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한몽 국제학술 심포지엄 발제논문』
한국, 한국인의 정체성으로서의 시조
이 근 배(신성대석좌교수․대한민국예술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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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오랜 역사와 전통문화를 가진 단일민족 국가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모국어가 공식 언어이며 문자 또한 인류가 쓰는 문자가운데서 가장 과학적이며 이상적이며 독창적인 한글로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습니다.
요즘 새롭게 자주 쓰는 용어로 “국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그와 더불어“민족적”이 있다면 그것을 가늠하는 첫째 요건은 “말”과 글“일 것입니다. 단일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 누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면서 통일된 하나의 민족어와 민족 문자를 가진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 공식어가 16개종이나 되는 인도 등 다민족, 다언어, 다문자의 나라들에게서“말”과“글”로 국가의 정체성이나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둘째는 그 나라 국민이 쓰는 말과 글의 품격입니다. 우리ㄴ의 모국어는 인류의 언어가운데 가장 많은 어휘를 가지고 있으며 한글 또한 그 어휘로 짜인 언어를 자유롭게 표기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는 말과 글로 빚어지는 언어예술, 곧 시의 품격입니다.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시를 생활해왔으며 모국어로 구사할 수 있는 가정 이상적인 시형식인“시조”가 있어“시격”과 함께“민족격”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조는“빛나는 한국문학의 유산”으로 또는“오직 하나뿐인 한국의 전통시”로 정의하는 것에서 벗어나 민족적 삶과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고 한국인의 얼, 말, 글을 담아내는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인이라는 민족의 정체서의 뼈대이고 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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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위대성은 독창적이며 과학적인 문자가 있는 위에 오래된 시 형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조는 한국어 특유의 리듬과 감각 살려내는 3장(章)의 정형시로서 이탈리아의 14행시 소네트가 일어난 시기인 14세기에 앞서는 고려중기 11세기 초에 형성되었다. 최충(崔沖 984 - 1068) 이규보(李奎報 1168 - 1241) 등의 시조가 전해오고 있음이 그것입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이나 [해동가요海東歌謠]등에 수록된 시조가 고려나 조선조의 권력계층인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던 것으로 보는 눈길도 있으나 당시의 기록문화의 한계에서 온 것일 뿐 시조는 널리 민중계급에서도 불리어졌던 노랫말 형식의 시였던 것입니다.
정몽주鄭夢周, 성삼문成三問, 이순신李舜臣, 김상헌金尙憲 등의 시조는 국가의 패망, 또는 전란과 역사적 격동의 현장에서 뿜어낸 강력한 신념과 사상을 담고 있으며 정철鄭澈, 윤선도尹善道 등은 국토와 자연, 서민적 삶과 애환을 고품격의 시조로 일구었던 것입니다.
조선후기에는 3장 6구의 평시조형식이 엇시조, 사설시조로 확대되고 서민계층에도 뿌리내려 은유와 풍자와 해학의 근대시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백 년 동안 실로 감당키 어려운 모국어의 수난 속에서도 시조는 푸른 대로 솟아 눈바람을 이겨냈고 최남선, 이광수, 정인보, 한용운, 양주동 등 개화기 문학의 거장들이 모두 시조부흥에 동참했고 이병기, 이은상, 조운, 김상옥, 이호우 등이 시조가 현대시로서의 기능과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던 것입니다.
