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편지
김 민 정
속뼈까지 다 드러낸 내 그리움 닮아 있어
자꾸자꾸 쓸어주고픈 잎 다 진 가로수가
호호호 입김을 불며 다가서는 계절입니다
눈시울 붉혀오던 그 가을도 다 보내고
목숨의 결을 흔들며 깊은 삶을 탄주하는
한겨울 뿌리 깊은 나무 내 안에서 자랍니다
찬바람과 눈보라 속 쓸쓸함도 다 지우고
하늘 닮은 맑은 눈빛, 푸른 희망을 담아
연화대 부처님 같은 환한 미소 보냅니다
언 손을 녹여주고 시린 마음을 데워주고
모락모락 정담 피어날 한 잔의 차 그리워
찰랑한 기다림 속에 겨울 편지 씁니다
우리들의 눈빛 속에 출렁이는 기쁨 같은
사랑을 가득 담아 축복을 가득 담아
이 겨울 함박눈 같은 편지 띄워 봅니다
<2004년 1월 13일>
바람의 숨결
정 근 옥
달빛의 서슬에
마음을 베이어
쓰라린 가슴 잠들지 못하는 날
진흙 속에서
어여삐 고개를 내밀고
환한 미소를 짓는 연꽃같은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눈 내리던 샤갈의 마을에
눈이 그치고
바람만이 생생히 살아
눈부시어 잠들지 못하고 헤매일 때
별들이 눈을 뜨고
아름다운 이승의 강물을 내려다 볼 때
나는
강물처럼 흐르는
바람의 숨결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뜨거운 숨결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참으로 많은 상처를 받게 된다. 작은 말 한마디에도 깊은 상처를 받고, 반대로 작은 말 한마디에도 기쁨이 넘치는 것이 인간의 나약한 마음이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아니면 사랑에서 상처를 받아 괴로울 때 진흙탕 속에서조차 맑게 피는 환한 미소를 짓는 연꽃 같은 얼굴을 발견한 기쁨을 위 시는 노래하고 있다. 그리하여 강물처럼 편안히 순리처럼 흐르는 바람의 숨결, 그것은 곧 당신의 뜨거운 숨결임을 깨닫는다. 새로운 만남의 기쁨, 발견의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삶에서 인연의 중요성, 만남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2004년 1월 20일>
선묘(善妙)의 사랑
김 민 정
이승 인연 다하면 저승에서 만나고
저승 인연 다하면 이승에서 뵈올까요
선묘의 낮은 음성이 예서 다시 들리고
돌때 낀 사리탑 위 별빛 고운 밤이 앉고
빈 공간을 메아리져 돌아오는 네 생각에
때로는 나비가 되어 그리움을 파닥였지
일상의 와중 속에 감정의 선을 둘러
잔기침 한 번에도 푸른 깃을 사리더니
오늘은 천년의 무게로 내 곁에 와 앉는 그대
선묘(善妙)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당나라(중국)에서 공부할 때 그를 사모했던 중국의 아름다운 소녀다. 의상대사가 고국 신라로 돌아오게 되자 바닷가에서 그 배를 바라보다가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됐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상대사의 배를 보호해 무사히 신라에 닿게 했고 의상대사가 영주부석사에 터를 닦고 절을 세우려할 때 그곳의 요괴들이 방해하자 용이 바위를 들어올려 그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 때서야 의상대사는 선묘의 사랑을 깨닫고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로 짓고, 선묘의 사당을 지어주었다 한다. 지금도 영주 부석사에 가면 선묘의 사당이 있다.
이 작품은 선묘와 의상대사의 설화를 바탕으로 해 사랑의 순수성과 영원성을 추구해 본 시조다. 자기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사랑, 죽어서도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순수한 사랑만이 가능할 것이다.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 수 있는 영원한 사랑과 그리움은 인간이 추구하는 사랑의 참모습이다. <2004년 1월 27일>
명중시켜라
김 홍 일
화살이 되어라
바람을 일으키며 과녁 한가운데를 꿰뚫는
우레 같은 갈채가 되어라
삶은 이미
시위 떠난 팽팽한 가속도,
절정을 치달리는 긴박감으로
더욱 향기로운 음악이다
현을 당겨라
터질 듯 아름다운 음률 속으로
네 모든 춤을 던져라
먹이 쫓는
맹수의 눈빛처럼
바람 앞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무게가 되어라
우리의 삶은 이미 태어나면서 목표점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인지도 모른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 날아가 목표점에 꽂힐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삶의 목표를 잃고 허둥대기도 하고, 방향감각을 잃고 삶을 헤매기도 한다.
이 시에서는 삶의 목표를 향해, 삶의 절정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또 일으키며 가는 화살이야 말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음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아름답다고 보는 것이다. 또 그러한 목표를 위해 춤추듯 모든 정열을 쏟고, 목표물을 결코 놓치지 않는 맹수의 눈빛처럼 바람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굳건한 삶의 자세가 되기를 권하고 있다. <2004년 2월 3일>
백로떼 날아오르는
김 민 정
눈부시게
맑은 영혼
그 산에 살고 있나
그리움의
북소리
밤새 둥둥 울렸구나
이 아침
우아한 자태
날개 펴는 백로떼
단단히
물고 떠날
생각 하나 얻었는가
불현듯
그리워질
불씨 하나 묻었는가
이제 막
흰 날개 펴고
비상하는 겨울숲
겨울숲의 아름다움을 표현해 본 시조이다. 1년 전 출장을 가서 양평 한화 콘도에서 묵을 때, 어느 겨울 아침 일어나 창문을 열었더니 앞의 산들이 하얀 눈들로 덮여 있었다. 눈부시게 흰 백조떼들이 날개를 펴고 산을 온통 품고 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이제 막 그 우아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듯한 모습이었다. 그 때 본 순백의 눈 내린 겨울숲의 모습은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 늘 무엇인가 깨닫고 배우게 한다. 자연은 넉넉한 그 품안에 언제나 인간을 품어 인간을 겸허하게 만드는 영원한 스승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2004년 2월 10일>
백담사 계곡음(吟)
강 우 식
물은 초지일관이다
초지일관으로
단풍나무숲을 지나며
아 님은 갔습니다
탄식하기도 하고
어느 굽이에 이르러서는
울대목을 세워
정선아라리의 한 대목으로
포말 짓기도 한다
사람들아 사람들아
우리도 가진 것 한마음으로
끝을 보고자 한다면
생명의 물줄기로 농울지기로는
저러할진저
백담사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보고 읊은 시이다. 한용운 스님이 머물며 <님의 침묵> 시집을 탈고한 곳이 바로 백담사이다. 물은 항상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이 물의 속성이며 고이면 썩게 되어있다. 그 처음의 마음으로 계속 흘러가는 것이 물이라는 것이다. 단풍나무숲을 지나며 한용운의 시를 생각나게 하기도 하고, 어디에선가는 정선아라리의 서러운 느린 가락처럼 너울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들도 초지일관, 처음의 마음으로 끝까지 가고자 한다면 저 생명의 물줄기처럼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도 흐르며 순리로 농울져갈 일이라고 시인은 읊고 있다. <2004년 2월 17일>
미인 폭포
김 민 정
파열도
때로는
이리 벅찬 감격일까
생의 한 뼘
둘레서도
자라나는 사랑이듯
물보라
흩날리느니
수정보다 눈부셔라
신라적
유씨 가문
님 구하던 미녀는
세상의
짝 없는 미
하늘을 원망하며
한 송이
붉은 꽃 되어
폭포를 덮었다지
그 후론
미인 폭포라
이름되어 남았으니
만년을
살리자는
하늘의 속셈인게지
치마폭
닮은 폭포가
오늘따라 유난하다
미인 폭포는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심포리에 있어 일명 심포폭포(深浦暴布)라고도 하는 높이 50m인 아름다운 폭포이다. 미인 폭포의 유래는 신라시대 폭포 옆 높은 터에 사는 한 미녀가 혼기가 넘어도 자기에게 걸맞는 신랑감을 구하지 못해 비관하여 투신자살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태백시 통동(통리)에서 삼척시 가곡면으로 넘어가는 곳의 오봉산과 백병산 사이에 있다.
