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영 시조의 고향성 연구
-자연으로서의 고향의식-
김민정1)
Ⅰ. 서 론
白水 鄭椀永은 1919년 11월 11일 경북 금릉군 봉산면 예지동 65번지에서 父 知鎔, 母 延安田氏 俊生의 4남2녀 중 2남으로 태어난다. 본관은 延日이며 조부 염기로부터 한학을 배운다. 1927년에는 봉계공립보통학교 입학하였으나 3학년 여름 홍수로 말미암아 단수 5마지기가 유실됨에 따라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1932년 대판 천황사 야간부기학교 입학, 2년 수료 후 고향에 다시 돌아와 보통학교를 마치고, 1938년에는 성산 김씨 주배의 장녀 덕행과 결혼을 한다.
정완영은 1941년부터 시조를 습작했으며, 1941년에는 시조 창작 관계로 일경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시조창작에 인연을 준 사람으로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조선어시간에 동요를 열심히 가르쳐주던 홍성린 선생과 일본에서 돌아와 5학년에 편입했을 때 일본인 교장 몰래 시조와 우리역사를 가르쳐주던 이위응 선생이다. 1946년 「김천 시문학구락부」에서 「오동」이란 동인집을 2집까지 내다가 중단했으며, 6․25피난 후 김천에서 「白水社」라는 문구점을 차렸었고, 동네사람들은 그를 白主事라 부르기도 했다.
1960년에는 정완영이 작품만 쓰고 추천을 받지 않는 것을 딱하게 여긴 처남이 2편을 골라 부산에 있는 <국제신보>에 보내 「해바라기」가 당선된다. 62년에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조선일보>신춘문예에 「祖國」을 보내 당선된다. 이 때가 42세였고, 정완영은 이때를 出壇이라 생각한다.
1966년에는 이호우․이영도․이우출과 함께 <영남시조문학회>를 창립한다. 1967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해바라기처럼」이 당선되었고, 제2회 <김천시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1968년에는 첫시조집 ?採春譜?를 출간하고 1972년에는 시조집 ?墨鷺圖?를 출간한다. 1974년에는 시조집 ?失日의 銘?을 발간하게 되고 제11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한다. 또 그 해에 고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작품 「조국」이 수록된다. 1976년 시선집 ?산이 나를 따라와서?를 출간하게 되며, 1979년에는 동시조집 ?꽃가지를 흔들듯이?를 출간하고, 회갑기념시사집?백수시선?을 출간한다. 이 해에 제1회 가람문학상을 수상하고,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회장을 맡게 된다.
1981년에는 ?시조창작법?을, 1982년에는 ?고시조 감상?을 출간한다. 중앙일보 시조 강좌를 맡고, 한국청소년연맹 시조 지도위원을 맡게 되며, 고향 김천의 남산공원에 고향 사람들의 뜻으로 시비가 세워진다. 1983년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작품 「분이네 살구나무」가 수록된다. 1984년에는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작품 「父子像」이 수록되며, 시조집 ?蓮과 바람?을 출간하고, 제3회 「중앙일보 시조대상」을 수상한다.
1985년에는 ?시조산책?출간하였다. 1989년 ?고희기념 사화집?을 헌정받았으며, 제5회 「六堂文學賞」을 수상한다. 1990년에는 시조집 ?蘭보다 푸른 돌?을 출간하였으며, 1992년에는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에 추대된다. 이 해에는 ?茶 한잔의 갈증?이라는 수상집을 출간한다. 1994년에는 直指寺 경내에 시비가 건립되고, 시조집 ?오동잎 그늘에 서서?를 출간한다. 1995년에는 ?白水散稿?, ?나뷔야 靑山?라는 수상집을 출간했으며, 은관문화훈장을 받는다. 1998년 동시조집 ?엄마 목소리?를 출간하고, 2001년에는 시조집 ?이승의 등불?을 출간한다. 그는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위원장, 영남시조문학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98년부터 直指寺 경내에 「鄭椀永 時調文學觀」 건립을 추진중이다.
정완영은 41년부터 시조를 써 왔다고 하지만 60년대에 등단한 만큼 60년대의 시인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60년대 이후의 고향의식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960년대는 4․19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대이다. 그리고 국토개발과 가난극복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모여들던 시대이기도 하다.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급격히 사회가 변화되어 空間的․精神的 고향상실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고, 때문에 문학에서 고향에 대한 鄕愁, 思鄕 등의 작품이 많이 나타난 시기이다.
정완영의 12권 시조집에서 발견한 고향이나 향수에 관련된 시조들은 중복을 빼고 나서도 100편이 넘는다. 그것은 주로 고향이란 단어가 들어간 경우인데, 고향이란 단어가 보이지 않으면서도 고향을 노래한 작품까지 치면 더 많은 분량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시조에서 보면 15년의 고향 생활이라고 한다. 여든이 넘은 그의 인생에서 15년이란 일생의 5분의 1도 안 되는 삶이지만, 그것이 평생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그의 밑바닥에 간직된 정서로, 그리움으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인들보다 감정이 섬세하다고 하는 시인에게 있어서는 고향이라든가, 어린 날의 추억이 더욱 감상 깊게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며, 또한 그 고향이 시골이고 전원생활을 했던 곳이라면, 도시의 각박한 현실에 묻혀 생활하다 보면 고향산천이 더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고향이란 단어가 주는 편안함, 그리움, 사랑스러움 등은 보편적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다.
볼노프는 고향을 ‘인격이 태어나고 자라고 또 일반적으로 계속 집으로 가지고 있는 삶의 영역’이라고 정의한다. 또 고향은 그에게서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등과 같은 가족 내에서의 친밀한 인간관계들과 함께 시작되는 곳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것은 고향을 어떤 영역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 혈통 및 가족 중심적으로 접근하는 시도이다. 이런 요소 외에 고향은 마을과 같은 공간적인 차원과 또 전통 같은 시간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2)
D.W 하아딩은 향수의 사회성에 대해서 ‘사회생활의 일면’이라고 규정하면서 ‘사회에서 우리가 적절한 집단생활을 경영할 수 없을 때 우리는 鄕愁를 가진다’3)고 하여 일상생활에서 향수의 유발동인에 대한 사회적 측면의 고찰을 제시했다.
