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태극 시조의 고향성 연구
-순수로서의 고향의식-
Ⅰ. 서론 Ⅱ. 순박한 인심의 평화 공간 Ⅲ. 분단된 국토의 인식 공간 Ⅳ. 결론 |
김민정 (문학박사, 시조시인)
Ⅰ. 서론
리태극은 50년대에 등단한 시인이다. 그의 고향의식도 5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6․25로 인한 조국의 분단과 황폐해진 조국의 모습, 그러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생활터전이었던 고향을 떠났고, 타향살이를 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생활 속에 나타났다. 또 6․25로 인한 조국의 분단으로 북한이 고향인 사람들은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불행한 실향민이 되었고, 민족적인 비극인 이산가족도 생겼다. 60․70년대 산업사회가 되면서 우리의 생활터전이었던 농어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났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공간적․정신적 고향상실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鄕愁․思鄕 등의 작품이 문학에 많이 나타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고향이란 전면적인 주변면식(Umgebungsbekanntheit)과 예외없는 방향 설정에의 무욕(Orientierungsunbedürftigkeit)의 총괄개념이다. 인간의 현존은 고향상실(Heimatlosigkeit)의 현존, 존재 망각(Seinsvergessenheit)의 현존이며 고향은 고요하고 위험이 없는 세계지정에 대한 표현이다. 그는 피투성(被投性, Gewofenheit)과 세계내 존재성(In-der-Welt-Sein) 가운데 있는 인간 현존은 그 본래성이 비본래성에 의해 은폐되어 그 본래성을 잃은 상태에 있다고 보고 이런 상태를 고향상실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고향인 본래성의 회복이야말로 철학자의 과제이고, 또 인간의 근본적인 지향 목표라고 보고 있다.7)
이태극의 작품에서의 고향은 바로 고요하고 위험이 없는 세계이며, 고향상실의 현존은 본래성이 비본래성에 의해 은폐되어 그 본래성을 잃은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순수성, 본래성에 대한 향수는 현재의 기계화, 문명화된 생활 속에서 물질문명의 물신숭배로 인해 소외되는 인간성8)에 대한 안타까움과 인간성 회복의 극복의지다. 그가 그리는 고향은 문명의 이기에 물들지 않은 순박한 인정과 때묻지 않은 자연이다. 강원도 화천의 깊은 산과 맑은 물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삭막한 현실과 대비되는 순수한 자연 속의 고향은 자유와 평화의 피안공간이며, 순수지향의 공간이다. 한편 그의 고향의식 속에는 분단된 조국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고, 이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곧 조국통일에의 염원과 통일지향 의식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는 전통적 인본주의와 낙관적 미래관, 자연친화사상 등 현대인이 갈망하는 내면세계를 구축하여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자아성찰로 인간의 순수한 본연의 마음을 갈망하고 회복하고자 하며, 미래지향적인 삶의 의지를 표출하고, 남북이 분단되기 이전의 고향모습을 회복하고자한다.
Ⅱ. 순박한 인심의 평화 공간
이태극의 시조 중 고향의식 발현양상을 살펴보면 순수한 자연과 순박한 인심의 평화 공간과 분단된 국토의 인식 공간으로 나타난다. 먼저 순수한 자연과 순박한 인심의 평화 공간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지정학적 고향은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방현포 268번지이다. 강원도 화천의 깊은 산과 맑은 물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가 그리는 고향은 문명의 이기에 물들지 않은 순박한 인정과 때묻지 않은 자연이다. 그의 고향은 삭막한 현실과 대비되는 순수한 자연과 순박한 인심의 평화공간이며, 순수지향의 공간이다.
그의 작품에는 물질문명의 물신숭배로 인해 소외되는 인간성 상실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는데 순수성, 본래성에 대한 향수는 현재의 기계화, 문명화된 생활 속에 소외된 인간성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인간성 회복의 극복의지가 나타난다. 본 장에서는 그의 고향의식의 작품을 통해 오염되지 않은 순박한 인심의 평화공간으로서의 고향을 살펴보려 한다.