윤곤강은「시와 진실」(1948. 8) <창조의 동기와 표현> ―조운의 시조를 중심으로 하여―란 논제에서 "시조라는 낡은 시가형태를 내용과 형식에 있어 현대화에 노력한 점에 있어서도 조 씨의 공이 크다 볼 수 있으니 예로부터 시조가 즐겨 그 제재로 삼는 자연묘사의 시조를 놓고 볼지라도 정인보의「근화사」이거나 노산의「금강산」「박연」이나 변영로의「백두산 가던 길에」나 월탄의「비로봉」이나 지용의「백록담」이나 ― 이것은 시조가 아닌 시이지만은 ― 그 밖의 어떠한 작품을 갖다 대어도 조씨의「구룡폭포」한 편과 어깨를 겨눌 작품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고 단언을 하고 있습니다. 윤곤강은 시조시인이 아니고 그 자신 자유시를 쓰고 있음에도 조운의 사설시조 한 편을 들어 당대 문단의 거장들을 베고 있는 것은 이미 일제강점기를 넘어선 해방공간에서 시조가 현대시조로서의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확인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정인보, 조운 등의 납북, 또는 월북과 전쟁이 몰고 온 외래사조의 범람으로 재능 있는 문학 지망생들이 자유시 쪽을 선호하는 등 5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조는 침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시조를 일으키는 실질적 작업에 착수한 이가 이태극이었습니다. 이화여대 국문과교수로 "현대시조선총"등 시조집과 연구서 등을 발간하는 한편 시조전문지「시조문학」(1960. 6)을 창간한 이후 40여 년간 꾸준히 발간하며 많은 시조시인들을 배출하고『가람문학상』등을 제정 시조의 오늘이 있도록 정지작업을 하고 경작을 해온 공로를 오늘 현대시조 100년을 맞아 치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태극은 1964년「한국시조작가협회」를 창립하는 산파역을 했으며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에서 시조분과로 독립(1966. 1)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일을 했습니다. 「시조문학」의 신인추천제도를 두고 한 때 "잡초론"이 무성하기도 했지만 만약「시조문학」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시조가 어떤 자리에 서 있을까를 생각하면 작은 그늘보다는 큰 햇볕에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정소파, 이영도, 박재삼, 최승범, 장순하, 송선영, 정완영, 김제현 등이 문예지 추천, 전국백일장, 신춘문예에서 독보적 영역을 개척하면서 시조의 동맥에 튼튼한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언론매체로는 유일하게 중앙일보가 독자시란을 펼친 데 이어 중앙시조대상을 제정 신인상과 아울러 시조창작을 크게 북돋아 주었으며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등이 신춘문예에 시조부문을 살리고 있음도 시조가 민족의 정체성과 문학의 정통성을 지키는 적자임을 인증받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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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오늘날 시조는 홀대를 받고 문학의 중심권에서 밀려나는 것일까요? 이것이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화두입니다. 어디서 첫 단추를 잘못 끼웠는가를 짚는 일은 불필요한 소모입니다. 물론 원인을 알아야 처방을 낼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 마는 우리는 의사의 처방 이전에 스스로의 병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첫째, 좋은 작품을 더 많이 써야 합니다. 한 사람의 시인이 많은 작품을 생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시조를 쓰는 시인의 숫자가 아직도 모자랍니다.
둘째, 생산된 우수한 작품이 널리 독자에게 투입되어야 합니다. 독자가 쉽게 시조와 만나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보다 적극적인 대중매체의 활용을 촉발시켜야 합니다.
셋째, 비평의 활성화입니다. 시조 비평의 부재가 시조 침체의 깊은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신간 시집이나 소설집은 언론매체에서 지면을 넓게 제공하고 있고 작품에 대한 비평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지만 시조의 경우 비평가들의 시선 밖에 머물고 있으며 아주 적은 숫자가 시조에 대한 열의를 갖고는 있으나 시조의 생산량을 감당하기는 어렵습니다.
넷째, 문화정책의 각성입니다. 김덕수 사물놀이가 세계를 두드리고 안숙선의 판소리가 빛깔이 다른 인종들의 박수를 받고 있는데 비해 뿌리 깊은 한국의 전통시인 시조가 밖으로 뻗어나가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문화정책 입안자들이 나라 안에서 먼저 시조가 국민 속에 파고 들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다섯째, 교육제도의 개선입니다. 프랑스는 초등학교에서 1주일 3시간의 국어시간을 배정하고 시낭송을 필수과목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초등학교의 국어교육을 시조낭송 및 시조 짓기에 할애한다면 모국어를 아름답게 구사할 줄 아는 국민이 될 것이며 정서함양과 인격형성을 북돋게 될 것입니다.