양현승은 思鄕은 막연하게 이미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에 대해 선험(Priori)된 것을 그대로 마음속에 회상하여 재현시켜본다는 의미가 아닌 ‘선험된 것에 대한 想像의 즐거움이 동반된 思를 의미하는 것’이라 보았다. 이 즐거움은 歸巢本能이라는 일종의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서 얻어지는 쾌락이며 위안이라고 볼 때 思鄕은 歸巢本能의 慾求에 대한 代理滿足4)이라고 보았다.
정완영의 작품에는 고향의 자연이 늘 함께 하는 자연친화 사상이 들어 있다. 그에게 있어 고향은 인격이 성장한 곳이며, 조상과 자손이 함께 사는 땅이며, 부모와 동기가 함께 하는 친밀한 인간관계를 지닌 곳이며, 자연 그 자체이다. 그는 고향을 노래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종교적 귀의까지 나타내고 있다.
Ⅱ. 田園的 자연친화 공간
人間은 자라면서, 그리고 어른이 된 후에도 回歸不可能한 시간과 공간인 유년에 대한 그리움을 갖는다. 어린 시절 태어나서 자라난 곳, 즉 고향과 현재 생활하는 곳이 다를 경우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더 클 것이다. 幼年의 꿈을 키워 오던 遊戱空間이었고 童話空間이 바로 고향이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모든 인간들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것은 공통된 정서이지만 삭막한 도시공간이 아닌 田園的, 自然的 공간이 고향인 사람들은 더욱 고향을 그리워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산업화된 삭막한 현대의 도시생활에서 自然에의 鄕愁가 더욱 간절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歸去來’를 외치며 田園으로, 自然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江湖歌道’가 있다. 그들은 벼슬살이를 하다가 당파 싸움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을 벗하며 살기를 원했던 사람들이고, 아니면 아예 어지러운 政界에 나타나지 않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살기를 원했던 사람들이다. 그만큼 예부터 우리 민족은 자연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정지용이 고향을 그리며 쓴 작품인 「鄕愁」는 우리들에게 전원적이며 아늑한 공간으로서의 고향을 느끼게 하며, 이은상의 「가고파」는 우리 모두에게 고향에 돌아가고픈 마음을 갖게 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가면/ 뷔인 밭에 밤 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이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섭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부분
내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가고파」부분
이러한 작품들이 우리들을 숙연하게 만드는 건 그 시 속에 자신의 어린 날이 있고, 아름다운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향을 그리워하여 鄕愁病(homesickness)에 걸리기도 하는데 ‘알프스의 소녀’에서 하아디는 아름다운 알프스 산정의 자기 집을 그리워하다 鄕愁病(homesickness)에 걸려 밤마다 ‘몽유병’으로 고생하게 된다. 그때 그 소녀는 고향, 곧 맑디맑은 알프스산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향수였다. 이때의 향수는 실재적인 장소의 고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향의식에는 실재적 장소를 그리워하는 향수 외에 고향에 대한 지향의식인 정신적인 의미로서의 향수(nostalgia)도 해당이 되는 것이다.
정완영의 시조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고향은 매우 비중있는 의미를 지닌다. 고향에 관한 시조 작품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며, 그것은 그의 모든 시조집에 고향에 관한 작품이 실려있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정완영의 시조세계는 유년의 삶을 형상화하는 고향을 모티브로 한 시조에서 출발하여 확산 수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의 고향 시조의 공간은 처소적 의미로만 간주할 수는 없다. 그의 고향 작품은 농경문화적․전원적 터전을 기반으로 형상화되어 있으나, 이 공간은 부모․동기들에 대한 가족애와 가족간의 유대관계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抒情的이고, 田園的이며, 牧歌的인 면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그의 성장 환경과 관련이 있다. 어렸을 때 보고 자란 원형적 공간인 고향에는 바로 자연이 있다. 곧 고향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릴 때 고향에서 보고 자란 자연을 사랑함을 의미한다.
내 고향은 언제나 황악산에서부터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흡사 천병 만마가 말발굽을 굽놓으며 달려오는 시늉을 했고, 이 소나기가 지나가고 나면 덩그렇게 쌍무지개 걸린 동녘 하늘 아래 금릉 30리 내달이벌에 7월 벼 오르는 소리가 물씬물씬 들려왔던 것입니다. -「시가 있는 여름」
위의 예처럼 정완영의 고향에 대한 愛着은 그의 수필 곳곳에서 발견된다. 시조에서 나타나는 그의 고향에 관한 작품은 處所였던 金泉이나 금릉을 중심으로 사실적인 情景描寫나 어린 날의 추억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정완영에게 그 고향은 自然親和의 空間이며, 祖孫이 함께 사는 땅으로 인식된다. 그의 작품에서는 處所的 故鄕의 情景描寫를 주로 하고 있으며 그의 故鄕에 대한 그리움은 곧 고향 김천 직지사 주변의 自然과 田園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作品을 통하여 故鄕意識의 發現樣相을 살펴보기로 한다.
경부선/ 김천에서/ 북으로 한 20리//
추풍령/ 먼 영마루/ 구름 한 장 얹어두고//
밟으면/ 거문고 소리/ 날듯도 한 내 고향길.//
한 구비/ 돌아들면/ 돌부처가 살고 있고//
또 한 구비/ 돌아들면/ 이조 백자 닮은 마을//
땟국도/ 금간 자국도/ 모두 정이랍니다.//
바위 틈/ 옹달샘에도/ 다 담기는 고향 하늘//
해와 달/ 곱게 접어/ 꽃잎처럼 띄워 두고//
조각달/ 외로운 풀에도/ 꿈을 모아 살던 마을.//
널어논/ 무명베 같은/ 시냇물이 흘렀는데//
낮달이/ 하나 잠기어/ 흔들리는 여울목엔//
별보다/ 고운 눈매의/ 조약돌도 살았어요.//
두 줄기/ 하얀 전선이/ 산마루를 넘어 가고//
쑤꾸기/ 울음 소리가/ 그 전선에 걸려있고//
늦은 봄/ 장다리밭엔/ 노오란 해가 숨었지요.//
-「시인의 고향」 전문
故鄕을 주제나 소재로 쓴 많은 시조에서 정완영은 주로 實在의 地名을 쓰고 있다. 이러한 표현의 효과는 독자에게 사실감과 친근감을 주어 작품의 진솔성과 함께 더 쉽게 작품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작품에서 實在 地名을 사용함으로써 시 속의 화자는 바로 시인 자신이며, 시인 자신의 고향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 즉 처소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시인은 작품 ‘밖’에 존재하고, 화자는 작품 ‘안’에 존재한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말하는 이를 시인과 구분하여 화자5)라 부른다. ‘작품 속의 시인’은 시인의 경험적 자아가 시적 자아로 변용․창조된 것이지 시인의 실제의 개성 그 자체는 아니다.6) 시에서 화자와 시인이 동일시되면 개성론이 되고 이 때의 시는 고백적이며 자전적이다. 즉 1인칭 화자인데, 시조 작품은 1인칭 화자가 많은 편이며, 특히 고향을 소재나 주제로 한 작품은 더욱 그러하다. 때문에 고향을 소재나 주제로 한 정완영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1인칭 화자는 바로 시인 자신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개성론의 시로서 고백적이며, 자전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작품을 통하여 독자는 정완영의 육성을 듣게 되고 그의 인격을 보게 된다. 고향에서의 유년의 추억을 말하고 있는 경우, 화자가 체험을 겪고 난 뒤에 어느 한 시점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경우이다.
