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연재시 모음 제1집>
시의 향기
엮음 : 김민정
함께 가는 길
긴 길이면 더 좋겠다
너와 함께 가는 길은
만남과 이별 잦은
우리들의 생애에서
아직도
익숙지 못해
숨 고르지 못한 나는
머 리 말
그동안 2년(2004~2005)에 걸쳐 국방일보에 연재한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게 되었다. 다행히 <시의 향기>에 대한 인기가 있어 올해도 계속 연재를 하게 된 것에 대해 국방일보와 독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2년 동안 연재한 분량이 90편이 넘어 일단 정리를 해 놓을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하려는 것이다.
처음에는 2주에 한 번은 자작시조, 한 번은 자유시를 소개했기 때문에 자작시조가 많이 소개되었다. 2004년 후반기에 오면서 자작시조 소개 횟수를 줄이고 다른 시인들의 작품을 많이 소개하고자 노력하였다. 계절별로 편집할까 하다가 그냥 신문에 연재한 순서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순서를 정하였고 편의상 4부로 나누었다.
또한 민족의 고유한 형식의 시인데도 사람들이 잘 인식을 못하는 듯하여 후반기에 들어서는 시조를 가능하면 많이 소개하려고 노력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전통으로 전해오는, 그 오랜 세월 형식을 유지해온 시조에 대해 애정을 갖고 그것이 우리의 고유 문학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짧게 압축한 시로서의 묘미를 우리의 시조는 강하게 갖고 있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자기정체성, 자기주체성이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임을 오늘도 나는 믿는다.
나는 또한 자유시도 사랑한다. 인간의 사유는 늘 자유롭기를 원한다. 우리가 권력이나 재력을 욕망하는 것도 억압으로부터,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높은 지적인 사고력을 추구하는 문학인이라면 의식과 행동에서 자유롭기를 원하고, 문학에서도 내용이나 형식에서 자유롭기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의 고유 정형시인 시조를 선택하여 쓰든, 형식의 제약에서 벗어난 자유시를 쓰든 그것은 시인 자신이 판단해서 할 일이다.
그동안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아 1권의 시집으로 묶을 수 있어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시를 게재하게 해 주신 시인님들께 감사하며, 지면을 할애해 주신 국방일보에도 감사하며 출판을 맡아주신 고요아침에도 감사한다.
2006. 01. 15.
宇 玄 김 민 정
차 례
제1부 (2004. 1. 1 ~ 2004. 6. 30)
겨울편지
바람의 숨결
선묘의 사랑
명중시켜라
백로떼 날아오르는
백담사 계곡吟
미인 폭포
동매(冬梅)를 보며
남해 봄빛
성자(聖者)처럼 나무는
봄이면
풀밭에 앉아 생을 관찰하다
봄날에
빗방울의 노래
진달래
봄꽃 지는 날
남산의 봄
봄날 강가에서
에밀레보다 푸른 사랑
그대 푸른 바람소리
우리 사랑은
바다에서
저 산에
강가에나 나가 보자
제2부 (2004. 7. 1 ~ 2004. 12. 31)
예송리 해변에서
남도 가는 길
저런 세상도 있다
대숲에 사는 바람
지리산 연가
바다와 바이올린 연주회
외암리 시편(詩篇)
그루터기
촉석루에 올라
가을편지
낚시 백서(白書)
가을 산책
가을에는
아차산성
고디 줍기
추억의 세레나데
경춘선․1
민족
서울․1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제3부 (2005. 1. 1 ~ 2005. 6. 30)
날개
오륙도
다시 수유리에서
동화댐 망향비 앞에서
섬
복수초에게
눈사람
바램
금강의 새벽숨소리
그리움
붓대로 피운 꽃
미시령고개
춘면(春眠)
행복의 나라
봄
사랑
해남에서 온 편지
마음 한 장
그대의 별이 되고 싶네
존재(1)
웃음
매봉산 딱따구리
파로호 가는 길
고향길
바리바리 비
제4부 (2005. 7. 1 ~ 2005. 12. 31)
정동진에서
독도는 한반도다
자랑스런 이등병
질경이
대청에 서면
비룡폭포
우포늪 환상곡
바람의 초상
어라연 계곡
입추날 연꽃을 보며
유민의 꽃
청계, 다시 흐르다
북한강
햇살들이 놀러 와서
감
낙동강
석류나무 한 그루
법주사
청어의 시
흔들림
돌․7
겨울 편지
김 민 정
속뼈까지 다 드러낸 내 그리움 닮아 있어
자꾸자꾸 쓸어주고픈 잎 다 진 가로수가
호호호 입김을 불며 다가서는 계절입니다
눈시울 붉혀오던 그 가을도 다 보내고
목숨의 결을 흔들며 깊은 삶을 탄주하는
한겨울 뿌리 깊은 나무 내 안에서 자랍니다
찬바람과 눈보라 속 쓸쓸함도 다 지우고
하늘 닮은 맑은 눈빛, 푸른 희망을 담아
연화대 부처님 같은 환한 미소 보냅니다
언 손을 녹여주고 시린 마음을 데워주고
모락모락 정담 피어날 한 잔의 차 그리워
찰랑한 기다림 속에 겨울 편지 씁니다
우리들의 눈빛 속에 출렁이는 기쁨 같은
사랑을 가득 담아 축복을 가득 담아
이 겨울 함박눈 같은 편지 띄워 봅니다
바람의 숨결
정 근 옥
달빛의 서슬에
마음을 베이어
쓰라린 가슴 잠들지 못하는 날
진흙 속에서
어여삐 고개를 내밀고
환한 미소를 짓는 연꽃같은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눈 내리던 샤갈의 마을에
눈이 그치고
바람만이 생생히 살아
눈부시어 잠들지 못하고 헤매일 때
별들이 눈을 뜨고
아름다운 이승의 강물을 내려다 볼 때
나는
강물처럼 흐르는
바람의 숨결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뜨거운 숨결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참으로 많은 상처를 받게 된다. 작은 말 한마디에도 깊은 상처를 받고, 반대로 작은 말 한마디에도 기쁨이 넘치는 것이 인간의 나약한 마음이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아니면 사랑에서 상처를 받아 괴로울 때 진흙탕 속에서조차 맑게 피는 환한 미소를 짓는 연꽃 같은 얼굴을 발견한 기쁨을 위 시는 노래하고 있다. 그리하여 강물처럼 편안히 순리처럼 흐르는 바람의 숨결, 그것은 곧 당신의 뜨거운 숨결임을 깨닫는다. 새로운 만남의 기쁨, 발견의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삶에서 인연의 중요성, 만남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2004년 1월 20일>
선묘(善妙)의 사랑
김 민 정
이승 인연 다하면 저승에서 만나고
저승 인연 다하면 이승에서 뵈올까요
선묘의 낮은 음성이 예서 다시 들리고
돌때 낀 사리탑 위 별빛 고운 밤이 앉고
빈 공간을 메아리져 돌아오는 네 생각에
때로는 나비가 되어 그리움을 파닥였지
일상의 와중 속에 감정의 선을 둘러
잔기침 한 번에도 푸른 깃을 사리더니
오늘은 천년의 무게로 내 곁에 와 앉는 그대
선묘(善妙)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당나라(중국)에서 공부할 때 그를 사모했던 중국의 아름다운 소녀다. 의상대사가 고국 신라로 돌아오게 되자 바닷가에서 그 배를 바라보다가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됐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상대사의 배를 보호해 무사히 신라에 닿게 했고 의상대사가 영주부석사에 터를 닦고 절을 세우려할 때 그곳의 요괴들이 방해하자 용이 바위를 들어올려 그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 때서야 의상대사는 선묘의 사랑을 깨닫고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로 짓고, 선묘의 사당을 지어주었다 한다. 지금도 영주 부석사에 가면 선묘의 사당이 있다.
이 작품은 선묘와 의상대사의 설화를 바탕으로 해 사랑의 순수성과 영원성을 추구해 본 시조다. 자기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사랑, 죽어서도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순수한 사랑만이 가능할 것이다.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 수 있는 영원한 사랑과 그리움은 인간이 추구하는 사랑의 참모습이다. <2004년 1월 27일>
명중시켜라
김 홍 일
화살이 되어라
바람을 일으키며 과녁 한가운데를 꿰뚫는
우레 같은 갈채가 되어라
삶은 이미
시위 떠난 팽팽한 가속도,
절정을 치달리는 긴박감으로
더욱 향기로운 음악이다
현을 당겨라
터질 듯 아름다운 음률 속으로
네 모든 춤을 던져라
먹이 쫓는
맹수의 눈빛처럼
바람 앞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무게가 되어라
우리의 삶은 이미 태어나면서 목표점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인지도 모른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 날아가 목표점에 꽂힐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삶의 목표를 잃고 허둥대기도 하고, 방향감각을 잃고 삶을 헤매기도 한다.
이 시에서는 삶의 목표를 향해, 삶의 절정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또 일으키며 가는 화살이야 말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음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아름답다고 보는 것이다. 또 그러한 목표를 위해 춤추듯 모든 정열을 쏟고, 목표물을 결코 놓치지 않는 맹수의 눈빛처럼 바람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굳건한 삶의 자세가 되기를 권하고 있다. <2004년 2월 3일>
백로떼 날아오르는
김 민 정
눈부시게
맑은 영혼
그 산에 살고 있나
그리움의
북소리
밤새 둥둥 울렸구나
이 아침
우아한 자태
날개 펴는 백로떼
단단히
물고 떠날
생각 하나 얻었는가
불현듯
그리워질
불씨 하나 묻었는가
이제 막
흰 날개 펴고
비상하는 겨울숲
겨울숲의 아름다움을 표현해 본 시조이다. 1년 전 출장을 가서 양평 한화 콘도에서 묵을 때, 어느 겨울 아침 일어나 창문을 열었더니 앞의 산들이 하얀 눈들로 덮여 있었다. 눈부시게 흰 백조떼들이 날개를 펴고 산을 온통 품고 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이제 막 그 우아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듯한 모습이었다. 그 때 본 순백의 눈 내린 겨울숲의 모습은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 늘 무엇인가 깨닫고 배우게 한다. 자연은 넉넉한 그 품안에 언제나 인간을 품어 인간을 겸허하게 만드는 영원한 스승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2004년 2월 10일>
백담사 계곡음(吟)
강 우 식
물은 초지일관이다
초지일관으로
단풍나무숲을 지나며
아 님은 갔습니다
탄식하기도 하고
어느 굽이에 이르러서는
울대목을 세워
정선아라리의 한 대목으로
포말 짓기도 한다
사람들아 사람들아
우리도 가진 것 한마음으로
끝을 보고자 한다면
생명의 물줄기로 농울지기로는
저러할진저
백담사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보고 읊은 시이다. 한용운 스님이 머물며 <님의 침묵> 시집을 탈고한 곳이 바로 백담사이다. 물은 항상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이 물의 속성이며 고이면 썩게 되어있다. 그 처음의 마음으로 계속 흘러가는 것이 물이라는 것이다. 단풍나무숲을 지나며 한용운의 시를 생각나게 하기도 하고, 어디에선가는 정선아라리의 서러운 느린 가락처럼 너울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들도 초지일관, 처음의 마음으로 끝까지 가고자 한다면 저 생명의 물줄기처럼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도 흐르며 순리로 농울져갈 일이라고 시인은 읊고 있다. <2004년 2월 17일>
미인 폭포
김 민 정
파열도
때로는
이리 벅찬 감격일까
생의 한 뼘
둘레서도
자라나는 사랑이듯
물보라
흩날리느니
수정보다 눈부셔라
신라적
유씨 가문
님 구하던 미녀는
세상의
짝 없는 미
하늘을 원망하며
한 송이
붉은 꽃 되어
폭포를 덮었다지
그 후론
미인 폭포라
이름되어 남았으니
만년을
살리자는
하늘의 속셈인게지
치마폭
닮은 폭포가
오늘따라 유난하다
미인 폭포는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심포리에 있어 일명 심포폭포(深浦暴布)라고도 하는 높이 50m인 아름다운 폭포이다. 미인 폭포의 유래는 신라시대 폭포 옆 높은 터에 사는 한 미녀가 혼기가 넘어도 자기에게 걸맞는 신랑감을 구하지 못해 비관하여 투신자살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태백시 통동(통리)에서 삼척시 가곡면으로 넘어가는 곳의 오봉산과 백병산 사이에 있다.
폭포는 오십천 상류에 해당하며, 하곡이 낮은 지대로 급격히 경사진 곳에 있다. 한국판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미인 폭포 주변의 협곡은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역암층으로 신생대 초의 심한 단층 작용 속에서 강물에 침식돼 270m 깊이로 패여 내려갔다. 협곡의 전체적인 색조가 붉은색을 띠는데 이것은 퇴적암들이 강물 속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건조한 기후조건으로 공기 중에서 노출된 채 산화되었기 때문이다. 주로 굵은 자갈로 된 역암과 모래로 이루어진 사암, 진흙으로 굳은 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발 700m 안팎의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안개나 구름이 끼는 날이 많으며, 이때 경치가 더욱 아름답고 신비하다. 전설에 의하면 일몰전과 일출전에 이 폭포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면 풍년이요, 찬바람이 불면 흉년을 예측했다고 한다. 그곳은 필자의 그리운 고향이기도 하다. <2004년 2월 24일>
동매(冬梅)를 보며
정 근 옥
눈발이 몰아치던
차가운 역사 앞에서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영화의 누더기를 다 벗어던지고
독한 향내를 홀로히 피워내는
동매(冬梅) 한 그루
흰 눈보다 깨끗하고
불길보다도 뜨거운
매월당 김시습의 눈빛
천 년의 역사를 꿰뚫어 본다
무엇이 선홍의 꽃잎을 피워 내고
무엇이 그 꽃잎을 갉아먹었는지를
겨울이 다 가기 전 차가운 기운 속에서 피는 매화, 차가운 눈과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자신의 소임을 다해 피는 꽃이 바로 매화다. 그래서 우리는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사람을 매화에 비유하기도 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매월당 김시습은 어려서는 신동으로, 정치에서는 생육신으로, 문학에서는 방외문학인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알려진 <금오신화>, 그리고 뛰어난 비유의 시들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는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사흘을 울었다 한다. 그 후 책을 불사르고 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깍고 방랑의 생활을 하였다. 수양은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그는 끝내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현실의 삭막한 정치판을 보면서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영화의 누더기를 다 벗어던지고' 방랑의 생활을 택했던, '흰 눈보다 깨끗하고/ 불길보다도 뜨거운' 김시습의 절개가 새삼 그리워지는 시이다. <2004년 3월 2일>
남해 봄빛
김 민 정
가지 마다
가득 돋은
푸른 봄을
보고 왔다
남해 통영
달아 공원
이른 봄의
청매 향기
마음에
실어온 봄빛
온 서울에
풀어놨다
2003년 2월 남해 통영을 다녀와서 쓴 단시조이다. 양평에서 결성된 모임 '양문회', 1년에 한 번 만남의 첫장소로 우리는 통영을 택했다. 2월의 통영바다는 깨끗했고, 아름다웠다. 통영은 많은 문인들의 고향이기도 하여 문향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 유치환, 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시조시인 김상옥, 김보한, 서우승, 음악가 윤이상, 그리고 멋진 유머와 재치로 우리 모임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시인이며, 소설가며, 소설평론가인 부산대 김정자 교수 등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의 통제영이 있던 곳이라 이름을 통영이라 하였는데 한 때 충무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다시 통영으로 쓰고 있다. 한려수도의 멋진 석양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유명한 달아 공원, 그 곳을 찾은 시간엔 날씨가 흐려 석양은 볼 수 없었지만, 자욱한 안개 속에 이른 봄의 은은한 청매 향기만은 가득히 전해져 왔다. 그 아름답고 알싸한 청매 향기, 가슴에 가득 담아와 서울에 풀어놓고 싶었다. <2004년 3월 9일>
성자(聖者)처럼 나무는
주 원 규
나무는, 더도 덜도 말고
생존에 꼭 필요한 물기만 빨아올린다
나무는, 고요히 바람 잔 날이나
가지가 휘는 바람 불 때에도
더도 덜도 말고 생존에 꼭 필요한
공기만 호흡한다
노란꽃은 노란꽃 피울 만큼만
호두나무는 호두알 익힐 만큼만
햇빛을 좇아 몸을 내어 민다
눈을 들면 눈 높이에서
내 혓바닥만한 나뭇잎들이
내 혓바닥보다 더 자유롭게
바람과 미어를 나누고 있다
전신으로 삶에 순응하며
나무는 공기와 진정으로 악수한다
나무는 햇살과 진정으로 입 맞춘다
나무는 토양과 진정으로 포옹한다
겨울 동구에
성자처럼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나무는 그에게 필요한 양만큼의 물만 빨아들이고, 그의 생존에 필요한 양만큼의 공기만 받아들이고, 또 그가 꽃 피우고 열매 익힐 양만큼의 햇빛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며 더 많이 차지하고 싶어하고, 더 많이 사랑받고 싶어하고,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싶어한다. 먹고 입고 살 만한데도 상대적 빈곤을 느끼고 좀더, 좀더 하고 욕심을 낸다.
