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와 화해의 시학
- 김민정론
이지엽 (시인, 경기대학교 교수)
1. 순수의 이미지스트
김민정 시인은 이미지스트다. 대부분의 이미지스트가 그러하듯이 김 시인의 시 세계는 순수하고 아름답다. 이번의 새 시조집『지상의 꿈』에는 편편마다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와 자연친화적이고 부드러운 비유를 통하여 순수의 정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희원이 잘 형상화 되고 있다.
하르르 무늬바람
하르르 무늬물결
그대 향기 하도 짙어
숨이 막혀 오는 날은
속눈썹 타들어가며
불 지피는 나의 연가
-「음악을 위하여」부분
물결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 들려오고
내 사유의 뜨락에도
하얀 달빛 밤새 내리는
오, 푸른
종소리 같은
그대편지 오실까
-「가을편지 」부분
「음악을 위하여」나, 「가을편지」는 그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을 위하여」에는 “하르르”의 의태어가 바람이나 물결의 부드러움을 형상화 시키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무늬바람”이나 “무늬물결”은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바람이나 물결이 무늬를 이루면서 “하르르” 다가오는데 시인은 이 풍경을 통해 그대의 “향기”를 느끼며 숨까지 막히고 종국에는 눈썹까지 타들어가고 있다. 시각이 후각으로, 후각이 다시 촉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시는 철저하게 이미지를 통해 서정자아의 심리 상태를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가을편지」는 어떠한가. 이 작품은 물결과 바람과 산새의 청각적 이미지와 “하얀 달빛”의 시각적 이미지가 접합되면서 “푸른 종소리 같은 그대편지”의 청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미지는 종류나 표현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기 마련인데 김 시인의 시에서는 자연 친화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이 지배적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우리가 살펴보아야할 문제 중 하나지만 이미지로만 국한해보자면 청각이나 촉각 등 다른 이미지보다는 시각적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그리움의 빛깔은」에는 “눈부시게/ 쏟아지는/저 무량의 가을 햇살”과 “나비처럼/팔랑이는/저 노오란 은행잎”, “불처럼/타오르고 있는/저 빠알간 단풍잎” 이라고 하여 모든 시적 대상이 회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김 시인은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미지나 비유의 묘사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
하이얀/그리움의 피돌기/순교의 절창이 빛난다 (「눈사람」)
수련보다 더 고운/아련한,/연분홍 그리움이라는 걸 알았습니다(「연꽃 만나러 가는 길 1 」)
푸르른 하늘을 향해/싱싱한 꽃대궁을 밀어올리는 (「연꽃 만나러 가는 길 1」)
잔잔한 수면을 향해/힘차게 솟아오르는 푸른 잎과 (「연꽃 만나러 가는 길 2」)
보드라운/느티 속잎/푸드득 날개 펴면//저것 봐/저것 좀 봐/천지간의 초록 물결//생명 그,/만발하는 무지개/분수처럼 솟구치는(「남산의 봄」)
하늘하늘/ 아지랑이/온 서울을 휘감더니---연초록/고운 바람이/사운대고 있잖아 (「남산의 봄」)
남해 통영/달아 공원/이른 봄의/청매 향기 (「남해 봄빛」)
촉촉이/양수 터트려/푸른 봄을 낳고 있다 (「봄비 2」)
보오얀/꿈을 꾸는/아가의/솜털 같은//고요한/햇살 속에/터지는/초록 함성//팽팽히/부풀어 오르는 (「오, 눈부신」)
우체국 앞 하얀 목련/이영도를 닮았을까//푸른 말/울음소리에/노을이 또 타고 있다 (「유치환론-靑馬거리」)
잣나무 가지 끝의 푸름으로 일렁이며 ---별빛 담은 눈빛들이 싱싱한 풀빛들이 (「진달래 필 무렵이면」)
그리운 /그대 얼굴 같은/강변 하얀 갈대꽃 (「작별의 한때」)
물감처럼/풀어놓은//연보라빛/그리움이//송이송이/등 밝히고 (「등꽃 피는 날」)
맑고 깊게/울리는/선율처럼/부드럽다//익을수록 의연해져/스스로 둥글어져(「가을 박」)
맑고 환한/얼굴의/형형한 가을 눈빛//투명히/피어오르는/저/눈부신 사랑 (「사루비아」)
여기에 인용하지 않은 작품도 상당수에 이른다. 문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다음의 작품에서 시인의 의도는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 길 을
따
라
서
가 을 이
오고 있다
저 길 을
따
라
서
가 을 이
가고 있다
오 가 는
길
은
하
나
다