위 작품은 고향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의 제시와 정경묘사를 통해 고향을 그리는 향수가 구체적으로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인간사는 유한이고 자연은 무한이라, 그 고향 마을에 살던 사람들과 고향 집은 많이 변한 상태겠지만, 시인이 뛰어 놀고 꿈을 심던 유희공간인 산과 들, 산마루와 시냇물은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정경묘사를 통해 표현되는 고향의 모습, 정경묘사를 통한 시각적 이미지 제시는 보다 선명하고 자연스러운 유년의 고향 모습을 형성하며, 이 시조를 읽는 사람에겐 어릴 때의 동화 공간을 환기시켜 주는 역할도 한다.
화자는 소년으로 童心空間으로서의 故鄕情景을 소개하고 있다. 김천에서 이십리를 더 가면 거기 그리운 시인의 고향이 있다며 고향을 소개한다. 동심의 추억 속에 그리는 동화적․유희적 공간은 지금도 회귀가능성이 있는 實存空間이다. ‘경부선/ 김천에서/ 북으로 한 20리//’라고 하여 화자가 어린시절을 보낸 실존공간으로서의 고향을 첫 수의 초장에서 설정하고 있다. 그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소재는 시각적 심상의 추풍령 먼 영마루에 얹힌 구름 한 장이다. ‘구름 한 장’에서 느껴지는 아득한 그리움의 그 고향길은 ‘밟으면 거문고 소리 날듯도 한’으로 표현하여, 종장에 오면 고향의 그윽함이 ‘거문고 소리’로 청각적 심상화하고 있다.
둘째 수에 오면 고향은 생동감이 넘치며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모습으로 다가온다. ‘돌부처가 살고 있고’란 표현으로 무생물도 살아 숨쉬는 생동감이 있는 고향이며, ‘이조 백자를 닮은 마을’로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이미지로 다정다감하게 다가오는 고향이며, 그리하여 땟국도 금간 자국도 모두 정으로 느껴지는 고향이다.
이 시조에서는 ‘추풍령, 영마루, 구름, 돌부처, 마을, 바위, 옹달샘, 고향 하늘, 해와 달, 꽃잎, 조각달, 풀, 시냇물, 낮달, 여울목, 별, 조약돌, 전선, 산마루, 쑤꾸기, 장다리밭, 해……’ 등 주로 자연 및 전원적 풍경이 소재로서 등장하며, 어린날의 꿈이 담긴 고향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렇게 정완영의 고향의식 속에는 자연이 함께 존재한다. 그가 추억하는 유년의 고향은 자연과 밀접한 생활이 있던 곳이며, 그 속에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더불어 삶을 누리는 자연친화적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 다 흘러간 極樂山 위
내 고향 하늘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
지금도 등 뒤에 걸려 사윌 줄을 모르네.
洞口밖 키 큰 장성 十里벌을 다스리고
푸수풀 깊은 골에 시절잊은 물레방아
秋風嶺 드리운 落照에 한 幅 그림이던 곳.
少年은 풀빛을 끌고 歲月 속을 갔건마는
버들피리 언덕 위에 두고온 마음 하나
올해도 차마 못 잊어 봄을 울고 갔더란다.
오솔길 갑사댕기 서러워도 달은 뜨데
꽃가마 울고 넘은 서낭당 제 철이면
생각다 생각다 못해 물이 들던 도라지꽃.
가난도 길이 들면 양처럼 어질더라
어머님 곱게 나순 물레줄에 피가 감겨
靑山 속 감감히 묻혀 등불처럼 가신 사랑.
뿌리고 거두어도 가시잖은 억만 시름
고래등 같은 집도 다락같은 소도 없이
아버님 탄식을 위해 먼 들녘은 비었더라.
빙그르 돌고 보면 人生은 回轉木馬
한 목청 뻐꾸기에 고개 돌린 외 사슴아
내 죽어 내 묻힐 땅이 구름 밖에 저문다.
-「고향 생각」 전문
이 작품은 일곱 수로 된 연시조로, 고향에 대한 옛 추억을 살리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내 죽어 내 묻힐 땅이 구름 밖에 머문다고 표현함으로써 죽어서 고향에 묻히고 싶은 귀향의식까지 내포하고 있다.
고향에는 그림같이 낙조가 아름답던 어린 날이 있고 버들피리 불던 소년의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가난과 탄식과 울음도 함께 담겨있다. 첫째 수를 보면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 다 흘러간 극락산 위’라고 표현함으로써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란 생의 괴로움이나 고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다 흘러간 극락산 위’란 그러한 고통이나 괴로움 등이 다 사라진 후의 극락같은 평화로운 곳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향 하늘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의 서러운 심상이며, 지금도 사윌 줄을 모른다고 하여 고향이 서러움으로 화자에게 다가옴을 알 수 있다. 셋째 수와 일곱째 수에서도 고향은 서러움으로 다가온다. 풀빛처럼 푸르고 어리던 소년은 세월을 끌고 늙어가서 이제는 고향 땅에 가 묻힐 생각을 하고 있다. 어릴 적 동화공간․유희공간의 상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향수는 나타난다. 이 때 유년의 향토적 생활 공간의 상실에 대한 아픔이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고향에 대한 정경묘사는 목가적이고 전원적이며 자연친화의 경향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유희공간이 자라서 성년이 되고 고향을 떠난 후에는 정서공간․보편정신의 안식공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둘째 수에서의 ‘장성, 물레방아, 낙조’ 등의 시각적 심상을 통해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고향을 추억하고 있다. 셋 째, 넷 째 수에서는 어린 날의 꿈과 낭만과 사랑이 나타난다. 다섯 째, 여섯 째 수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의해 상기되는 고향의 모습이다. 가난 속에 양처럼 어질게 살다 가신 어머님, 시름 속에 탄식 속에 살다 가신 아버님에 대한 회상이 시적 모티브가 되고 있다. 일곱 째 수의 ‘빙그르 돌고 보면 人生은 回轉木馬’라고 하여 인생에 대한 관조적 자세가 나타나며 첫째 수의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 다 흘러간 극락산 위’와 맥을 같이한다. 고향의 천진한 소년은 꿈을 찾아 타관땅을 찾게 되고 그 땅에는 어려움과 시련이 있다. 그 시련을 겪으면서 소년은 어른이 되고 삶을 이해하고 터득하게 된다. ‘풀빛을 끌고 歲月 속을 간’ 소년은 인생을 살아보고 나서 인생에 대한 깨달음과 관조를 배우고, 이미 세상의 어려움과 시련을 맛보고 나서 순수한 원래적 고향의 고귀함을 깨닫는다.
