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문화, 김민정 시인 단시조 작품론
소슬한 시간, 혹은 청정(淸淨)과 무구(無垢)
황치복 (문학평론가, 고려대)
1. 지질학적 상상력과 돌의 시간
김민정 시인은 앞서 발간한 ?백악기 붉은 기침?(고요아침, 2014)에서 ‘기찻길’과 ‘사막’을 통해서 순환론적 시간관에 입각한 독특한 시의식을 보여준 바 있다. 특히 고향인 강원도 산천의 절벽과 돌을 통한 고고학적 상상력은 ‘화석’과 같은 원형적 이미지를 발굴하면서 지금, 여기의 실존적 조건에 깃들어 있으면서 현대인의 진부한 일상과 세속적 의식을 정화하는 날것으로서의 원시적 생명력을 복원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기존의 길들을 지우고 항상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사막과 지층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들을 통해서 시인은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 그리고 원시적 생명력으로 정화된 시간의 발굴을 통해서 현대인의 진부하고 낡은 경험을 갱신할 수 있는 역동적인 상상력을 펼쳐 보인 것이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단시조 10편에서도 앞서 펴낸 시조집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돌과 시간에 대한 독특한 상상력과 관심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앞서 펴낸 시조집과 달리 이번 신작들에서는 소멸하는 시간과 단축되는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이 좀더 짙게 표출되고 있으며 기울어지는 시간에서 파생되는 상실과 적막의 정조가 시적 공간을 은은하게 물들이고 있다. 하지만 상실과 적막의 정조만이 시적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상실과 조락의 시적 정조가 적극적인 버림과 비움의 시적 태도로 전환됨으로써 성숙과 결실을 향한 열망이 들끓는 역동적 시적 공간이 창출되고 있다.
이번 신작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돌’에 대한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하게 변주되는 돌의 이미지는 “수석(壽石)”과 관련하여 독특한 상상력을 산출하는데, 이전 시집에서 돌이 주로 시간과 관련되어 있었다면 신작에서도 돌은 여전히 시간과 관련되면서도 어떤 집착과 고집 등의 메타포를 함축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예컨대 이전 시집에서 돌은 “널 보며/ 생각한다/ 세월이 둥글다는 걸”(「몽돌을 위한 명상」)과 같이 순환론적인 시간의 이미지로 수용되거나 “백악기 붉은 기침/ 이제 막 터져올 듯/ 오래된 미래 같은 곳/ 푸드득 활개친다”와 같이 태고적 시공을 간직하고 있는 벼랑의 이미지로 변주되곤 했다.
이번 신작에서도 돌은 시간을 함축하는 메타포로 수용되고 있지만, 그것이 시원적 시간을 간직하고 있어서 원시림을 키워내는 신화적 시간을 표상하기보다는 어떤 대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과 같은 붙듵림으로서의 지속적 시간, 혹은 ‘악착(齷齪)’의 이미지로 표상되고 있다는 점에서 변별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악착(齷齪)’이란 순리에 따르지 않고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구애(拘碍)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세상의 이치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탐욕과 편견에 의해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불가능한 집착에 붙들려 있는 내적 풍경이 ‘돌’의 이미지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이미지는 돌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를 발견하고자 하는 방법적 도구로서 중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을 살펴보자.
을미도 해변가에
돌밭을 더듬다가
낙지가 물고 있어
질려있는 돌을 본다
심장이
뛰고 있는 소리
견뎌 온 돌의 시간
―「이력을 헹구며」, 전문
‘돌’과 ‘낙지’라는 서로 이질적인 사물들이 결합되어 충격적인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구도는 1950년대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했던 조향의 「바다의 층계」라는 다음의 시구절을 연상케 한다.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조향, 「바다의 층계」, 일부
김민정 시인의 시조 작품이 이처럼 아방가르드적인 조향의 작품과 유사한 수준의 돌발적인 이미지의 결합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해변가의 돌과 그것을 붙들고 있는 낙지라는 구도를 통해서 서로 결합되기 어려운 이질적인 사물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대시조의 전위성과 실험성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 김민정 시인의 인용된 작품은 돌발적인 이미지의 결합에서 오는 감각적 충격을 추구하거나 이미지를 통한 구상적인 대상의 조립이라는 기존 시의 관념을 파괴하고자 하는 무의미시의 시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김민정 시인의 시조 작품은 낙지와 돌의 결합을 통해서 우리 삶의 한 국면, 즉 집착과 미련에 의해서 일그러진 어떤 삶의 한 국면을 포착하고자 하고 있다.