폭포는 오십천 상류에 해당하며, 하곡이 낮은 지대로 급격히 경사진 곳에 있다. 한국판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미인 폭포 주변의 협곡은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역암층으로 신생대 초의 심한 단층 작용 속에서 강물에 침식돼 270m 깊이로 패여 내려갔다. 협곡의 전체적인 색조가 붉은색을 띠는데 이것은 퇴적암들이 강물 속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건조한 기후조건으로 공기 중에서 노출된 채 산화되었기 때문이다. 주로 굵은 자갈로 된 역암과 모래로 이루어진 사암, 진흙으로 굳은 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발 700m 안팎의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안개나 구름이 끼는 날이 많으며, 이때 경치가 더욱 아름답고 신비하다. 전설에 의하면 일몰전과 일출전에 이 폭포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면 풍년이요, 찬바람이 불면 흉년을 예측했다고 한다. 그곳은 필자의 그리운 고향이기도 하다. <2004년 2월 24일>
동매(冬梅)를 보며
정 근 옥
눈발이 몰아치던
차가운 역사 앞에서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영화의 누더기를 다 벗어던지고
독한 향내를 홀로히 피워내는
동매(冬梅) 한 그루
흰 눈보다 깨끗하고
불길보다도 뜨거운
매월당 김시습의 눈빛
천 년의 역사를 꿰뚫어 본다
무엇이 선홍의 꽃잎을 피워 내고
무엇이 그 꽃잎을 갉아먹었는지를
겨울이 다 가기 전 차가운 기운 속에서 피는 매화, 차가운 눈과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자신의 소임을 다해 피는 꽃이 바로 매화다. 그래서 우리는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사람을 매화에 비유하기도 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매월당 김시습은 어려서는 신동으로, 정치에서는 생육신으로, 문학에서는 방외문학인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 그리고 뛰어난 비유의 시들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는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사흘을 울었다 한다. 그 후 책을 불사르고 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깍고 방랑의 생활을 하였다. 수양은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그는 끝내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현실의 삭막한 정치판을 보면서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영화의 누더기를 다 벗어던지고' 방랑의 생활을 택했던, '흰 눈보다 깨끗하고/ 불길보다도 뜨거운' 김시습의 절개가 새삼 그리워지는 시이다. <2004년 3월 2일>
남해 봄빛
김 민 정
가지 마다
가득 돋은
푸른 봄을
보고 왔다
남해 통영
달아 공원
이른 봄의
청매 향기
마음에
실어온 봄빛
온 서울에
풀어놨다
2003년 2월 남해 통영을 다녀와서 쓴 단시조이다. 양평에서 결성된 모임 '양문회', 1년에 한 번 만남의 첫장소로 우리는 통영을 택했다. 2월의 통영바다는 깨끗했고, 아름다웠다. 통영은 많은 문인들의 고향이기도 하여 문향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 유치환, 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시조시인 김상옥, 김보한, 서우승, 음악가 윤이상, 그리고 멋진 유머와 재치로 우리 모임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시인이며, 소설가며, 소설평론가인 부산대 김정자 교수 등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의 통제영이 있던 곳이라 이름을 통영이라 하였는데 한 때 충무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다시 통영으로 쓰고 있다. 한려수도의 멋진 석양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유명한 달아 공원, 그 곳을 찾은 시간엔 날씨가 흐려 석양은 볼 수 없었지만, 자욱한 안개 속에 이른 봄의 은은한 청매 향기만은 가득히 전해져 왔다. 그 아름답고 알싸한 청매 향기, 가슴에 가득 담아와 서울에 풀어놓고 싶었다. <2004년 3월 9일>
성자(聖者)처럼 나무는
주 원 규
나무는, 더도 덜도 말고
생존에 꼭 필요한 물기만 빨아올린다
나무는, 고요히 바람 잔 날이나
가지가 휘는 바람 불 때에도
더도 덜도 말고 생존에 꼭 필요한
공기만 호흡한다
노란꽃은 노란꽃 피울 만큼만
호두나무는 호두알 익힐 만큼만
햇빛을 좇아 몸을 내어 민다
눈을 들면 눈 높이에서
내 혓바닥만한 나뭇잎들이
내 혓바닥보다 더 자유롭게
바람과 미어를 나누고 있다
전신으로 삶에 순응하며
나무는 공기와 진정으로 악수한다
나무는 햇살과 진정으로 입 맞춘다
나무는 토양과 진정으로 포옹한다
겨울 동구에
성자처럼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나무는 그에게 필요한 양만큼의 물만 빨아들이고, 그의 생존에 필요한 양만큼의 공기만 받아들이고, 또 그가 꽃 피우고 열매 익힐 양만큼의 햇빛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며 더 많이 차지하고 싶어하고, 더 많이 사랑받고 싶어하고,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싶어한다. 먹고 입고 살 만한데도 상대적 빈곤을 느끼고 좀더, 좀더 하고 욕심을 낸다.
그래서 늘 인간의 마음은 가난하고 허기가 진다. 물론 인간에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이 없다면 생활에 권태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현실의 자아에게 만족도 할 줄 알고 자기자신의 현재를 사랑할 줄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자기에게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도 당당히 성자처럼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를 보며 지나치게 욕심이 많은 우리의 삶을 한 번쯤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2004년 3월 16일>
봄이면
김 민 정
봄빛이
출렁이면
초록물결
반짝이면
너에게로
달릴 테야
사랑을
가득 안고
풋풋한
네 영혼 깊이
상록수를
심을 테야
봄! 봄은 약동의 계절이다. 모든 만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계절! 햇빛은 따사롭고 그 햇빛을 받으며 만물은 기지개를 켜고 새로움을 준비한다. 인생의 봄인 청춘. 헤르만 헷세의 '청춘은 아름다워라! 알알이 속속들이 아름다워라!'는 구절과 민태원의 수필 '청춘 예찬'이 생각나는 계절이 또한 봄이다.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계절, 세상이 봄빛으로 출렁이며 온통 초록으로 빛날 때 사랑하는 그대에게로 달리고 싶은 마음, 그리하여 사랑하는 그대의 영혼 깊은 곳에 영원히 변하지 않을 푸른 상록수 같은 사랑을 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해 본 단시조이다.
누구나 꿈꾸는 아름다운 사랑, 그것은 소유가 아니고 속박도 아니며, 노력없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겨울을 견딘 새싹만이 봄이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듯 사랑을 꽃 피우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노력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2004년 3월 23일>
풀밭에 앉아 생을 관찰하다
김 홍 일
가만히 보니
온통 풀잎들이 물음표를 그리며
살래살래 고개를 젓고 있다
불쑥
느낌표를 내미는
꽃대의 탄성
군데군데 쉼표와 마침표
와, 생은
부호의 천국이로구나
해마다 봄이 되면 새삼 느끼는 자연의 신비. 두꺼운 표피를 뚫고 그 여린 새싹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나무, 아직도 언 땅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그 여린 풀잎들의 강한 생명력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계절이 바로 봄이다. 그 뿐인가. 대지는 어디다가 그렇게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깔의 꽃들을 숨겨놓았다가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일까. 보들레르는 '4월은 잔인한 달, 언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라고 생의 환희, 신비를 역설하고 있지만,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봄은 아름답고도 신비한 계절이다.
뾰족이 잎을 틔우는 풀잎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온통 물음표를 그리며 살래살래 고개를 젓고 있다'는 시인의 관찰력이 놀랍다. 그 가운데 느낌표처럼 솟아오르는 꽃대! 또르르 말려 쉼표처럼, 또 마침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어린 풀잎들. 그것을 바라보며 '와, 생은 부호의 천국'이라고 표현하는 화자의 감탄은 바로, 사물에 대한 시인의 짙은 애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시는 봄의 경이로운 모습을 찬탄하며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2004년 3월 30일>
봄날에
김 민 정
세상사 시끄럼도
네 앞에선 남실바람
잠길 듯 다시 뜨는
해말간 미소 하나
고요히
앙금 갈앉는
가슴 벅찬 기쁨이여
속살 깊이 키워내는
여리디 여린 생명
다독여 가꾸는 일이
일생의 숙제인 듯
지열은
가슴에 조차
불씨 하나 남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조용하지만은 않다. 늘 많은 문제와 떠들썩함을 지닌 채 역사는 흐르고 있다. 눈만 뜨면 어지러운 소식들이 신문지상을 덮고, 놀랍고 삭막한 TV소식들이 우리의 여린 가슴을 짓누르기도 한다. 그러한 세상의 어지러움 속에서도 늘 부드러운 남실바람이 불어가듯 세상사를 잊은 듯이 맑은 미소를 다시 지을 수 있는 삶의 모습을 표현해 보았다.
