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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스위치백(switch back) 철로 - 시조로 쓰는 영동선 철길따라 제3회

by 시조시인 김민정 2009. 2. 15.

 

시조로 쓰는 영동선 철길따라 제3회

 

스위치백(switch back)철로

 

1. 영동선[嶺東線]의 역사

 

                                              김민정(시조시인, 문학박사)

 

 

 

 

 

  영동선(嶺東線)은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영주역에서 강원도 강릉시 교동의 강릉역을 잇는 총길이 193.6㎞인 산업철도이다. 1963년 5월 17일 기존의 영암선(영주~철암간 86.4Km)·철암선(철암~묵호간 60.5Km)·황지본선(통리~심포리 간 8.5Km)·동해북부선(묵호~강릉 간 44.6Km)을 하나로 합쳐 영동선이라 개칭했다.

  1933년 5월 삼척~북평 간 23㎞가 개통된 것을 시작으로 1940년 8월에 묵호~도계 간, 1951년 10월 도계~철암간, 1955년 12월 영암선, 1962년 11월 동해북부선이 개통됨으로써 전구간이 연결되었다. 영동선은 영주에서 중앙선과 경북선에 연결되어 X자형 철도망을 이루며 전국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또한 동해역에서 북평선(동해~삼화)· 삼척선(동해~삼척)과 연결되며, 태백시의 백산역에서 태백선과 이어진다.

 

산을 깎아 길을 내고

바위 폭파 굴을 뚫어

 

강원산악 심심산골

기찻길을 만들 무렵

 

오십천  기-인 적막도 깨어나고 있었네      <철암선을 놓으며 - 영동선의 긴 봄날 16, 둘째 수>

 

 ‘영동선의 긴 봄날 16~20’은 철로선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일제 말경에 태평양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했던 일본은 산업자원을 착취하기 위하여 매장량이 가장 많은 삼척탄전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묵호항을 만들고, 산업철도와 신작로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해방 후에도 우리나라 산업발전을 위하여 삼척탄전의 무연탄이 필요했기 때문에 철로 개발이 계속되었던 것이며, 이러한 영동선은 많은 석탄을 운반했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석탄먼지를 꺼멓게 날리며 가루탄을 실은 트럭들이 신작로를 지나가고, 터덜거리는 시골 버스가 지나가기도 했다.

 

대바위산 가물가물/ 아지랑이 피워내면//

두메산골 심포에도/ 봄은 다시 찾아오고//

건널목/ 오랍뜰에는/ 옥수수와 감자 심고//

 

호랑나비/ 떼 지으며/ 그리움을 피워내면//

올망졸망 육남매를/ 꽃 가꾸듯 가꾸면서//

깊은 산/ 곤드레 나물/ 봄 한 철이 깊었네// 

                            <건널목을 지키며 - 영동선의 긴 봄날 20, 전문>

 

  아버지가 선로반에 들어가 일을 시작한 것은 만주 이민을 다녀오시고 난 후의 일이라 생각되지만, 몇 년도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렇게 철로를 놓는 일부터 시작하여 철로를 돌보는 일을 하면서 선로반에 들어가 일을 하던 어느 날 누군가 철로위에 돌멩이를 얹어 놓아 운반차에 앉은 채 그것을 치우려고 몸을 기울이다가 철로위에 떨어져 다리를 다치고 3년이나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읍내병원에서 겉만 다친 줄 알고 겉을 계속 치료하였는데 낫다가 또 고름이 생기고, 낫다가 다시 고름이 생겨 나중에 삼척도립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3센티 정도의 부러진 뼈가 살 속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수술을 받고 한쪽 다리뼈를 3센티 정도 잘라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빨리 낫고 싶어서 누군가가 가르쳐준 옻나무의 옻을 상처에 처방했다가 온 몸에 옻이 퍼져 죽을 뻔한 고비도 있었으며, 병원치료를 끝내고도 한 쪽 다리를 3cm정도 절단하게 되어 절뚝이며 여생을 보내야 했다. 때문에 아버지는 선로반을 떠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건널목지기가 되어 심심산골 심포리(深浦里)의 건널목을 지키며 가난하고 외롭고 힘든 삶을 이어갔다. 

  많이 배운 것도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였지만, 형부의 말씀에 의하면 법 없어도 살 만큼 꼿꼿하고 착한 분들이었다. 남에게 피해 가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분들이었고, 정직하라는 것과 뒤에서 남의 험담이나 흉을 봐서는 안 된다고 어린 우리들에게 누누이 교육하신 분들이다. 때문에 동네에서도 인심을 잃지 않았고, 가난하지만 곧은 심성으로 6남매를 키우셨다. 강원도 깊은 산골 곤드레나물 같은, 진국의 삶이었다.