시적 관심의 구도는 낙지와 돌의 구도로 짜여져 있지만, 시적 초점은 ‘돌’에 있다. “낙지가 물고 있어”서 “질려있는 돌”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시적 화자는 그 돌에서 “심장이/ 뛰고 있는 소리”를 “견뎌 온 돌의 시간”을 발견한다. 시적 구도에서 돌의 심장이 뛰고 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소리는 물론 낙지의 심장 소리일 것이다. 심장 소리가 “질려있는 돌을” 물고 있는 낙지의 심장 소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간절함과 애착으로 고동치는 소리, 절대 놓칠 수 없다는 애타는 심정을 표상하고 있는 소리일 것이다. 낙지의 그러한 소리를 듣고서 견뎌온 ‘돌의 시간’이란 어떤 시간일까? “질려있는 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돌의 시간은 질식과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돌은 유정한 존재의 집착과 애집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답답함과 질식의 정서적 상태를 함축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 작품도 이와 유사한 구도를 취하고 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컥울컥 쏟아내던
접동새 울음 같은
진달래빛 수석 한 점
마음껏
울지 못하고
잠이 든 절벽처럼
―「주상절리」, 전문
주상절리란 마그마가 냉각되면서 응고함에 따라 부피가 수축하여 생기는 다각형의 기둥 모양의 금을 말한다. 즉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면서 식게 되는데 이때 식는 과정에서 규칙적인 균열이 생겨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주상절리란 화산작용에 의해서 발생한 바위에 풍화작용이나 침식 작용에 의해서 생겨난 균열과 틈이 그것을 갈라 기둥모양이 된 것을 말하는데, 시적 화자는 진달래빛깔의 수석 한 점에서 균열과 틈에 의해 생성된 주상절리를 발견한다. 진달래빛 수석을 보면서 시적 화자는 접동새 울음처럼 울다가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돌로 굳어버린 망부석(望夫石)을 연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수석에서 “접동새의 울음”을 읽어내고, 그것을 다시금 “마음껏/ 울지 못하고/ 잠이 든 절벽”으로 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음껏/ 울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억눌리고 억압된 정서적 응축을 상상할 수 있는데, 시적 화자는 진달래빛 수석과 주상절리라는 절벽에 그러한 정서적 응축을 집약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의 작품과 달리 신작에서의 돌은 시간의 응축보다는 정서적 응축의 상징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무수한 균열과 틈으로 점철된 바위기둥의 집적물에서 “마음껏/ 울지 못하고/ 잠이 든” 유정물의 정서적 앙금과 분열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도 예사로운 것은 아니지만, 돌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응축과 억압의 정서적 효과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시인의 새로운 시적 변모로서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응축과 억압의 반대 기제로서 이완과 해방에 대한 정서적 갈망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패인 돌 틈 사이에
풀꽃이 앉아 있다
내 가슴에 박혀 있던
네 얼굴도 앉아 있다
그런 날 그런 저녁에
찍어보는 꼭지점
―「돌꽃 한 송이」, 전문