어지러운 세상사에 결코 함몰되지 않으며, 고요하게 가슴 벅찬 기쁨을 간직하는 생활은 바로 주변에 대한 작은 사랑의 실천이다. 아침마다 만나는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 그들을 여린 생명이라 여기고 다독여 가꾸어 주는 일이 교육자의 할 일이라 생각하면 그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슴에 뜨거운 불씨로 남는 봄날, 행복과 평화는 바로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2004년 4월 6일>
빗방울의 노래
이 인 자
그늘진 하늘자락 한 꺼풀 벗겨내고
투명한 별빛 모아 숨결로 스며들면
또로롱
풀잎 끝마다
눈을 뜨는 초롱꽃
닫혀진 가슴 열고 희망을 꿈꾸는 날
은물결 찰랑찰랑 하늘과 입 맞추면
잔잔한
선율을 타고
피어나는 방울꽃
빗방울의 모습을 초롱꽃, 방울꽃에 비유해 표현한 귀엽고 사랑스런 작품이다. 비가 내림으로써 구름진 하늘은 마치 한 꺼풀 그늘을 벗는 산뜻함을 지니게 될 것이고, 그 비를 맞는 풀과 나무들은 싱그러움을 더할 것이다. 그 비는 바로 투명한 별빛을 모아 만들어진 것, 그리하여 비를 맞은 풀잎들은 풀잎 끝에 귀여운 물방울 초롱꽃을 단다.
둘째 수에서는 비가 내리는 날 닫혔던 가슴도 열고 희망을 꿈꾸어 보는 물결은 비를 통해 하늘과 입맞춤을 한다. 그 황홀감은 잔잔한 선율을 타고 방울방울 방울꽃으로 피어난다. 조용히 비가 내리면서 물결 위로 아름답게 파문이 번져나는 모습을 방울꽃으로 표현하여 표현의 참신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2004년 4월 13일>
진달래
김 민 정
그건 열여섯
피는 춘향이 마음
쨍쨍한 햇빛 속에
눈씻음의 향기로
첫사랑
호젓한 심사
홀로 펼쳐 드노니
출렁이는 봄물결
산 속 누비는 고요 행렬
물결지는 산산골골
비단실 풀리는 소리
자우룩
안개 내리듯
사월을 덮는 바람
한국 사람에게 진달래만큼 친숙한 꽃도 없을 것이다. 봄이면 어느 산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진달래꽃이다. 낯익은 오솔길이 있는 고향산천에 온 듯한 느낌의 꽃. 그만큼 진달래는 우리 눈에 낯익어 향수처럼 느껴지는 꽃이다.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어있는 산을 보면서 춘향이의 첫사랑이 저런 색깔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녀가 펼쳐든 호젓한 마음이 저러하리라 상상해 본다.
4월이면 온 산천을 물들이며 고요하게 산 속을 누비고 있는 진달래꽃이 자욱한 분홍색 안개로 느껴지기도 하고 연분홍 부드럽고 고운 비단을 가득 펼쳐놓은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진달래로 하여 아름다운 봄산과 그것을 바라보는 첫사랑 같은 황홀한 봄날…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이별의 정한을 형상화한 자유시라면 이 작품은 온 산을 물들인 진달래꽃 자체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정형시이다. <2004년 4월 13일>
봄꽃 지는 날
박 수 진
누가 후득후득 울고 있는가
이 아름다운 시절에
우리들 청춘도 저러하거늘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
쓰린 이별의 자리
지금은 피 흐르고 눈물 나지만
상처마다 추억같은 등불 매달고
그 자리에 아름다이 열매 맺는
눈부신 가을날도 있으리니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오늘은 눈물이 난다
바람에 하염없이
봄꽃 지는 날
우리는 피는 꽃을 보고 있으면 기쁨을 느끼지만, 지는 꽃을 보고 있으면 슬픔이 느껴진다. 눈부시게 순결한 화려함으로 피었다가 금방 시들고 마는 이른 봄의 목련이나 일시에 화려하게 피었다가 금방 지고 마는 벚꽃이나 첫여름의 정열을 느끼게 하는 담장의 붉은 장미꽃 등 모든 꽃이 필 때는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시드는 모습은 초라하고 슬프다.
그러한 꽃을 보면서 우리가 슬퍼하는 건 꽃의 피고짐을 인생과 연결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청춘도 저러하거늘/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꽃잎이 짐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이 열매 맺는 눈부신 가을날도 있으리니'라고 화자는 스스로 위로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눈물이 난다고 화자는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아무리 열매 맺는 가을날이 있다지만 꽃이 지는 것, 인생의 아름다운 청춘이 사라지는 것은 슬픈 일임을 화자는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2004년 4월 27일>
남산의 봄
김 민 정
보드라운
느티속잎
푸드득 날개 펴면
저것 봐,
저것 좀 봐
천지간의 초록 물결
생명 그,
만발하는 무지개
분수처럼 솟구치는
하늘하늘
아지랑이
온 서울을 휘감더니
오늘은
남산골에
잔치마당 열렸구나
연초록
고운 바람이
사운대고 있잖아
남산의 옛이름은 목멱산이다. 서울의 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산. 그래서 예부터 우리의 사랑을 담뿍 받아온 산. 장충당 공원을 따라 오르든가, 아니면 남대문 시장 뒤쪽 회현동으로 올라가면 서울시민의 정다운 산 남산이 나타난다. 남산타워에서 동서남북을 내려다보면 서울은 참으로 넓다. 대한민국 국민의 4분의 1이 사는 땅, 그 많은 인구가 저마다 사연을 담고 복작대며 살아가고 있는 곳, 서울에도 봄은 오고 평화는 존재한다.
옛 어린이회관, 지금의 서울교육과학연구원 앞뜰에는 느티나무가 있다. 그 느티나무 잎이 피는 모습,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연초록 어린 잎새의 고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생의 환희와 기쁨만이 가득 느껴진다. 봄의 생생력과 생명력이 분수처럼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천지에 가득한 초록물결도 만날 수 있다. 사운대는 봄바람에 초록물결이 넘실거리는 봄날, 천지에 가득 넘치는 생의 환희를 표현해 본 작품이다. <2004년 5월 4일>
봄날 강가에서
정 근 옥
눈부시게 화장을 한
새악씨 얼굴처럼 고운 봄햇살
비늘을 퍼덕거리며 숨쉬는
강물을 조용히 쓰다듬는다
작고 하얀 이를
살며시 드러내며 웃는
강물의 웃음소리에
목련꽃 눈망울
입춘을 지나온 바람에게 눈짓을 한다
풀밭에서 꽃잎을 뜯는
갓 태어난 봄병아리
버들이 눈뜨는 강가로 걸어나오다
문득 구름 속을 날아가는
자유의 새 한 마리를 발견하고
푸른 날개짓을 쉼없이 한다
이 시에서는 화장을 한 새악시 얼굴처럼 화사한 봄햇살과 그 고운 봄햇살이 퍼덕이며 흘러가는 강물을 조용히 쓰다듬는 평화스러운 봄날을 만날 수 있다. 행복함과 평화스러움으로 '작고 하얀 이를 살며시 드러내며 웃는' 강물의 웃음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다.