그래서 늘 인간의 마음은 가난하고 허기가 진다. 물론 인간에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이 없다면 생활에 권태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현실의 자아에게 만족도 할 줄 알고 자기자신의 현재를 사랑할 줄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자기에게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도 당당히 성자처럼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를 보며 지나치게 욕심이 많은 우리의 삶을 한 번쯤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2004년 3월 16일>
봄이면
김 민 정
봄빛이
출렁이면
초록물결
반짝이면
너에게로
달릴 테야
사랑을
가득 안고
풋풋한
네 영혼 깊이
상록수를
심을 테야
봄! 봄은 약동의 계절이다. 모든 만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계절! 햇빛은 따사롭고 그 햇빛을 받으며 만물은 기지개를 켜고 새로움을 준비한다. 인생의 봄인 청춘. 헤르만 헷세의 '청춘은 아름다워라! 알알이 속속들이 아름다워라!'는 구절과 민태원의 수필 '청춘 예찬'이 생각나는 계절이 또한 봄이다.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계절, 세상이 봄빛으로 출렁이며 온통 초록으로 빛날 때 사랑하는 그대에게로 달리고 싶은 마음, 그리하여 사랑하는 그대의 영혼 깊은 곳에 영원히 변하지 않을 푸른 상록수 같은 사랑을 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해 본 단시조이다.
누구나 꿈꾸는 아름다운 사랑, 그것은 소유가 아니고 속박도 아니며, 노력없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겨울을 견딘 새싹만이 봄이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듯 사랑을 꽃 피우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노력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2004년 3월 23일>
풀밭에 앉아 생을 관찰하다
김 홍 일
가만히 보니
온통 풀잎들이 물음표를 그리며
살래살래 고개를 젓고 있다
불쑥
느낌표를 내미는
꽃대의 탄성
군데군데 쉼표와 마침표
와, 생은
부호의 천국이로구나
해마다 봄이 되면 새삼 느끼는 자연의 신비. 두꺼운 표피를 뚫고 그 여린 새싹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나무, 아직도 언 땅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그 여린 풀잎들의 강한 생명력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계절이 바로 봄이다. 그 뿐인가. 대지는 어디다가 그렇게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깔의 꽃들을 숨겨놓았다가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일까. 보들레르는 '4월은 잔인한 달, 언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라고 생의 환희, 신비를 역설하고 있지만,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봄은 아름답고도 신비한 계절이다.
뾰족이 잎을 틔우는 풀잎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온통 물음표를 그리며 살래살래 고개를 젓고 있다'는 시인의 관찰력이 놀랍다. 그 가운데 느낌표처럼 솟아오르는 꽃대! 또르르 말려 쉼표처럼, 또 마침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어린 풀잎들. 그것을 바라보며 '와, 생은 부호의 천국'이라고 표현하는 화자의 감탄은 바로, 사물에 대한 시인의 짙은 애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시는 봄의 경이로운 모습을 찬탄하며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2004년 3월 30일>
봄날에
김 민 정
세상사 시끄럼도
네 앞에선 남실바람
잠길 듯 다시 뜨는
해말간 미소 하나
고요히
앙금 갈앉는
가슴 벅찬 기쁨이여
속살 깊이 키워내는
여리디 여린 생명
다독여 가꾸는 일이
일생의 숙제인 듯
지열은
가슴에 조차
불씨 하나 남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조용하지만은 않다. 늘 많은 문제와 떠들썩함을 지닌 채 역사는 흐르고 있다. 눈만 뜨면 어지러운 소식들이 신문지상을 덮고, 놀랍고 삭막한 TV소식들이 우리의 여린 가슴을 짓누르기도 한다. 그러한 세상의 어지러움 속에서도 늘 부드러운 남실바람이 불어가듯 세상사를 잊은 듯이 맑은 미소를 다시 지을 수 있는 삶의 모습을 표현해 보았다.
어지러운 세상사에 결코 함몰되지 않으며, 고요하게 가슴 벅찬 기쁨을 간직하는 생활은 바로 주변에 대한 작은 사랑의 실천이다. 아침마다 만나는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 그들을 여린 생명이라 여기고 다독여 가꾸어 주는 일이 교육자의 할 일이라 생각하면 그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슴에 뜨거운 불씨로 남는 봄날, 행복과 평화는 바로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2004년 4월 6일>
빗방울의 노래
이 인 자
그늘진 하늘자락 한 꺼풀 벗겨내고
투명한 별빛 모아 숨결로 스며들면
또로롱
풀잎 끝마다
눈을 뜨는 초롱꽃
닫혀진 가슴 열고 희망을 꿈꾸는 날
은물결 찰랑찰랑 하늘과 입 맞추면
잔잔한
선율을 타고
피어나는 방울꽃
빗방울의 모습을 초롱꽃, 방울꽃에 비유해 표현한 귀엽고 사랑스런 작품이다. 비가 내림으로써 구름진 하늘은 마치 한 꺼풀 그늘을 벗는 산뜻함을 지니게 될 것이고, 그 비를 맞는 풀과 나무들은 싱그러움을 더할 것이다. 그 비는 바로 투명한 별빛을 모아 만들어진 것, 그리하여 비를 맞은 풀잎들은 풀잎 끝에 귀여운 물방울 초롱꽃을 단다.
둘째 수에서는 비가 내리는 날 닫혔던 가슴도 열고 희망을 꿈꾸어 보는 물결은 비를 통해 하늘과 입맞춤을 한다. 그 황홀감은 잔잔한 선율을 타고 방울방울 방울꽃으로 피어난다. 조용히 비가 내리면서 물결 위로 아름답게 파문이 번져나는 모습을 방울꽃으로 표현하여 표현의 참신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2004년 4월 13일>
진달래
김 민 정
그건 열여섯
피는 춘향이 마음
쨍쨍한 햇빛 속에
눈씻음의 향기로
첫사랑
호젓한 심사
홀로 펼쳐 드노니
출렁이는 봄물결
산 속 누비는 고요 행렬
물결지는 산산골골
비단실 풀리는 소리
자우룩
안개 내리듯
사월을 덮는 바람
한국 사람에게 진달래만큼 친숙한 꽃도 없을 것이다. 봄이면 어느 산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진달래꽃이다. 낯익은 오솔길이 있는 고향산천에 온 듯한 느낌의 꽃. 그만큼 진달래는 우리 눈에 낯익어 향수처럼 느껴지는 꽃이다.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어있는 산을 보면서 춘향이의 첫사랑이 저런 색깔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녀가 펼쳐든 호젓한 마음이 저러하리라 상상해 본다.
4월이면 온 산천을 물들이며 고요하게 산 속을 누비고 있는 진달래꽃이 자욱한 분홍색 안개로 느껴지기도 하고 연분홍 부드럽고 고운 비단을 가득 펼쳐놓은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진달래로 하여 아름다운 봄산과 그것을 바라보는 첫사랑 같은 황홀한 봄날…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이별의 정한을 형상화한 자유시라면 이 작품은 온 산을 물들인 진달래꽃 자체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정형시이다. <2004년 4월 13일>
봄꽃 지는 날
박 수 진
누가 후득후득 울고 있는가
이 아름다운 시절에
우리들 청춘도 저러하거늘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
쓰린 이별의 자리
지금은 피 흐르고 눈물 나지만
상처마다 추억같은 등불 매달고
그 자리에 아름다이 열매 맺는
눈부신 가을날도 있으리니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오늘은 눈물이 난다
바람에 하염없이
봄꽃 지는 날
우리는 피는 꽃을 보고 있으면 기쁨을 느끼지만, 지는 꽃을 보고 있으면 슬픔이 느껴진다. 눈부시게 순결한 화려함으로 피었다가 금방 시들고 마는 이른 봄의 목련이나 일시에 화려하게 피었다가 금방 지고 마는 벚꽃이나 첫여름의 정열을 느끼게 하는 담장의 붉은 장미꽃 등 모든 꽃이 필 때는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시드는 모습은 초라하고 슬프다.
그러한 꽃을 보면서 우리가 슬퍼하는 건 꽃의 피고짐을 인생과 연결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청춘도 저러하거늘/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꽃잎이 짐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이 열매 맺는 눈부신 가을날도 있으리니'라고 화자는 스스로 위로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눈물이 난다고 화자는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아무리 열매 맺는 가을날이 있다지만 꽃이 지는 것, 인생의 아름다운 청춘이 사라지는 것은 슬픈 일임을 화자는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2004년 4월 27일>
남산의 봄
김 민 정
보드라운
느티속잎
푸드득 날개 펴면
저것 봐,
저것 좀 봐
천지간의 초록 물결
생명 그,
만발하는 무지개
분수처럼 솟구치는
하늘하늘
아지랑이
온 서울을 휘감더니
오늘은
남산골에
잔치마당 열렸구나
연초록
고운 바람이
사운대고 있잖아
남산의 옛이름은 목멱산이다. 서울의 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산. 그래서 예부터 우리의 사랑을 담뿍 받아온 산. 장충당 공원을 따라 오르든가, 아니면 남대문 시장 뒤쪽 회현동으로 올라가면 서울시민의 정다운 산 남산이 나타난다. 남산타워에서 동서남북을 내려다보면 서울은 참으로 넓다. 대한민국 국민의 4분의 1이 사는 땅, 그 많은 인구가 저마다 사연을 담고 복작대며 살아가고 있는 곳, 서울에도 봄은 오고 평화는 존재한다.
옛 어린이회관, 지금의 서울교육과학연구원 앞뜰에는 느티나무가 있다. 그 느티나무 잎이 피는 모습,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연초록 어린 잎새의 고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생의 환희와 기쁨만이 가득 느껴진다. 봄의 생생력과 생명력이 분수처럼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천지에 가득한 초록물결도 만날 수 있다. 사운대는 봄바람에 초록물결이 넘실거리는 봄날, 천지에 가득 넘치는 생의 환희를 표현해 본 작품이다. <2004년 5월 4일>
봄날 강가에서
정 근 옥
눈부시게 화장을 한
새악씨 얼굴처럼 고운 봄햇살
비늘을 퍼덕거리며 숨쉬는
강물을 조용히 쓰다듬는다
작고 하얀 이를
살며시 드러내며 웃는
강물의 웃음소리에
목련꽃 눈망울
입춘을 지나온 바람에게 눈짓을 한다
풀밭에서 꽃잎을 뜯는
갓 태어난 봄병아리
버들이 눈뜨는 강가로 걸어나오다
문득 구름 속을 날아가는
자유의 새 한 마리를 발견하고
푸른 날개짓을 쉼없이 한다
이 시에서는 화장을 한 새악시 얼굴처럼 화사한 봄햇살과 그 고운 봄햇살이 퍼덕이며 흘러가는 강물을 조용히 쓰다듬는 평화스러운 봄날을 만날 수 있다. 행복함과 평화스러움으로 '작고 하얀 이를 살며시 드러내며 웃는' 강물의 웃음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다.
바람에게 눈짓하는 목련꽃 눈망울과 풀밭에서 꽃잎을 뜯는 봄병아리, 모두가 평화스러운 봄풍경을 보여주는 소재들이다. 귀여운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버들이 눈뜨고, 봄이 무르익는 강가로 걸어나오다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는 새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 새를 닮고 싶은 마음에 작은 날개를 퍼덕이는 병아리. 그 예쁘고 사랑스러운 몸짓이 마음의 카메라 렌즈 안에 가득 잡히는 아름다운 시이다. <2004년 5월 11일>
에밀레보다 푸른 사랑
김 민 정
우주를 다 주어도 바꾸지 않을 사랑 하나
펄펄 끓는 용광로 속 뼈도 혼도 다 녹여서
에밀레 애절한 울림으로 태어나고 싶어라
밀물 같은 그리움 가득하게 차오르면
동백보다 붉은 울음 그렁그렁 쏟으면서
사뿐히 승천하리라 청아하게 울리리라
깊고 맑은 종소리 온 세상에 퍼져가듯
그대 안에 융합하는 아름다운 사랑노래
천지에 빛나는 기쁨 영롱하게 울리리라
천년을 내리게 될 꽃비 같은 그리움과
천년을 살아 숨쉴 불꽃 같은 그대 사랑
에밀레 푸른 목숨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도 인생을 모르듯이,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인생이고, 이것이 사랑이라고 딱히 정의내리기가 어렵다. 따뜻함, 기분 좋음, 상대에 대한 많은 관심, 아껴주고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 상대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등등이 사랑의 감정일까?
수십 억의 인구 속에서, 수십 억년의 세월 속에서 너와 내가 이 순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인연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만난다는 것은 더욱 값진 만남이다. 그 귀한 만남이 오래 가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을 노래해 보았다. 천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 뛰어 아직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에밀레종, 인간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던져 넣었을 때 마침내 울리던 맑은 종소리. 그 명징한 에밀레 울림 같은 사랑이여!