三國遺事 朝鮮條에서 환웅이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라 하여 태백산의 산신이 되어 1908세나 살았다는 것은 영생적인 삶의 염원과 이상적인 삶의 추구를 동시에 추구하는 신선사상이며, 우리 민족의 낙관주의적 인생관을 표출9)하는 대목이라 볼 수 있으며, 이선희도 “이러한 고유의 신선사상은 노장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데, 노장사상에서는 ‘道以自然爲貴’라 하여 자연이 도의 본성이며, ‘樸․卽無爲敦質之體, 爲道之本’이라 하여 어떤 인위도 가하지 않은 자연성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간이 무위자연해야 하며 타고난 대로 소박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道以虛靜爲體, 謙弱爲用’인 虛靜과 謙弱이 도의 성질이 되는 無爲自然의 세계를 이상향으로 삼는다. 즉, 자연친근사상이다. 자연은 인간 삶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도 예부터 하늘을 숭상하고 자연과 합일되는 민족의 정서를 키워왔다.”10)며 월하 시조에 나타나는 전통사상을 살피고 있다.
낙원에의 지향을 N.프라이는 인간은 본래 낙원에서 살았으나 이를 상실함으로써 상실의 회복을 위해 부단히 낙원을 추구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낙원은 천상계를 대표하고, 천상은 통일된 세계, 합일된 세계로서 영원의 세계라는 구원을 시사하는 세계가 된다. 그래서 천상을 시사하는 세계가 되며, 천상계를 지향하는 태양․산․나무․깃발․무지개․화살․새․탑․백조와 같은 사물을 상승지향이미지를 대표하는 원형상징물로 제시한다. 월하의 시조에 나타나는 평화 공간은 이러한 상승이미지들을 동원, 구축하여 이루어짐을 오승희는 그의 논문11)에서 밝힌 바 있다.
순수한 자연과 순박한 인심을 지향하고 그리워하는 이태극의 고향의식은 인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본주의사상과 무위자연을 이상으로 삼는 자연친화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이태극에게 있어 고향은 시인의 회상공간이며 현실의 삭막함과 대비되는 순수한 자연과 순후한 인간이 그려지는 평화공간이기도 하다.
오로지 하늘 바라
靑山이여 서 있는가?
옹종기 네 권속들
날개 펼쳐 마주 쥐고
흘러간 세월에 안겨
오늘 날을 맞음인가.
무리지어 사는 곳에
네 없이 어이하리
물 줄기 바람 소리
언제나 곁에 두고
온갖 것 길러 섬기는
내 벗이여 靑山이여!
소용돌아 風化되어
땅 위에 자리 잡고
네 품으로 찾아드는
人間이 못 잊혀져
그렇게 솟아 앉아서
낮과 날을 삶인가?
-「靑山이여!」전문
이태극의 고향의식에는 山水가 있고, 순후한 인심의 사람들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어질고 인정 많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사는 곳은 바로 화자의 고향이라 볼 수 있으며 바로 여기에는 靑山이 벗으로 있어준다. 이 시조에는 순수자연공간이며 화자의 어렸을 때 자라던 고향의 모습이기도 한 靑山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으며 자연을 통한 서정세계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심정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공간을 가진 고향은 화자에게 평화공간으로 인식된다. 변화무쌍한 현실의 삶 속에서 사는 인간들에게는 변함없는 영원의 모습으로, 우주 만물의 존재공간과 질서공간으로 서 있는 ‘온갖 것 길러 섬기는’ 靑山이 精神的 安息處가 되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청산을 통해서 화자는 꿋꿋하게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를 터득하고 인간의 미덕을 지닌 삶을 그리워하며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시인은 物質萬能主義의 현대인의 삶 속에서 시인의 고향의 모습이기도 한 대자연의 질서를 겸허하게 지켜보며,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이상 세계의 구현을 위한 삶을 끝없이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정감을 자연에 용해시켜 한국적 정서가 잘 드러나는 작품을 씀으로써 抒情的 美學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작품은 고려시대의 나옹선사(1320~1376)의 다음 시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선사의 시에서는 청산과 인간은 不二關係로 화자와 청산의 거리감이 없다. 마찬가지로 이태극의 작품에서도 ‘내 벗이여, 청산이여’라고 표현했는가 하면 ‘네 품으로 찾아드는 인간’이라 하여 청산에 가까이 접근하고, 아예 인간은 그 안에 안겨 안주해 버리는, 靑山은 인간의 彼岸空間으로 제시된다. 또 위 작품은 또 成渾(1535~1598)의
말업슨 靑山이여 態업슨 流水ㅣ로다
갑업슨 淸風이요 님자 업슨 明月이라
이 中에 病업슨 이 몸이 分別업시 늙으리라
라는 시조와도 맥을 같이 한다. 자연 속에서 건강한 몸으로 욕심 없이 살아가겠다는 安貧樂道의 사상이다. 자연과 동화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화자의 정서는 이태극의 작품과 비슷한 정서를 지닌다.