바람에게 눈짓하는 목련꽃 눈망울과 풀밭에서 꽃잎을 뜯는 봄병아리, 모두가 평화스러운 봄풍경을 보여주는 소재들이다. 귀여운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버들이 눈뜨고, 봄이 무르익는 강가로 걸어나오다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는 새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 새를 닮고 싶은 마음에 작은 날개를 퍼덕이는 병아리.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몸짓이 마음의 카메라 렌즈 안에 가득 잡히는 아름다운 시이다. <2004년 5월 11일>
에밀레보다 푸른 사랑
김 민 정
우주를 다 주어도 바꾸지 않을 사랑 하나
펄펄 끓는 용광로 속 뼈도 혼도 다 녹여서
에밀레 애절한 울림으로 태어나고 싶어라
밀물 같은 그리움 가득하게 차오르면
동백보다 붉은 울음 그렁그렁 쏟으면서
사뿐히 승천하리라 청아하게 울리리라
깊고 맑은 종소리 온 세상에 퍼져가듯
그대 안에 융합하는 아름다운 사랑노래
천지에 빛나는 기쁨 영롱하게 울리리라
천년을 내리게 될 꽃비 같은 그리움과
천년을 살아 숨쉴 불꽃 같은 그대 사랑
에밀레 푸른 목숨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도 인생을 모르듯이,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인생이고, 이것이 사랑이라고 딱히 정의내리기가 어렵다. 따뜻함, 기분 좋음, 상대에 대한 많은 관심, 아껴주고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 상대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등등이 사랑의 감정일까?
수십 억의 인구 속에서, 수십 억년의 세월 속에서 너와 내가 이 순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인연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만난다는 것은 더욱 값진 만남이다. 그 귀한 만남이 오래 가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을 노래해 보았다. 천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 뛰어 아직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에밀레종, 인간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던져 넣었을 때 마침내 울리던 맑은 종소리. 그 명징한 에밀레 울림 같은 사랑이여!
이 작품은 천년을 넘어서도 존재할 수 있고, 그리워할 수 있고,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는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을 표현해 본 작품이다. <2004년 5월 18일>
그대 푸른 바람소리
김 정 자
뻐꾸기 울음소리에
솔가지 사이로 일렁이는
그대 물결치는 머리칼
푸른 오월은
산등성이 무성한 잎새들을
맑은 웃음으로 흔들어대고
깃발로 나부끼는 자유의 바람은
구비치는 바다를 넘어
골짜기 맑은 물줄기에
눈부신 날개로 내려와 앉는다
낮은 데로 흐르는 세월
끝끝내 아름다운 인생임을 깨닫게 해준
그대에게 감사하며
이 아침
먼 산 봄새들이 다투어 노래하는
푸른 숲에서
내 아득한 그리움의 편지를 띄운다
바람소리도, 초록빛 나뭇잎들의 흔들림도 가장 맑고 상쾌한 계절이 오월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산 속 뻐꾸기 소리 들려오고, 솔가지 사이로 물결치는 오월 머리칼의 아름다움과 무성한 잎새들을 흔들어 대며 웃는 산의 웃음소리. 이 작품에선 마냥 싱그러운 오월의 푸르름과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골짜기 맑은 물줄기에도 눈부신 날개처럼 살랑이며 내려와 앉는 바람, 물처럼 낮은 곳으로 세월은 흐르지만, 끝끝내 인생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계절에 화자는 감사한다.
산새들의 노래소리로 더욱 푸른 숲의 아침, 잊었던 사람에게, 싱그러운 자연에게, 이 아름다운 자연을 인간에게 선물로 준 신에게 '아득한 그리움의 편지'를 띄우는 화자여! 나도 이 푸르고 싱그러운 오월 아침엔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리움의 편지를 띄우리라, 띄우리라. <2004년 5월 25일>
우리 사랑은
김 민 정
네 안에서 내가 자라
내 안에서 네가 자라
비 그친 하늘 아래
유월의 숲 속처럼
우리는
어우러진 나무
이루어질 숲, 그늘
날마다 조금씩의
기다림을 먹고 크는
칠월의 덩굴이듯
끝도 모를 생명의 움
장마 속
수국을 닮아
물기 떨며 핀 그리움
진정한 사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쇠퇴하고 퇴색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힘이 되고 성장,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서로의 사랑 안에서 상대방이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어느 한 쪽만의 성장이나 발전을 위해 다른 쪽이 희생을 강요당한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어느 한쪽의 성장이나 발전이 아닌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서로가 힘이 되고 격려가 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비온 뒤의 맑은 하늘 아래 존재하는 숲 속의 싱그러운 나무들처럼, 끝없이 뻗어나가는 여름의 덩굴처럼 푸르고 힘찬 삶이 되도록 서로를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힘이며, 성숙된 사랑의 모습이다. <2004년 6월 7일>
바다에서
안 상 근
칼바람 부는 땅 끝 섬
안개에 묻힌 오름
비 오는 바닷가
언제나 그 자리에
나는 없고
춥고 배고픈 가슴만이 있다
하늘과 맞닿은 바다
그 너머의 시간,
바다는
그저 자기 모습만 보여 주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바다를 본다
하늘과 맞닿은 푸르고 끝없는 수평선, 다가가도 다가가도 그만큼의 거리가 항상 남는 아득한 거리, 끊임없이 파도는 만들어지고 부서지고…. 그 역동성으로 늘 깨어있는 생동감과 신선함이 느껴지는 곳이 바로 바다이다.
우리는 사물을 대할 때 얼마나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까.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사물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의 범위에다가 자신의 주관을 가미하여 그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 이 시 속의 화자는 비 오는 바닷가에서 '나는 없고/ 춥고 배고픈 가슴만이 있다'고 표현하여 비 오는 바다의 쓸쓸함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마지막 연에서 '바다는/ 그저 자기 모습만 보여 주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바다를 본다./'로 표현하여 나와 바다의 거리감을 표현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바다와 그 바다를 주관적 정서로 바라보고 있는 화자를 만나 볼 수 있다. 모든 사물은 나의 밖에 존재하며 그것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인 것이다. <2004년 6월 14일>
저 산에
민 병 도
스스로 물러앉아 그리운 이름이 된
산에, 저 산에 향기 나는 사람 있었네
수없이 나를 깨워 준 늘푸른 사람 있었네
법구경을 펼쳐두고 비에 젖은 저 빈 산에
휘젓고 간 바람처럼 가슴 아픈 사람 있었네
드러난 상처가 고운, 눈이 먼 사람 있었네
만나서 빛이 되고 돌아서서 길이 되는,
날마다 내 곁을 떠나가는 산에 저 산 안에
영혼의 맑은 노래로 창을 내는 사람 있었네
산은 사철 변화를 가지면서도 늘 그 자리에 의젓하게 앉아 있다. 그곳은 스스로 물러앉을 줄 아는 그리움으로 남는 향기로운 사람이 있는 곳, 수없이 나를 깨워 준 늘푸른 사람이 있는 곳이다. 휘젓고 간 바람처럼 가슴 아픈 사람이 있는 곳, 드러난 상처가 고운, 눈이 먼 사람이 있는 곳, 영혼의 맑은 노래로 창을 내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언제보아도 푸른 산은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간직하며 법구경처럼 자비롭게 앉아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나무들을 키우고, 새를 키우며 향기롭고, 푸르고 맑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아픔도 감싸안고 상처도 포용하며 '만나서 빛이 되고 돌아서서 길이 되는' 산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산은 실제의 산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상징일 수도 있다. <2004년 6월 21일>
강가에나 나가 보자
김 영 덕
시름겨워 울컥 치밀 때 강가에나 나가 보자
