사가 있다. 작년 가을 참배를 다녀오며 감명 깊었는데 오늘 오죽헌에 오

니 감회가 남다르다. 마침 옆에 서예가 예연옥 회원님이 있어서 함께 신사임당의 그림을 감상했다. 다음

음으로는 경포호수를 잠깐 둘러보면서 이일향 선생님을 비롯한 몇몇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비가 와서

더욱 고즈넉한 경포호를 바라보았다. 경포호에 달이 뜨면 더 멋질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2. 바다열차

드디어 오후 2시 10분 우리는 바다열차를 타게 되었다. 바다열차는 하루에 3회 운영되며, 강릉에서 3

번, 즉 10시 28분, 오후 2시 10분, 오후 5시 20분(5,8월에만 운영)에 운행 된다. 삼척역에서도 강릉으로

바다열차를 하루에 세 번 운행한다. 우리는 다른 곳도 구경할 예정이라 편도만 하기로 하였고 특실을 끊

고 단체라고 20%씩 할인도 받았었다. 산사태로 버스가 연착하는 바람에 반환하고 남은 자리로 표를 끊

는 바람에 뒷좌석이 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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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바다열차를 타는 낭만도 나쁘지는 않았다. 코레일 강원본부로부터 연락을 받으셨는지 강릉

역장님이 직접 나오셔서 우리를 배웅해 주셨다. 기차가 출발하고 5~10분 지나서일까. '야, 바다다!' 회

원들은 바다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흥분해서 일어나 스마트폰으로 바다를 찍기 시작했다. 모두 어린아이

가 된 기분…. 어린이처럼 천진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 시인이니까. 먼 길 달려와 바다열차를 탔다는 기쁨

에 '드디어 바다열차 타보네'라며 모두가 말만 들은 바다열차 타본다고 즐거워 하셨다. 나도 처음이었다.

사실은 코레일의 배려로 바다열차를 공차로 탈 기회가 두 번 정도 있었는데 그 때마다 시간이 없다는 이

유로 못 타고 티켓도 다른 분께 드리고, 이제야 돈을 내고 기차를 탄다. 정동진역에서는 10분인가 정차시

간을 주어 나가서 바다도 구경하고 단체사진도 찍고 끼리끼리 그룹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기차를 탔다. 마음의 여유가 즐거움을 가져온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마냥 즐거워했다.

삼척역에 내리니 삼척역장님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며 버스 타는 곳까지 오셔서 배웅해 주셨다. 삼척

역에서 우리를 기다려주신 김은숙 시인님을 만나 우리는 삼척물횟집으로 향했다.

3. 삼척 물횟집

2층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서 우리는 맛있는 물회로 점심을 먹었다. 3시가 넘은 시간이라 시장기도 더

해져 물회는 일품이었다. 원래 물회에는 오징어가 많이 들어가지만, 요즘 오징어가 많이 잡히지 않아서

인지, 아님 김은숙시인님의 특별한 주문인지 오징어보다 더 비싼 고급 생선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 물회

는 더욱 맛있었다. 김은숙시인님은 이렇게 먹어야 더 맛있다며 돌아다니시며 회원마다 초고추장을 듬뿍

듬뿍 뿌려주셨다. 예전에 못 느꼈는데, 오늘보니 씩씩한 여장부 같다. 이렇게 맛있는 물회 처음이라며 모

두 즐거워하셨고,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4. 수로부인공원

점심을 먹고 나오니 비가 그쳐 있었다. 우리는 가까운 이사부 공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사부사자

공원 부근에 위치한 수로부인공원도 둘러보았다. 임해정臨海亭이란 팔각정도 있는데, 역사서에 따르면

이곳에서 동해의 용왕이 수로부인을 납치해갔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수로부인 조'는 "노인이 헌화가와

함께 꽃을 꺾어 바친 곳에서 이틀 뒤에 임해정臨海亭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다가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끌고 갔다. 경내의 사람들을 모아 해가를 부르니 용이 수로부인을 온전하게 되돌려 주었

다."고 기록하고 있다.

龜乎龜乎出水路 (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 (납인부녀죄하극) 남의 부녀 앗아간 죄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 (여약패역불출헌) 네 만일 거역하고 바치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 (입망포략번지끽)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고 말리라!