‘인생은 회전목마’, ‘내 죽어 내 묻힐 땅’이란 표현 속에 고향에의 귀향의지와 자연에서 태어나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人生의 理致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위 시조에서는 향토적 정서공간에 대한 귀향가능성의 인식과 귀향의지가 생의 마지막 순간, 죽어서는 고향땅에 묻히겠다는 소박한 꿈과 의지로 나타나고 있다. 고향에 대한 이러한 정서는 독자에게 정서적 공감대․정신적 일체감을 형성해 주기도 한다.
이 작품에 대해 김제현은 “청산유수처럼 흐르는 리듬 속에 언어들이 제자리를 찾고 있으며 그 감성은 가장 한국적인 자연과 정감과 이미지를 교직하여 서정의 높은 품격”7)을 이루어내고 있다는 견해를 보여 서정의 품격이 높은 시조임을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이성재는 “「고향생각」은 단순한 고향의 추억이나 향수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전통적 정서인 정한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정완영의 고향은 정한의 세계로 한국적 정한과 육친에 대한 사무침에 기인한다.”8)라고 하여 정완영의 고향의식을 한국적 정한과 육친에 대한 사무침으로 보고 있다.
또 서벌은 “쓰르라미의 울음이 맵다는 감각, 내 고향 하늘빛이 서러운 열무김치의 맛으로 오는 감각은 이 나라 산천이 백수 세계에 준 共感覺이고 特惠다. 고향을 가슴에 지니되 사무침으로 지니지 않고서는 이런 특혜를 받지 못한다. 그것은 고향을 지극한 감성으로 받드는 데서 오는 사무침이고,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 감각과 일치된 데서 우러난 사무침이다.”9)라고 하여 고향에 관한 사무침의 시로 보고 있다.
위에서 보듯 김제현은 “한국적인 자연과 정감과 이미지를 교직하여”라고 하여 작품에 나타나는 자연성을 말하고 있으며, 서벌 역시 “이 나라 산천이 백수 세계에 준 공감각이고 특혜다.”라고 하여 정완영의 작품 속에 ‘이 나라 산천’, 즉 그의 시조에 자연이 깊게 작용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시냇가 수양버들 눈은 미처 못 떴지만
봄 오는 기척이야 어디서나 소곤소곤
별밭도 잔뿌리 내리고 잠도 솔솔 내리더라.
-「고향의 봄」
동구밖 정자나무는 대궐보다 덩그런데
패랭이꽃 만한 하늘은 골에 갇혀 혼자 피고
금매미 울음소리만 주렁주렁 열리더라.
-「고향의 여름」
붕어떼 피라미떼 살 오르던 시냇물이
밤이면 꼬리치며 하늘로도 이어지고
그 물이 은하수 되어 용마루에 흐르더라.
-「고향의 가을」
아랫목 다 식어도/ 정이 남아 훈훈하고
쌀독 쌀 떨어져도/ 밤새도록 내리던 눈
삼이웃/ 둘러만 앉아도/ 만석 같은 밤이더라.
-「고향의 겨울」
이 시조는 고향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생각하며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의 소재는 ‘시냇가, 수양버들, 별밭, 잔뿌리, 동구 밖, 정자나무, 패랭이꽃, 하늘, 골, 금매미, 붕어떼, 피라미떼, 시냇물, 은하수, 용마루’ 등으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한국적 정서, 향토적 정서인 자연이 소재가 되어 작품에 다정다감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누구나 꿈꾸고 있는 원초적 고향의 모습일 수도 있다.
정완영에게 고향은 자연과 깊이 밀착되어 있다. 사계절의 모습이 우리의 삶과 밀착되어 있는 곳, 그곳은 우리의 정서가 배어 있는 곳이며, 바로 고향 마을이다. 이렇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곧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공간적 정경묘사가 월등한 이 작품은 시간적 의미 인식에 대한 작품보다 현재적 삶의 모습이 현저히 약화되어 있어 현재적 삶의 모습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고향에 대한 과거의 회상적인 기억만 나타날 뿐 현재의 화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떠한 갈등도 나타나지 않고, 평화스런 계절의 모습과 화자의 그리움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이 작품에서는 ‘시냇가 수양버들 눈은 미처 못 떴지만’이라는 표현 속에는 자연을 의인화하여 고향의 이른 봄 모습을 인격화하고 있다. ‘눈을 미처 못 떴다’는 표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눈 못뜬 강아지’의 귀여운 모습을 본 듯하여 우리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자아내게 하여 더욱 다감한 모습으로 작품에 다가가게 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패랭이꽃 만한 하늘은 골에 갇혀 혼자 피고’란 표현 속에 시골의 작고 어여쁜 하늘의 모습이 나타나고, ‘금매미 울음소리만 주렁주렁 열리더라.’라고 청각을 시각화하여 한여름 요란한 매미소리를 보이듯이 표현하고 있다. ‘붕어떼 피라미떼 살 오르던 시냇물’, ‘밤새도록 내리던 눈’ 등으로 고향의 자연과 계절을 정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또 이 작품은 종장마다 ‘더라’라는 과거회상형의 시어를 써서 현재가 아닌 과거의 기억만을 재생시키고 있다. 기억의 재생, 즉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심리적인 폐허의 영역이며, 추억의 골동품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완영은 고향에 대한 작품을 통하여 빛바랜 추억을 반짝반짝 빛나는 소중한 보석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 경험들이 서로 다른 날짜와 장소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더라도 향수라는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독자를 감동시킨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되살리는 것을 계기로 하여 독자는 그 작품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되살리게 되어 제각기 기억 속에 사장되어 있던 어린시절의 단편적인 추억을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太陽의 眷屬은 아니다
두메 산골 긴긴 밤을/ 달이 가다 머문 자리
그 둘레 달빛이 실려/ 꿈으로나 익은 거다.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다 못 달랠 懷鄕의 길목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돌담 위 十月 上天을/ 등불로나 밝힌 거다.