올망졸망 모여 앉아 대중조차 잊고 사는,
자갈과 자갈 사이의 여유쯤은 갖고 살자
제 살을 깎아 내어 얻어 낸 풍요로움
얼만큼 굴러봐야 저 소릴 들을 건가
하루쯤 강가에 서서 손바닥을 펴 보자
부딪쳐 터진 상흔 물살에 씻어 내고
이제는 가슴 열어 이웃하는 저 틈새로
작아도 거침없이 넓게 가는 바람소리 들어보자
삶은 늘 즐겁고 기쁜 일만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고,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울컥울컥 화가 치밀 때도 있고 시름에 겨울 때도 있다. 인간이기에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화자는 화가 치밀 때, 시름에 겨울 때 '강가에 나가보자'고 한다. 그곳에 가면 올망졸망하게 모여 사는 자갈을 만날 수 있고, 오랜 세월을 다듬고 깎이어 모나지 않고 둥글어진 자갈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건 바로 제 살을 깎아내는 아픔 후에 얻은 평화이다. 그 자갈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움켜쥐었던 손바닥을 가만히 펴며 응어리진 마음의 울화와 근심을 풀어보자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부딪치며 얻는 상처 물살에 씻어내고 이웃해 앉는 자갈들처럼 그렇게 거침없이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들어보는 여유를 갖자고 화자는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2004년 6월 28일>
예송리 해변에서
김 민 정
돌 구르는 밤의 저쪽
퍼덕이는 검은 비늘
등솔기며 머릿결에
청청히 내린 별빛
저마다 아픈 보석으로
이 한 밤을 대낀다
낙지회 한 접시에
먼 바다가 살아오고
맥주 한 잔이면
적막도 넘치느니
물새는 벼랑에 자고
어화등(漁火燈)이 떨고 있다
당신의 말씀 이후
살이 붙고 피가 돌아
삭망의 별빛 속에
드러나는 능선이며
때로는 샛별 하나쯤
띄울 줄도 아는 바다
가슴속을 두드리며
깨어나는 말씀들이
맷돌에 갈린 듯이
내 사랑에 앙금지면
바다도 고운 사랑 앞에
설레이며 누웠다
아무도 없고, 달빛조차 없는 밤바다 앞에 그대 서 본 일이 있는가. 먼 하늘에 별빛만이 반짝이는 밤, 우주의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 끊임없이 철썩이는 파도소리…. 그 파도소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몇 천 년, 아니 몇 만 년 전부터 철썩였을 것이고, 우리가 가고 없는 몇 천 년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자연에 비해 백 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을 살다가는 인간은 자연의 영원성 앞에 서면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예송리 해변'은 보길도에 있다. 소나무가 예술적으로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시조시인 윤선도가 유배생활을 하면서 어부사시사를 지은 곳이다. 그 해변의 특이한 점은 검은 자갈해변이라는 것이다. 작고 고운 자갈이 깔려있는 해변에선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갈 때마다 ‘짜르륵짜르륵'하고 그곳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파도소리를 낸다. 1984년에 쓴 이 글은 ‘시조문학25주년기념 지상백일장 장원(1985)' 작품으로 필자의 등단작품이기도 하다. <2004년 7월 5일>
남도 가는 길
김 준
금만경 뒤로 하고 정이 앞서 가네
한 자락 청산이 기우뚱 춤을 추네
가로수 행렬을 타고 파도로 길을 넘네
삼복 허허롭다 비껴간 자리마다
은혜의 빛을 받아 저리도 자족한 삶
칠백 리 설레는 길이 초록으로 나를 잡네
외진골 초옥마다 바람 자는 저 물소리
천심 강심 불러놓고 새소리 돌을 쪼네
저 건너 설레는 놀이 나를 앞서 지르네
‘남도에 가는 길'은 푸른 여름의 길이다. 정이 앞서 달려가는 길, 청산도 즐거운가 기우뚱 춤을 추고, 가로수는 파도처럼 길을 넘는 즐거운 여행길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화자는 즐거운 여행길에 올라 남도로 가고 있는 것이다. 허허로움을 달래며 자족할 줄 아는 삶, 그러한 가운데 온통 초록으로 물결지는 칠백리 길이 화자를 설레게 한다. 초가집들이 있는 평화로운 마을은 바람도 없는 고요한 물소리와 새소리만 들릴 뿐이다. 또한 하루가 저물어 설레는 놀이 나를 질러 앞서 가고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하루해가 끝나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작품은 남도 칠백 리를 가면서 보고 느낀 여행의 설레임과 푸르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경을 보면서 시인의 마음도 고요하고 평화롭고 한가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2004년 7월 12일>
저런 세상도 있다
김 홍 일
떼새의 자유를 보라
저들의 저 푸른 하늘을 보라
어느 한 곳 스며들 틈도 없는 군무의 축제
찬란한 생의 절정을 보라
단 하나의 날개도 서로 꺽지 않으며
노래가 있고 사랑이 있는 저 아름다운
화합의 장관을 보라
저기엔
탐욕도 교만도 미움도 없다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갈등도
먹고 먹히는 숨막히는 긴박도 없다
밟으려하지 않으며 이기려하지 않으며
잘남도 못남도 없는 평등의 세상
거짓도 허영도 없는 진실의 세상
오직
기쁨에 넘치는 평화가 있다
아, 저런 세상도 있다!
하늘을 나는 떼새를 보며 ‘단 하나의 날개도 서로 꺽지 않으며/ 노래가 있고 사랑이 있는' 아름다운 화합의 인간세계를 화자는 꿈꾸고 있다. 떼새들이 누리는 ‘탐욕, 교만, 미움, 갈등, 긴박이 없는 세상', ‘잘남도 못남도 없는 평등의 세상/ 거짓도 허영도 없는 진실의 세상'을 화자는 찬미하고 부러워하고 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백낙천(772-846)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교졸현우상시비(巧拙賢愚相是非): 잘났다 못났다 영악하다 어리석다 서로 시비를 가리지만
하여일취진망기(何如一醉盡忘機): 흠뻑 취하여 속세의 간계 잊음이 어떠하리
군지천지중관책(君知天地中寬笮): 그대 아는가? 천지는 끝없이 넓으면서도 좁아
조악난황각자비(鵰鶚鸞皇各自飛): 사나운 보라매와 상스러운 봉황이 저마다 날 수 있다네.
인간의 시비나 갈등은 부질없는 욕망에서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에서도 서로 상하지 않고 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조금씩 욕심을 줄이고 서로 도우며 공존공영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04년 7월 19일>
대숲에 사는 바람
임 종 찬
대숲에 사는 바람은
사서삼경을 다 외는지
있는 듯 없는 듯이
살은 듯 죽은 듯이
세월에 나부끼면서
걱정없이 살더라
왕대밭에 왕대바람
퉁소대롱을 빠져나와
동구밖 미루나무
까치알을 굴리더니
어느새 대숲에 와서
살 비비며 살더라
세월이 심심하면
대숲으로 갈 일이다
대숲에 사는 바람
걱정없는 흔들림을
우리도 조금은 배워
몸 흔들며 살 일이다
대숲에 사는 바람은 늘 여유가 있다. 인간들처럼 공부에 쫓기지 않고 이미 사서삼경도 다 외워 넉넉하게 세월에 나부끼면서 있다. 바람은 왕대밭에 가면 왕대와 어울리고 또 어느새 빠져나와 동구밖 미루나무 까치알을 굴리더니 또 대숲에 와서는 대와 살 비비며 살고 있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바람은 아무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그저 넉넉하고 자유롭고 평화롭다.
셋째 수에 오면 바람은 남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흔들고 있다. 대숲의 바람소리, 그 소소한 바람소리는 바로 우리들 삶의 여유로움이다. 스스로를 흔들면서도 꼿꼿하게 서는 대나무, 그리고 그 대와 어울리며 대숲소리를 만들어 내는 바람의 여유와 조화, 자연에게서 인간은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2004년 7월 26일>
지리산 연가
김 민 정
산이 산을 부르고
인간이 인간을 부르는
넉넉한 그대 품에
안기고 안기는 건
구름뿐 아니었더라
바람뿐이 아니더라
산이 높아 골도 깊은
그대 자락을 도는 안개
무성한 푸른 숨결
물소리로 와 앉으면
하늘엔 별들이 뜨고
지상엔 사랑 뜨네
사무침을 불러 모아
우렁우렁 산이 울면
한도 풀고 설움도 풀어
섬진강을 흘려 놓는
지리산 자락자락을
휘감는 그대 사랑
설악산이 기골이 살아나는 남성적인 산이라면 지리산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안는 여성적인 산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에 걸쳐있는 지리산. 몇 년 전 여름 천왕봉을 올랐을 때 경상도 쪽은 해가 나는 청명한 날씨인데 전라도 쪽은 짙은 안개가 쌓인 흐린 날씨라 그 대조가 너무나 신비하게 느껴진 적이 있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날씨가 완전히 달랐다.