여섯째, 국민 시조 짓기 운동에 나서야 합니다. 일본의 단가(短歌)가 세계적일 수 있는 것은 1천만 명을 헤아리는 단가 인구의 바탕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조 인구의 저변확대가 본격문학으로서의 시조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기도 합니다만 예술세계에서 애호가와 전문가는 엄격히 구분되는 것이며 저변의 층이 쌓일수록 천재적 시인이 배출 될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이밖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한 둘이 아닙니다. 교과서에서 시조가 제외되는 문제,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문제, 예술원회원 문제 등이 있습니다마는 앞의 5개의 문제가 선결된다면 부수적으로 해결되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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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교수는 "시조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전문적인 그릇 큰 시조시인들을 앞으로 배출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한정된 모티브로 말미암아 소진상태에 있는 현대시조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의표를 찌르는 새로운 가능성의 제시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조의 생득적 반모더니즘을 어떻게 지양하느냐는 곤란한 가능성의 탐구이기도 하다" 고 결론을 내놓고 있습니다.
또한 박철희교수는 "시조는 시사의 전 과정을 반영, 가장 모범적인 시사적 텍스트를 이룬다고 할만하다. 이른바 ‘다층융합’ 아니 엘리옷의 전통이라는 개념을 생각케한다. 시조를 옆으로 자른다면 그 단면이 여러 시대의 특색을 지닌 여러 개의 층이 나타나고 있음이 틀림없다. 시조는 이 겨레의 대표적 서정이자 자기동일적인 포에지다" 고 시조에 대한 기능적이며 진취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같은 날 제기된 두 논지의 충돌에서 우리는 오늘 시조가 당면한 숙명적 고뇌를 읽게 됩니다.
한쪽은 시조가 달팽이껍질 같은 형식과 내용에 갇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음을 각성하자는 것이며 다른 한쪽은 역사를 꿰뚫고 면면히 흘러온 시조의 다양한 가능성과 미래성에 대한 믿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시조인가를 돌아보고 시조가 걸어온 길의 몇 백 몇 천의 먼 내일을 내다보아야 하겠습니다. 시조의 형식은 우리 모국어가 낳은 가장 이상적인 악기입니다. 3장6구의 구성과 초, 중, 종장의 배분은 무수한 언어의 담금질 끝에 생성된 오묘 불가사의한 예술입니다.
시조의 틀에 얹으면 신명이 올라 우주 밖을 넘나드는 생각과 사람이 나고 죽는 일과 대자연이 일으키는 천변만화, 털끝만한 마음의 움직임도 모두 높고 낮은 가락으로 타내게 됩니다. 정몽주의「단심가」이순신의「한산섬」김상헌의「가노라 삼각산」등은 평시조 단수로 장엄한 역사를 담아냈으며 정철, 윤선도의 실사구시와 자연묘사는 그 넘나듦이 사람을 넘어서 초목에게까지 울림이 닿게 하였습니다.
지금 자유시는 시의 한계를 벗어나서 그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는 시조가 고삐를 죄어서 멀리 나가있는 시를 불러들여야 합니다. 시조의 진수를 꿰뚫지 못하고 낡은 형식이라거나 융통 자재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모국어의 문맹들을 눈을 뜨게 해야 합니다.
현대시조가 겪어온 한 세기는 앞으로 천 년의 시간을 차고 오를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아직 세계문학의 벽을 뚫지 못하는 한국문학의 한계도 시조가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종호교수가 지적한 "전문적인 그릇 큰 시인"의 배출로 박철희교수가 내세운 "포에지"를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시조는 우리 겨레의 동맥이며 백두대간의 산과 물입니다. 민족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이상적으로 구현시킨 시조의 형식은 모국어와의 절묘한 융화를 이루고 있는 까닭으로 앞에서 적시한 5가지 문제들을 풀어나간다면 어떤 시대의 변천에도 용맹 정진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며 한국의 국격과 한국인의 민족격을 높이는 엄청난 에너지가 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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