초가집 까만 지붕 위/ 까마귀 서리를 날리고
한 톨 감 외로이 타는/ 韓國 千年의 시장기여,
세월도 팔장을 끼고/ 情으로나 가는 거다.
-「감」 전문
가장 아름다운 한국적 전원 풍경의 한 단면이다. 우리 민족의 농경문화 속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인 한국의 자연, 한국의 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모습이다.
이 작품의 소재인 ‘감’은 고향의 정서, 자연의 정서를 나타내 준다. 시각적 심상이 두드러진 이 작품에서 ‘감’은 ‘달이 가다 머문 자리’, ‘꿈으로 익은 것’, ‘돌담 위 十月 上天’, ‘핏빛 노을 마신 등불’, ‘한국 천년의 시장기’, ‘정’으로 은유 및 상징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고향의 정서가 ‘감’의 형상화로 잘 나타나고 있다. 감이 익어가는 공간은 한국의 어느 산비탈의 모습일 수도, 아니면 마을 한가운데의 모습일 수도 있다. 늘 우리들 마음이 달려가는 고향, 그곳엔 언제라도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고 넉넉하게 감싸주는 자연적 환경이 있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의 단면을 위 작품은 보여준다. 정완영의 뛰어난 언어감각과 비유감각이 ‘그것은 아무래도 태양의 권속은 아니다, 韓國 千年의 시장기, 세월도 팔장을 끼고’ 등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정완영의 고향의식의 발현 양상 중 자연친화적 공간으로서의 고향을 살펴보았다. 위의 작품을 통해 그가 그리는 고향은 전원적 자연친화의 공간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주로 쓰는 소재는 한국적 정서, 향토적 정서인 자연이다. 사계절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는 한국의 자연, 어린 날의 유희 공간이었고 동화 공간이었던 고향의 정경을 제시하여 고향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귀거래’를 읊으며, 고향의 자연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조선시대의 江湖歌道처럼 정완영은 어린 날의 추억과 자연속의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가 그리는 고향은 그가 태어난 김천이라는 지정학적인 고향을 중심으로 한 한국적 정서가 깃들어 있는 전원적 자연친화 공간이다.
Ⅲ. 祖孫이 함께 하는 안식 공간
정완영의 시조에 나타나는 고향의식에서 자연친화의 공간 외에 고향은 조상과 자손이 함께 살아가는 안식 공간으로 발현된다. 조부모, 부모, 형제, 친지들이 함께 등을 맞대고 살아가는 안식 공간이다. 그는 고향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고향이란 산 사람과 죽은 조상이 등을 맞대 사는 마을이다. 고향이란 산 사람들만이 이해에 얽혀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근시안적이고 단세포적인 뜨내기 마을이 아니라 산 사람(子孫)과 죽은 사람(祖上)이 등을 맞대 사는 마을이다.10)
고향이란 아빠 엄마만이 자녀들을 기르며 사는 단세포 마을이 아니라 할아머님, 아버님의 석굴암 대불과 할머님, 어머님의 관세음보살이 그 산천에 앉아 계시어 그 후광으로 자손들을 가호하고 있는 곳이다.11)
어머니 아버지, 다시 말해서 어버이는 집이라는 우리 안에서만 사는 어린 새끼들의 비호자가 아니라, 그 선을 훨씬 넘어서 고향이라는 至情의 처소에 정좌하시어 슬플 때나 기쁠 때나 撫愛하고 愛恤하시며, 雨露의 은택까지를 내 兒孫들 위에 드리워주시는 現人神이시며, 비호자 아닌 가호자이시다.12)
이러한 백수의 고향관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 고향은 조상이 살았던 땅이요, 부모가 살았던 땅이요, 내가 죽어 묻힐 땅이다. 부모, 형제, 친구, 친척 등을 생각할 때 으레 고향이 떠오르는 것이고, 또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그들이다. 고향은 육친에 대한 밀착성을 떠올려주는 세계인 것이다. 그리하여 조상이나 부모로부터 보호받았던 곳,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므로 그 곳은 언제나 따뜻하고 편안한 안식 공간으로 존재한다.
높지도 않은 그 산, 깊지도 않은 그 물,
그래도 그 산 그 물 무엇인가 비칠듯 해
닦으면 닦아낼수록 청동거울 같은 고향
하늘엔 빗살무늬 기러기떼 날아가고
사계의 비바람이 어루만진 無紋土器
세월이 흐르지 못하고 거기 숨어 사옵디다.
애당초 고향이야 깊이 잠든 先史時代
파 보면 파 볼수록 출토되는 햇살이여
한결로 별빛에 가 닿는 祭器 아니오리까.
-「先史고향」 전문
고향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우리들 의식의 깊은 밑바닥에 있는 삶의 정신적 뿌리로서의 고향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선사란 역사이전의 역사다. 기록되기 전의 역사를 선사라고 하듯 고향으로 인식되기 전의 고향을 「先史고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높지도 않은 그 산, 깊지도 않은 그 물’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는 위압적이지 않고 다정다감하여 언제라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포근한 자연적 공간이다. 별 볼일 없을 것만 같은 공간인데도 ‘무엇인가 비칠 듯 한’ 고향이다. 녹슨 곳을 닦아내면 닦아낼수록 반짝이는 청동거울처럼 고향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애정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들 마음속에 더 밝고 아름답게 비친다. 그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기억 속의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곳임을 이 작품에서는 말하고 있다. 또 ‘빗살무늬 기러기떼’와 ‘無紋土器’를 대조하여 ‘빗살무늬 기러기떼’는 날아가는 존재로서, ‘無紋土器’는 비바람 속에 남아있는 존재로서 표현하여 ‘시간의 흐름’과 ‘시간의 정지’를 상징하고 있다.