지리산을 오르면서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청준의 ‘서편제’라는 소설과 김지하의 ‘지리산’이란 시와 또 영화 ‘남부군’을 생각했다. 그리고 원래이름이 ‘직전리’인데 육이오 때의 동족 상잔이후 ‘피아골’로 불린다는 한맺힌 골짜기도 생각했다. ‘동학혁명’, ‘여순반란’, ‘빨치산’, ‘육이오’ 등의 단어와 함께 생각나는 산, 수많은 우리의 역사와 문학 속에 등장하는 지리산은 기쁨보다 슬픔과 한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근래 우리역사의 격동기와 운명을 함께 한 산이 바로 지리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웅장하고 넉넉하여 모든 것을 포용할 듯한 산, 그 속에서 인간도 시비를 가리기 전에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타이르며 앉아있는 듯한 산이 바로 지리산이다. <2004년 8월 2일>
바다와 바이올린 연주회
정 근 옥
동해바다가 잔물결을 흔든다
하얀 드레스에 아침 햇살이 넘치며
잔잔히 흘러가는 물결이 일어선다
뱃고동소리가 울리면서
고도를 향해 달리던 배는
더욱 속도를 올리며 갈매기 소리를 낸다
바이올린의 검은 선 위에
열정의 활이 말을 타고 달린다
밀려오던 하얀 포말이
수억 년 버텨온 바닷가의 바위를 뒤흔든다
오, 히말라야의 눈사태…
저 하얀 손이 달빛을 흔들며
우주를 빚어내는 천지창조의 소리
이 시는 아침 동해바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으며, 파도를 상징한 시어들이 다양하며 파도에서 연상하는 상상력이 아주 빼어난 시다. 지금 화자는 아침 동해 바닷가에서 잔잔한 바다 위로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있다. 아침바다의 파도는 막 떠오른 아침햇살을 받아 하얀 드레스처럼 깨끗하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고도를 향해 달리는 배는 더욱 속도를 올리며 갈매기 소리를 내어 갈매기가 바다 위를 날 듯 바다 위를 달리고 있다.
마치 바이올린의 검은 선 위에 열정의 활이 달리며 연주하듯 그렇게 포말은 밀려와 바닷가의 바위를 흔들고….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또다시 히말라야의 눈사태를 연상시키고 있다. 또 파도는 달빛을 흔드는 하얀 손이 되고 우주를 빚어내는 신비한 천지창조의 소리가 되고 있다. 미의 여신 비너스가 바다에서 탄생되듯이, 예술적 감각을 빚어내는 바다의 파도형상을 다양하게 나타내고 있다. <2004년 8월 9일>
외암리 시편(詩篇)
유 권 재
누가 지난 역사(歷史)를 기록이라 하였나요
어제라는 수레위에 오늘이 실려가는
아산의 설화산자락 외암리에 와보세요
구태여 기억하려 꺼내보려 하지 않는
다락에 쌓아 놓은 좀먹은 비망록처럼
아득히 지난 내력을 잊은 듯이 살다가
세상의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
오래 전 그리움이 간절하게 샘솟듯이
소진한 기억 속으로 향수가 스며들면
저물녘 산마루의 자욱한 안개 아래
고가(古家)의 밥 짓는 연기 밀어처럼 속삭이는
한편의 과거 속으로 길을 찾아 나서 봐요
충청도 아산의 설화산자락 외암리를 시인은 읊고 있다. 세월은 흘러가고 흘러간 과거의 기록들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을 기억하려고도 꺼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제가 있어 오늘이 존재함을 우리는 잊은 듯이 살고 있다. 그러다가 현실이 지루해질 때, 과거로의 여행이 그리울 때, 아니 과거에 대한 향수가 스며들 때 아직도 옛 향수를 그대로 간직한 이곳 외암리를 찾아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 외암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시인은 마지막 수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수는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저문 황혼녘 산마루엔 자욱한 안개가 끼고 고가(古家)에선 나무를 때어 밥 짓는 연기가 밀어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한 편의 영화 같은 외암리의 고즈넉한 저녁 풍경이 고향집을 보듯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 작품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좀먹은 비망록’, 밥 짓은 연기를 ‘밀어처럼 속삭이는’ 등의 참신한 표현이 돋보이며, 작품 전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귀결되고 있다. <2004년 8월 16일>
그루터기
-정(情)-
이 인 자
세월을 얹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분신처럼 남겨진 눈 같은 사랑이여!
굽은 뼈 마디마디에 빈 바람을 품었네
육남매 중 고명딸 말없이 품에 안고
하늘, 별, 풀꽃이름 하나하나 불러주며
나직이 노래하시던 고운 눈빛 닮고 파
잔가지 부러질까 허리 굽은 나무처럼
저승꽃 핀 얼굴로 눈물 감춘 애틋한 맘
후미진 골목길에서 돌아보고 또 보고
이 시는 아버지에 대한 정을 읊고 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시집을 가서 살아도 부모님의 마음에 늘 걸리는 것이 자식이다. 화자는 아버지를 보며 자식들 걱정으로 늘 편할 날이 없는 부모의 마음을 애틋해 하고 있다. 문득 그 아버지를 바라보니 연륜이 쌓인 머리는 눈같이 희어지셨고, 굽은 뼈 마디마디엔 빈 바람만 품고 있는 듯 했다.
자식들 키우고 걱정하느라 모든 영양분도 빠져나가고 앙상한 뼈마디만 간직하신 모습을 화자는 안쓰러워하고 있다. 하늘, 별, 풀꽃이름을 알려주시며 시인이 될 수 있도록 자양분을 심어주시던 사랑이 담긴 고운 눈빛의 아버지, 자기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고 싶어 하듯 화자는 그런 아버지의 눈빛을 닮고 싶어 한다.
어쩌다 자식이 찾아뵙고 돌아올 때 굽은 허리로, 저승꽃 핀 얼굴로 눈물 감추시며 골목까지 배웅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지 못해 보고 또 돌아보는 딸의 심정을 이 시에서는 잘 표현하고 있다. 늙으신 아버님에 대한 애틋한 시인의 정이 잘 나타나는 시다. <2004년 8월 23일>
그루터기[情]
나
촉석루에 올라
서 공 식
누대를 휘 감도는 매미 소리 잦아들면
마침내 붉은 석류 타는 가슴 터트리고
사백년 거슬러 올라 대 숲으로 서는 충절
풋바람 끌어안은 강물도 숨을 죽여
청청한 하늘조차 물 깊이로 잠잠할 때
선홍빛 자귀꽃 하나 의암되어 솟았다
다시금 이 자리는 능소화 피어나고
푸른 솔 가지끝에 새순 돋는 매미 소리
도도히 물굽이 치며 뻗어가는 저 남강
진주 촉석루에 서면 역사를 굽이 돌아흐르는 남강이 한 눈에 보인다. 일찍이 변영로는 진주의 의기 ‘논개’를 기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이하 생략>
화자는 촉석루에 올라 대숲을 바라보며 석류 가슴처럼 붉은 사 백년 전의 논개의 충절을 새겨보고 있다. 강물도 숨을 죽이고 하늘도 잠잠할 때 선홍빛 자귀꽃은 의암으로 솟고 있다. 왜장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든 지름 2미터도 안되는 바위인 의암, 이 작품에서 의암은 논개(선홍빛 자귀꽃)로 상징되어 나타난다. 셋째 수에서는 논개의 마음은 능소화꽃으로 나타난다.
붉은 석류, 선홍빛 자귀꽃, 능소화 등은 모두 논개의 충절을 상징하는 시어이며, 이러한 역사 속에 강물은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이 시의 화자는 말하고 있다. <2004년 8월 30일>
가을편지
김 민 정
부드럽게 쏟아지는
청량한 햇살 아래
가을꽃처럼 소슬하게
그리움이 피어나면
오, 맑은
그대 영혼 같은
가을편지 오실까
가을햇살 나뭇잎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산들한 가을바람
호젓하게 불어오면
오, 문득
그리운 고향 같은
가을편지 오실까
물결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 들려오고
내 사유의 뜨락에도
하얀 달빛 밤새 내리는
오, 푸른
종소리 같은
그대편지 오실까
아침 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고 귀뚜라미도 밤새 울어 가을임을 알리고 있다. 햇살은 부드럽게 쏟아지고 그 맑은 햇살을 받으며 오곡이 익어가고 있다. 한 차례의 태풍 메기가 우리의 들판과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긴 했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오고 세월 또한 거침없이 흐르고 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며 피고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날아 마냥 상쾌한 계절 가을이 오면 그리운 사람의 소식이 기다려지고 편지가 기다려진다.
