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조, 희망의 길
김민정(시조시인, 문학박사)
이번에 만나는 다섯 시인들은 젊은 시인들이라 시의 주제와 소재도 새롭고 신선하고, 형식 또한 새롭게 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보이는 작품들이었다. 먼저 박희정 시인의 ‘늦멀미’라는 작품을 살펴 보자.
차마 읽지 못한 지난밤의 사연처럼
분분이 덮쳐오는 삼월 늦눈의 아침
때 없이 흔들리는 세상, 참말 알 수 없어라
낯설지만 태연하게 한 줄기 빛으로 와
성한 몸 숭숭 뚫어 하얗게 덧대놓고
끌끌한 시간의 거리 닫아걸고 마는 지
물 젖은 솜뭉치를 등짐진 나귀모양
그대 먼 소식들은 눈발에 스러지고
엇갈린 결빙의 생채기 왜 이리 아찔한 지 (늦멀미 전문, 박희정)
박희정 시인의 ‘늦멀미’에서 시인은 왜 늦멀미를 하는 걸까. 차를 운전할 때 운전자는 절대로 멀미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가 갈 방향에 대해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의식이나 몸이 예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사는 자기가 조정하며 가기가 힘이 든다. 마치 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신이 운전하는 차에 우리는 타고 가는 것일까. 그래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때 멀미를 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지금 중장에서 ‘삼월 늦눈’이 분분이 덮쳐오는 아침을 맞고 있다. 따뜻한 봄볕이 내리고 꽃이 피어야 할 때에 내리는 늦눈, 그것은 분명 화자에게 예기치 않았던 상황이며, 그리하여 ‘때 없이 흔들리는 세상, 참말 알 수 없어’ 멀미를 느끼고 있다. ‘삼월 늦눈’은 여기서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나, 사랑의 감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인생은 만남이다’라는 말이 있다. 모든 사람, 모든 사물과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만나고, 처음에는 낯설게 다가온다. 그런데 그 낯섬이 ‘태연하게 한 줄기 빛’으로 온다고 했다. 내리지 않아야 할 때 내리는 늦눈처럼 그것은 낯설지만 태연하게 오는 한 줄기 빛, 즉 밝음으로 내게 왔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한 몸 숭숭 뚫어 하얗게 덧대놓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의 성한 몸이란 ‘마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눈은 깨끗하게 내리지만, 끝내는 녹으면서 지저분해 질 수 있는 것처럼 끝내는 ‘끌끌한 시간의 거리’를 닫아걸고 만다. ‘끌끌하다’의 시어는 ‘마음이 맑고 바르며 깨끗하다’의 의미이다. 한줄기 빛으로 와서 하얗게 덧대놓은 깨끗함을 결국은 ‘닫아걸고 마는’는 끝남이 오는 것이다.
끝남 뒤에 오는 ‘물 젖은 솜뭉치’는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그것을 진 나귀는 당연히 무거움에 휘청거릴 것이고 그리운 ‘그대 먼 소식’들은 눈발에 스러지고 만다. ‘엇갈린 결빙의 생채기’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시는 오지 않아야 올 때 온 늦눈처럼 늦게 온 사랑과 그리고 그것이 끝났을 때의 마음의 무거움과 상처를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디에도 사랑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랑과 이별을 말하고 있는 시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제목인 ‘늦멀미’는 예고없이 다가온 늦사랑에의 멀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이경미 시인의 ‘절망의 경계’란 작품을 살펴보자.