비록 어렸을 때 떠난 고향이라도 고향은 언제나 우리 의식의 중심에 있다. 우리가 살면서 저도 모르게 핏줄이 당겨지는 목숨의 磁場이 그 곳에는 있다. 뚜렷하게 높지도 않은 산, 깊지도 않은 물, 그러면서도 그곳은 닦으면 닦을수록 윤기나고 빛나는 청동 거울 같다. 어떠한 화려한 무늬도 없이 무문토기 같은 밋밋하고 단순한 고향, 그 곳에는 정지된 시간이 있다. 생각이 멈추고 흐르지 않는 공간이다. 우리들의 선조가 살다간 시대처럼 우리들의 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시간과 공간, 그곳에서 시인은 밝음을 찾아내고 있다. 별빛에 가 닿는 祭器처럼 신성한 곳이 또한 고향이라고 보고 있다.
반만년인 5천년의 역사를 지녀온 우리 민족, 우리 조상이 이 땅에 뼈를 묻어 온 지는 더 오랜 세월임이 분명하다. 산 사람과 죽은 조상이 등을 맞대 사는 곳,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유대의식이 핏줄처럼 이어져 내리는 곳, 조상의 幽宅인 마을이 고향이다. 「先史고향」으로 照鑑해 보는, 역사적 시간이라는 과거의 고향은 나의 주체가 존재하게 된 諸根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날만 새면 홍수가 나서 소용도는 세상살이
다 잊고 어느 하루 고향마을 찾아갔더니
감꽃이 적막한 이 세상 한복판에 떨어지더라.
아버지 어머니는 저 세상의 뻐꾹새 되고
형님 누나 모두 데려가 품에 안고 뻐꾹새 되고
사시절 한 우물 파는 푸른 산만 깊어 가더라.
온 세상 떠내려 가도 고스란히 남은 섬아!
내 죽어 촉루로 빛날 들찔레도 미리 펴나고
섬돌 위 벗어놓고 온 내 신발도 거기 있더라.
-「떠내려 가지 않는 섬」 전문
시각적 심상이 두드러진 이 작품은 그 모든 인생의 희노애락 속에서도, 망각의 세월 속에서도 화자의 의식 속에 자리한 뿌리깊은 고향은 흔들리지 않고, 떠내려가지 않는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삶의 고달픔을 ‘날만 새면 홍수가 나서 소용도는 세상살이’로 표현하고 있다. 타향에서의 인생살이는 결코 쉽지가 않다. 늘 새로운 고민거리와 그 해결로 인생은 소용돈다. 그러한 모든 것을 잊고 고향을 찾아갔을 때 느낀 적막감을 첫 수에서는 말하고 있다.
고향에서 느끼는 적막감의 이유가 둘째 수에 나온다. 그것은 이미 나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가 모두 저 세상의 뻐꾹새가 되었기 때문이다. 화자에게 있어 고향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핏줄의 유대관계인 부모․동기의 개념이다. 시간이 흘러 그 다정한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人間事도 변하고, 푸른 산만 깊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산은 모든 것을 안고 있다. 부모와 동기들의 유택으로서 그들을 품에 안고 있다.
‘온 세상 떠내려 가도 고스란히 남은 섬아!’라는 표현 속에는 고향은 어떠한 홍수에도 떠내려 가지 않는 섬이라는 인식이 들어 있다. 그곳은 화자에게 정신적인 깊은 유대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고향인 것이다. 그리하여 ‘내 죽어 촉루로 빛날 들찔레’까지 미리 보면서도 비탄에 잠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고향은 귀의처로서 안도감이나 안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섬돌 위 벗어놓고 온 내 신발도 거기 있더라.’란 표현 속에 고향은 화자의 추억 속에 손상되지 않은 원형으로 존재함을 말하고 있다.
감꽃이 적막한 이 세상 한복판에 뚝 떨어지듯 적막과 평화만이 도는 고향 마을. 화자의 마음속에는 그리운 원형의 고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비록 부모와 동기가 저 세상의 뻐꾹새가 되었을망정 어떠한 삶의 질곡 속에서도 상처받지 않고 훼손되지 않는, 공동체의 화해로운 원형적 공간으로, 영원한 안식공간으로 고향은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따금 고향에 갈 때면 고속버스를 타고 간다
추풍령 먼 발치에 용배라는 못이 있어
못물에 아버님 옛모습 일렁이기 때문이다.
낚대로 세월을 낚던 아버님은 길 떠나고
그 못물 입고 서서 깃을 빗는 물새 한 쌍
못물이 누구냐? 물으며 눈 비비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버님 그림자 갈대꽃이 비쳐주고
갈대꽃 사이 사이 글썽이는 그 못물이
가슴에 눈물을 담으며 울고 있기 때문이다.
-「용배 못물」 전문
이 작품은 첫 수의 초장에서 ‘이따금 고향에 갈 때면 고속버스를 타고 간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답하고 있다. 고향을 가면서 고속버스를 타는 이유를 화자는 용배 못물 때문이라고 한다. 그 못물에 아버님 옛모습이 일렁이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기 위해 화자는 고속버스를 타고 간다. 화자는 아버지의 고향, 역사적 시간이라는 과거의 고향으로 돌아가며, 하나의 못물을 소재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낚대로 세월을 낚던 아버님’이라 하여 과거의 아버님의 경험을 떠올리고 그것이 시적 소재가 되고 있다.
고향의 하늘과 산과 들에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 친척들이 얼비친다. 고향의 못물에도, 풀 한 포기에도 그러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리움을 갖게 된다. 화자는 고향 못물에 일렁이는 아버지 모습, 그 못물을 바라보며 세상 떠난 아버지를 생각한다. ‘갈대꽃 사이사이 글썽이는 그 못물’이란 시인 자신의 슬픔을 대신해 울어주는 자연이다. 시인은 이렇게 고향의 자연을 끌어와 감정이입을 하고 있으며, 고향과 부모를 생각하게 하여 독자로 하여 공감의 폭을 넓히고 있다.
시인의 모든 과거는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는데, 이 말은 시인이 일상인에 비해서 탁월한 기억력을 갖는다는 것은 아니며, 늘 과거의 어떤 기억이나 회상 속에 일상인보다 많이 잠겨 있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일상인은 하나의 경험이나 추억으로 그치지만 시인은 그 경험을 새로운 창작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경험을 재생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 그것이 일어났는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단순한 기억이 아닌 그 때의 정신상태를 이용할 수 있는 상태로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에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정신상태란 여러 가지 형태의 경험 중에서도 감각경험이다. 많은 경험 중에서 현재의 어떤 유사한 계기와 유사한 충동에 의해서 재생의 가능도가 높은 경험이 채택된다.