맑은 그대 영혼 같은, 고향 같은 포근함과 안식을 주고 내 영혼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푸른 종소리 같은 편지, 사랑하는 그대의 편지가 기다려지는 계절, 가을이다.<2004년 9월 6일>
낚시 白書
김 광 수
물안개 사물사물
고요를 짜는 물가에서
낚대 드리우고
종일 찌나 바라보다
시라도
한 수 건지면
그 또한 보람 아니랴
일상사 무거운 사념
구름 끝에 실어 두고
수초에 매달려 놀던
바람도 잠 든 한 낮
한 생각
죄 풀어 놓고
물에 나를 비춰 본다
낚아 챈 물고기 몇 수
수심으로 돌려보내고
기다림도 설렘도 접고
하루해를 다 거둬도
내 안에
푸득거리는
월척꿈은 놓지 못하네
중국 주나라 때의 강태공은 천하를 다스리고 싶다는 큰 꿈을 간직한 채 미끼도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향의 강가에 앉아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자신이 나라를 위해 펼칠 꿈을 이리저리 설계해 보곤 했다. 마침내 그는 주나라 임금인 서백을 만나게 되고, 그 동안 마음속으로 설계해 왔던 병법이나 인재등용법 등의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탁월하게 왕을 보필하였다. 그리하여 ‘스승’의 의미가 담긴 ‘태공’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고, 그가 쓴 ‘육도’라는 책은 그 후 정치가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강태공이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았듯이 시인은 시를 낚고 있는 것일까. 일상사 무거운 사념을 벗어놓고 시를 생각하고 시를 건져 올리고 있는 것일까. 화자인 시인자신은 낚은 고기들을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고 기다림도 설레임도 접고 하루해를 거두면서도 좋은 시를 낚고 싶은 월척의 꿈은 저버리지 못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고 사랑받을 수 있는 시, 월척 같은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욕망, 하루해가 저물어 가도 저물 줄 모르는 시인의 꿈은 아름답다. <2004년 9월 13일>
가을 산책
김 석 철
수줍은 코스모스
서리 아침 들국화도
눈 시린 쪽빛 하늘
머리 위에 받쳐 이고
저마다
저린 사연을
그려내고 있나니
울밑의 귀뚜라미
저문 뜨락 낙엽들도
계절의 깊은 뜻을
온몸으로 그려내며
밤새껏
푸른 달빛에
부대끼고 있나니
이 세상에 쉽게 피는 꽃은 없다. 길가의 코스모스 꽃 한 송이도, 서리를 맞으며 피는 들국화도 여름의 긴긴 해를 견디고 비바람 폭풍우를 견뎌낸 후에야 해맑은 꽃을 피운다. 결국 세상에는 함부로 된 것은 없고, 의미 없이 피는 꽃도 없다.
저마다 저린 사연들을 가지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흔하게 울어대는 울밑의 귀뚜라미도 우는 사연이 있고, 뜨락의 떨어진 한 잎 낙엽도 온몸으로 뜨겁게 자기의 계절을 살아왔을 것이며, 가을이면 떨어져야 하는 섭리를 깨닫고 있을 것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크든 작든 저마다의 사연으로 흔들리며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만물의 살아가는 모습이며, 화자는 이 작품을 통해 그러한 모습을 관조하고 있다. <2004년 9월 20일>
가을에는
김 민 정
나뭇잎이 떨어지면
파문도 그려내고
바람 부는 날에는
잔물결도 만들면서
가을엔 깊은 산 속의
호수가 되고 싶다
버려지고 잊혀지는
우리들의 이야기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출렁이는 삶의 무늬
물결에 지치지 않는
씻고 씻긴 삶이고 싶다
테 두르지 않아 좋은
마음 조릴 것도 없는
낯익어 향수 같은
투명한 저녁노을
그렇게 하루를 닫는
조용한 삶이고 싶다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고 했던가. 한 개인의 역사도 ‘도전과 응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젊은 날은 끊임없는 용기로 인생에 도전하고 또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응전도 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의 자세가 인생을 아름답게, 또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으로 만든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쯤에는 한 발작쯤 떨어져서 인생을 관조하며 살아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 무엇에도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않고, 지나치게 방관하지 않는 중용의 자세로, 관조하고 이해하고 포용하며 살아가는 삶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지혜이다.
첫째 수에서는 나뭇잎이 떨어지면 파문도 그려내고 바람 부는 날에는 잔물결도 만들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호수처럼 그렇게 잔잔하게 모든 것을 포용하며 살아가는 삶이고 싶은 마음을, 둘째 수에서는 끊임없이 출렁이며 반복되는 우리들 삶의 이야기를 말갛게 씻어내고 씻어내면서도 지치지 않는 맑은 삶의 모습을, 셋째 수에서는 누구에게도 격의 없고 부담감 주지 않아 낯익어 그리움 같은 밝고도 고운 저녁노을 같은 삶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해 보았다. <2004년 10월 4일>
아차산성
원 용 문
천년 전 기왓장들이
다시 살아 눈빛 주고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다람쥐가 넘나든다
아직도
긴장감 도네
바람마저 숨죽였네
저 건너 풍납토성엔
백제군의 아우성 소리
그 앞을 가로 지르는
한강물은 유유하다
온달이
마셨을 옹달샘에
내려앉은 햇살이여
취사병의 밥 짓는 연기
산성 위를 뒤덮고
평강공주 통곡하며
쓰러졌을 그 자리에
군사들
도열해 서듯
거목들만 버텨 섰다
아차산은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전설이 있는 산이다. 고구려의 울보공주, 그래서 농담처럼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아버지 평강왕(평원왕)의 말을 들으면서 크던 그녀는 혼기에 이르러 바보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우겨 궁전에서 쫓겨나게 된다. 평강공주는 마침내 숯구이 총각 바보온달이 산다는 마을에 도착하여 그를 만나 함께 살면서 그를 훌륭한 장수로 키워내고 아버지 평강왕에게도 온달은 부마로 인정을 받게 된다.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여 한강유역 탈환을 위한 군사의 출정이 있자 그는 자원하여 참전하였으나 아단성(지금의 아차산성)전투에서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죽은 그의 시신이 움직이지 않아 평강공주가 와서 그의 혼을 달래자 그때서야 시신은 움직였다고 한다.
이 시의 화자는 한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역사 앞에서 죽어서도 평강공주를 사랑하고 그의 말을 믿고 따랐던 온달의 사랑, 충직함, 성실함과 또 그러한 지아비의 죽음 앞에서 슬퍼했을 평강공주를 그리고 있다. 역사상 실존인물을 다루었던 역사설화이며 인물설화인 바보온달설화가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2004년 10월 11일>
고디 줍기
박 우 현
고디를 줍습니다
고디 줍기야 다리품만 있으면 되지만
그래도 원칙은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엉덩이를 높이고
눈은 가능하면 물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안그러면 놓치는 게 더 많지요
다음에는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안그러면 물이 흐려져 보이지 않지요
여럿이서 주울 때는
나란히 서서 한 걸음씩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안그러면 뒷사람은 공치지요
그리고 작은 것은 절대로 잡으면 안 됩니다
안그러면 내년에는 쓸쓸한 강이 되겠지요
고디가 사는 깨끗한 물에는
꺽지, 동사리, 밀어 같은 물고기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함께 어울려 사는 그들을 보면서
즐거움을 얻는 것도 어떤 원칙이 될 수 있을지요
고디란 경상도 사투리로 ‘다슬기’라고 한다.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고디’. 이 시의 화자는 고디줍기에도 원칙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 속의 화자는 평범한 내용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인생의 교훈을 전해 주고 있다. 하찮은 고디 하나 줍는데도 온 신경을 집중하여 진지하게 해야 하며, 물을 흐리지 않고 잘 볼 수 있도록 아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지혜가 필요하며, 여럿이 주울 때는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고 하여 공존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으며, 작은 것을 잡으면 씨가 말라 내년에는 쓸쓸한 강이 된다고 하여 생태보존을 강조하고 있다.