이 작품은 천년을 넘어서도 존재할 수 있고, 그리워할 수 있고,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는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을 표현해 본 작품이다. <2004년 5월 18일>
그대 푸른 바람소리
김 정 자
뻐꾸기 울음소리에
솔가지 사이로 일렁이는
그대 물결치는 머리칼
푸른 오월은
산등성이 무성한 잎새들을
맑은 웃음으로 흔들어대고
깃발로 나부끼는 자유의 바람은
구비치는 바다를 넘어
골짜기 맑은 물줄기에
눈부신 날개로 내려와 앉는다
낮은 데로 흐르는 세월
끝끝내 아름다운 인생임을 깨닫게 해준
그대에게 감사하며
이 아침
먼 산 봄새들이 다투어 노래하는
푸른 숲에서
내 아득한 그리움의 편지를 띄운다
바람소리도, 초록빛 나뭇잎들의 흔들림도 가장 맑고 상쾌한 계절이 오월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산 속 뻐꾸기 소리 들려오고, 솔가지 사이로 물결치는 오월 머리칼의 아름다움과 무성한 잎새들을 흔들어 대며 웃는 산의 웃음소리. 이 작품에선 마냥 싱그러운 오월의 푸르름과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골짜기 맑은 물줄기에도 눈부신 날개처럼 살랑이며 내려와 앉는 바람, 물처럼 낮은 곳으로 세월은 흐르지만, 끝끝내 인생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계절에 화자는 감사한다.
산새들의 노래소리로 더욱 푸른 숲의 아침, 잊었던 사람에게, 싱그러운 자연에게, 이 아름다운 자연을 인간에게 선물로 준 신에게 '아득한 그리움의 편지'를 띄우는 화자여! 나도 이 푸르고 싱그러운 오월 아침엔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리움의 편지를 띄우리라, 띄우리라. <2004년 5월 25일>
우리 사랑은
김 민 정
네 안에서 내가 자라
내 안에서 네가 자라
비 그친 하늘 아래
유월의 숲 속처럼
우리는
어우러진 나무
이루어질 숲, 그늘
날마다 조금씩의
기다림을 먹고 크는
칠월의 덩굴이듯
끝도 모를 생명의 움
장마 속
수국을 닮아
물기 떨며 핀 그리움
진정한 사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쇠퇴하고 퇴색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힘이 되고 성장,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서로의 사랑 안에서 상대방이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어느 한 쪽만의 성장이나 발전을 위해 다른 쪽이 희생을 강요당한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어느 한쪽의 성장이나 발전이 아닌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서로가 힘이 되고 격려가 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비온 뒤의 맑은 하늘 아래 존재하는 숲 속의 싱그러운 나무들처럼, 끝없이 뻗어나가는 여름의 덩굴처럼 푸르고 힘찬 삶이 되도록 서로를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힘이며, 성숙된 사랑의 모습이다. <2004년 6월 7일>
바다에서
안 상 근
칼바람 부는 땅 끝 섬
안개에 묻힌 오름
비 오는 바닷가
언제나 그 자리에
나는 없고
춥고 배고픈 가슴만이 있다
하늘과 맞닿은 바다
그 너머의 시간,
바다는
그저 자기 모습만 보여 주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바다를 본다
하늘과 맞닿은 푸르고 끝없는 수평선, 다가가도 다가가도 그만큼의 거리가 항상 남는 아득한 거리, 끊임없이 파도는 만들어지고 부서지고…. 그 역동성으로 늘 깨어있는 생동감과 신선함이 느껴지는 곳이 바로 바다이다.
우리는 사물을 대할 때 얼마나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까.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사물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의 범위에다가 자신의 주관을 가미하여 그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 이 시 속의 화자는 비 오는 바닷가에서 '나는 없고/ 춥고 배고픈 가슴만이 있다'고 표현하여 비 오는 바다의 쓸쓸함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마지막 연에서 '바다는/ 그저 자기 모습만 보여 주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바다를 본다./'로 표현하여 나와 바다의 거리감을 표현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바다와 그 바다를 주관적 정서로 바라보고 있는 화자를 만나 볼 수 있다. 모든 사물은 나의 밖에 존재하며 그것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인 것이다. <2004년 6월 14일>
저 산에
민 병 도
스스로 물러앉아 그리운 이름이 된
산에, 저 산에 향기 나는 사람 있었네
수없이 나를 깨워 준 늘푸른 사람 있었네
법구경을 펼쳐두고 비에 젖은 저 빈 산에
휘젓고 간 바람처럼 가슴 아픈 사람 있었네
드러난 상처가 고운, 눈이 먼 사람 있었네
만나서 빛이 되고 돌아서서 길이 되는,
날마다 내 곁을 떠나가는 산에 저 산 안에
영혼의 맑은 노래로 창을 내는 사람 있었네
산은 사철 변화를 가지면서도 늘 그 자리에 의젓하게 앉아 있다. 그곳은 스스로 물러앉을 줄 아는 그리움으로 남는 향기로운 사람이 있는 곳, 수없이 나를 깨워 준 늘푸른 사람이 있는 곳이다. 휘젓고 간 바람처럼 가슴 아픈 사람이 있는 곳, 드러난 상처가 고운, 눈이 먼 사람이 있는 곳, 영혼의 맑은 노래로 창을 내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언제보아도 푸른 산은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간직하며 법구경처럼 자비롭게 앉아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나무들을 키우고, 새를 키우며 향기롭고, 푸르고 맑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아픔도 감싸안고 상처도 포용하며 '만나서 빛이 되고 돌아서서 길이 되는' 산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산은 실제의 산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상징일 수도 있다. <2004년 6월 21일>
강가에나 나가 보자
김 영 덕
시름겨워 울컥 치밀 때 강가에나 나가 보자
올망졸망 모여 앉아 대중조차 잊고 사는,
자갈과 자갈 사이의 여유쯤은 갖고 살자
제 살을 깎아 내어 얻어 낸 풍요로움
얼만큼 굴러봐야 저 소릴 들을 건가
하루쯤 강가에 서서 손바닥을 펴 보자
부딪쳐 터진 상흔 물살에 씻어 내고
이제는 가슴 열어 이웃하는 저 틈새로
작아도 거침없이 넓게 가는 바람소리 들어보자
삶은 늘 즐겁고 기쁜 일만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고,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울컥울컥 화가 치밀 때도 있고 시름에 겨울 때도 있다. 인간이기에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화자는 화가 치밀 때, 시름에 겨울 때 '강가에 나가보자'고 한다. 그곳에 가면 올망졸망하게 모여 사는 자갈을 만날 수 있고, 오랜 세월을 다듬고 깎이어 모나지 않고 둥글어진 자갈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건 바로 제 살을 깎아내는 아픔 후에 얻은 평화이다. 그 자갈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움켜쥐었던 손바닥을 가만히 펴며 응어리진 마음의 울화와 근심을 풀어보자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부딪치며 얻는 상처 물살에 씻어내고 이웃해 앉는 자갈들처럼 그렇게 거침없이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들어보는 여유를 갖자고 화자는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2004년 6월 28일>
예송리 해변에서
김 민 정
돌 구르는 밤의 저쪽
퍼덕이는 검은 비늘
등솔기며 머릿결에
청청히 내린 별빛
저마다 아픈 보석으로
이 한 밤을 대낀다
낙지회 한 접시에
먼 바다가 살아오고
맥주 한 잔이면
적막도 넘치느니
물새는 벼랑에 자고
어화등(漁火燈)이 떨고 있다
당신의 말씀 이후
살이 붙고 피가 돌아
삭망의 별빛 속에
드러나는 능선이며
때로는 샛별 하나쯤
띄울 줄도 아는 바다
가슴속을 두드리며
깨어나는 말씀들이
맷돌에 갈린 듯이
내 사랑에 앙금지면
바다도 고운 사랑 앞에
설레이며 누웠다
아무도 없고, 달빛조차 없는 밤바다 앞에 그대 서 본 일이 있는가. 먼 하늘에 별빛만이 반짝이는 밤, 우주의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 끊임없이 철썩이는 파도소리…. 그 파도소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몇 천 년, 아니 몇 만 년 전부터 철썩였을 것이고, 우리가 가고 없는 몇 천 년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자연에 비해 백 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을 살다가는 인간은 자연의 영원성 앞에 서면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예송리 해변'은 보길도에 있다. 소나무가 예술적으로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시조시인 윤선도가 유배생활을 하면서 어부사시사를 지은 곳이다. 그 해변의 특이한 점은 검은 자갈해변이라는 것이다. 작고 고운 자갈이 깔려있는 해변에선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갈 때마다 ‘짜르륵짜르륵'하고 그곳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파도소리를 낸다. 1984년에 쓴 이 글은 ‘시조문학25주년기념 지상백일장 장원(1985)' 작품으로 필자의 등단작품이기도 하다. <2004년 7월 5일>
남도 가는 길
김 준
금만경 뒤로 하고 정이 앞서 가네
한 자락 청산이 기우뚱 춤을 추네
가로수 행렬을 타고 파도로 길을 넘네
삼복 허허롭다 비껴간 자리마다
은혜의 빛을 받아 저리도 자족한 삶
칠백 리 설레는 길이 초록으로 나를 잡네
외진골 초옥마다 바람 자는 저 물소리
천심 강심 불러놓고 새소리 돌을 쪼네
저 건너 설레는 놀이 나를 앞서 지르네
‘남도에 가는 길'은 푸른 여름의 길이다. 정이 앞서 달려가는 길, 청산도 즐거운가 기우뚱 춤을 추고, 가로수는 파도처럼 길을 넘는 즐거운 여행길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화자는 즐거운 여행길에 올라 남도로 가고 있는 것이다. 허허로움을 달래며 자족할 줄 아는 삶, 그러한 가운데 온통 초록으로 물결지는 칠백리 길이 화자를 설레게 한다. 초가집들이 있는 평화로운 마을은 바람도 없는 고요한 물소리와 새소리만 들릴 뿐이다. 또한 하루가 저물어 설레는 놀이 나를 질러 앞서 가고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하루해가 끝나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작품은 남도 칠백 리를 가면서 보고 느낀 여행의 설레임과 푸르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경을 보면서 시인의 마음도 고요하고 평화롭고 한가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2004년 7월 12일>
저런 세상도 있다
김 홍 일
떼새의 자유를 보라
저들의 저 푸른 하늘을 보라
어느 한 곳 스며들 틈도 없는 군무의 축제
찬란한 생의 절정을 보라
단 하나의 날개도 서로 꺽지 않으며
노래가 있고 사랑이 있는 저 아름다운
화합의 장관을 보라
저기엔
탐욕도 교만도 미움도 없다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갈등도
먹고 먹히는 숨막히는 긴박도 없다
밟으려하지 않으며 이기려하지 않으며
잘남도 못남도 없는 평등의 세상
거짓도 허영도 없는 진실의 세상
오직
기쁨에 넘치는 평화가 있다
아, 저런 세상도 있다!
하늘을 나는 떼새를 보며 ‘단 하나의 날개도 서로 꺽지 않으며/ 노래가 있고 사랑이 있는' 아름다운 화합의 인간세계를 화자는 꿈꾸고 있다. 떼새들이 누리는 ‘탐욕, 교만, 미움, 갈등, 긴박이 없는 세상', ‘잘남도 못남도 없는 평등의 세상/ 거짓도 허영도 없는 진실의 세상'을 화자는 찬미하고 부러워하고 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백낙천(772-846)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교졸현우상시비(巧拙賢愚相是非): 잘났다 못났다 영악하다 어리석다 서로 시비를 가리지만
하여일취진망기(何如一醉盡忘機): 흠뻑 취하여 속세의 간계 잊음이 어떠하리
군지천지중관책(君知天地中寬笮): 그대 아는가? 천지는 끝없이 넓으면서도 좁아
조악난황각자비(鵰鶚鸞皇各自飛): 사나운 보라매와 상스러운 봉황이 저마다 날 수 있다네.
인간의 시비나 갈등은 부질없는 욕망에서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에서도 서로 상하지 않고 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조금씩 욕심을 줄이고 서로 도우며 공존공영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04년 7월 19일>
대숲에 사는 바람
임 종 찬
대숲에 사는 바람은
사서삼경을 다 외는지
있는 듯 없는 듯이
살은 듯 죽은 듯이
세월에 나부끼면서
걱정없이 살더라
왕대밭에 왕대바람
퉁소대롱을 빠져나와
동구밖 미루나무
까치알을 굴리더니
어느새 대숲에 와서
살 비비며 살더라
세월이 심심하면
대숲으로 갈 일이다
대숲에 사는 바람
걱정없는 흔들림을
우리도 조금은 배워
몸 흔들며 살 일이다
대숲에 사는 바람은 늘 여유가 있다. 인간들처럼 공부에 쫓기지 않고 이미 사서삼경도 다 외워 넉넉하게 세월에 나부끼면서 있다. 바람은 왕대밭에 가면 왕대와 어울리고 또 어느새 빠져나와 동구밖 미루나무 까치알을 굴리더니 또 대숲에 와서는 대와 살 비비며 살고 있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바람은 아무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그저 넉넉하고 자유롭고 평화롭다.
셋째 수에 오면 바람은 남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흔들고 있다. 대숲의 바람소리, 그 소소한 바람소리는 바로 우리들 삶의 여유로움이다. 스스로를 흔들면서도 꼿꼿하게 서는 대나무, 그리고 그 대와 어울리며 대숲소리를 만들어 내는 바람의 여유와 조화, 자연에게서 인간은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2004년 7월 26일>
지리산 연가
김 민 정
산이 산을 부르고
인간이 인간을 부르는
넉넉한 그대 품에
안기고 안기는 건
구름뿐 아니었더라
바람뿐이 아니더라
산이 높아 골도 깊은
그대 자락을 도는 안개
무성한 푸른 숨결
물소리로 와 앉으면
하늘엔 별들이 뜨고
지상엔 사랑 뜨네
사무침을 불러 모아
우렁우렁 산이 울면
한도 풀고 설움도 풀어
섬진강을 흘려 놓는
지리산 자락자락을
휘감는 그대 사랑
설악산이 기골이 살아나는 남성적인 산이라면 지리산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안는 여성적인 산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에 걸쳐있는 지리산. 몇 년 전 여름 천왕봉을 올랐을 때 경상도 쪽은 해가 나는 청명한 날씨인데 전라도 쪽은 짙은 안개가 쌓인 흐린 날씨라 그 대조가 너무나 신비하게 느껴진 적이 있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날씨가 완전히 달랐다.