시간은 물에 잠겨 길을 비껴서고
악어*도 보이지 않는 비장의 늪에는
안개만
늦도록 남아
전설을 외고 있다
발을 디디면 또 다른 시간들이
갈피마다 담담히 고요를 잠식하고
아무도
이르지 못한 늪의
밑바닥이 깊어간다
바닥에 이르지 않고서는 누구도
날아오르지 못하는 절망의 경계 뒤,
아직은
어린 해오라기
박차고 오른다
저 흐릿하게 멀어져간 배경 위로
낮은 집 한 채 늦은 불 켜는 저녁
비온 뒤,
수채화 한 폭
사진으로만 남는다 (절망의 경계-우포늪- 전문, 이경임)
*주* 송수권....<우포늪엔 악어가 산다>인용
이경임 시인의 ‘우포늪’이란 부제가 붙어있는 ‘절망의 경계’란 제목이 시선을 끈다. ‘시간은 물에 잠겨’ ‘악어도 보이지 않는 비장의 늪’ ‘안개’란 시어들이 삶에의 절망을 나타내는 시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전설’은 화려했던 시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수 역시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듯 절망이 깊어짐을 드러낸다. 늪이란 습성은 디디면 디딜수록 헤어나지 못하도록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절망들이 ‘시간의 갈피마다 담담히 고요’를 내리면서 더 깊이 ‘늪의 밑바닥’, 즉 절망이 바닥까지 이르고 있음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셋째 수에 오면 절망의 밑바닥, 즉 더 가라앉을 곳이 없는 절망의 경계에 까지 오면 아직은 어린 해오라기지만 박차고 오른다고 하여 희망을 말하고 있다. 개구리가 멀리 뛰기 위해 움츠린다는 속담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즉 첫째 수, 둘째 수에서 깊어지던 절망감이 반전을 시도하고 있다. 마치 한시의 기승전결의 기법에서 ‘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넷째 수에 오면 ‘저 흐릿하게 멀어져간 배경 위로’라고 하여 어떤 절망감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역시 중장에서 ‘낮은 집 한 채 늦은 불 켜는 저녁’이라고 하여 낮긴 하지만 희망의 불을 켜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비온 뒤의 맑은 수채화 한 폭 같은 우포늪의 모습이다. 삶에서의 절망과 희망의 모습을 우포늪으로 상징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셋째 수 초장끝 ‘누구도’란 시어는 초장이 아닌 중장에 가 붙는 의미이다. 시조란 3장6구45자 내외의 형식을 지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랬을 경우 3장은 초장, 중장, 종장으로서 각 장은 하나의 완결된 의미를 지녀야 한다. 6구의 의미도 마찬가지여서 각 구에서 끊어져야 한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있을 때 좋은 시조가 되는 것이다.
이석구 시인의 ‘여행’이란 작품을 살펴보자.
벼르고 벼르다가 모처럼 시간 빌려 발자국 뒤로 한 채 지도 위에 길을 놓고
인적이 뜸한 이른 아침 감포로 차를 몰았다.
여기서부터 길게 휜
골짜기 아래 능선
입춘 지난 감은사지
하늘 높은 돌탑 위로
볍씨 문 청둥오리들
햇살 비껴 날아왔다.
훤하게 드러난 중심 지상의 문 앞인가 피리 구멍처럼 뚫린 탑신과 옥개석 사이
단청빛 비늘 번득여 목어 한 마리 헤엄치다.
바다가 바로 뵈는 대종천 한가운데
눈 뜨고 감는 사이 마른 잎 밀쳐내며
등 굽은 느티나무에 붉은 잎이 돋고 있다. (여행 전문, 이석구)
여행이란 작품은 네 수로 된 연시조이다. 그러나 각 수마다 행갈이는 같지 않다. 첫째 수는 초장과 중장, 종장을 각각 한 행으로 전체를 2행으로 행갈이를 하여 독자들의 눈길을 낯설게 하고 있다.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둘째 수는 여섯행으로, 셋째 수는 2행으로, 넷째 수는 3행으로, 각각의 수가 행이 다른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올해 당선된 신춘문예 작품들 중 이런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작품이 몇 편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벼르던 감포로 여행을 떠났다는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감은사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길게 휜 골짜기 아래 능선’, 하늘 높은 돌탑’, ‘볍씨 문 청둥오리’등 시각적 묘사가 두드러진다. 절터만 남아 있는 감은사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돌탑, 그리고 날아드는 청둥오리로 평화스런 정경을 눈앞에 펼치듯이 보여주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감은사지의 돌탑을 노래하고 있는데, 감각적 묘사가 드러난다. ‘피리 구멍처럼 뚫린 탑신과 옥개석 사이’에서의 직유적 표현이나 ‘단청빛 비늘 번득여 목어 한 마리 헤엄치다’에서 목어의 흔들림을 ‘헤엄치다’로 비유하고 있는 이 부분도 시각적 심상이 뛰어나며 하나의 돌탑을 보고도 화자는‘환하게 드러난 중심’을 느끼고 있다.