우리 민족은 合自然을 추구하고 그 속에서 自然과 더불어 사는 것을 하나의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했다. 곧 自然親和思想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은 자연과 인간 사이가 主客關係나 從屬關係가 아니라 自然의 흐름 안에서 하나의 질서로서 人間事를 이해했던 것이다. ?논어․옹야?에는 <知者樂水 仁者樂山>이라는 글이 있다. <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仁者는 산을 좋아한다.>는 내용이다. 인간이 왜 산수를 즐기는가에 관해 공자는 주객관의 유사성을 들어 설명한다. <知者는 움직이고 仁者는 고요하다. 知者는 즐기고 仁者는 천수를 다한다.>고 하여 고요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언제나 인간의 벗이 되고 인간의 따뜻한 품이 되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청산은 이태극에게 영원한 고향이기도 하다. 진달래, 산딸기, 산나리 등 그의 시조에 등장하는 자연적 소재는 언제나 그의 고향산천의 모습이다. 그의 고향은 인공이 전혀 가해지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순진무구한 상태의 순수한 자연이며 현실의 각박함이 없는 순박한 인심이 나타나는 평화공간인 것이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靑山에 살고 진 季節
그래 까아만 瞳子같은
알알을 손에 들고
내 여기 삶의 주름 헤며
無限定을 그린다.
아름 차게 이고 진 머루
손에 손을 넘어와서
기계가 날고 기는
長安 뒷집 툇마루에
山精氣ㄹ 맛 보란듯이도
광우리에 담겼다.
-「머루」전문
이태극의 처소적 고향이기도 한 강원도 산골에서 많이 나는 산머루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의 화자는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12)라는 고려시대 「靑山別曲」의 화자와 다를 바 없는 서정을 지니고 있다. ‘머루’라는 소재가 주는 소박함과 순수함에 대한 그리움이 이 작품의 근간이다. ‘삶의 주름 헤며 무한정을 그린다.’는 표현으로 삶의 각박한 현실에서 고향의 순수성으로의 회귀를 갈망한다. 현대 사회는 기계화, 산업화 등의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함에 따라 인간성 상실과 도덕의 부재 등이 팽배하고 있다.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도덕과 질서가 파괴되고 인간의 정이 메마를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들은 기계 문명에 의한 소외감으로 삶의 가치를 잃게 되고, 나아가 자아상실과 소외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고향이 주는 포근한 감정을 잃고 현대문명의 이기로 감정이 메말라 가는 사회에 따스한 정감을 불어넣어 인간성을 회복하고 참된 삶을 추구하는 마음을 이태극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계가 날고기는 장안’의 그 삭막한 서울의 뒷집 툇마루에 산정기를 맛보란 듯이 광주리에 담겨 있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왔을 ‘머루’를 보면서 고향산천을 그리워하는 화자는 바로 순박한 인심을 지향하는 마음이다. 그의 고향의식 속에는 순수하고 소박한 인정과 평화로움이 있다.
골짝 바위 서리에 빨가장이 여문 딸기
가마귀 먹게 두고 산이 좋아 사는 것을
아이들 종종쳐 뛰며 숲을 헤쳐 덤비네.
삼동을 견뎌 넘고 삼춘을 숨어 살아
되약볕 이 산 허리 외롬 품고 자란 딸기
알알이 부푼 정열이사 마냥 누려지이다.