패인 돌 틈 사이에 피어 있는 “풀꽃”과 시적 화자의 가슴에 박혀 있는 “네 얼굴”이 유비적 구조를 이루면서 동일한 상황으로 설정되어 있다. 돌틈 사이에 핀 꽃을 시인은 “돌꽃”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셈인데, 그것이 풀꽃이 아니라 돌꽃인 이유는 네 가슴에 박혀 있는 “네 얼굴”과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내 가슴에 박혀 있는 “네 얼굴”은 그것이 박혀 있다는 점에서 돌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또한 “네 얼굴”은 시적 화자의 가슴에 “앉아 있다”는 점에서 돌 틈 사이에 “앉아 있”는 풀꽃과 유사한 속성을 분유하고 있는 셈인데, 이처럼 앉아 있다는 점에서 “풀꽃”과 “네 얼굴”은 가라앉아 있는 어떤 감정의 앙금 상태를 시사하고 있다. 결국 돌 틈 사이에 앉아 있는 “풀꽃”이나 시적 화자의 가슴에 앉아 있는 “네 얼굴”은 어떤 정서적 상태의 균열과 응축을 대변해주는 “돌”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시적 화자는 돌 틈 사이에 앉아 있는 풀꽃을 보면서 자신의 가슴 속에서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네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데, 그리움의 대상인 그 얼굴을 돌꽃으로 비유하고 있다. 시적 화자가 굳이 그리움의 대상을 돌꽃으로 비유한 것을 보면 그리운 사람을 품고서 살아온 자신의 가슴을 응어리진 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날 그런 저녁에/ 찍어보는 꼭지점”이라는 표현을 보면 시적 화자의 가슴이 왜 돌과 같은 것인지를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떠나버린 사람을 마음속에서 내보내지 못하고, 극적인 만남을 상상해보는 내면은 갈라진 틈 사이에 풀꽃을 키우는 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신작에 투영되어 있는 돌에 대한 상상력을 살펴보았는데, 돌은 어떤 감정의 앙금을 대변해주는 사물이자, 분열과 균열, 혹은 떠난 자를 보내지 못하는 한과 같은 양가감정을 함축하고 있는 시적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폭발과 발산을 통해서 정화와 해방에 이르지 못한 응어리진 감정의 응축 상태, 혹은 미련과 집착으로 인해서 구애되고 있는 악착과 같은 심적 상황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돌이 함축하고 있는 정서는 시인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시원의 시공을 품고서 현대를 갱신하는 원시적 생명력으로 작동했던 돌과 화석의 이미지가 이처럼 억압과 응축의 이미지로 변모한 시의식은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보인다. 시인이 고고학적 상상력에서 지금, 여기의 실존적 현실로 눈을 돌리고 있는 내면적 관심의 전환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실존적 현실로 눈을 돌렸을 때, 거기에는 풀어진 시간, 혹은 소멸하거나 단축하는 시간의 양상이 시적 화자의 강박관념을 자극하게 된다.
2. 스러지는 것들, 혹은 소멸하는 시간의 아름다움
들녘은 바람의 몫
꿈처럼 이는 변방
목숨의 결을 따라
흔들리는 별빛인가
계절도 가장자리에서
머뭇대며 기우는,
―「사북에서」, 전문
시인의 고향인 강원도의 한 마을인 사북이라는 곳의 풍경과 그것에 대한 시적 화자의 내면 풍경을 그리고 있는 단시조이다. 고향은 언제나 따사로운 정서를 환기하는 곳이며, ‘귀향’이라는 어휘에서 알 수 있듯이 언제나 돌아가고 싶고 귀의하고 싶은 곳이다. 하지만 이 단시조에서 그려지고 있는 강원도 한 마을의 풍경은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운 곳으로 투영되고 있다.
물론 고향의 풍경이 꿈결처럼 떠오르고 아름다운 별과 같이 반짝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꿈처럼 이는 변방”인 고향의 들녘은 바람이 차지하고 있으며, 반짝이는 별빛 또한 “목숨의 결을 따라/ 흔들리”고 있다. 또한 풍요로운 곳으로 기억되어야 할 곳인 고향의 계절은 “머뭇대며 기”울고 있다. “머뭇대며 기우는”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다시금 미련과 집착 같은 ‘돌’이 품고 있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지만, 강원도 정선의 사북이라는 시골의 모습이 쓸쓸한 바람에 휩싸여 있으며, 별빛도 흔들리고, 계절도 기울고 있다는 점은 쓸쓸하고 고적한 느낌을 자아낸다. 더구나 사북이라는 시적 대상은 “꿈처럼 이는 변방”으로, 혹은 “가장자리”라는 표현으로 인해서 더욱 외지고 소슬한 곳이라는 인상을 생성해 낸다.