눈을 뜨고 감는 것 같은 잠깐 사이의 세월, 또 한 계절 겨울이 가고 늙은 느티나무에는 붉은 잎, 새 잎이 돋는 봄이 오고 있는 것을 화자는 감은사에서 느끼고 있다.
다음은 이승현의 작품을 살펴보자.
찌그러진 동전 속 무너진 저 다보탑
다시 세울 수 있는 한 줌 빛 있다면야
시든 꽃 한 아름 품고 면벽수행 하겠는가
묽어지는 늪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비빌 언덕배기도 움켜쥘 끈조차 없어
밑으로 곤두박이며 빠져드는 이 세상
낮은 코 치켜세우고 종종치는 사람들아! 슬픈 가면의 눈빛 적선하듯 뿌려대며
곤곤한 이 살얼음판 깨뜨리지 말게나
낸들 알콜중독자 되고 싶어 되었을까 살 에는 광풍狂風에 홀로 몸 되어보시게
누구도 먹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할 걸세
신선한 물고기도
잡는 법도 아니라네
웃음소리 묻어나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별 하나
올려볼 수만
있다면
그․뿐․이라네 (지하도를 맴도는 메아리 전문, 이승현)
이승현의 ‘지하도를 맴도는 메아리’는 지하도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또는 노숙자들의 삶에 대한 것이 소재가 되고 있다. 첫째 수에서는 사람들이 동정해서 던젼주는 동전, 그 속의 다보탑이듯 다시 세울 수 있는 한 줌 희망이 있다면 구태여 ‘시든 꽃 한 아름 품고 면벽수행 하겠는가’고 희망없는 절망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 수에 오면 희망이 더욱 없음을 말하고 있다. ‘묽어지는 늪’ 희망이 흐려지는 세상이란 늪 쯤으로 해석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비빌 언덕배기도 움켜쥘 연줄이나 도움 받을 만한 곳이 없이, 깊은 절망감 속으로 짜져들어감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셋째 수와 넷째 수에서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화자의 발언이다. ‘낮은 코 치켜 세우고 종종치는 사람들아’라고 하여 별로 잘난 것도 없는 사람들, 슬픈 척 가면의 눈빛으로 적선하듯 시선을 뿌리며 가는 사람들, 마지못해 앉아있는 살얼픔판 깨뜨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차마 산목숨 죽지 못해, 자존심 등을 모두 버리고 앉아있는 삶이 살얼음판 같은 사람들의 심정이다. ‘낸들 알콜 중독자가 되고 싶어 되었을까’라고, 그럴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때, 즉 ‘살 에는 광풍에 홀로 몸 되어 보면’ 모든 고통을 잊고 싶은 마음이 되어 먹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 된다는 하소연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화자의 꿈은 소박하다. 큰 욕심이 아니라 ‘웃음소리 묻어나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별 하나 올려볼 수만 있다면 그․뿐․이라네’라고 한다. 별 하나 올려볼 수 있는 만큼의 삶의 여유를 원하는 것이다.
이승현의 작품은 이 작품 외에도 사회의 소외계층에 대한 따뜻한 시선의 시조가 많다. 또한 ‘어느 과학자의 끌’, ‘아름다운 향기’ 등 주제가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이라는 데 앞으로의 작품이 기대된다.
앞 뒷산 숲길 따라 어엿이 선 굴밤나무
어느 것 하나 없이, 같은 높이 그 자리에
서러운 전설의 옹이 보듬어 안고 있다.