- 해가海歌 -

임해정臨海亭 정자 앞에 4톤 무게의 '드래곤 볼', 사랑의 여의주는 혼자서도 돌릴 수 있다. 해가와 헌

화가가 새겨진 오석으로 만들어진 여의주는 회전하는 구체이다. 해룡이 바닷 속으로 끌고 들어간 수로부

인을 다시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하면서 백성들이 한 목소리로 읊은 ‘해가’의 내용과 '헌화가'의 내용이

함께 음각되어 있다. 해가의 내용이 새겨진 여의주는 젊은 연인들 사이에 사랑과 소망을 기원하는 인기

조각품이라 한다. 이 여의주를 돌리며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하여 우리는 한 번씩 돌려보기도

하면서 사진도 찍었다. 수로부인의 헌화가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자줏빛 바윗가에

잡고 있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 헌화가獻花歌 -

지은이는 견우노옹牽牛老翁이고, 연대는 신라 성덕왕대 702-737년이며, 형식은 4구체 향가이다. 헌

화가의 성격은 주술적, 서정적, 민요적이며, 내용은 아름다운 수로부인을 위해 한 노인이 절벽에 핀 꽃을

꺾어 바치며 부른 노래이고, 주제는 꽃을 바치며 아름다움을 찬양했다.『삼국유사』권2 '紀異 第二'

《수로 부인》편의 배경설화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덕왕 시대에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

임할 적에 가다가 바닷가에 머물러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돌로 된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바다에 다가서

있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가 이

것을 보고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말하였다. “꽃을 꺾어다 바칠 사람이 그 누구인고?” 종자從者들이 말하

였다. “사람의 발자취가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물러섰는데, 그 곁으로 암

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수로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오고 또한 노래를 지어서 바치었다.

그 노인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1500년 전 실직인悉直人(삼척인)인 것만은 명료하다고 삼척인들

은 말하고 있다. 신라인의 소박하고 보편적인 미의식을 보여 주는 서정시이다. 이곳은 1986년 현대시학

으로 등단한 김진광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원래 오늘 이곳 삼척 설명을 해 주기로 하셨는데 일이 있으

셔서 김은숙시인님이 맡아주셨다.

가까이 추암 촛대바위가 있었는데, 이곳은 애국가의 첫구절 "동해물과~"이 부분에 나오는 장소이다.

해변으로 걸어서 가 볼 계획이었는데 너무 시간이 늦을 것 같아 죽서루만 구경하고 서울로 오기로 하였

다. 추암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동해시에 속한다. 여러 개의 바위들이 바닷물에 침식되면서 기이한 형상

을 하고 있어 마치 해금강을 축소해 놓은 듯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다. 촛대바위는 생김새가 정말 촛대처

럼 생겼고, 어찌보면 기도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해송과 검푸른 바다의 풍경이 정말 아름다운 곳인데,

시간상 못 보아 아쉬움이 남았다.

5. 이사부사자공원

2011년 8월 2일에 개장한 이사부사자공원은 신라장군 이사부의 이름을 따서 만든 공원이다. 사자동상

을 많이 세워놓은 것이 특징이었고, 우리는 계단을 올라 공원정상까지 올라갔다. 언덕위에 기이한 형태

의 구조물은 장군의 투구와도 같고 또 장수의 갑옷 어깨날개처럼 생긴 건물이다. 바로 이곳이 이사부사

자공원이다.

이사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연상하면 제

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신라장군 이사부는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점령할 때 사자조각상을 싣고 가 사자의 입에서 불을 뿜게 하여 우산국을 정벌하였다는데서 유래하여 이

사부사자공원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이사부는 신라의 벼슬이름이다. 이사부는 드라마 선덕영왕의 미실과는 잠시지만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였으며 이사부의 이름에 대해서는 어떤 문헌에서도 이사부의 성씨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우산국을 정벌한 곳이 삼척이 아닌 강릉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이곳에서 지금의 해군사령관을

지낸바 있는 이사부장군은 삼척에서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서 배를 띄웠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공원의 이름처럼 여기저기 사자조각상들이 많다. 다소 해학적인 사자상도 있고 자세하게 만들어진 사자

조각상도 있고…. 신라장군 이사부는 해학적인 사자조각상보다는 다소 무서운 사자조각상을 배에 싣고

갔을 것이다. 무섭게 생긴 생전 처음보는 이상한 동물형상의 조각상에서 불까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

고 우산국사람들은 두려움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력이 아닌 기치로 우산국을 정벌한 신라장

군 이사부였다고 한다. 이사부사자공원은 새천년해안도로, 조각공원과 인접해 있고 추암 바다와 촛대바

위도 가까이 있다.

6. 관동제일루 죽서루

 

 

 

 

 

 

 

 

 

선사 암각화

관동제일 죽서루에 올라가 죽서루를 구경하고 죽서루에 관한 설명은 김은숙선생님께 들었다. 송강 정

철의 가사 ‘관동팔경’에 나오는 관동제일루, 죽서루는 보물 제213호이다.

절벽 위 바위에 세워진 이 죽서루는 특이하게도 17개 기둥의 길이가 제각각이다. 13개는 바위 위에 그

냥 세워져 있고 나머지는 초석 위에 올려져 있다. 울퉁불퉁한 암반터를 고르지 않고 기둥 길이를 달리해

높이를 맞춘 조상들의 여유와 융통성이 놀랍고 돋보인다. 요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바위를 폭파시키

거나 평평하게 깎으려는 생각부터 했을 텐데,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살린 멋스러움이 있다.