또 맑은 물에만 산다는 고기들이 고디와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보며 즐거움을 얻는 것도 ‘어떤 원칙이 될 수 있을지요’라고 하며 환경보존, 생태보존이 결국 우리를 즐겁게 하며 그것을 보존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화자는 이 시에서 강조하고 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은 결국 인간이 해야 할 일이며, 자연을 보호하고 보존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행복하고 즐겁게 하는 길임을 이 시의 화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2004년 10월 18일>
추억의 세레나데
김 민 정
들여다 보노라면
속생각 꽃처럼 붉네
해일처럼 넘쳐나던
청춘의 날들, 푸른 합창
산들도
진초록으로
거기 둘러 앉았네
후미진 골짝에도
소리내어 흐르던 물
맥짚어 오는 숨결
왁자한 초록빛 바다
원색의
고향하늘이
거기 펼쳐 있었네
형광등 불빛 아래
촉수 높은 귀를 세우면
간간이 들려오는
솔바람, 사랑의 밀어
청춘을
휘몰아 가네
휘파람, 저 휘파람은
지나고 뒤돌아보는 추억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추억의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지난 젊은 날들을 돌이켜보면 거기엔 무지개 같은 아름다운 꿈이 있고, 사랑이 있고, 낭만이 있다. 대학 졸업여행의 사진 한 장이 불러온 추억! 우리는 대학4년 때 계룡산의 마곡사, 갑사, 동학사로 졸업 여행을 떠났었고, 계속 떠들고 웃으며 계룡산 능선을 넘으며 곳곳에서 사진을 찍곤 했었다. 사진 속의 과친구들은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싱그러움이 가득 넘쳐 힘줄처럼 푸르게 돋아나는 젊음, 그것은 푸르게 푸르게 넘치는 해일이었다. 그것은 하늘과 땅과 신록과 조화된 청춘의 합창이고, 교향곡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활짝 웃는 푸른 웃음만이 존재하는 고향의 다정하고 편안한 하늘이었다. 꽃처럼 아름답던 날들, 어디선가 그때의 휘파람 소리가 싱그럽게 들려온다. <2004년 11월 8일>
경춘선·1
정 남 채
선연한 새벽안개 가르며 섬이 뜬다
북한강 허리 감아올린 비둘기호 등을 따라
물새떼 눕는 수평으로
기지개 켜는 아침
왁자지껄 웃음 묻힌 지폐 한 장으로
김밥 한 줄, 달걀 한 줄 비우던 유년의 시간
백양리(白楊里) 덜커덩 덜커덩
무동 태워 보낸다
종착지 알리는 방송, 졸던 아이 눈 뜬다
창틀 앉은 고추잠자리 아이 눈과 마주친다
눈알을 서로 굴리다
자릴 뜨지 못했다
경춘선을 타고 가는 기차여행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는 시다.
첫째 수에서는 경춘선을 타고 가며 바라보는 북한강의 아침 모습이다. 새벽안개 속에 섬은 뜨고, 기찻길과 함께 수평으로 다가오는 북한강의 안개 낀 아침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고 하여 아름다운 아침강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기차간 안에서의 어린 시절의 풍경이다. 왁자지껄한 웃음과 함께 김밥과 달걀을 사 먹으며 즐겁던 시간, 백양리를 지나며 아름다운 지난날을 추억하고 있다. 셋째 수에 오면 기차여행의 종착지에 도착한 화자의 어린 시절, 아이가 등장한다. 그 아이는 창틀에 앉은 고추잠자리를 발견하게 되고 고추잠자리와 눈맞추다가 내려야 하는 것도 잊고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천진한 동심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화자는 지금 경춘선을 타고 가며 현재의 북한강 아침 모습을 보며, 또 경춘선을 탔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여 동심이 살아나고 있는 아름다운 시이다. <2004년 11월 15일>
민족
박 영 교
출렁이는 강물을 보면
푸른 말이 살아 오릅니다
바닥에 깔려 있는
돌과 자갈 모래들이
짓눌린
역사만큼이나
살아있는 긴 숨결
우리네 손목에 뛰는
혈맥을 짚어 가면
가슴마다 푸득이는
제 여끔 찬 할 말들이
강바람
쌓인 울분 쓸어
온몸 앓아 흐릅니다
캄캄한 곳 어디서나
환한 당신의 얼굴 모습
이 어둠 다 지새고 나면
우린 한 줄기 여명의 밧줄
하늘 땅
하나로 녹이는
폭이 깊은 울림의 강
끊임없이 출렁이며 강물이 흘러가듯 우리 민족의 역사도 끊임없이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음을 이 시에서는 말하고 있다. 흘러가는 강물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돌과 자갈 모래들의 삶 만큼이나 긴 숨결을 지니며 살고 있는 우리 민족. 민족의 역사 앞에서 우리는 저마다 한도
많고 하고 싶은 말들, 쌓인 울분의 말도 많을 것이다. 많은 한과 울분들을 쓸어안고 가슴을 앓으면서도 강물은 흐르고 있다.
그러나 아픔이 많은 역사 앞에서도 항상 환하고 밝은 우리 민족의 모습이다. 시련들을 슬기롭게 극복하며 헤쳐 아픔의 역사, 어둠의 역사를 지새고 나면 우리 민족 앞에 펼쳐질 여명의 밧줄같이 튼튼하고 희망찬 시간이 올 것과 하늘과 땅이 하나로 되듯 어우러지고 함께하는 민족 역사의 큰 강이 흐를 것을 이 시의 화자는 확신하고 있다. <2004년 11월 22일>
서울 1
김 민 정
삼청동 뒤로 하고
고요로 나앉으면
비원은 서글픈 역사 허기진 인생 같고
소슬한 바람 너머로 서로 포개 잠을 잔다
궁전 앞 깊은 겨울
빈가지에 걸린 바람
하늘 향해 손을 젓는 회초린 양 아픈 기도
드러난 맨살의 땅엔 눈발만이 서성이고
매연에 절었어도
별리(別離)일 수 없는 서울
도심의 운율 위에 묻혀 버린 숱한 사연
울분도 상처처럼은 안고 도는 세월이다
창경궁과 비원 숲이 내려다보이는 삼청동 뒤 와룡산.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비원은 비운의 명성왕후를 생각하게 하는 옛 궁전의 후원뜰이다. 궁전 앞에 서 있는 겨울나무조차 아픔으로 느껴지는 삭막한 도심. 그 속에서 서민들은 매연에 절으며 수많은 사연들을 묻으며 고단한 하루를 살고 있지만 결코 이별할 수 없는 애환의 도시 서울, 울분까지도 상처인양 숙명인양 감싸안으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리라. <2004년 12월 6일>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이 청 화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깊은 산 깊은 골에 산꽃처럼 피워 둘까
다섯 개 구멍을 뚫어 피리로나 불어 볼까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밤 뜨락 그대 날 찾아 풀벌레를 울려 놔도
난 고작 못물을 돌며 돌맹이나 던질밖에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씨앗처럼 떨구어서 바윗결에 심어두면
이 바위 금방 신령해 무지개가 돋아날까
불교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한다는 말이다. 때로 입으로 하는 말보다 마음으로 하는 말이 더 오래갈 수도 있고 더 깊을 수도 있다. 말로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도 있고, 또 언외언(言外言)의 경우도 있다. 진심어린 마음을 담은 행동은 말보다 더 진실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도 하다. 이 시에서 화자는 차마 말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2004년 12월 13일>
시의 향기-겨울나무<정근옥>
2004. 12. 20
한줄금 바람이 강물의 심장을 흔들다 예린 칼날로 거꾸로 걸었던 세월의 껍질을 일으켜 세우는데 강 언덕 겨울나무는 혼자서 큰 울음을 운다 얼어붙은 땅덩이가 갈라지면서 빛이 솟구치는 큰 울음을 운다 아픔의 껍질을 가르고 태어난 금빛 잎들 다 떨구고 미래를 향해 새로 태어나야 할 조용한 기다림의 눈 살포시 눈을 떠라 빛의 새여! 저 눈엔 우리들이 버리지 못하는 새벽의 못박힌 사랑이 있다 차가운 가슴속에 아직도 싹트지 않은 사랑이 있다 잎도 다 떨구고 찬 바람 속에 의연히 서 있는 겨울나무. 그것은 새봄이 되면 다시 싹틔울 것을 기다리는 조용한 눈을 지니고 있다. 봄이 오면 다시 눈을 틔울 희망과 우리들이 버리지 못하는 사랑, 아직도 가슴에만 간직하고 있는 사랑을 지닌 겨울나무는 새봄이 오면 더 아름답고 튼실한 새 눈을 틔우고 사랑을 키울 것이다. <시풀이:김민정-시인·문학박사·서울 장평중 교사 sijokm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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