지리산을 오르면서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청준의 ‘서편제’라는 소설과 김지하의 ‘지리산’이란 시와 또 영화 ‘남부군’을 생각했다. 그리고 원래이름이 ‘직전리’인데 육이오 때의 동족 상잔이후 ‘피아골’로 불린다는 한맺힌 골짜기도 생각했다. ‘동학혁명’, ‘여순반란’, ‘빨치산’, ‘육이오’ 등의 단어와 함께 생각나는 산, 수많은 우리의 역사와 문학 속에 등장하는 지리산은 기쁨보다 슬픔과 한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근래 우리역사의 격동기와 운명을 함께 한 산이 바로 지리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웅장하고 넉넉하여 모든 것을 포용할 듯한 산, 그 속에서 인간도 시비를 가리기 전에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타이르며 앉아있는 듯한 산이 바로 지리산이다. <2004년 8월 2일>
바다와 바이올린 연주회
정 근 옥
동해바다가 잔물결을 흔든다
하얀 드레스에 아침 햇살이 넘치며
잔잔히 흘러가는 물결이 일어선다
뱃고동소리가 울리면서
고도를 향해 달리던 배는
더욱 속도를 올리며 갈매기 소리를 낸다
바이올린의 검은 선 위에
열정의 활이 말을 타고 달린다
밀려오던 하얀 포말이
수억 년 버텨온 바닷가의 바위를 뒤흔든다
오, 히말라야의 눈사태…
저 하얀 손이 달빛을 흔들며
우주를 빚어내는 천지창조의 소리
이 시는 아침 동해바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으며, 파도를 상징한 시어들이 다양하며 파도에서 연상하는 상상력이 아주 빼어난 시다. 지금 화자는 아침 동해 바닷가에서 잔잔한 바다 위로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있다. 아침바다의 파도는 막 떠오른 아침햇살을 받아 하얀 드레스처럼 깨끗하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고도를 향해 달리는 배는 더욱 속도를 올리며 갈매기 소리를 내어 갈매기가 바다 위를 날 듯 바다 위를 달리고 있다.
마치 바이올린의 검은 선 위에 열정의 활이 달리며 연주하듯 그렇게 포말은 밀려와 바닷가의 바위를 흔들고….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또다시 히말라야의 눈사태를 연상시키고 있다. 또 파도는 달빛을 흔드는 하얀 손이 되고 우주를 빚어내는 신비한 천지창조의 소리가 되고 있다. 미의 여신 비너스가 바다에서 탄생되듯이, 예술적 감각을 빚어내는 바다의 파도형상을 다양하게 나타내고 있다. <2004년 8월 9일>
외암리 시편(詩篇)
유 권 재
누가 지난 역사(歷史)를 기록이라 하였나요
어제라는 수레위에 오늘이 실려가는
아산의 설화산자락 외암리에 와보세요
구태여 기억하려 꺼내보려 하지 않는
다락에 쌓아 놓은 좀먹은 비망록처럼
아득히 지난 내력을 잊은 듯이 살다가
세상의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
오래 전 그리움이 간절하게 샘솟듯이
소진한 기억 속으로 향수가 스며들면
저물녘 산마루의 자욱한 안개 아래
고가(古家)의 밥 짓는 연기 밀어처럼 속삭이는
한편의 과거 속으로 길을 찾아 나서 봐요
충청도 아산의 설화산자락 외암리를 시인은 읊고 있다. 세월은 흘러가고 흘러간 과거의 기록들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을 기억하려고도 꺼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제가 있어 오늘이 존재함을 우리는 잊은 듯이 살고 있다. 그러다가 현실이 지루해질 때, 과거로의 여행이 그리울 때, 아니 과거에 대한 향수가 스며들 때 아직도 옛 향수를 그대로 간직한 이곳 외암리를 찾아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 외암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시인은 마지막 수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수는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저문 황혼녘 산마루엔 자욱한 안개가 끼고 고가(古家)에선 나무를 때어 밥 짓는 연기가 밀어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한 편의 영화 같은 외암리의 고즈넉한 저녁 풍경이 고향집을 보듯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 작품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좀먹은 비망록’, 밥 짓은 연기를 ‘밀어처럼 속삭이는’ 등의 참신한 표현이 돋보이며, 작품 전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귀결되고 있다. <2004년 8월 16일>
그루터기
-정(情)-
이 인 자
세월을 얹고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분신처럼 남겨진 눈 같은 사랑이여!
굽은 뼈 마디마디에 빈 바람을 품었네
육남매 중 고명딸 말없이 품에 안고
하늘, 별, 풀꽃이름 하나하나 불러주며
나직이 노래하시던 고운 눈빛 닮고 파
잔가지 부러질까 허리 굽은 나무처럼
저승꽃 핀 얼굴로 눈물 감춘 애틋한 맘
후미진 골목길에서 돌아보고 또 보고
이 시는 아버지에 대한 정을 읊고 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시집을 가서 살아도 부모님의 마음에 늘 걸리는 것이 자식이다. 화자는 아버지를 보며 자식들 걱정으로 늘 편할 날이 없는 부모의 마음을 애틋해 하고 있다. 문득 그 아버지를 바라보니 연륜이 쌓인 머리는 눈같이 희어지셨고, 굽은 뼈 마디마디엔 빈 바람만 품고 있는 듯 했다.
자식들 키우고 걱정하느라 모든 영양분도 빠져나가고 앙상한 뼈마디만 간직하신 모습을 화자는 안쓰러워하고 있다. 하늘, 별, 풀꽃이름을 알려주시며 시인이 될 수 있도록 자양분을 심어주시던 사랑이 담긴 고운 눈빛의 아버지, 자기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고 싶어 하듯 화자는 그런 아버지의 눈빛을 닮고 싶어 한다.
어쩌다 자식이 찾아뵙고 돌아올 때 굽은 허리로, 저승꽃 핀 얼굴로 눈물 감추시며 골목까지 배웅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지 못해 보고 또 돌아보는 딸의 심정을 이 시에서는 잘 표현하고 있다. 늙으신 아버님에 대한 애틋한 시인의 정이 잘 나타나는 시다. <2004년 8월 23일>
그루터기[情]
나
촉석루에 올라
서 공 식
누대를 휘 감도는 매미 소리 잦아들면
마침내 붉은 석류 타는 가슴 터트리고
사백년 거슬러 올라 대 숲으로 서는 충절
풋바람 끌어안은 강물도 숨을 죽여
청청한 하늘조차 물 깊이로 잠잠할 때
선홍빛 자귀꽃 하나 의암되어 솟았다
다시금 이 자리는 능소화 피어나고
푸른 솔 가지끝에 새순 돋는 매미 소리
도도히 물굽이 치며 뻗어가는 저 남강
진주 촉석루에 서면 역사를 굽이 돌아흐르는 남강이 한 눈에 보인다. 일찍이 변영로는 진주의 의기 ‘논개’를 기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이하 생략>
화자는 촉석루에 올라 대숲을 바라보며 석류 가슴처럼 붉은 사 백년 전의 논개의 충절을 새겨보고 있다. 강물도 숨을 죽이고 하늘도 잠잠할 때 선홍빛 자귀꽃은 의암으로 솟고 있다. 왜장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든 지름 2미터도 안되는 바위인 의암, 이 작품에서 의암은 논개(선홍빛 자귀꽃)로 상징되어 나타난다. 셋째 수에서는 논개의 마음은 능소화꽃으로 나타난다.
붉은 석류, 선홍빛 자귀꽃, 능소화 등은 모두 논개의 충절을 상징하는 시어이며, 이러한 역사 속에 강물은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이 시의 화자는 말하고 있다. <2004년 8월 30일>
가을편지
김 민 정
부드럽게 쏟아지는
청량한 햇살 아래
가을꽃처럼 소슬하게
그리움이 피어나면
오, 맑은
그대 영혼 같은
가을편지 오실까
가을햇살 나뭇잎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산들한 가을바람
호젓하게 불어오면
오, 문득
그리운 고향 같은
가을편지 오실까
물결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 들려오고
내 사유의 뜨락에도
하얀 달빛 밤새 내리는
오, 푸른
종소리 같은
그대편지 오실까
아침 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고 귀뚜라미도 밤새 울어 가을임을 알리고 있다. 햇살은 부드럽게 쏟아지고 그 맑은 햇살을 받으며 오곡이 익어가고 있다. 한 차례의 태풍 메기가 우리의 들판과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긴 했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오고 세월 또한 거침없이 흐르고 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며 피고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날아 마냥 상쾌한 계절 가을이 오면 그리운 사람의 소식이 기다려지고 편지가 기다려진다.
맑은 그대 영혼 같은, 고향 같은 포근함과 안식을 주고 내 영혼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푸른 종소리 같은 편지, 사랑하는 그대의 편지가 기다려지는 계절, 가을이다.<2004년 9월 6일>
낚시 白書
김 광 수
물안개 사물사물
고요를 짜는 물가에서
낚대 드리우고
종일 찌나 바라보다
시라도
한 수 건지면
그 또한 보람 아니랴
일상사 무거운 사념
구름 끝에 실어 두고
수초에 매달려 놀던
바람도 잠 든 한 낮
한 생각
죄 풀어 놓고
물에 나를 비춰 본다
낚아 챈 물고기 몇 수
수심으로 돌려보내고
기다림도 설렘도 접고
하루해를 다 거둬도
내 안에
푸득거리는
월척꿈은 놓지 못하네
중국 주나라 때의 강태공은 천하를 다스리고 싶다는 큰 꿈을 간직한 채 미끼도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향의 강가에 앉아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자신이 나라를 위해 펼칠 꿈을 이리저리 설계해 보곤 했다. 마침내 그는 주나라 임금인 서백을 만나게 되고, 그 동안 마음속으로 설계해 왔던 병법이나 인재등용법 등의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탁월하게 왕을 보필하였다. 그리하여 ‘스승’의 의미가 담긴 ‘태공’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고, 그가 쓴 ‘육도’라는 책은 그 후 정치가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강태공이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았듯이 시인은 시를 낚고 있는 것일까. 일상사 무거운 사념을 벗어놓고 시를 생각하고 시를 건져 올리고 있는 것일까. 화자인 시인자신은 낚은 고기들을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고 기다림도 설레임도 접고 하루해를 거두면서도 좋은 시를 낚고 싶은 월척의 꿈은 저버리지 못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고 사랑받을 수 있는 시, 월척 같은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욕망, 하루해가 저물어 가도 저물 줄 모르는 시인의 꿈은 아름답다. <2004년 9월 13일>
가을 산책
김 석 철
수줍은 코스모스
서리 아침 들국화도
눈 시린 쪽빛 하늘
머리 위에 받쳐 이고
저마다
저린 사연을
그려내고 있나니
울밑의 귀뚜라미
저문 뜨락 낙엽들도
계절의 깊은 뜻을
온몸으로 그려내며
밤새껏
푸른 달빛에
부대끼고 있나니
이 세상에 쉽게 피는 꽃은 없다. 길가의 코스모스 꽃 한 송이도, 서리를 맞으며 피는 들국화도 여름의 긴긴 해를 견디고 비바람 폭풍우를 견뎌낸 후에야 해맑은 꽃을 피운다. 결국 세상에는 함부로 된 것은 없고, 의미 없이 피는 꽃도 없다.
저마다 저린 사연들을 가지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흔하게 울어대는 울밑의 귀뚜라미도 우는 사연이 있고, 뜨락의 떨어진 한 잎 낙엽도 온몸으로 뜨겁게 자기의 계절을 살아왔을 것이며, 가을이면 떨어져야 하는 섭리를 깨닫고 있을 것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크든 작든 저마다의 사연으로 흔들리며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만물의 살아가는 모습이며, 화자는 이 작품을 통해 그러한 모습을 관조하고 있다. <2004년 9월 20일>
가을에는
김 민 정
나뭇잎이 떨어지면
파문도 그려내고
바람 부는 날에는
잔물결도 만들면서
가을엔 깊은 산 속의
호수가 되고 싶다
버려지고 잊혀지는
우리들의 이야기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출렁이는 삶의 무늬
물결에 지치지 않는
씻고 씻긴 삶이고 싶다
테 두르지 않아 좋은
마음 조릴 것도 없는
낯익어 향수 같은
투명한 저녁노을
그렇게 하루를 닫는
조용한 삶이고 싶다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고 했던가. 한 개인의 역사도 ‘도전과 응전’이라고 볼 수 있다. 젊은 날은 끊임없는 용기로 인생에 도전하고 또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응전도 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의 자세가 인생을 아름답게, 또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으로 만든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쯤에는 한 발작쯤 떨어져서 인생을 관조하며 살아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 무엇에도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않고, 지나치게 방관하지 않는 중용의 자세로, 관조하고 이해하고 포용하며 살아가는 삶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지혜이다.
첫째 수에서는 나뭇잎이 떨어지면 파문도 그려내고 바람 부는 날에는 잔물결도 만들면서 자연에 순응하는 호수처럼 그렇게 잔잔하게 모든 것을 포용하며 살아가는 삶이고 싶은 마음을, 둘째 수에서는 끊임없이 출렁이며 반복되는 우리들 삶의 이야기를 말갛게 씻어내고 씻어내면서도 지치지 않는 맑은 삶의 모습을, 셋째 수에서는 누구에게도 격의 없고 부담감 주지 않아 낯익어 그리움 같은 밝고도 고운 저녁노을 같은 삶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해 보았다. <2004년 10월 4일>
아차산성
원 용 문
천년 전 기왓장들이
다시 살아 눈빛 주고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다람쥐가 넘나든다
아직도
긴장감 도네
바람마저 숨죽였네
저 건너 풍납토성엔
백제군의 아우성 소리
그 앞을 가로 지르는
한강물은 유유하다
온달이
마셨을 옹달샘에
내려앉은 햇살이여
취사병의 밥 짓는 연기
산성 위를 뒤덮고
평강공주 통곡하며
쓰러졌을 그 자리에
군사들
도열해 서듯
거목들만 버텨 섰다
아차산은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전설이 있는 산이다. 고구려의 울보공주, 그래서 농담처럼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아버지 평강왕(평원왕)의 말을 들으면서 크던 그녀는 혼기에 이르러 바보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우겨 궁전에서 쫓겨나게 된다. 평강공주는 마침내 숯구이 총각 바보온달이 산다는 마을에 도착하여 그를 만나 함께 살면서 그를 훌륭한 장수로 키워내고 아버지 평강왕에게도 온달은 부마로 인정을 받게 된다.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여 한강유역 탈환을 위한 군사의 출정이 있자 그는 자원하여 참전하였으나 아단성(지금의 아차산성)전투에서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죽은 그의 시신이 움직이지 않아 평강공주가 와서 그의 혼을 달래자 그때서야 시신은 움직였다고 한다.
이 시의 화자는 한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역사 앞에서 죽어서도 평강공주를 사랑하고 그의 말을 믿고 따랐던 온달의 사랑, 충직함, 성실함과 또 그러한 지아비의 죽음 앞에서 슬퍼했을 평강공주를 그리고 있다. 역사상 실존인물을 다루었던 역사설화이며 인물설화인 바보온달설화가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2004년 10월 11일>
고디 줍기
박 우 현
고디를 줍습니다
고디 줍기야 다리품만 있으면 되지만
그래도 원칙은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엉덩이를 높이고
눈은 가능하면 물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안그러면 놓치는 게 더 많지요
다음에는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안그러면 물이 흐려져 보이지 않지요
여럿이서 주울 때는
나란히 서서 한 걸음씩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안그러면 뒷사람은 공치지요
그리고 작은 것은 절대로 잡으면 안 됩니다
안그러면 내년에는 쓸쓸한 강이 되겠지요
고디가 사는 깨끗한 물에는
꺽지, 동사리, 밀어 같은 물고기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함께 어울려 사는 그들을 보면서
즐거움을 얻는 것도 어떤 원칙이 될 수 있을지요
고디란 경상도 사투리로 ‘다슬기’라고 한다.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고디’. 이 시의 화자는 고디줍기에도 원칙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 속의 화자는 평범한 내용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인생의 교훈을 전해 주고 있다. 하찮은 고디 하나 줍는데도 온 신경을 집중하여 진지하게 해야 하며, 물을 흐리지 않고 잘 볼 수 있도록 아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지혜가 필요하며, 여럿이 주울 때는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고 하여 공존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으며, 작은 것을 잡으면 씨가 말라 내년에는 쓸쓸한 강이 된다고 하여 생태보존을 강조하고 있다.