-「산딸기」전문
고향산천의 「산딸기」가 소재가 되고 있는 작품이며, 화천 파로호 옆 이태극의 시비에 새겨진 내용이다. 이 작품에 대해 김준은 “산딸기를 찾아 숲을 헤매는 아이들의 동심의 세계”13)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오승희는 “기실 「산딸기」의 세계는 동심의 세계가 아니라 빛으로 영그는 밝음의 공간으로 엮어가는 삶의 한 과정으로서의 공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14)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곧 밝음의 세계는 빛의 세계로서 구원의 세계이고 행복한 공간으로서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 확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산딸기와 같은 삶의 여정 끝에서 만나는 極地이며, 밝음의 極地는 어둠을 극복했을 때만 가능한 세계이고 공간이다. 시조「산딸기」에는 ‘삼동을 견뎌 넘고 삼춘을 숨어살아’의 극복의지가 있다. 그것은 삼동의 견딤없이 삼춘을 맞을 수 없고, 삼춘을 맞지 않고서는 ‘뙤약볕’의 빛으로 영글 수 없음이 자연의 순리다. 오승희의 견해대로 ‘밝음의 공간으로 엮어가는 삶의 한 과정’이라고 해석하기보다 유년시절 추억으로의 과거지향적 회귀공간으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하다.
탐스럽고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따먹으러 몰려다니던 개구쟁이 아이들이 탐스럽게 딸기가 열린 산딸기나무를 발견하고 지르는 환호성과 그것을 딸 때의 희열은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기 때문이다. 군것질 거리가 별로 없었던 옛날, 가난한 산골에서 계절마다 자연이 주는 열매들은 귀하고 소중한 아이들의 간식이었다.
이러한 소재를 찾는 화자는 이 작품에서 현실에서 잃은 것을 찾고 싶어 행복했던 시간과 공간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한 작은 소재를 작품화함으로써 어렸을 때 고향에서 경험한 추억이 비로소 생명을 갖고 되살아난다. 이태극의 고향에 대한 향수와 자연에 대한 애정이 나타나는 과거지향적 회귀공간의 작품이다.
키다리 수숫대는 주체스레 이삭 달고
푸른 하늘 조아리며 추석을 기다리네
올 가을 수수고물제빈 동이 함께 먹어야지-.
-「수숫대」
그 까만 눈동자들을 동글동글 깜빡이며
동구밖 재재공론 단풍 잎 더욱 고와
덤불 밑 참새 공론도 익어가는 어스름!
-「참새」
흰 머리 너울짓는 저 언덕 갈대숲밭
어깨동무 처얼철 그 소리도 메아리쳐
노을이 비낀 언덕으로 신이 나는 숨바꼭질!
-「갈대」
빨간 고추지붕이 겨울로 다가가네
무 배추 퍼러한 올해 뜰도 풍성하고
엄마의 다래끼 속엔 엄마 마음 가득 해-.
-「고추」
벼 이삭 휘어진 둑 아빠의 환한 얼굴
시루떡 무설기 눈 앞에 서리는 김
가을은 보람만 찬 잔치 누나도 시집간대-.
-「가을」
「가을 五題」는 가을의 정서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한 제목 아래 다섯 편의 단시조 형태의 시조가 있다. 자연이 고향임을 잘 드러내 주는 작품들이다. 산골 정서를 나타내는 소재를 택하여 어린이의 순수한 동심을 노래하고 있다.
무거운 이삭을 이고 서 있는 수수의 모습을 보고 수수고물제비를 동이 채 먹고 싶다는 소박한 동심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다. 동시적 상상력은 복잡다단한 세계를 단순화시켜 바라보려는 순진무구한 세계관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세계는 그것이 지닌 실제적 복합성에도 불구하고 간명하고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어른의 시각에서는 논리적이거나 비판적으로 인식될 만한 세계의 악조차도 천진난만하게 인식함으로써 궁극에는 이 세계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 수수가 열매 맺기까지, 추수하기까지의 힘든 노력, 곡식을 쪼아먹는 참새를 쫓느라, 늦가을 갈대가 흔들릴 때쯤의 을씨년스런 추위 속에 김장준비로 무․배추를 뽑아들이던 늦가을걷이의 어려움 등은 이미 추억과 동심이란 이름으로 걸러진다. 모든 사물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와 여유만이 남는다. 고향의 행복 이미지만 존재하게 된다. 이태극의 추억 속의 고향은 아무런 갈등이 없고, 가을의 풍성함만이 느껴지는 순박하고 순후한 인심공간이며 언제나 여유와 미소를 주는 행복하고 평화스런 시․공간이다.