각질을 떼어내자
발갛게 부어오른다
놓쳐버린 시간들이
부유하는 여름밤에
누군가
살짝 놓고 간
기억 속의 사진 한 장
―「지난 일」, 전문
지나간 시간들은 모두 아련한 추억과 아쉬움의 정서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향유해버린 시간의 일회적 성격으로 인해서 과거의 시간들은 항상 애틋한 감상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지나간 시간들은 본질적으로 “놓쳐버린 시간”의 성격을 지니기 마련이며, 그러한 시간의 더께를 들쑤시고 파헤치는 작업은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일 수 있을 것이다. “각질을 떼어내자/ 발갛게 부어오른다”는 표현은 바로 지나간 시간의 덮개를 열어젖힐 때 다가오는 회한과 아쉬움의 정서적 고통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놓쳐버린 시간들이/ 부유하는 여름밤”이라는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부유한다”는 어휘는 물론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상태를 형용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여름밤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밤하늘을 떠다니는 하루살이나 물것 등을 연상시킨다. “발갛게 부어오른” 살갗과 연상해 보면, “기억 속의 사진 한 장”과 “지난 일”로 표상되는 과거의 시간들은 지금, 여기의 삶의 현장에 개입하면서 실존적 자아의 상흔을 들쑤시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것들이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달려들지 않듯이, 과거의 시간은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 현재의 평온을 뒤흔들어 놓는 불가항력적 요소라고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런데 과거의 시간이 그처럼 상처를 들쑤시는 기제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다음 시조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라는 시간은 항상 엇갈리는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번개부터 보내놓고
눈치 채게 달려오는
흡사 내 사랑이
뒤따라 다가가듯
오뉴월 마른하늘을
울려놓는 그 이름
―「천둥」, 전문
시적 논리에 의하면 “오뉴월 마른하늘을/ 울려놓는 그 이름”은 시적 화자가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인데, 그 이름이 마치 ‘번개’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이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번뜩이자 내 마음은 천둥이 되어 마른하늘을 울려놓는다. “그 이름”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자 내 마음은 마른하늘을 울리는 천둥이 되어 울린다는 발상은 과거의 사랑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정서를 강조해 주고 있는데, 내 마음에서 발생한 천둥이 “마른하늘을 울려놓는”다는 표현에서 그 강렬도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시적 화자가 사랑하는 “그 이름”이 번개라고 한다면, “내 사랑”은 그것을 “뒤따라 다가가듯” 하는 천둥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적 구도는 인력을 본질로 하는 사랑의 속성을 절묘하게 잘 표현해주고 있기도 하지만, 더욱 주목되는 점은 번개와 천둥이 항상 시간차를 두고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번개와 천둥은 영원히 함께 묶여 있는 운명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또한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운명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번개와 천둥이 영원히 묶여 있지만 함께 만날 수 없는 것은 시간의 간격 때문이다. 동일한 시간을 그것들은 동시에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번개와 천둥의 시적 구조를 통해서 시적 화자는 자신이 사랑했던 과거의 “그 이름”과 어떤 사연에 의해서 함께 하지 못하고 엇갈리게 되었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흡사 내 사랑은/ 뒤따라 다가가듯” 하기 때문에, “그 이름”이 번개처럼 앞서가면 항상 천둥처럼 뒤따라 다가가야 하는 엇갈린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의 사랑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과거의 시간은 항상 결핍과 결여의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미련과 아쉬움의 정조와 결합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결핍과 결여의 시간적 속성으로 인해서 소멸하는 시간은 더욱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수용된다는 점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달빛 한 사발을
누가 건져 올리는가
차르르르
물소리가
봄밤을 다 적신다
짧아도
너무 짧았던
그 밤에 스친
눈빛
―「홍매」, 전문