산하에 널린 돌과 바위도 둥그런 것, 삐딱한 것, 각진 것 등 모양새도 각양각색인데 우리 선인들은 그

런 막돌을 주춧돌로 썼다. 적당한 돌을 주춧돌 삼아 그랭이질(주춧돌의 생김새에 맞춰 기둥을 깎음)을 해

서 나무기둥을 얹었다. 이를 ‘덤벙주초’라 한다. 들뜬 행동으로 아무 일에나 서둘러 뛰어드는 모양을 뜻

하는 ‘덤벙’은 무거운 물건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에서 비롯된 우리말이다. 큰 물건이 물에 떨어질 때 ‘덤

벙’ 하는 큰 소리를 내듯, 사소함에 얽매이지 않고 스케일 있게 사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깊은 지혜가 ‘덤벙 주초’라는 말에 녹아 있다.

죽서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이다. 삼척시의 서편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있으며, 옛날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이승휴(李承休)가 창건하

였는데, 그 후 1403년(조선 태종 3)에 삼척부사(府使) 김효손(金孝孫)이 구기(舊基)에 의거하여 중창(重

創)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정면이 5칸이었던 것을 후일 좌우 양단에 1칸씩을 늘린 것 같고, 그 부분만

은 공포(拱包)의 형식을 달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부의 천장을 보면 당초의 건물의 측면 외부에 나

와 있던 도리의 뺄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 누각이 전에는 맞배지붕 건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

포는 주두(柱頭) 뒤의 두공(頭工)으로써 대들보를 받도록 한 후 그 보머리가 그대로 길게 나와서 외목도

리(外目道里)를 직접 받고 있다. 제일 밑에 있는 첨차(遮)는 기둥머리에 꽂혀 있는데, 이는 주심포(柱心

包)집 계통에서 볼 수 있는 수법이다. 그러나 그 첨차의 형태는 오히려 다포(多包)집 계통의 것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조선 초기의 건축이지만 몇 번에 걸친 수리 때문에 원형이 손상된 부분이 많다.

죽서루 앞을 흐르는 오십천은 백병산으로부터 흘러오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오십 개의 작은 천이 모여

서 이루어진다고 오십천이란 이름이 붙었다. 오십천은 물이 맑고, 이 물을 따라 태평양까지 갔던 연어가

알을 부화하기 위하여 다시 고향인 이곳 오십천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죽서루 맞은편으로는 오십천을 사

이에 두고 삼척문화원과 박물관이 보였다.

죽서루 옆에는 용문이란 작은 바위동굴이 있고 이 문을 통과하면 용이 된다는 전설도 있다. 용바위를

빠져 나가 위로 올라가니 선사 암각화가 있다. 옛사람들이 자손을 낳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며 바위에 구

멍을 파서 만들었다는 구멍이 있었고 비가 외서 빗물이 고여 있었다.

죽서루 근처에는 송강 정철의 관동팔경 가사터라는 비가 서 있고 그 곳엔 관동팔경을 새겨놓아 관동팔

경이란 작품이 죽서루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하나의 문학작품이 후대까지 많은 사람들로부

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일은 가치 있어 보인다. 설명을 듣다가 보니 6시가 넘어 문닫을 시간이라 우리는

 

서둘러 죽서루를 빠져 나왔다.

죽서루를 보고 우리는 그곳에서 김은숙, 김기옥, 구금자, 그리고 죽서루에서 합세했던 구금자님의 부

군 김영철 시조시인과 헤어져 서울로 향했다. 삼척의 유명한 해양레일바이크, 또 해신당 공원, 대이리 동

굴 및 환선굴, 천은사, 추암바다와 촛대바위, 척추동해비 등 보고 싶었던 곳이 많았지만, 시간상 다 못 보

아 아쉬움을 남기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즐거웠던 하루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무사히 돌아왔다.

참석한 회원은 김민정, 우형숙, 이가은, 최숙영, 이숙자, 진길자, 홍오선, 이명희, 예연옥, 김인숙, 신순애, 김순자,

김태은, 양계향, 장미라, 이경자, 이진숙, 이양순, 최순향, 김수자, 이일향, 이동륜, 김선희, 구금자, 김기옥, 김은숙

(무순)과 비회원은 권영희 시인 외 4명, 모두 31명이다. 장대비가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빗속을 질주하여 동해까

지 다녀온 용감무쌍한 우먼파워들이다. 한국여성시조문학회 화이팅!

 

 

 

 

 

 

 

 

 

 

 

 

 

 

 

 

 

 

 

 

 

 

 

 

 

 

 

 

 

사진은 참고자료로 할지 몰라 더 넣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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