스스러운 죽지는 접고
발을 터는 처마밑
문고리에 닿는 情이
삶을 지레 솟꾸는데
따라온 사연은 겹쳐
창문 턱에 누웠네.
그믐 달 새어 들어
야위어 서린 벼갯맡
성황당 부엉이도
밤새 울다 지친 思念
저 먼 길 嶺이 뵈는 곳
두고 두고 가는 밤-.
-「酒幕」 전문
위 작품은 ?꽃과 여인?에는 ‘1966년 5. 28일 감나무골’이라 되어 있고, 또 ?노고지리?에는 ‘1966. 5. 湖井’에서라고 되어 있어 작품을 창작한 장소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한편 이것은 詩想의 구상과 창작완성 장소는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긴장된 사회생활에서 오는 피로를 풀기 위해,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목을 축이기 위해 들르는 곳이 주막이다. ‘문고리에 닿는 정이/ 삶을 지레 솟구는데’라는 표현으로 한국인의 인간미가 느껴지는 따뜻한 공간이다. 현대의 각박한 삶의 질곡으로 자아상실감을 느끼는 현대인을 따뜻이 맞아주는 곳이다. 그러나 주막에서도 쌓인 회포는 다 풀지 못하여 ‘따라온 사연은 겹쳐/ 창문가에 누웠다.’고 하여 시름 많은 인생을 말하고 있다. 고향 떠난 삶을 살면서도 언제나 고향의 언덕은 생각나는 곳이기에 그 고향을 마음속에 두고 살고 있다. 특히 우리가 삶의 질곡에 부딪치고 외로움을 느끼게 될 때, 고향은 더욱 간절히 생각나는 안식의 공간이다. 비정한 현대 문명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인 삶을 살게 해 주는 정신적 위안의 장소는 바로 성황당이 있고 부엉이가 우는, 두고 온 고향이다.
이상으로 이태극의 고향의식이 나타나는 작품 중에서 순수한 자연과 순후한 인심의 평화공간으로 인식되는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題名에서 보여주듯이 「머루」, 「산딸기」,「靑山이여」등은 산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다. 그의 고향의식 속에 순수한 자연과 순박한 인심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가을 五題」는 산골의 가을 모습의 풍성함과 후덕한 인심이 나타나는 유년의 평화공간이다. 「酒幕」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고, 고향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언제나 위안의 구심 공간임을 보여준다. 위 고향의식의 작품들에서는 고향은 갈등적 요인이 전혀 없는 순수한 자연과 순박한 인심의 평화공간으로 表現되고 있다.
Ⅲ. 分斷된 국토의 인식 공간
이태극의 고향은 강원도 화천으로 옛날에는 삼팔선 이북이다. 화천은 철의 삼각지로 육이오 때 치열한 격전으로 많은 병사들이 전사한 곳이다. 그 때의 희생의 결과로 화천은 휴전선 이남으로 남게 되었지만 삼팔선 대신 휴전선이 생기고 또다시 자유로운 왕래가 끊어진 남과 북의 조국산천이다. 때문에 그의 고향의식 속에는 육이오 전쟁에 대한 기억과 자유의 소중함과 국토분단에 대한 아픔과 안타까움이 존재한다. 이러한 현실인식은 또한 그의 작품에서 통일에 대한 염원과 의지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꿈으로 그리던 고향/ 찾아보면 파로호수//
뫼새들도 반기는 듯/ 다람쥐도 종종걸음//
이 저산 흩어진 얘긴/ 꾸레미져 안겨 들고-.//
산영(山影) 잠긴 그 속/ 내 어린 시절이 있고//
햇볕도 노 결에 부신/ 물소리 웃음소리//
한나절 녹음도 겨워/ 매아미는 울어 쌌나?//
굽이굽이 기슭을 따라/ 물길을 가노라면//
구름은 영을 넘고/ 바람은 재롱짓고//
옛 생각 실꾸리되어/ 감겨들고 감겨나고-.//
총소리 드놓던 골짝/ 초목은 잠들었고//
줄기 가눠 오르면/ 못 넘는 저편 언덕//
차라리 저 작은 나비가/ 그저 그만 부럽기만-//
몇 대를 비알 갈아/ 목숨을 이어 살고//
이 물속 잉어 낚아/ 푸짐한 잔치라네//
목메기 뒤쫓는 앞날/ 환히 밝아 주려마.-//
-「尋鄕曲」 전문
시인이 꿈으로 그리던 고향은 바로 파로호수가 있는 그의 지정학적 고향인 화천이다. 그 고향을 찾으면 산새들도 반기고 다람쥐도 종종걸음을 치면서 반기는 듯하다. 옛고향을 찾은 화자에게 옛생각은 실꾸리처럼 감기고 풀리고 한다. 육이오 전쟁으로 인하여 총소리가 요란했던 전쟁터인 골짝, 지금은 초목도 잠이 든 듯 조용하고 그 줄기 가눠 오르면 못 넘는 저편 언덕이 보이고, 그럴 때는 그곳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은 나비가 부럽기만 하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남북이 가로막혀 국토를, 더구나 옛고향을 마음대로 넘나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화자로 하여 한 마리 나비를 부러워하게 한다.