아름다운 순간들은 빨리 지나가기 마련이다. 꽃피는 아름다운 봄날이 짧게 끝나고 마는 것은 자연의 이치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시간들은 그처럼 짧게 끝나버린 봄날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으로 채워진다. 이 단시조 작품은 달빛 가득 깔린 봄밤의 풍경을 통해서 그러한 아름다운 순간의 찰나적 성격을 강조하고 그러한 순간의 강렬한 인상을 부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적 공간에 “달빛”을 끌어온 것은 시적 공간을 낭만적인 분위기로 만들려는 시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차르르르” 울리는 “물소리”의 도입 역시 봄밤의 정경을 서정적 공간으로 바꾸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 또한 물소리의 도입은 종장의 “짧은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서 시간의 흐름을 배치하고자 하는 의도도 숨어 있다. 이렇게 낭만적인 시적 공간인 봄밤은 “짧아도/ 너무 짧”게 지나가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짧은 순간에 스친 “눈빛”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그치고 소멸해버린다. 그러나 그처럼 짧았기에, 그리고 그처럼 짧은 순간의 부딪침이기에 그것은 영원으로 탈바꿈해버린다. 그러한 아름다운 순간은 시적 화자의 마음속에 “홍매”라는 붉은 색의 꽃으로 각인되어 해마다 부활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봄밤이기에 붉은 색의 홍매는 더욱 강하게 부조되며,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것은 어두운 밤을 붉게 물들이며 시간의 흐름을 응축해 놓는다. 괴테가 파우스트의 말을 빌어서 ‘멈추어라, 세상아,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말한 것처럼 아름다운 순간은 시간을 멈추게 하고,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몰리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아름다움이 순간의 예술이며, 찰나의 꽃임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순간과 찰나의 시간이란 곧 소멸하는 시간, 스러지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시간은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3. 버림과 비움, 혹은 청정(淸淨)과 무구(無垢)
지금까지 우리는 김민정 시인의 단시조 신작들이 돌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응축되고 응결된 정서적 상태를 표출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정서적 등가물인 돌은 미련과 애착, 혹은 정한(情恨)과 같은 응어리진 감정 상태를 표상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그러한 정서적 앙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파생되고, 그러한 욕망으로 인해서 지금, 여기의 현실적 시간에 주목하게 되자 파국과 소멸을 향해 쏜살같이 나아가는 결핍과 결여로 충만한 시간의 흐름을 발견하게 됨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스러지는 시간은 시인에게 역설적인 기제로서 순간의 아름다움을 자각하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었다. 소멸과 순간이 지닌 아름다움의 발견은 결핍과 결여, 소멸과 파국의 시간을 수용하는 버림과 비움의 삶의 자세로 이어지게 된다.
이제 막 그쳐버린
분수대의 물빛같은,
눈시울에 떨어지는 마른 잎의 망설임같은,
다시는 못 온다면서
돌아서는 얼굴같은,
―「소슬하다」, 전문
외롭고 쓸쓸한 정서를 환기하는 이미지들의 배열로 한 편의 단시조가 탄생하고 있다. 하늘 높이 솟구쳐오르다 그쳐버린 분수대의 풍경이나 가을날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막 떨어지려 하면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풍경,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을 예감하며 이별을 받아들이고 돌아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등은 고적하고 소슬한 정서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풍경에서 촉발되는 소슬한 정서는 미련과 애착으로 응어리진 감정 상태와는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다. 소슬한 정서란 그러한 미련과 애착에서 벗어나 결핍과 결별을 수용한 결단에서 야기된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시적 표현에서 “분수대의 물빛”은 솟구치던 열정과 감정적 고양상태에서 열기가 모두 빠져나간 상태의 쓸쓸하지만 평온한 상태를 표상해준다. “눈시울에 떨어지는 마른 잎의 망설임”에서는 미련과 애착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곧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한다는 점에서 애틋한 정서를 읽을 수는 있지만 악착과 같은 응어리진 정서적 상태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다시는 못 온다면서/ 돌아서는 얼굴”에서는 돌아서는 자의 결단과 보내는 자의 수용이 동시에 어려 있는데, 이러한 결단과 수용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대한 포용과 순응이 내포되어 있다. 돌에 대한 사유와 실존적 시간에 대한 사유를 통해 시인은 버림과 비움의 삶의 태도에 도달하고 있는 셈인데, 이러한 버림과 비움은 이치와 순리에 순응하는 자세가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삶의 자세가 “이제 막 그쳐버린/ 분수대의 물빛”과 같은 청정과 평정의 심적 풍경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오관이 짜릿하게
팝콘처럼 뻥, 터지는
바쁜 걸음 멈춰 놓고
가벼이 건너시라
군살은
다 빠진 웃음,
불순물 이제 없는!