시 간 들 이
다 를 뿐
-「저 길을 따라서」전문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포말리즘의 기법도 시인이 얼마나 이미지를 중시여기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에 속한다. 물론 이 형태를 통해 시인은 “저 길”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시각적으로 보이고자 했을 것이다. “저 길”은 구불구불 하지만 그 길로 가을은 또 오고 가고 있다. 가고 오는 길은 시인은 “하나”라고 말한다. “시간”들이 다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여기서 “길”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이 “길”의 존재를 찾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미지스트이기 때문에 이 영원한 길에 대해 욕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냥 보여줄 뿐이다. 보여주는 것으로써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러기에 시인은 “영혼의/젖은 음색/갈피갈피 부리면서//추억처럼/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밤//기다림/등불을 켜고/만리 밖을 비추네//”(「가을비 내리는 밤」부분)에서 보듯 청각적인 요소도 시각적 요소로 바꾸어 서정자아의 심경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미지스트들은 대부분 생의 색깔에만 관심을 두고 깊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살아가는 일이 어찌 보이는 것에만 있겠는가. 가슴 저미는 아픔과 고통과 고뇌가 드문드문 동반되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김민정 시인은 이미지스트이면서도 이 점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음의 작품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울성 가장자리
성가퀴로 돋아나면
그 높은 새둥지에도
등불 하나 걸리고
팔팔팔
끓는 백비탕에
녹아드는 한 생애
-「설야」부분
은은히 울리면서
빛이 되어 흐르는
천년보다 더 긴 세월
영혼의 기침소리
가파른
생의 계단을
이 밤 누가 오르는가
-「종」부분
이 작품들 역시 이미지 중심의 시이긴 하지만 단순히 이미지로만 설명할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진다. 그 점은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가.「설야」를 먼저 검토해보면 이 작품 역시 초장과 중장은 다른 작품과 같이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겨울 “높은 새둥지”에 “등불 하나”를 내거는 모습이니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문제는 바로 다음이다. “팔팔팔/끓는 백비탕에 /녹아드는 한 생애”에서 이 시는 의미심장하게 바뀐다. “팔팔팔/끓는 백비탕”이라고 눈 오는 밤을 묘사한 새로움도 새로움이지만, 여기까지 형상화된 이미지를 일시에 “녹아드는 한 생애”로 바꾸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의 표현기법을 이미지 중심에서 인생관 중심의 주제로 옮아왔기 때문이다. 이 점을 유념하고 「종」이란 작품을 보면 이 작품의 깊이가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시 역시 초․ 중장에서 형상화된 시각적 이미지 (“빛”)와 청각적 이미지(“영혼의 기침소리”)를 인생관 중심의 주제의식(“가파른 생의 계단”)으로 환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들은 김 시인의 시가 앞으로 변모를 모색하는 증거로 보아도 좋을 듯싶다.
2. 화해의 시학
앞서 우리는 김 시인의 작품세계가 자연친화적이고 부드러운 세계를 형상화 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자아 밖의 세계를 대결과 긴장으로 인식하지 않고 화해를 추구하는 정신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의 작품을 통해 이것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기다리던
꽃소식에
마음이 온통 달아
찻잔으로
가는 손길
그도 한참 뜨겁더니
비로소
꽃 한 송이가
내 안에서 벙근다
-「기다리는 마음」전문
비울 것 다 비워낸 가벼운 몸짓으로
가지 사이 이는 바람
그도 모두 보내놓고
비로소
맑은 하늘 한 장
펼쳐드는
저 선사(禪師)
「지상의 꿈-용문사 겨울은행」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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