첫째, 둘째, 셋째 수의 고향은 자연친화적이며 평화공간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넷째 수와 다섯째 수에 오면 민족분단의 현실인식이 나타나고 통일의 갈망이 나타난다. ‘못 넘는 저편 언덕’이라 하여 자유롭게 넘나들 수 없는 분단의 현실인식에서 오는 절망과 아픔이 나타난다. ‘차라리 저 작은 나비가/ 그저 그만 부럽기만.’이라 표현하여 그 작은 나비보다 못한 자아인식과 함께 현실에 대한 극복의지가 어떤 적극적 행동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작은 나비’이기를 갈망하는 소극적인 사고에 머물고 있다. 때문에 통일의지의 한계가 나타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태극의 고향의식 속에는 고향이 순수한 자연과 순박한 인심의 평화공간이라는 인식과 함께 조국의 비극인 국토분단이라는 현실인식이 있다. 순수한 자연과 순박한 인심 속의 평화 공간으로 인식되는 고향, 그러나 그 고향의식 속에는 국토분단이라는 아픔의 현실인식 공간이 있어 평화공간에 대한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마땅히 있어야 할 요소인 평화공간에 갈등적 요인이 되는 현실인식공간인 조국분단이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마지막 수에서 보여주듯이 그의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미래관은 앞날이 밝으리라는, 그래서 머지 않아 통일이 되리라는 의지가 나타나고 있다.
깊은 산에 안겨
어짊을 잃지 않고
맑은 물 바라보며
슬기를 안 무리들이
풍요의 먼 발치에서도
예 이제를 살아왔네
철따른 금강 소식
한강으로 띄워주고
골골을 누벼 우는
산새들의 가락맞춰
뿌리고 거두어 사는
이 고장의 어버이들
한 때는 철의 장막
파로호는 피의 바다
되찾은 자율 안고
지켜 새는 휴전선
보람찬 내일을 바라
맑아오는 화천이여!
-「山水의 고향」 전문
「山水의 고향」도 「尋鄕曲」과 같은 맥락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수에서 휴전선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山水의 고장인 화천, 금강산에서 흘러오는 물로 강을 이루며, 인심이 어질고 슬기로운 조상들이 예부터 이제까지 살아온 고장이다.
첫째와 둘째 수에서는 山紫水明의 평화공간으로 고향은 존재한다. 소박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셋째 수에 오면 비로소 현실인식이 드러나는데 파로호 부근은 한 때는 삼팔선 이북으로 철의 장막이었고, 육이오 때 자유를 되찾았으나 지금은 새롭게 만들어 놓은 휴전선이 버티고 있다. 비극적 현실이지만 그의 긍정적인 미래관은 현실을 절망하지 않는다. ‘보람찬 내일을 바라 맑아오는 화천이여’라며 고향 화천을 긍정하고 찬양하며 통일에의 꿈을 저버리지 않고 있다.
전후의 비극적인 조국의 역사 상황을 인식한 시조작품으로는 이은상의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고지가 바로 저긴데」와 최성연의 「핏자국」이라는 현실직시의 성실한 체험이 드러난 작품과 송선영의 「설야」와 「휴전선」도 전쟁의 상흔을 말한 불행한 시대의 작품이다.