특히 고향을 노래한 시 속에 이용되는 과거의 경험은 여타의 성격을 가진 시들보다 본질적으로 극히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경험들이다. 이 경험들이 외면적인 객관화 속에서 의미가 부여되고 통합되어 한 편의 시로 탄생되는 것이다. 일상적 경험이 미적 경험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 때 과거의 경험 제시만 하는게 아니라 현재적 감정과 정황이 곁들여짐을 알 수 있다. 그 현재적 감정의 기저에는 그리움과 가벼운 우수가 동반된다. 즉 이미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현재적 삶의 보편정신의 안식처이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에 동반되는 우수가 발견된다. 때문에 그리움과 우수가 동반되는 과거의 경험․기억에 대한 회상과 상실감의 인식이 향수의 가장 큰 모체가 됨을 알 수 있다.
知命에 어버일 여의도/ 생각은 길 잃습니다//
세월이란 山脈 속에/ 病만같은 고향을 두고//
시시로 고개를 돌려/ 바라기나 하였더니.//
百年도 恨으로 재면/ 꿈결이라 하옵는데//
눈 감으면 가슴에 찾아 와/ 갈피 갈피 밟히는 산천//
어머님 계오신 靑山이/ 젖줄처럼 빨립니다.//
얼마나 슬픔을 살면/ 悔恨은 또 잠드오리//
오늘도 저무는 하늘/ 마음 하나 歸鳥로 떴오//
고향산 그 어디메에/ 둥지라도 트오리까.//
-「어머님 가신 후로」 전문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부모가 계시다는 생각으로 부모가 돌아가시면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생각나는 곳이 고향이다. 부모가 계시는 고향이기에 시시로 고개 돌리고 마음은 늘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는 것이다. 정완영의 고향의식 속에는 고향은 부모와 밀착되어 나타난다. ‘갈피 갈피 밟히는 산천’은 ‘어머님 계오신 靑山’이며, 나는 또 그것을 ‘젖줄처럼 빨고’ 있다. 고향 산천과 어머니와 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로 밀착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내 삶의 근원이 그곳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내 삶의 근원으로서의 고향이다. 타향에서 고향과 부모를 그리는 마음은 늘 슬프고 깊은 悔恨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마음은 ‘歸鳥로 떠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새가 되고, 고향에 돌아가 고향 산에 둥지라도 틀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만 그러할 뿐 실천은 하지 못하는 서글픔을 이 작품에서는 나타내고 있다.
고향이란 조상의 산소가 있고 부모와 형제와 친지가 있는 곳이며, 이들과 함께 하던 삶이 있는 곳이다. 고향의 안온함은 어머니로 하여 더욱 진하게 나타난다. 고향이 안식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정완영의 작품에서는 고향은 영원한 모성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영원한 모성성(여성성)이 우리를 천상의 세계로 인도한다(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13)는 괴테의 말처럼 모성성만이 화해로운 원형의 공동체를 보호하고 그것을 유지시켜 줄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 하면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 어머니와 함께 하는 고향의 모습이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듯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고향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모습이 위 작품에도 역력하게 나타난다. 고향이 안식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은 조상이 있고, 어머니가 있기 때문임을 정완영의 작품에서는 보여준다. 위 작품 외에 어머니가 등장하는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立冬철 어머님은 흰 옷만도 추웠는데 -「귀고」
어머님 켜 놓고 간 등불만한 설움으로 -「감」
어머님 옛날엔 이 물이 은하에도 가 닿았고 -「시냇물」
어머님 잠 드신 봉분도 내 가슴엔 달이더라 -「봉분」
가신 길 하도 멀어 세월마저 가뭇하고 -「달빛」
고향산 어머님 봉분 등불 들고 계오신 골 -「쑥국새 봉분」
너 왔냐! 말도 없이 한줌 흙만 보태신 이 -「한 즘 흙 보태신 이」
어머니 무덤가엔 생시 같은 꽃 피는데 -「눈물이 아직 남아」
아버지 어머니는 저 세상의 뻐꾹새 되고 -「떠내려가지 않는 섬」
한 철만 살다가 죽어도 나 모천에 가고싶네. -「모천에 가고 싶네」
어머님 愁心이 흘러 물은 이리 우옵는데 -「향산 귀추」
할아버님 봉분 아래
아버님의 잠든 봉분
고향은 흙살이 두터워
다 흙으로 돌아가고
옛 꿈만
풀 끝에 올라
찬 이슬로 맺혀 있네.
-「찬 이슬 고향」 전문
고향을 노래한 시조 중에는 가족이나 친지에 관한 것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봉분이나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많이 나오는 것은 정완영 자신이 늦게 등단을 하고 문단에 늦게 나온 때문일 것이다. 작품 창작 당시의 본인의 나이가 많다 보니 고향으로 상기되는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가족 공동체 의식이 나타나기도 하는 이 작품에서 고향 산에 잠든 할아버지, 아버지의 봉분을 보며 ‘옛 꿈만 풀 끝에 올라 찬 이슬로 맺혀 있네.’라는 종장의 표현에서 인생의 허무감을 느끼고 있는 화자를 볼 수 있다. 인식의 범위가 한정되고 순수한 정서만 간직했던 유년시절에 각인된 고향은 그 자체로 낙원이요, 꿈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은 더 이상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변해버린 고향은 화자가 꿈꾸던 어린 날을 잃어버린 상실감과 다정했던 할아버지․아버지까지 흙으로 돌아가 봉분으로 앉아있는 냉혹하고 무의미한 현실인식이 ‘찬 이슬’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작품에서 고향이 비관적인 모습으로만 비취는 것은 아니다. ‘고향은 흙살이 두터워’라는 표현에서 오히려 고향을 안식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는 화자를 볼 수 있다. 핏줄로 이어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등장하는 고향의식의 작품에는 다음의 것이 더 있다.