―「웃음 다이어트」, 전문
“바쁜 걸음 멈춰 놓고”라는 시구 속에 버림과 비움의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 “바쁜 걸음”이란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을 반영하고 있으며,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은 교환가치를 대변하는 시간에 의한 이윤 창출의 합목적적 의식을 전제한다. 주지하듯이 근대는 시간을 화폐가치로 환산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적 질료로 바꿈으로써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을 강화했다. 따라서 “바쁜 걸음 멈춰 놓고”라는 시구는 바로 그러한 근대적 강박관념에 대한 저항이자 일탈의 태도를 표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이윤과 생산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났기에 “오관이 짜릿하게/ 팝콘처럼 뻥, 터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오관이 팝콘처럼 터지는 경험이란 방기(放棄)와 방심(放心)의 일탈의 상태에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방기와 방심의 일탈이 “군살”과 “불순물”이 없는 청정과 평정의 내적 지평에 도달하게 한다는 것이다. “군살은/ 다 빠진 웃음,/ 불순물 이제 없는!”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러한 심적 지평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군살”은 육체적 차원의 군더더기라고 할 수 있지만, “불순물”이라는 어휘는 심적인 차원의 앙금과 혼탁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면적 평정의 지평으로 해석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시적 화자가 이렇게 육체적, 심적인 청정과 평정의 지평을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 “웃음”을 시적 공간에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웃음”이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생동하는 현실과 감각을 옹호하는 정신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당위적인 현실원칙보다는 쾌락원칙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데, 이처럼 쾌락원칙과 현실을 긍정하는 원리는 곧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정신을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웃음이란 합목적적인 근대적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순수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웃음은 정신의 “군살”과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방심과 방기의 일탈, 그리고 쾌락원칙을 추구하는 웃음을 통해서 시인은 순수와 청정의 내면 풍경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적 의도를 확인한 셈인데, 이러한 과정은 곧 현실원칙이 대변하는 현실적 가치를 버리고 비우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우고 버리는 과정은 어떤 종교적 각성으로 연결된다.
그래,
꼭 너처럼
이 가을에 나 취하네
새빨갛게 타더니만
샛노랗게 까무라쳐
불콰한 절집의 얼굴
덩그러니 이 몸 한 채
―「불국토」, 전문
가을은 파국과 적막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의 마디이다. 시적 화자가 “이 가을에 나 취하네”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그러한 파국과 적막을 수용하고, 자연의 이치에 순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순응과 수용이 없고서는 타들어가는 가을과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취한다는 것은 대상과의 동화(同和)를 전제한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꼭 너처럼” 취한다고 고백한다. 시적 문맥에 의하면 “너”는 “불과한 절집의 얼굴”, 혹은 절집을 둘러싼 가을의 풍경을 의미한다. “불콰한 절집의 얼굴”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절집 또한 가을의 단풍에 동화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절집이 불콰하게 취하는 모습은 “새빨갛게 타더니만/ 샛노랗게 까무라쳐”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단풍드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절집은 가을의 풍경을 자신의 모습으로 삼아서 빨갛고 노랗게 단풍이 들고 있는 것이다. 절집이 단풍이 든다는 것은 곧 절집이 가을의 시간을 자신의 형식으로 삼아서 가을과 동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집은 파국과 적막을 초래하는 소멸과 파괴의 가을의 시간을 수용하고, 그 시간이 그려내는 풍경과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콰한 절집의 얼굴”이라든가 “덩그러니 이 몸 한 채”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절집은 하나의 유기체적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곧 절집과 시적 화자의 일치를 암시할 뿐 아니라, 모든 세상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 유기체의 일부라는 점도 암시하고 있다. 세상은 하나의 몸으로 가을의 시간을 체현하고 있는 셈이다. 시인은 그러한 세상을 “불국토”라고 표현하고 있다. 차별이 없는 세계, 집착과 아집에서 해방되어 여여(如如)의 진리를 체현하고 있는 세계를 불국토라고 할 때,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 지평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김민정 시인의 신작 단시조의 세계를 더듬어보았다. 돌에 대한 상상력을 출발점으로 해서 소멸하는 시간에 대한 수용은 결국 청정과 무구의 세계, 혹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수용하는 여여의 진실에 도달하고 있다. 집착과 애착을 표상하는 돌에 대한 상상력이 응어리진 감정의 앙금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지향을 드러낼 때부터 이러한 귀결점은 예정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고고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시원의 시간을 찾아가던 시인이 이제 지금, 여기의 현실로 내려와 소멸하는 시간에 직면하여 그것과 고투하는 사유를 통해 새로운 길을 내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시화문화, 2016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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