이태극의 고향의식이 나타나는 작품 중에서 분단된 국토의 인식 작품은 분단의 비극적 현실이 소극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작품에서 현실의 비극적인 면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인데, 그 이유로는 작품의 창작년대가 육이오의 비극성이 많이 희석된 시기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의 긍정적인 미래관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작품 역시 그의 고향을 통해 분단조국의 현실을 인식하는 작품이며 나아가 통일에의 염원이 들어있는 작품인데 통일의지가 적극적으로 나타난다고 보기는 어렵다.
靑瓷빛 맑은 하늘
구름으로 솟는 녹음
창을 넘어 훨훨
마음은 氣球인채
그늘속 환히 열린 새날
아름차다 아름차.
쏟아지는 태양이
그저 마구 타던 한낮
洞口 밖 장승들도
내 江山 고향인데
펄펄펄 휘나는 祖國
꽃으로 피던 그날이여!
감겨 들던 그 기쁨을
돗자리를 깔아 놓고
두리던 가얏고의
열 두 줄도 골랐건만
수무 돌 밝는 햇살 앞엔
토라 앉은 먼 地脈.
-「아! 그날이」 전문
광복 스무 돌을 맞는 감격이 표현된 작품이다. 첫째, 둘째 수에서는 밝음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상징어들 ‘하늘, 솟는, 환히 열린, 태양, 피던’ 등의 어휘들이 많이 쓰이고 있다. 광복 스무 돌을 맞는 기쁨으로 밝음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그러나 마지막 수 종장에 오면 통일되지 못한 조국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토라 앉은 먼 地脈’으로 표현되고 있다. ‘스무 돌 밝는 햇살’ 즉 광복의 기쁨 가운데 통일되지 못한 국토는 안스러움, 안타까움으로 남아 있다. 이데올로기의 희생이 된 국토와 민족을 인식하고 통일을 갈망하는 화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종달이의 울음으로
피어난 진달래가
활개 펴고 누운
兵士의 꿈을 덮노라
이따금 노이는 총소리에
골은 울어 쌓아도-.
-「진달래」 첫째 수
古宮에 世宗路에
외어 웃고 서 있구나
그 빛갈 그 목숨이
來日인들 가실까만
발 멈춰 기울이는 向念에
보람참이 겨우리.
- 넷째 수
「진달래」에서는 고향과 전쟁의 상흔이 함께 상기된다. 꽃의 상징은 아름다움이다. 고궁에, 세종로에 고향산천을 옮겨다 놓은 듯 아름답게 피는 진달래, 웃고 있는 그 아름다워야 할 꽃의 모습에서도 고향산천의 전쟁의 상흔이 존재한다. 이영도의 「진달래」가 4․19때 희생된 학생들을 애도하는 작품이라면, 이태극의 「진달래」는 고향산천에 피는 진달래를 생각하며 6․25때 죽은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작품이다. 6․25때 희생된 젊은 영혼들의 희생이 값지기를, 보람차기를 바라는 화자의 마음이 ‘발 멈춰 기울이는 向念’으로 표현된다. ‘向念’이란 그들에 대한 묵념이나 기도이다. 조국분단이라는 안타까운 비극적 역사인식 속에서도 애써 긍정을 찾아내는 화자의 현실극복의지가 마지막 수 종장에서 긍정적으로 밝은 미래를 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분단조국에 대한 안타까움이 표현되고 있다.
Ⅳ. 결론
이상으로 이태극 시조의 고향의식 발현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고향은 현실의 삭막함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과 순박한 인심의 평화 공간과 분단된 국토의 인식 공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지정학적인 고향이 화천이고 그 곳은 山紫水明의 고장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 본 때묻지 않은 순수의 자연과 순박한 인심을 가진 고향 사람들이 살던 평화스런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한편 전쟁의 상흔을 다른 곳보다 많이 간직한 고향에 대한 인식은 분단된 국토에 대한 현실인식이며 나아가 통일에의 의지로까지 확대된다.
그의 고향의식의 작품을 통해 의식 속에 있는 고향은 순수 자연과 순박한 인심의 평화 공간에 대한 그리움과 분단된 국토의 인식 공간의 안타까움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인식은 통일에의 의지로 확대되어 민족애, 조국애로까지 확산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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