허리 살을 돌덩이가 난도질 할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옹송그려 보았지만
신열을 이기지 못해 떨어지는 저 도토리
뼈 속으로 스민 사연 켜켜이 눌러앉아
세월의 무게 따라 더더욱 불거지는
얼비친 보릿고개의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이다
곰삭아 깊게 패인 주름 속 그 밑에는
중증에 시달리는 건망증 환자 보라는 듯
봉긋이 새순이 돋는 굴밤 한 톨 있더이다. (굴밤나무에게 전문, 장명웅)
* 우리나라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육·칠십년 이상 된 굴밤(도토리)나무의 거의 대부분은 허리쯤에 커다란 상흔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보릿고개 시절 한시라도 빨리 도토리를 따기 위해 큰 돌덩이로 굴밤나무를 쳐서 떨어지는 굴밤을 주어 왔던 뼈아픈 과거사의 증거이다. 요즈음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이 무심코 지나치지만 등산길에 눈여겨보면 우리의 시린 삶의 응어리가 곳곳에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굴밤나무를 소재로 하여 지금은 잊혀져가는 어린 날의 보릿고개를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도토리묵의 재료로만 사용되지만, 도토리는 우리들이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에서 가을이면 큰 자루를 몇 개씩 들고 큰 산으로 어른들이 주우러 가던 생각이 난다.
동네사람 여럿이서 이른 새벽 도시락이나 뭉치밥을 준비해 가지고 큰 산으로 도토리를 주우러 가는 것이다. 단순히 묵을 쑤어 먹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구황식품으로서 주워온 도토리를 쪄서 바싹 말려 두었다가 겨울에는 다시 쪄서 물을 우려내고 우려내어 도토리의 덟은 맛이 가시면 그것을 보드랍게 빻아서 볶은 콩가루를 뿌려 식사대용으로 먹던 기억이 새롭다. 그것을 먹어보고, 그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겨울을 나던 산골 사람들의 모습을 이 작품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전설의 옹이’란 바로 그러한 시절 사람들이 높고 큰 나무를 흔들기가 힘겨워 돌을 들어 쳐서 열매가 떨어지게 하여 주었던 흔적이다. 둘째 수에서는 돌덩이를 맞으며 아파했을 도토리나무를 표현하고 있다. ‘입술 옹송그려 보지만/ 신열을 이기지 못해’도토리는 떨어지고 만다. 그러한 아픈 사연이 켜켜이 눌러앉아 있는 도토리나무는 보릿고개의 모습이 드러나는 지울 수 없는 화인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중증에 시달리는 건망증 환자’란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30, 40년 전의 힘들었던 생활은 모두 다 잊고 있는 현대인들…. 그 속에 봉긋이 도토리의 새순이 돋고 있다고 했다. 늘 이렇게 과거의 상처는 묻히고 새롭게 역사는 탄생된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아픔도, 과거의 역사도 소중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과거로 하여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며, 그것이 삶의 거울이 되어 보다 밝은 미래를 지향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굴밤나무에 난 상처를 소재로 이러한 한 편의 작품으로 완성해 낼 수 있다는 것이 시인의 능력이라 느껴진다.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생활주변의 작은 소재들이 우리들의 잊었던 의식을 끄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젊은 다섯 시인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앞으로 얼마든지 발전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란 점에서 희망을 건다. 모두 신선한 소재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고루하지는 않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들을 탄생시켜 이 땅의 훌륭한 시조시인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해 본다.
천 년 가까이 이어온 시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시절가조라 하여 당대 인간의 현실적 삶을 우의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표현되었거나, 자연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의 작품을 읽다가 보면 소재와 주제가 굉장히 다양하다. 자연에 대한 관조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현실적 인간 세계로 시선을 이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자신의 내면에 대한 탐구라고 할까, 자신을 객관화시켜 놓고 보는 태도도 들어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시조를 고루한 문학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생각할 것은 시적 대상에 대한 묘사력이 어느 정도 새로운가도 중요하지만, 시조의 가락적 운용을 얼마만큼 자연스레 하고 있는가도 중요하다. 소재나 표현기법 등에서 새로움은 있다해도 가락의 운용이 뒤를 받쳐주지 못한다면 시조로서 분명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시조와 현대시를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를 시조시인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한다. 내용면으로는 구분하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형식인데, 요즘 시조는 형식의 파괴가 너무 많아 과연 시조다운 시조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좋은 시조란 어떤 것인가. 외국에 가장 시조다운 작품을 소개한다면 어떠한 작품을 소개할 수 있을까를 아울러 생각하며 시조창작에 임한다면 더 좋은 시조작품이 탄생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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