천지에 눕혔던 잠을 일으켰던 할아버님 -「봉춘」
아버님 당신 생각에 목련꽃이 풀립니다 -「휘일」
우리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계시다가도 -「우리 할아버지는」
아버지 어머니는 저 세상의 뻐꾹새 되고 -「떠내려가지 않는 섬」
아버님 白髮이 비쳐 山은 저리 嚴威롭고 -「鄕山 歸秋」
고속버스 停留場까지 二十里길 따라나와
손 흔들며 배웅해 준 팃기 없던 고향 친구들
그날 그 주름진 얼굴이 햇살처럼 번져 온다.
거름 냄새 물씬 풍기는 자라같은 손을 내밀며
人生이 반은 허물인 날 보내는 인사법들
「조카 늬 언제 또 올래」먼 하늘에 솔개가 돌데.
세월에 핑계가 많아 돌아 못간 數三年에
더러는 이미 산자락 熟果처럼 떨어지고
생각만 고향 까치집 동그맣게 걸려 있다.
-「세월이 간다」 전문
공동체적 삶을 살았던 고향은 조상과 부모, 동기, 친척 외에도 어렸을 때의 소꿉친구인 고향친구가 있다. ‘죽마고우’라고도 표현되는 어렸을 적의 친구는 동기간보다도 더 가까운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다. 위 작품은 그러한 친구들에 의해 상기된 고향이다. 언제 가도 반겨주는 고향 친구들, 이십 리 먼 길까지 따라나와 손 흔들며 배웅해 주는 정이 많고 사심 없는 친구들이다. 화자는 고향에 다니러 갔다가 다시 도회적인 삶의 공간 속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그날 그 주름진 얼굴이 햇살처럼 번져 온다’는 직유적 표현으로 그들에게서 느끼는 따뜻한 정감을 표현하고 있다.
‘조카 늬 언제 또 올래’라는 표현에서 동기간보다 더 가까운 고향 친구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 인사말에 왜 ‘먼 하늘에 솔개가 도는’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아득함, 쓸쓸함,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나이 때문이다. 서너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고향이지만 일상생활에 젖다보면 고향에 가기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그것을 화자는 ‘세월에 핑계가 많아 돌아 못간 數三年에’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 친구들은 산자락에 익어 떨어지는 낙과처럼 돌아가고, 생각만 언제나 그곳에 까치집처럼 걸려있는 것이다. ‘친구’, ‘까치집’ 등의 소재를 통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공감을 얻고 있는 작품이다.
Ⅳ. 결론
정완영의 고향의식 발현 양상을 살펴보면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전원적 자연친화 공간이며, 두 번째는 조손이 함께하는 안식 공간이다. 먼저 전원적 자연친화 공간으로서의 고향을 살펴보면, 그의 지정학적인 고향은 김천이고, 그곳의 자연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작품을 많이 쓰고 있다. 抒情的이고, 田園的이며, 牧歌的인 면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그의 성장 환경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보고 자란 원형적 공간인 고향에는 바로 자연이 있다. 그가 고향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릴 때 고향에서 보고 자란 자연을 사랑함을 의미한다. 고향의 자연은 정완영의 생애에 늘 그리움과 평화스러움, 정신적 안식을 주는 공간이 되고 있다. 사계절 자연의 모습이 삶과 깊이 밀착되어 있는 곳, 그곳은 우리의 정서가 배어 있는 곳이며, 바로 고향 마을이다. 전원적이며 자연적 고향은 어떠한 갈등도 나타나지 않고, 평화스런 계절의 모습과 화자의 그리움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이것은 동양적 자연친화사상이 그 바탕이 되고 있다.
정완영의 작품에서는 조선시대의 산수자연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의 서정 자아의 흥취와 이상을 미적으로 형상한 江湖歌道의 시조나 당쟁 속의 벼슬길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하게 농사지으며 유유자적하게 살기를 원하던 歸去來辭의 시조, 또는 공간적 배경으로 밭 갈고 씨 뿌리는 구체적 삶의 현장이 등장하는 田家時調에서 보이는 작품과는 구별된다. 누구나 고향에 돌아가고파 하고 노년을 고향에서 여유있게 보내고 싶어하지만, 조선시대에도 귀거래가 구두선이 되었듯이 그러한 여건을 지니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완영의 경우는 고향에 돌아와 한적하고 여유있게 사는 것을 추구하지는 않고 있다. 전원적․자연적 삶의 상실에 대한 아픔과 향수를 지니고 있을 뿐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전원생활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 주지는 않는다. 그는 생활기반을 이미 도시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노래하는 귀거래는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잠시 처소적 고향을 다니러 가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영원한 안식처로의 귀거래로 사후에 육신이 고향땅에 묻히는 것이다. 그러한 작품 속에 드러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사랑이며, 그러한 작품을 통해 자연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정완영의 고향의식인 조손이 함께하는 안식공간으로서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정완영은 ‘고향이란 산 사람과 죽은 조상이 등을 맞대 사는 마을이다. 고향이란 산 사람들만이 이해에 얽혀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근시안적이고 단세포적인 뜨내기 마을이 아니라 산 사람과 죽은 사람들이 등을 맞대 사는 마을’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만큼 그의 의식 속에는 고향은 조상과 자손이 함께 사는 안식공간으로 나타난다. 이 고향의식은 볼노프의 고향의 정의인 ‘고향은 인격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며,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등과 같은 가족 내에서의 친밀한 인간관계들과 함께 시작되는 곳이다.’14)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이것은 고향을 어떤 영역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기보다 혈통 및 가족 중심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곧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며, 형제자매의 동기와 어릴 적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난다. 즉 고향이란 조상의 산소가 있고 부모와 형제와 친지가 있는 곳이며, 이들과 함께 하던 삶이 있던 공간이다. 즉 조손이 함께하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안식공간이다. 고향이 안식공간으로 인식되는 정완영의 작품에서는 고향은 영원한 모성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영원한 모성성(여성성)이 우리를 천상의 세계로 인도한다(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15)는 괴테의 말처럼 모성성만이 화해로운 원형의 공동체를 보호하고 그것을 유지시켜 줄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향 하면 떠오르는 어머니 얼굴, 어머니와 함께 하는 고향의 모습이 정완영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고향이 안식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은 조상이 있고, 어머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이 시인 자신의 부모, 형제자매, 친구라 하여도 개인적 그리움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있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부모, 형제자매, 친구들을 생가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감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고향이란 이름만으로도 부모를 떠올리고 형제자매를 떠올리고 친구․친척을 떠올리게 되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 때문이다. 시인과 독자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란 정서로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루게 되고, 독자 또한 고향이란 조손이 함께 사는 평화롭고 안온한 안식공간으로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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