또 맑은 물에만 산다는 고기들이 고디와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보며 즐거움을 얻는 것도 ‘어떤 원칙이 될 수 있을지요’라고 하며 환경보존, 생태보존이 결국 우리를 즐겁게 하며 그것을 보존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화자는 이 시에서 강조하고 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은 결국 인간이 해야 할 일이며, 자연을 보호하고 보존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행복하고 즐겁게 하는 길임을 이 시의 화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2004년 10월 18일>
추억의 세레나데
김 민 정
들여다 보노라면
속생각 꽃처럼 붉네
해일처럼 넘쳐나던
청춘의 날들, 푸른 합창
산들도
진초록으로
거기 둘러 앉았네
후미진 골짝에도
소리내어 흐르던 물
맥짚어 오는 숨결
왁자한 초록빛 바다
원색의
고향하늘이
거기 펼쳐 있었네
형광등 불빛 아래
촉수 높은 귀를 세우면
간간이 들려오는
솔바람, 사랑의 밀어
청춘을
휘몰아 가네
휘파람, 저 휘파람은
지나고 뒤돌아보는 추억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추억의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지난 젊은 날들을 돌이켜보면 거기엔 무지개 같은 아름다운 꿈이 있고, 사랑이 있고, 낭만이 있다. 대학 졸업여행의 사진 한 장이 불러온 추억! 우리는 대학4년 때 계룡산의 마곡사, 갑사, 동학사로 졸업 여행을 떠났었고, 계속 떠들고 웃으며 계룡산 능선을 넘으며 곳곳에서 사진을 찍곤 했었다. 사진 속의 과친구들은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싱그러움이 가득 넘쳐 힘줄처럼 푸르게 돋아나는 젊음, 그것은 푸르게 푸르게 넘치는 해일이었다. 그것은 하늘과 땅과 신록과 조화된 청춘의 합창이고, 교향곡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활짝 웃는 푸른 웃음만이 존재하는 고향의 다정하고 편안한 하늘이었다. 꽃처럼 아름답던 날들, 어디선가 그때의 휘파람 소리가 싱그럽게 들려온다. <2004년 11월 8일>
경춘선·1
정 남 채
선연한 새벽안개 가르며 섬이 뜬다
북한강 허리 감아올린 비둘기호 등을 따라
물새떼 눕는 수평으로
기지개 켜는 아침
왁자지껄 웃음 묻힌 지폐 한 장으로
김밥 한 줄, 달걀 한 줄 비우던 유년의 시간
백양리(白楊里) 덜커덩 덜커덩
무동 태워 보낸다
종착지 알리는 방송, 졸던 아이 눈 뜬다
창틀 앉은 고추잠자리 아이 눈과 마주친다
눈알을 서로 굴리다
자릴 뜨지 못했다
경춘선을 타고 가는 기차여행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는 시다.
첫째 수에서는 경춘선을 타고 가며 바라보는 북한강의 아침 모습이다. 새벽안개 속에 섬은 뜨고, 기찻길과 함께 수평으로 다가오는 북한강의 안개 낀 아침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고 하여 아름다운 아침강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기차간 안에서의 어린 시절의 풍경이다. 왁자지껄한 웃음과 함께 김밥과 달걀을 사 먹으며 즐겁던 시간, 백양리를 지나며 아름다운 지난날을 추억하고 있다. 셋째 수에 오면 기차여행의 종착지에 도착한 화자의 어린 시절, 아이가 등장한다. 그 아이는 창틀에 앉은 고추잠자리를 발견하게 되고 고추잠자리와 눈맞추다가 내려야 하는 것도 잊고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천진한 동심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화자는 지금 경춘선을 타고 가며 현재의 북한강 아침 모습을 보며, 또 경춘선을 탔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여 동심이 살아나고 있는 아름다운 시이다. <2004년 11월 15일>
민족
박 영 교
출렁이는 강물을 보면
푸른 말이 살아 오릅니다
바닥에 깔려 있는
돌과 자갈 모래들이
짓눌린
역사만큼이나
살아있는 긴 숨결
우리네 손목에 뛰는
혈맥을 짚어 가면
가슴마다 푸득이는
제 여끔 찬 할 말들이
강바람
쌓인 울분 쓸어
온몸 앓아 흐릅니다
캄캄한 곳 어디서나
환한 당신의 얼굴 모습
이 어둠 다 지새고 나면
우린 한 줄기 여명의 밧줄
하늘 땅
하나로 녹이는
폭이 깊은 울림의 강
끊임없이 출렁이며 강물이 흘러가듯 우리 민족의 역사도 끊임없이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음을 이 시에서는 말하고 있다. 흘러가는 강물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돌과 자갈 모래들의 삶 만큼이나 긴 숨결을 지니며 살고 있는 우리 민족. 민족의 역사 앞에서 우리는 저마다 한도
많고 하고 싶은 말들, 쌓인 울분의 말도 많을 것이다. 많은 한과 울분들을 쓸어안고 가슴을 앓으면서도 강물은 흐르고 있다.
그러나 아픔이 많은 역사 앞에서도 항상 환하고 밝은 우리 민족의 모습이다. 시련들을 슬기롭게 극복하며 헤쳐 아픔의 역사, 어둠의 역사를 지새고 나면 우리 민족 앞에 펼쳐질 여명의 밧줄같이 튼튼하고 희망찬 시간이 올 것과 하늘과 땅이 하나로 되듯 어우러지고 함께하는 민족 역사의 큰 강이 흐를 것을 이 시의 화자는 확신하고 있다. <2004년 11월 22일>
서울 1
김 민 정
삼청동 뒤로 하고
고요로 나앉으면
비원은 서글픈 역사 허기진 인생 같고
소슬한 바람 너머로 서로 포개 잠을 잔다
궁전 앞 깊은 겨울
빈가지에 걸린 바람
하늘 향해 손을 젓는 회초린 양 아픈 기도
드러난 맨살의 땅엔 눈발만이 서성이고
매연에 절었어도
별리(別離)일 수 없는 서울
도심의 운율 위에 묻혀 버린 숱한 사연
울분도 상처처럼은 안고 도는 세월이다
창경궁과 비원 숲이 내려다보이는 삼청동 뒤 와룡산.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비원은 비운의 명성왕후를 생각하게 하는 옛 궁전의 후원뜰이다. 궁전 앞에 서 있는 겨울나무조차 아픔으로 느껴지는 삭막한 도심. 그 속에서 서민들은 매연에 절으며 수많은 사연들을 묻으며 고단한 하루를 살고 있지만 결코 이별할 수 없는 애환의 도시 서울, 울분까지도 상처인양 숙명인양 감싸안으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리라. <2004년 12월 6일>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이 청 화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깊은 산 깊은 골에 산꽃처럼 피워 둘까
다섯 개 구멍을 뚫어 피리로나 불어 볼까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밤 뜨락 그대 날 찾아 풀벌레를 울려 놔도
난 고작 못물을 돌며 돌맹이나 던질밖에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씨앗처럼 떨구어서 바윗결에 심어두면
이 바위 금방 신령해 무지개가 돋아날까
불교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한다는 말이다. 때로 입으로 하는 말보다 마음으로 하는 말이 더 오래갈 수도 있고 더 깊을 수도 있다. 말로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도 있고, 또 언외언(言外言)의 경우도 있다. 진심어린 마음을 담은 행동은 말보다 더 진실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도 하다. 이 시에서 화자는 차마 말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2004년 12월 13일>
날 개
김 민 정
여명의 가슴 위로
새 천년의 해가 뜬다
달려가 안아야 할
무한의 가능성이여
푸르고
힘찬 비상을 꿈꾸는
오, 희망에 부푼
눈빛들
우리들의 기대 속에
푸른 미래가 숨어 있다
너와 나의 만남 속에
뜨거운 사랑이 숨쉬고 있다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오, 맑고 밝은
생명의 빛
출발의 시간이여
장엄하게 종을 울려라
상서러운 그 종소리
가슴마다 물결쳐라
역사는
너와 나의 존재 위에
오, 새롭게
태어난다
우리의 삶은 새로운 시간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에서 역사를 창조한다. 무한의 가능성을 향해 달리고, 푸른 희망을 향해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모두에게 기쁨과 사랑이 넘치고, 생명력이 충만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2005년 출발의 상서로운 종소리가 가슴마다 장엄하게 울려 퍼져 각자가 아름답고 가치있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하게 빌어본다. <2005년 1월 3일>
오륙도
주 강 식
날마다 막을 여는 생명 이는 저 벌판에
턱 괴고 곧추앉아 세월을 기다렸다
억겁을 지켜선 길목 증언도 많았거니
연연한 그리움이사 간이 배면 돌도 되지
온 바다 가슴에 안고 바람에 이마 깨쳐
살과 피 닦고 절이며 푸른 넋을 다둑여 왔다
절영도 안개 젖은 뱃고동 목맨 울음이
오대양 파도를 타고 수평선을 넘나들 때
열망의 문턱에 서서 십자가로 자리한 별
부산 앞바다의 섬인 오륙도는 조용필의 노래로 더 많이 알려지기도 했다. 5개로 보일 때도 있고, 6개로 보일 때도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오륙도’이다. 늘 생명이 파도치는 바다에 떠 있는 섬을 화자는 억겁의 세월동안 턱 괴고 고추앉아 세월을 기다리는 섬이라고 보고 있으며 또한 바람에 이마 깨치며 살과 피 닦고 절이며 푸른 넋을 다둑여 왔다고 한다. 오륙도는 오늘도 열망의 문턱에서 연연한 그리움으로 오고가는 배를 기다리는 것일까.<2005년 1월 10일>
다시 수유리에서
박 시 교
수유리에 오시려거든 되도록 비 내리는 날
우산은 받지 마시고 그냥 오십시오
가슴은 술로 데우게
겉만 젖어 오십시오
우거진 상수리나무 숲길 지나 어느 등성이
굳이 정상 아니더라도 도봉 마주해 앉으면
마음속 은밀한 앙금도
녹아나게 마련입디다
비 오는 날 수유리에 오실 때에는 또 한 가지
잊지말고 시계는 풀어놓고 오십시오
어차피 흐르는 세월은
물 같은 것이기에
‘수유리’하면 생각나는 것은 4.19탑이지만, 이 시에서 화자는 수유리에 비오는 날 술 마시러 오라고 권유한다. 정철의 ‘장진주사’라는 사설시조에 비견될만한 작품이다. 화자는 비오는 날 우산도 받지 말고, 마음도 풀어 놓고, 시계도 풀어 놓고 와서 술로 가슴을 데우자고 한다. 도봉을 마주해 앉으면 마음속 깊은 앙금들도 녹아나고, 시계도 풀어놓아 현대인의 바쁜 일상을 잊고, 세월을 잊으며 여유롭게 술을 마시자고 권유하고 있어 우리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시다. <2005년 1월 17일>
동화댐 망향비 앞에서
김 종 원
눈 감으면 떠오르는
동구 밖 느티나무
기와집 뒤란에는
장독들 모여 앉고
지붕엔
박넝쿨마다
주렁주렁 열려라
눈 뜨면 시퍼런 물
물오리만 한가롭고
철없는 낚싯꾼들
태연히 앉았으니
백운천(白雲川)
드렝이 마을
어디 가서 찾을거나
어머니 살강 닦고
할머니 길쌈하던
정겹던 고향 집은
어디에 숨어 있나
물 위에
비친 달 보며
그 시절을 그리네
*드렝이 마을 : 전북 장수군 번암면 동화댐에 수몰된 마을
지금 화자는 물 속에 잠긴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고향, 동구 밖 느티나무와 뒤란의 장독들과 지붕의 박넝쿨마다 주렁주렁 열리던 박들의 모습 속에 존재하던 순박하고 정겹던 고향집은 물 밑에 깊이 가라앉아 숨어 있고, 화자는 물 위에 비친 달을 보며 그 밑에 가라앉아 있을 옛날의 고향을 추억하고 있다. 화자의 삶의 터전이었고, 정신적 안식처인 고향을 상실한 허전함과 안타까움을 나타낸 작품이다. <2005년 1월 24일>
섬
정 인 관
지구,
흔들리는 점 하나
물에 떨구고
섬 하나 포옹하여
물새알 하나 낳고
땅과 땅 사이
기나긴 터널의 숨소리 들리고
수평선 너머 가만히 스러지는
뱃고동 소리
하얀 노래로 웃고 있는
파도
화자는 이 시에서 섬을 지구의 흔들리는 점 하나로 보고 있다. 지구가 물에 떨어뜨린 점 하나인 섬, 그 섬을 포옹하여 물새알을 낳고 살게 하고, 또한 바다를 땅과 땅 사이의 기나긴 터널로, 파도를 그 터널의 숨소리로 보고 있다.
