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시와소금》 가을호 이 계절의 좋은 시
박명숙
부표를 읽다
김민정
바다와 첫 상견례 후 거처를 옮겼는지
물결의 갈기 속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등줄기 꼿꼿이 세워 숨비소리 뱉는다
낡고 헌 망사리만큼 한 생도 기우뚱한
햇살 잘게 부서지는 물속을 텃밭 삼아
수평선 그쯤에 걸린 이마를 씻는 나날
손아귀에 움켜쥔 게 목숨 같은 것이어서
노을도 한 번씩은 붉디붉게 울어줄 때
등 푸른 고등어같이 잠녀들이 떠 있다
-《나래시조》 2016년 여름호
‘물결의 갈기’, 그곳을 헤치고 들어서면 외려 편안할까. 목숨을 담보로 삼은 바다 속 삶의 터전을 한 마리 검은 물고기처럼 뛰어들었다가 ‘등줄기 꼿꼿이 세’우고 ‘숨비소리 뱉’으며 올라오는 잠녀들. ‘기우뚱’해진 ‘한 생’이야 ‘망사리만큼’이나 ‘낡고’ 헐었지만, ‘햇살 잘게 부서지는 물속’은 싱싱한 생명을 기르는 ‘텃밭’이 아닐 것인가. 하지만 ‘수평선 그쯤에 걸린 이마를 씻는 나날’마다 경계에 내걸린 삶도 언제나 그 명암이 부표처럼 흐려질 터.
끝내 ‘손아귀에 움켜쥔’ 것은 한 끼 ‘목숨’을 구하는 서러운 것이라 ‘노을도 한 번씩은 붉디붉게 울어’주는데, 물을 떠나지 못하는 ‘잠녀들’의 하루는 ‘등 푸른 고등어’처럼 오늘도 바다 위로 여전히 둥그렇게 떠오르는 것이다. 물과 뭍 사이, 빛과 어둠 사이, 흐름과 머묾 사이, 하루와 영원 사이로, 삶의 탄력이 등처럼 휘었다가 튀어오를 때만큼 목숨의 아름다움을 견줄 수 있는 순간이 어디 있으랴.
* 김민정 약력
1985년 시조문학 지상백일장 장원. 시집 『백악기 붉은 기침』 『영동선의 긴 봄날』 『사랑하고 싶던 날』 외. 수필집 『사람이 그리운 날엔 기차를 타라』. 나래시조문학상, 열린시학상, 성균문학상, 철도시인공로상, 한국여성시조문학회회장 역임, 나래시조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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