수평선 너머로는 뱃고동 소리 남기며 가만히 배가 떠나가고 파도는 ‘하얀 노래로 웃고 있는’섬의 평화로운 정경을 노래한 작품이다. <2005년 1월 31일>
복수초에게
문 무 학
눈 덮인 언덕배기 노랗게 물들이는
너는 어느 먼 황실의 곤룡포 그 자락
잠 깊은 대지를 깨우는 황홀한 몸짓이다
겨우내 가슴 끓던
우울이란 고뿔도
네 앞에선 서성이다
뒷걸음 치며 가고
먼 곳에 불던 바람이
네 향기를 흩고 있다
매운 바람 건너온 잔설 속의 너처럼
그런 태깔로 또 그런 놀라움으로
내 삶이 놓여진다면 그런 내일 있다면
복수초는 설 무렵에 눈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린다. 때문에 설을 기념하고 무병장수를 준다 하여 덕담과 함께 설날, 이 복수초 분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햇볕이 있으면 꽃송이를 한껏 벌리고 어두워지면 꽃잎을 닫는 특징이 있는 꽃이다. 아직도 잔설이 남아있는 양지쪽에 노랗게 꽃을 피우는 복수초를 ‘황실의 곤룡포 자락’으로 표현하여 눈 속에 의연히 피는 꽃의 고귀함을 말하고 있다. 화자는 매운 바람과 차가운 눈을 헤치고 피어나는 복수초 같이 밝고 아름다운 태깔과 놀라움을 주는 삶이기를 이 시에서 바라고 있다. <2005년 2월 7일>
눈사람
김 민 정
온종일
기다렸다
슬픔이 밀려왔다
전화벨도 울리지 않는 절해의 고도
나의 긴
기다림 속으로
펄펄 눈이 내렸다
마을 어귀
망부석처럼
서 있는 눈사람
그의 몸 구석구석을 휘돌아 흐르는
하이얀
그리움의 피돌기
순교의 절창이 빛난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랑하는 이의 소식…. 애절한 기다림의 마음을 ‘님이 오실 길목에 망부석처럼 서 있는 눈사람’으로 표현해 보았다. 그 속을 ‘흐르는 하이얀 그리움의 피돌기’는 바로 눈사람처럼 희디희게 표백되는 그리움이다. 님이 또는 님의 반가운 소식이 와서 눈사람처럼 순결한 그리움으로 기다리고 있는 차가운 화자를 따스하게 녹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해 본 작품이다. <2005년 2월 14일>
바램
심 응 문
따스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음 좋겠다
눈길을 받기보단 눈길 주는 그런 사람
울 밖의 벙근 매화 꽃잎 나였으면 좋겠다
폭풍우 친 다음날 시름에 겨운 이에게
땅 끝을 부여잡고 보란 듯 웃음 짓는
낮은 곳 붉은 채송화 나였으면 좋겠다
잊었던 정감들도 나를 보면 푸근해져
잠시 서서 명상케 하는 그런 꽃이 되고 싶다
햇살에 간지럼 타는 길섶의 구절초처럼
바람 부는 긴 겨울밤 그대 생각 부풀릴 때
서재의 한 켠에서 발등에 툭 떨어지는
지난 날 네잎 크로바 나였으면 좋겠다
이 시의 화자는 따스한 눈빛을 지닌 사람, 위안이 되는 미소를 지닌 사람, 푸근한 정감을 살아나게 하는 사람, 지난 날의 네잎 클로버 같은 행운을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시 전체에 따스한 정감이 흐르고 있다. 올 해에는 풍요롭고 따스하고 행복한 이웃들이 많았으면 좋겠고,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도록 마음속의 네 잎 클로버를 각자가 챙겨갖는 한 해였으면 좋겠다. <2005년 2월 21일>
금강의 새벽 숨소리
정 근 옥
고요한 물결 잠재우고
물안개 가득한 바다 위에 남겨놓은
지난 날 사랑하던 이가
하나씩 가슴에 꽂아 놓은
손끝 싸늘한 추억의 화살들이
새벽의 상큼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오는데
불빛 흐르는 항구에 정박된 설봉호
아직도 고요한 잠에 빠져있구나
멀리 눈을 깜박이며
아침을 깨우는 작은 고깃배
서서히 가는 핏줄을 움직이며
어둠에 잠들어 있는
햇살을 끌어올릴 때
푸른 옥비녀 꽂은 백옥경 선녀
새벽 목욕을 하고 올라가시다
산허리 구름안개 베일을
가렸다 거뒀다 하면서
천지에 아름다운 눈빛을 보내는구나
아름다운 새벽 바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명의 시간, 고깃배들의 불빛들이 눈을 깜빡이며 아침을 깨우고 서서히 어둠에 잠들어 있던 햇살이 솟아오를 때 안개 낀 바다의 모습은 마치 백옥경 선녀가 목욕을 마치고 올라가면서 산허리 구름안개 베일을 가렸다 거뒀다 하면서 천지에 아름다운 눈빛을 보내는 모습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2005년 2월 28일>
그리움
김 민 정
이만큼 물러서도
너는 한결 같구나
밤마다 기슭에선
흰 물결로 넘치더니
가슴에
찍어둔 지문 한 점
지워질라, 지워질라
귀 막고 돌아서야지
씹지도 못할 슬픔
촛농처럼 녹아내려
사그라질 목숨 터에
고독은
안으로 접자
허무로나 키우자
조약돌 같은 맹세
텃세 짙은 땅에 깔리면
꿈보다 더 아득히
손짓해 부르면서
목덜미
적신 하루가
탱자울을 넘어 가네
인생이 수학공식처럼 척척 맞아떨어지면 오죽 좋겠는가. 그러나 삶은 이율배반적일 때가 많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참으로 미묘하고 아이러니컬한 모순이 많다. 사랑하면서도 이별해야 할 때도 있고,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깊이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움은 사랑의 또다른 이름이 분명하다. 사랑과 이별과 그리움의 시는 인류에게 최초 서정시의 주제였고, 또 가장 늦게까지 남을 주제이다. 예부터 사랑의 기쁨을 읊은 시보다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을 읊은 시가 더 많이 애송되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할 때는 사랑의 기쁨에 도취되어 모르다가 이별 후에야 비로소 외로움과 사랑의 깊이를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2005년 3월 7일>
붓대로 피운 꽃
-일연의 삼국유사
박 상 문
천하에 하나뿐인
오래갈 큰 집 한 채
그 집 속에 나라가
생긴 연유 설계도 있어
오천 년
훨씬 넘어간 척도
기록 되어 남아 있다
내 얼굴 보이어 줄
연륜 쌓인 뿌리 족보
사생아가 될 뻔 했던
민초들의 원류 찾아
시조(始祖)가
누구인가도
조목조목 밝혀 놨다
신령스런 곰․호랑이
쑥․마늘 먹고 인도 환생(還生)
햇빛 없는 굴속에서
어엿한 웅녀로 변해
마침내
환웅과 결혼
단군왕검 태어났다
‘일연’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곰을 섬기는 토템신앙에 의해 단군왕검이 태어나고 그가 우리나라의 시조가 되어, 오천 년이 넘는 역사를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일연이 우리의 역사를 더듬어 붓으로 ‘삼국유사’를 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그러한 업적을 남겨 민족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일연의 위대성을 화자는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2005년 3월 14일>
미시령고개
노 선 관
굽이굽이 오르는 길
오르라고 있는 길
지나온 세월만큼
힘이 부친 이 길을
오늘은 마음 다 덜고
정(情)으로만 오른다
산도 읽고 숲도 보며
새소리도 들으며
물소리 맑은 골에
발도 잠시 담가 보며
야생화 진한 향기를
가슴 풀고 마주 서며
오를 듯 떨어질 듯
땀을 한 줌 움켜쥐고
아찔한 벼랑 끝에
매달린 저 나무들
나무야 손에 쥔 땀을
식힐 줄도 알아라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졌다 다시 숨는
저 길이 갈 길인가
아닐세 이 쪽일세
구름이 바람 따르며
한 수 짚어 가르친다
서울에서 속초로 가는 길, 속초에서 서울로 오는 길 설악산의 유명한 언덕길이 미시령이다. 미시령에 서면 동해바다와 속초시내가 훤하게 내려다 보인다. 그 미시령에서 화자는 인생을 생각하고 있다. 힘들게 오르는 길이 인생길이라면, 그것은 오르라고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동안 미시령(인생의 정상)까지 오르느라 힘든 길이라면 이제는 힘에 부친 욕망 등은 모두 덜고, 자연을 즐기는 여유를 가지고 자연이 가르쳐주는 지혜로 인생을 살아가야겠다는 것이다. <2005년 3월 21일>
춘면(春眠)
박 영 록
탐라의 유채향기 사립문을 들어서면
따스한 양지쪽에 아장대던 병아리도
개나리
노란 향에 취해
까닥까닥 졸고 있다
흰나비 담장 너머 규방을 훔쳐보고
햇살의 기척에 놀라 선잠깬 종달새는
유사(遊絲)의
꽁무니잡고
수직으로 솟구친다
봄날의 화사하고 평화로운 모습이 나타나는 작품이다. 멀리 남쪽 제주로부터 유채꽃 소식이 전해지면 봄은 이미 한반도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양지쪽에는 개나리가 피어나고 그 개나리 색상을 닮은 노란병아리들이 아장대다가 개나리 모습과 봄햇살에 취해 졸고 있다. 그런가 하면 봄나비들은 규방을 훔쳐보고 있고, 종달새는 높이 날아오르며 ‘지지배배’를 지저귄다. 화자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농촌마을의 봄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2005년 3월 28일>
행복의 나라
김 민 정
그대와
내가 있어
달도 별도 빛납니다
그대와
내가 있어
꽃도 새도 예쁩니다
그대와
내가 있어서
행복의 나라 있습니다
행복 또는 불행 같은 이 세상의 모든 감정의 주체는 나이다. 사랑하는 나의 연인이 나의 곁에 있어 바라보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행복이라는 감정을 내가 갖게 된다면 달도 별도 꽃도 새도 모두 아름답게 보일 수 있고 삼라만상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너와 내가 꼭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너와 나의 존재가 원만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을 때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다워 보이고 인간은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다. 행복은 내 마음으로부터 세상속으로 번져나가는 물결과도 같은 것이다. <2005년 4월 4일>
봄
유 한 나
어두운 지층을 뚫고
뛰쳐나오는 빛의 향연
메마른 땅에 무지개를 띄우고 있다
긴 기다림의 가지 끝에 맺히는
애틋한 그리움의 봉우리
애절한 사랑의 사연 품은
나비 한 마리,
춤추는 날개 짓으로
꽃잎 사이 날아다니며
바람결로 그려진 오선지 따라
비발디의 봄을 연주하고 있다
봄이면 어두운 대지에 묻혀있던 갖가지 빛들이 땅위로 솟아오른다. 그러한 빛의 향연은 메마른 땅에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뜬다. 겨울의 긴 기다림을 견딘 나무들은 아름다운 봉우리로 꽃을 피우고 잎새를 단다. 나비들은 꽃잎 사이를 날아다니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춤을 추며 마치 바람결로 그려진 오선지 같은 비발디의 음악, 아름다운 봄을 연주하고 있다고 화자는 보고 있다. <2005년 4월 11일>
사랑
김 홍 일
고요한 폭발이 있었다
그 아름다운 향기
물보라처럼 내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영롱한 아침 햇살 아래
눈이 부시게 꽃 한 송이 피어올랐다
사랑의 감정은 위의 시처럼 어느 날 폭발하듯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사랑은 한 송이 눈부시게 만발하는 꽃 같은 것임을 이 시의 화자는 말하고 있다. 사랑은 폭발하는 활화산보다 더 뜨거운 감정으로 솟아나는 것이며 물보라보다 더 아름답고 싱그러운 향기로 날아와 꽂히는 것이며 영롱한 아침 햇살 아래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라고 이 시의 화자는 보고 있다. <2005년 4월 18일>
해남에서 온 편지
이 지 엽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칸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달랑하고 지난 설에도 안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룽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안 그러냐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 잔 혔다 지랄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딸이 수녀원에 들어간다는 편지를 받고 나서 보내는 어머니의 편지형식 사설시조이다. 이 시조의 화자는 남편은 먼저 보내고 자식들은 멀리 도시로 나가 있어 외롭게 농사를 지으며 홀로 사는 시골의 어머니이다. 수녀원에 들어가겠다는 딸에게 인편으로 쌀을 보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푸념과 수녀가 되겠다는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보고픔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아들딸을 보고 싶어하며 외롭게 혼자 사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 작품의 종장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라는 사투리 속에 진하게 드러나고 있다. <2005년 4월 18일>
마음 한 장
김 민 정
펼치면
온 우주를
다 덮고도 남지요
오므리면
손바닥보다
작은 것이 되지요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웃고 울며 살지요
인간의 마음이란 대범할 때도 있고 소심할 때도 있다. 우리는 대범한 사람, 소심한 사람으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때로 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대범과 소심이 공존할 때가 많다. 마음을 크게 가지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대범한 사람이 되지만 마음을 작게 가지면 작은 일에도 계속 부대끼며 사는 옹졸한 사람이 된다. 인생을 넓고 깊게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마음을 너그럽고 크게 갖도록 노력하며 대범하게 웃고 사는 것이 보람 있는 인생이 아닐까. <2005년 5월 2일>
그대의 별이 되고 싶네
정 근 옥
나 그대의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고 싶네
어슴푸레한 숲 속에 바람이 울면
따스한 숨소리 들리는
푸른 별빛에 가슴을 데이어
새벽 길가에
함초롬히 눈뜨고 있는 패랭이꽃
사납고 차디찬 빗줄기가
살가죽을 찢어 벌려
어둠 속에 타오르는 불빛
그 은빛 물풀이 다 자란 후
뿌리째 뽑힌다 해도
낮에는 메마른 사막 속에 숨어 있다
밤에는 깊은 어둠의 바다에
내 가장 소중한 것들로 엮어 만든
금빛 겉옷을 모두 던져버리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밤새껏 울부짖다가
통째로 타오르는
나
그대의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고 싶네
사랑하는 이의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고 싶은 마음은 사랑을 별처럼 영롱하고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낮의 수많은 일상에 부딪치며 살아가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틈도 없겠지만 고요한 사색의 밤이 오면 사랑하는 이가 생각나고, 그의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고 싶다는 화자(話者)는, 가장 소중한 것들로 엮어 만든 금빛 겉옷도 모두 던져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밝은 빛이 되어 주는, 또한 스스로 빛나는 존재인 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2005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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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1)
신 현 필
고무줄 한 자락을
살짝 당겨본다
손끝에 미세하게
당겨오는 지구자락
감지한
고만큼으로
존재하는 나의 우주
바람은 꽃가지를
꽃가지는 꽃가루를
흔들림은 흔들림으로
온 우주를 흔들어,
우리의
아름다운 생도
출렁이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작은 것으로부터 커다란 우주 모습을 감지하고 있다. 작은 고무줄 하나의 튕김만큼이나 삶은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 안에서 우리의 삶은 흔들리고 있다. 한 인간의 삶이란 비록 넓은 우주에서 보면 아주 사소한 작은 존재지만 그것은 나(화자)에게 있어서는 전 우주인 것이다. 때문에 나의 흔들림은 전 우주의 흔들림이 되고 그 흔들림 속에 생이 출렁이고 있는 것이다. <2005년 5월 16일>
웃음
권 영 준
한 뼘 척박한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난다
섬뜩한 뼛조각 속에서
순을 밀어 올리는 그것은,
일그러진 주름의 골을 헤집고
제 몸보다 몇 배나 큰 사랑꽃을 피워 올리는
보기만 해도 눈부신 그것은
아스팔트 위에서
콘크리트 속에서
세상을 떠받히고 있다
인간의 웃음이란 그 하나만으로도 우주를 떠받히는 힘이 되나 보다. 웃음은 확실히 기적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삶이 삭막할 때 부드러운 미소가 있다면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부드러워지는가. ‘제 몸보다 몇 배나 큰 사랑꽃을 피워 올리는/ 보기만 해도 눈부신’ 것이 바로 웃음이고 미소인 것이다. 많이 웃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삶이 척박할수록, 웃을 일이 없더라도 자꾸만 웃다보면 생은 정말로 행복해질 것이다. <2005년 5월 23일>
매봉산 딱따구리
윤 금 초
떡갈나무 숲길 열고
부챗살 펼친 붉은 아침
세속 도시 기웃대다
쉬엄쉬엄 숨 고르다
따그락 딱딱 따그락
젖은 발목 말리고 있네
기름기 도는 잎새 위를
둥둥 떠가는 봄 그리매
해종일 산빛 두르고
들숨 날숨 돌아와서
따그락 딱딱 따그락
저문 전(廛)을 거두고 있네
매봉산 떡갈나무 숲 속에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구름이 떠가는 한가한 봄날 매봉산 숲속에서 딱따구리는 해종일 나무를 쪼며 먹이를 찾고 있는 것일까. 화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숲의 적막을 깨며 나무를 쪼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딱따구리를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2005년 5월 30일>
파로호 가는 길
김 민 정
아리디 아린 기억 파로호는 눈을 뜨고
이끼 낀 비목에도 새파랗게 돋아나는
설움은 굽이굽이길 비단처럼 펼쳐진다
해산령 마루에서 들꽃으로 흔들리다
두견이 울음소리에 꽃대만 남아 떠는
슬픔은 이 땅 위에 피는 또 하나의 꽃이었다
그 날의 젊은 피 노오란 달맞이꽃
고향 못간 그 사연을 향기로 띄우나니
못다 핀 젊은 꿈 두고 강물은 흘러간다
2002년 여름 시조시인협회 세미나를 화천에서 개최하면서 화천 파로호 근처를 구경했다. 평화의 댐을 보기 위해 지나가는 아흔아홉 구비의 해산령, 몇 십년 동안 사람들의 접근을 금지하여 왔다는 울울창창한 숲에는 지금도 산짐승들이 나타나고 비목이 발견된다고 한다. 화천 파로호 근처는 육이오 때 심한격전지로 수만 명의 젊은이가 전사했던 곳이다.
'비목’공원에는 그 때의 젊은이를 추도하는 비목 노래가사가 적힌 시비가 있으며 화천군에서는 해마다 ‘비목제’를 개최하여 우리의 슬픈 역사와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다시는 슬픔의 꽃이 이 땅위에 피지 않기를, 그리고 어서 빨리 이 땅에 평화통일이 오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썼던 작품이다. <2005년 6월 13일>
고향길
조 주 환
내 감성의 여울목에 푸른 불길로 타는
아직 마르지 않은 영혼의 탯줄 같은
아득한 경상도 길섶의
능금 꽃을 따 문다
칼 끝 같은 슬픔이 박혀 더욱 푸른 그 하늘빛
금호강 강물로 울던 내 젊은 날 상흔은 지고
보현산 산굽이 아득히 한 생애가 저문다
금 간 항아리처럼 등이 굽은 내 노모는
모진 세월로 퇴행성 관절을 앓고
바람은 눈발을 날리며
갈대처럼 흔들린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운 곳이다. 시인에게 있어서도 ‘내 감성의 여울목에 푸른 불길로 타는’ 곳이며, ‘마르지 않은 영혼의 탯줄 같은’ 곳이다. 첫 수에서는 그리운 고향을 그리는 모습이고, 둘째 수에서는 ‘금호강 강물로 울던’ 젊은 날을 지나 저물어가는 시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셋째 수에서는 고향과 함께 떠오르는 ‘금간 항아리처럼’ 늙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읊고 있다. <2005년 6월 20일>
바리바리 비
이 영 지
단비를 좋아하는 바람이 나를 본다
후두둑
마음 창을 비단비 비비대면
부비어
한 아름으로 촉촉하게 젖어라
물방울 바리바리 싣고서 나를 본다
가뭄의 눈물비에 비날개 달아주며
초록비
바리바리 비 타는 들판 젖어라
후두둑 마음창을
비단비 비비대며
비알들 물알되어
부비며 비오신다
머릿결 촉촐히 적셔 초롱초롱 해져라
이 시의 화자는 비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다. 비 오는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는 이 시조는 행갈이를 자유롭게 하고 있다. 첫 수에서는 비단비 같은 단비가 내리면 마음이 촉촉하게 젖기를, 둘째 수에서는 가뭄 끝에 오는 눈물비라고 하여 비를 기다리는 들판을 적셔 초록 들판이 되기를, 셋째 수에서는 비단비를 맞고 초롱초롱한 맑은 마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곧 장마철이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비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2005년 6월 27일>
정동진에서
김 민 정
어둠 속을 달려오는
정동진의 밤 파도
우르르 몰려왔다
재빠르게 달아나며
어린 날 기억 속으로 나를 잡아 이끈다
옷 젖는 줄 모르고
뛰어놀던 백사장에
발자국 지워가며
따라오던 하얀 포말
까르르 자지러질 듯 배꼽잡고 웃고 있다
아련한 영상 속에
그리움의 집을 짓고
잠시 만난 동심에서
아스라이 멀어지는
그대는 삶의 바다에 또 얼마나 젖었는가
두 발을 적시고
온 몸을 적시고
영혼까지 다 적시며
살아온 세월들이
정동진 바닷가에서 철썩이고 있었구나
정동진은 ‘모래시계’로 유명해진 정동쪽에서 해가 뜨는 곳이다. 주로 시인들이 아침을 노래하는 곳이지만 밤에 찾은 정동진에의 느낌은 어린 날의 바닷가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었다. 수없는 발자국을 만들며 뛰어놀던 어린 날의 즐겁던 바닷가, 아련한 영상속의 모습들이다. 걱정근심이 없던 어린 날의 즐겁던 바다와 많은 질곡 속에 살아가는 인생의 바다를 오버랩 시켜보았다. 인생의 바다에 깊이 빠지며 살아왔을 나와 내 이웃, 우리 모두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2005년 7월 4일>
독도는 한반도다
권 갑 하
너는 독도(獨島)가 아니다 외론 절도(絶島)가 아니다
동해의 붉은 해가 가장 먼저 너를 깨우고
공연히 푸른 파도가 밤낮없이 호위하겠는냐
꿈속에서도 너의 심장은 뜨겁게 고동치고
날이 밝으면 장엄한 백두의 위용 그대로다
오천년 역사를 일궈온 강골의 내 피붙이다
이젠 널 외론 섬 독도라 부르지 않겠다
보라 네 가슴에 선명한 한반도의 형상을
오대양 육대주를 향해 뻗어나간 저 기상을
그렇다 너는 한반도다 붉은 피가 들끓는
배달겨레의 자존, 깨어있는 혼이다
이 땅의 자유와 평화 지켜나갈 불사조다
독도에는 한반도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지형이 있다고 한다. 일본은 역사교과서 왜곡과 함께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조선 시대의 지도에도 독도는 조선의 땅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우리는 더욱 강력한 의지로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하고 우리땅이기에 지켜야 한다. 화자는 이 작품에서 독도는 우리의 땅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특히 넷째 수에서 ‘그렇다 너는 한반도다 붉은 피가 들끓는/ 배달겨레의 자존, 깨어있는 혼이다/ 이 땅의 자유와 평화 지켜나갈 불사조다’라고 하여 독도가 한반도의 땅임을 강조하고 있다. <2005년 7월 11일>
자랑스런 이등병
김 양 수
안개서린 긴 터널을
숨가쁘게 빠져나와
씩씩한 아들의
거수경례 받고서
아비는
가장 진실된 반가움을 보았다
아픔과 눈물로
떨리는 손으로
이등병 계급장을
가슴에 달아주며
아비는
가장 귀하디귀한 보물을 만졌다
45년의 역사 속에
함께 한 단 하루는
언뜻언뜻 보이던
그 어떤 행복처럼
영원한
화석으로 남아 우리 곁에 누웠다
이 시 속의 화자는 면회 간 이등병 아들에 대한 회포를 말하고 있는 아버지이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놓고 가슴 조이며 면회를 가 씩씩한 아들을 만나보고 이등병 계급장을 달아주며 흐뭇해하고 행복해 하는 이 땅의 모든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남자는 군에 갔다 와야만 비로소 철이 들고 남자다와진다고 하시던 어른들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전방에서 이 땅의 평화를 지키고 있을 늠름하고 씩씩한 우리 장병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2005년 7월 18일>
질경이
이 인 웅
전생에
무슨 죄로
밟혀만 사는 건가
기름진 땅
마다하고
길가에 뿌리내려
한 평생
꺾이는 아픔
길들이고 있으니
시골 길가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질경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 어디에서나 쉽게 자라고 뿌리 깊게 내려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기름진 땅에서보다 척박한 땅에 더 잘 자라는 습성이 있다. 생활력이 강하다고 ‘질경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아니면 잎맥의 줄기가 질겨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다. 4월 초순에서 봄․여름에 걸쳐 잎과 뿌리를 뜯어다가 데쳐서 쌈을 싸 먹기도 하고 무쳐서 나물로 먹기도 하고, 5월 상순에 다량채취하여 말렸다가 식용하는 구황식물이기도 하다. 또 어렸을 때는 그 잎맥의 줄기를 뽑아내서 누구 것이 질긴가 내기하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시의 화자는 ‘기름진 땅 마다하고 길가에 뿌리 내려’ 오가는 이의 발에 밟히고 꺾이면서도 강한 생활력을 지닌 질경이의 삶을 안쓰러워하고 있다. <2005년 7월 25일>
대청에 서면
김 민 정
흐르는 구름하며 제멋 겨운 나무하며
바람소리 산새소리 데불고 살 줄 아는
설악은 기골장대한 늠름한 사내였네
한 치 키를 더 해 본들 여전히 높은 하늘
팔 벌려 안아본들 여전히 넓은 세상
인간은 어느 귀퉁이 자기 성을 쌓고 있나
설악은 겨울이라야 산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눈 쌓인 겨울에 보면 산 능선의 기골이 제대로 드러나 왜 산의 이름이 설악인지를 알게 해 준다. 갈비뼈를 드러내듯이 산의 능선을 드러낸 겨울 설악산의 위용은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아니라 남성적인 기골을 느끼게 한다. 흐르는 구름과 제 멋 겨운 나무와 바람소리 산새소리 등을 모두 포용하며 서 있는 산은 너그럽고 늠름한 사내대장부를 연상시킨다. 정상인 대청봉에 올라 심호흡을 하다보면 자기의 성을 쌓기 위해, 아웅다웅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참으로 작아 보인다. <2005년 7월 25일>
비룡폭포
한 분 순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아픔을 다져
비바람 몰아치는 날은
큰 날개
둥지 접는다
벼랑에 버틴 깊은 속이사
거목(巨木)인가
바람이던가
맑고 정(淨)한 몸짓,
젊은
목욕을 한다
회오리 드나들면서
솟구쳐 고이는 것
청산에 감기는 연기
문득 산이 우네
강이 젖네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다지며 부딪쳐 부서지는 폭포의 아픔, 벼랑에 버틴 깊은 속이사 거목인가 바람인가고 화자는 묻고 있다. 폭포, 그것은 맑고 정한 몸짓이며, 흐르는 것이 아니라 솟구쳐 고이는 것이며 청산에 감기는 연기이다. 둘째 수 종장의 ‘청산에 감기는 연기/ 문득 산이 우네/ 강이 젖네’라는 표현은 깊은 산속 폭포의 모습을 노래한 절창 부분이다. <2005년 8월 8일>
우포늪 환상곡
이 상 범
어쩌면 마지막 지휘일지 모르겠다
노구에 연미복 끌며 천천히 등장하는
먼 달빛 조명 받으며 무대중앙 서 있다
달팽이의 여린 뿔에 휘감기는 우주의 소리
숨 막히는 고요 속에 비밀의 문 열어 놓고
음색도 꺼풀 벗고서 별빛 불러 앉힌다
숲에 바람이 일고 물면이 들먹인다
이파리와 이파리 사이 밤의 향기 돌며 가고
저 멀리 강물이 뉘인 곳 풀숲들이 웅성댄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가 잡은 지휘봉에 춤추는 우포환상곡
갈채 속 연미복 끌며 점 하나로 사라진다
이 작품의 화자는 달밤 ‘우포늪’에서 본 달팽이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묘사와 진술의 반복 표현법을 통해 작품을 구성해 가고 있다. 달팽이의 여린 뿔에는 우주의 소리가 휘감기고, ‘모든 것이 가능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가 잡은 지휘봉에 춤추는 우포 환상곡’이라고 하여 고요한 달밤의 우포늪의 느리게 움직이는 달팽이의 모습으로 우포늪 전체의 고적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달팽이는 시인자신의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2005년 8월 22일>
바람의 초상
엄 창 섭
피곤한 내 영혼이
상한 갈꽃처럼 쓰러져 누운
혼탁한 세기의 늪에
푸른 월광은 쏟아지고
깊은 밤, 불 꺼진 창 두드리며
눈물 묻은 상기된 볼에
감미롭게 입맞춤하는
긴 머리카락 날리는
얼굴 없는 당신은 누구신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얼굴 없는 바람의 모습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첫째 연에서는 피곤한 영혼이 쉬는 푸른 월광(달빛)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밤을 표현하고 있으며, 2연에서는 깊은 밤 부드럽게 부는 바람을 노래하고 있다. 바람을 ‘눈물 묻은 상기된 볼에/ 감미롭게 입맞춤하는/ 긴 머리카락 날리는 얼굴 없는 당신’이라고 의인법을 사용하여 부드럽고 감미로운 바람의 이미지를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2005년 8월 29일>
어라연 계곡
김 민 정
청산을
넘지 못해
물소리로
우는 강물,
강물을
건너지 못해
바람소리
우는 저 산
아득히
깊고도 푸른 정
한세월을 삽니다
중국 비단길<실크로드>을 여행하고 나서야 중국인들이 왜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워낙 넓은 중국은 경치가 빼어난 곳도 많지만 넓은 황무지와 사막도 많다. 반면 우리나라는 사방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푸른 산과 맑은 물을 볼 수 있어 삭막함이 없다. 강원도 영월에는 김삿갓(김병연)의 묘소가 있는 아름다운 동강, 그리고 아름다운 어라연 계곡이 있다. 산은 산대로 높고, 물은 물대로 흐르고 있는 그 변함없는 관계,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건너가지 못하고 있는 듯한 산과 물, 산은 산이요 물은 물로 존재의 당위성만을 영원히 지켜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노래해 보았다. <2005년 9월 5일>
입추날 연꽃을 보며
정 근 옥
강변은 여름빛으로
흔흔히 젖는다
물새가 깃을 치고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면
연꽃 사이로 휘도는
붉은 비단잉어 한 마리
저 천일(天日)의 아름다운 빛을 띤
물고기를 투망질하여 잡아먹고
쓸모없는 똥만 남기는
허욕 가득한 슬픈 중생들
무성했던 강변의 여름빛을 잃어버리고
나뭇잎을 한 잎 떨어뜨리며
가을속으로 걸어간다
자연은 욕심이 없는데 인간은 쓸데없는 욕심이 너무 많은 것일까. 아니면 살아남기 위한 방편일까. 여름빛으로 흔흔히 젖은 강변, 물새가 깃을 치고 날아오르는 자연은 아름다운데 인간은 그 자연을 훼손하며 사는 것일까. 이 시에서 화자는 인간이 그 아름다운 비단잉어를 잡아먹고 쓸모없는 똥만 남긴다고 인간의 헛된 욕망을 책망하는 한편 ‘슬픈 중생들’로 표현함으로써 그러한 인간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무성했던 강변의 여름빛을 잃어버리고/ 나뭇잎을 한 잎 떨어뜨리며/ 가을속으로 걸어간다’는 표현 속에는 아름다운 자연을 훼손하여 상실해 가는 인간의 모습과 젊음을 뒤로하고 인생의 가을속으로 걸어가는 쓸쓸한 인간의 모습을 함께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9월 12일>
유민(流民)의 꽃
-연변 역사 전시관
이 은 방
용정 연길 간도 땅에
조선민초 혼을 본다
한자락 가난한 꿈
남녘 별로 여워두고
어쩌다 표류해 가는
부평초의 역사였다
길섶에 핀 개망초꽃 이슬 젖은 웃음들이
박물관에 모여 앉아 회고록을 쓰고 있다
시공을 넘겨다보면 피흘려 온 일대기다
밀려온 탯줄을 묻고 변성의 바람이 운다
해란강 낮달로 빠진 이민사의 젖은 불빛
난파된 죽지의 악몽도 그 멀미로 시달렸다
다시금 밟으리라는 눈 먼 화신 귀향 꿈도
먼 회역 강둑에 올라 흐린 눈을 자꾸 닦고
그 무슨 천형의 길은 눈발 속에 빠져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연변 역사박물관의 모습을 보고 감회를 읊고 있다. 연변에는 일제 시대 이민을 가서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인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 용정, 연길, 간도 등은 박경리의 토지에서 주인공 ‘최서희’의 남편 ‘길상’이가 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곳이기도 하며, 또 ‘선구자’라는 가곡에도 등장하는 ‘해란강’이 있는 곳이며, 우리의 많은 선각자들이 가서 독립운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이민을 간 사람들은 조선의 힘없는 민초였으며 남의 땅에 가서 그곳을 개척하며 힘겹게 살아온 것이다. 그들의 역사를 모아놓은 ‘박물관’을 살펴보며 화자는 ‘시공을 넘겨다보면 피 흘려 온 일대기다’라고 표현하여 그들의 힘들었던 삶을 아파하고 있다. <2005년 9월 26일>
청계(淸溪), 다시 흐르다
김 민 정
신선한 새벽종소리 청계 타고 흐르면
생명의 노래처럼 파아랗게 숨쉬는 물
막혔던 서울심장부 동맥 하나 트이고
북악 인왕 두 산자락 적시며 흐르던 물
광통교와 수표교 등 옛이름도 찾아주며
그 푸른 날들의 기억 다시 살아 흐르네
바깥 물은 한강이요 안의 물은 청계라는
사대문 안 풍수지리 다시 한 번 일깨우며
전설로 묻히던 이름 제자리를 찾아가고
우리 다시 불러보는 그리운 이름 앞에
지즐대며 돌아오는 그대 밝은 목소리여
바람도 축복 한 아름 그대 앞에 부려주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대 맑은 청계눈빛
반짝반짝 윤기나는 자태 고운 모습으로
부활의 눈부신 아침 싱그럽게 피어나고
한 폭의 수채화 속 친환경의 물줄기엔
물고기가 살아나고 생태계가 살아나고
남산골 선비정신도 파득파득 살아나네
버드나무 늘어지고 길가에도 꽃이 피면
아낙들의 하얀 정담 서리서리 감겨있을
추억의 청계빨래터 푸른 물살 너울지고
너와 나의 그리움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우리 함께 어우러질 만남의 장 청계마당
세월교 야경 속에서 꿈과 사랑 익어가네
성북천과 합류하는 정에 겨운 두물다리
부드러운 마음들을 서로 모아 화합하며
새로운 꿈을 펼쳐갈 아름다운 나래교여
천만 시민 가슴 속에 밝은 꿈을 심어주며
근심 걱정 맑게맑게 씻어가 줄 고운 청계
영원히 아름다울 서울, 그 중심을 흐르네
10월 1일 역사적인 청계천이 복원되어 맑은 물이 흐르게 되었다. 언제 독가스로 인해 폭발될지 모른다고 위험해 하던 청계천이 복원되어 맑은 물이 흐르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생태공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청계천으로 하여 주변의 기온까지 내려간다고 하니 주변의 환경에 많은 변화를 주고 있고 야경도 아름다워 서울시민의 많은 사랑을 받을 것으로 여겨지며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까지 많은 관광객이 몰려 올 것으로 예상된다. 모쪼록 환경과 경제가 함께 살아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5년 10월 10일>
북한강
윤 제 철
가을 옷을 벗은 산 중턱에
숨어 있던 몸을 들어 내놓고
북한강 물에 비추는 그림자는
작은 물오리를 이끌고 건너간다
강물에 던져버린 마음의 쓰레기를
상류에서 하류로 끊임없는 빗질로
쓸고 쓸어도 치워지지 않고
빨갛게 물들이고 가슴을 적시던 일몰은
겨울 문턱에서 칙칙하게 문을 닫아
메마른 호흡을 갑갑하게 한다
색채가 선명하게 살아 움직이는
햇살 아래 빛깔들이 눈에 차더니
어둠이 몰려드는 강변에
걸어놓은 풍경들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상상에 얹힌 의미를 토해낸다
화자는 지금 저무는 강가에서 강을 바라보고 있다. 가을 옷을 벗은 산은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강물에 마음의 쓰레기들을 던지고 상류에서 하류로 쓸어내리지만 마음의 쓰레기들은 쉽게 치워지지 않고 겨울문턱에서 화자의 호흡을 갑갑하게 하고 있다. 그렇게 쉽게 흘려버릴 수 없는 것이 마음의 쓰레기들임을 일깨우고 있다. 밝은 햇살 아래서는 빛깔들이 선명하게 살아나지만 어둠이 오면 그것은 어둠에 묻혀 상상에 얹힌 의미만을 토해낼 뿐이라고, 어둠 속에 묻혀가는 가을강가의 모습을 보고 있는 화자는 말하고 있다. <2005년 10월 17일>
햇살들이 놀러 와서
유 재 영
아가위 열매 익자 가만 휘는 무게여
잎사귀 뒤에 숨은 고 열매 빛깔까지
벌레에 물린 가을이 가랑잎처럼 울었다
보랏빛 여운 두고 과꽃으로 지는 하루
오늘은 한 종일 햇살들이 놀러 와서
마른 풀 남은 향기가 별빛처럼 따스했다
가을날의 따스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봄볕보다 따갑다는 가을볕, 그 볕이 있어 곡식들과 과일들은 익어가고 가을도 영글어간다. 아가위도 열매가 익어 가지가 휘어지고. ‘벌레에 물린 가을이 가랑잎처럼 울었다’에서는 벌레의 울음소리를 가을이 우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랑잎처럼 울었다’고 표현하여 가랑잎이 바스락대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청각의 시각화가 나타나고 있는 부분이다. ‘마른 풀 남은 향기가 별빛처럼 따스했다’는 후각의 시각화, 촉각화가 나타난다. 별빛에서조차 따스함을 찾는 이 시조는 시어 하나하나가 곱고 정겨우며 가을날의 따스함이 잘 느껴지는 감각적인 작품이다. <2005년 10월 24일>
감
정 완 영
그것은 아무래도
태양(太陽)의 권속(眷屬)은 아니다
두메 산골 긴긴 밤을
달이 가다 머문 자리
그 둘레 달빛이 실려
꿈으로나 익은 거다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다 못 달랠 회향(懷鄕)의 길목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돌담 위 시월(十月) 상천(上天)을
등불로나 밝힌 거다
초가집 까만 지붕 위
까마귀 서리를 내리고
한 톨 감 외로이 타는
한국(韓國) 천년(千年)의 시장기여
세월도 팔장을 끼고
정(情)으로나 가는 거다
가장 아름다운 한국적 전원 풍경의 한 단면이다. 우리 민족의 농경문화 속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인 한국의 자연, 한국의 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모습이다. 이 작품의 소재인 ‘감’은 고향의 정서, 자연의 정서를 나타내 준다. 시각적 심상이 두드러진 이 작품에서 ‘감’은 ‘달이 가다 머문 자리’, ‘꿈으로 익은 것’, ‘돌담 위 시월 상천’, ‘핏빛 노을 마신 등불’, ‘한국 천년의 시장기’, ‘정’으로 나타내어 은유 및 상징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고향의 정서가 ‘감’으로 형상화 되어 있다. 감이 익어가는 공간은 한국의 어느 산비탈의 모습일 수도, 아니면 마을 한가운데의 모습일 수도 있다. 늘 우리들 마음이 달려가는 고향, 그곳엔 언제라도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고 넉넉하게 감싸주는 자연적 환경이 있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의 단면을 위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2005년 10월 31일>
낙동강
이 근 덕
고요히 묵상하는 정적 속 깊어진 밤
사르르 눈감으면 은빛처럼 반짝이는
낙동강
하얀 모래밭
새록새록 떠올라라
수채화 한 폭 같은 낙동강 천 삼백 리
총총한 밤하늘에 북두칠성 샛별 찾던
그 시절
하, 그리워라
다시 한번 가고파라
기러기 끼룩끼룩 구슬피 울던 달밤
강어귀 갈대숲엔 정겨운 물새소리
그리움
애틋하여라
옛 시절이 그리워라
아름다운 낙동강의 흐르는 모습이 잘 나타나고 옛날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화자가 나타나고 있다. ‘은빛처럼 반짝이는’,‘사르르’, ‘새록새록’등 시어들이 부드럽고 다정다감하여 낙동강물이 조용하고 부드럽게 흘러가는 이미지를 드러낸다. 첫째 수와 둘째 수에서는 시각적 이미지가 잘 나타나고 있으며 셋째 수에서는 ‘달밤’, ‘강어귀 갈대숲’ 등의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구슬피 울던’, ‘물새소리’ 등의 청각적 이미지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시에서는 낙동강 천 삼 백리 긴 흐름처럼 옛 추억에 대한 화자의 그리움도 길게 흐르고 있다. <2005년 11월 14일>
석류나무 한 그루
김 여 정
언제 누가 심었을까
나도 몰래
나도 몰래
석류나무 한 그루
내 가슴 속에 자라서
어느새 탐스럽게 열린
석류에
노을이 스며들고
일몰의 태양이 빠져들어
터진 껍질 속에서
번뇌의 별들 알알이 빛날 때
아, 그제야
나도 몰래
석류나무 한 그루
내 가슴 속에 자라고 있었음을
알았네
화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자신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슴 속에 자라서 석류는 노을이 스며들고 일몰의 태양이 빠져들어 터진 껍질 속에서 빛나는 것은 번뇌의 별들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삶의 번뇌, 석류알처럼 알알이 익어 빛나고 있음을 시인은 이 시에서 말하고 있다. 붉게 익어 보석처럼 빛나는 석류알을 자신 속의 ‘번뇌의 별들’로 표현한 시인의 비유적 표현법이 뛰어난 시이다. <2005년 11월 21일>
법주사
장 지 성
골도 깊은 골을 속리라 이름 하고
석등에 불을 밝혀 깨우친 누리라면
불이문 안과 밖에는 마음 넘쳐 비울 것도
탑돌이 후광 속에 기척 없이 오신 대불
오리숲 한나절에 되려 눈이 감아지네
적막도 시방 피는가 쇠북 소리, 그 파장…
빗장 푼 대웅전은 죄업들도 시름인 양
추켜올린 하늘 한점 기왓장에 골을 치고
그림자 밟히지 않는 인간 꿈은 어디인가
속세를 떠난 곳에 ‘속리(俗離)’는 존재한다. 인간세를 떠난 속리, 그 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법주사. 석등에 불을 밝히며 깨우치는 세상, 속세와 속리가 둘이 아니듯이 마음은 넘칠 것도 비울 것도 없음을 깨닫고 있다. 탑돌이를 하다가 보면 대불은 어느새 내 안에 있다. 마음을 깨우치면 그가 곧 부처이고, 오리숲을 걷다보면 부처처럼 눈이 감기고, 적막 속에 울려 퍼지는 쇠북소리…. 모든 죄업을 받아들이려는 ‘빗장 푼 대웅전’에 하늘은 기왓장에 골을 치고 있다. 속세를 떠난 곳, 속리(俗離)에 와서, ‘그림자 밟히지 않는 인간 꿈은 어디인가’라고 하여 결국 이 세상 어느 곳도 속리가 되지 못함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2005년 11월 21일>
청어의 시
이 승 은
노릇하게 잘 구워낸 청어 살점을 뜯다
지나온 내 죄목인 양 목에 걸린 잔가시들
말 못할 저항만 같아 배앝지도 못하네
검푸는 물길 속에 넘실대던 그 자유를
목마른 식욕으로 삼켜버린 어스름녘
애꿎은 시간의 갈피에 다시 슬몃 가시는 돋고
이 시는 노릇하게 잘 구운 청어를 먹다가 목에 걸린 가시가 시의 소재이다. 가시 많기로 유명한 생선 청어, 목에 걸린 청어의 가시를 화자는 ‘지나온 내 죄목인 양’하다고 하여 지나온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있다. 또한 목에 걸린 가시를 청어의 ‘말 못할 저항’만 같다고 느껴 ‘배앝지도 못하’고 있다.
검푸르게 넘실대는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살던 청어의 삶, 그것을 식욕으로 삼킨 인간의 대변자인 화자는 시간의 갈피, 삶의 갈피에도 문득 가시가 돋음을 인식하고 있다. <2005년 12월 12일>
흔들림
김 영 재
흔들리며 사는 일이 때로는 아름답다
더불어 살아가면 더불어 흔들리고
혼자서 길을 걸으면 혼자서 흔들리겠지
느리게 기어가면 느리게 흔들리고
빠르게 달려가면 빠르게 흔들리는
이것이 사람살이의 또 다른 깨달음인 것을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선남선녀들은 늘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며 살아간다. 작은 일 하나에도 언제나 망설이며, 외부에서 불어오는 작은 바람 하나에도 늘 부대끼며 흔들리며 그러한 가운데서 자기정체성, 자기중심을 잡아가며 살고 있다. 더불어 살아가면 더불어 사는 대로의 흔들림이 있고, 혼자서 살아가면 혼자서 사는 대로의 흔들림이 있으며, 느리면 느린대로의 흔들림이 있고, 빠르면 빠른대로의 흔들림이 있음을, 그것이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임을 이 시의 화자는 깨닫고 있다. <2005년 12월 19일>
돌 ․ 7
백 이 운
저무는 겨울 바다
수평선 접어 두고
쌓았다 허물었다
파도 혼자
짓는 집
갈매기
끼룩 날개쳐 봐도
너는, 아아
말없구나
저무는 겨울 바다, 그 속에서 파도는 혼자서 끊임없이 ‘쌓았다 허물었다’를 계속하며 허무의 집, 고독의 집을 짓고 있다. 이 작품은 저무는 겨울바다에서 끊임없이 혼자 집을 쌓았다 허물었다 하는 파도와, 끼룩 날개치는 갈매기는 살아있음의 인식과 사랑하는 사람에게의 사랑의 고백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겨울바다로 상징되는 이가 시인 자신이라면, 끝내 말이 없는 너는 돌로 상징되며 시인의 과묵한 삶, 또는 시인의 사랑하는 이라고도 해석해 볼 수 있다. <2005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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