 

 

2. 사라져갈 지그재그철로 구간

 

가끔은 묻고 싶은

지그재그 인생길 

 

이곳에 와서 보면

그 이치를 알게 된다

 

영동선  기찻길에도 

지그재그 있다는 걸

 

 

가끔은 묻고 싶은

가도 가도 숨찬 인생  

 

이곳에 와서 보면

그 이치를 알게 된다

 

때로는 

바람도 숨찬

언덕길이 있다는 걸         <지그재그철로- 영동선의 긴 봄날 46, 전문>

 

 ‘영동선의 긴 봄날 46~50’은 지그재그 철로인 도계역, 나한정역, 흥전역, 심포역 사이의 모습이다. 태백시 통리와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 구간은 해발 680m에 이르는 험준한 지형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내 유일의 스위치백(switch back) 철로인 을(乙)자형 철로 시설이 있다. 심포역과 나한정역 사이에는 흥전역이 있고, 이곳이 국내유일의 스위치백(switch back) 철로인 것이다. 스위치백 철로란 경사가 가파른 구간에서 열차를 전진·후진을 반복하게 하여 목적지에 오를 수 있도록 설계한 철도선로이다.

  기울기 30란 1000m 진행에 30m가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기울기가 30이상이면 운전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열차운전의 한계구배인 30/1000으로 철길을 운행하기 위해 기차는 도계역에서 나한정역까지 3.2Km, 나한정역에서 흥전역까지 1.5Km, 흥전역에서 심포리역까지 4.06Km를 지그재그로 왔다갔다하면서 올라가는 것이다. 이 구간 중 나한정역 ~ 흥전역 1.5Km 구간을 뒤로 달리는  ‘스위치백’ 시스템으로 열차가 통과한다. 즉 앞머리가 꽁무니가 되고, 꽁무니가 앞이 되어 경사면을 오르는 것이다. 

 

 

기관차가 물을 먹는/ 이~삼십 분 정차 동안// 저탄장의 가루석탄/ 화물차에 실렸었고//

차량반/ 검수원들은/ 바퀴 점검 바빴고//

 

옥수수, 감자, 김밥/ 산골다운 먹거리와//

동해바다 갓 건져온/ 생선, 미역 흥정으로//

영문도/ 모르는 여객/ 지루함을 달랬다//  <도계역 - 영동선의 긴 봄날 50, 전문>

 

  도계역은 여객차가 30~40분씩 머무는 큰 역이었다.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오래 머무는지 이유를 몰랐었다. 손님이 많은 곳이라 더 태우려고 기다리는 줄 알았다.

아니면 석탄을 싣기 위해서 오래 정차하는 줄 알았다.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나 가장 큰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도계역에는 높이 8m, 용량 26㎥인 급수탑이 있다. 요즘은 사용되지 않는 이 급수탑은 2003년 1월 문화재청 근대문화재 46호로 지정되었다. 국내에서 몇 개 안 되는 급수탑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보충하기 위해 만든 설비였으며, 도계역에 정차하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보충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급수탑의 물은 기관차의 물보충 시간 외에도 계속 흘러넘쳐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의 물을 식수로 삼기도 했다. 60~70년대만 해도 이 마을은 식수부족으로 산 중턱까지 가서 물을 길어와야만 했고, 그래서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지하수인 급수탑의 물을 식수로 이용했다.

  도계역에 기차가 오래 정차했던 이유는 그 급수탑에서 증기기관차에 물을 보충하고, 열을 받은 기관차의 엔진을 식히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기차에 안내 방송도 없던 시절, 기차가 오래 정차하는 이유도 모르는 채 궁금하고 답답했던 사람들은 그곳 장사꾼들의 국수, 옥수수, 감자, 김밥, 떡 등 간식거리를 사 먹으며 또 역전에서 파는 묵호, 삼척, 북평에서 올라온 싱싱한 생선, 미역, 파래 등의 반찬거리를 사기도 하며 지루한 정차 시간을 보냈다.  

 

돈 벌어 뜨겠다던/ 탄광촌의 뜨내기들//

소박한 꿈 다시 묻혀/ 뿌리 내린 삶이 되고//

한여름/ 루핑 지붕만/ 사막처럼 후끈이던//

 

심포리역, 흥전역,/ 나한정역, 도계역 사이//

지그재그 철로에서/ 뒷걸음을 치던 기차//

새로운/ 전설 속으로/ 아스라히 사라져갈//

                              <나한정역 - 영동선의 긴 봄날 47, 전문>

 

  나한정역은 지금은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거의 없는 한가한 간이역이다. 1939년 3월 1일 역사 준공, 1940년 신호장역을 거쳐 1953년 4월 1일 여객과 화물을 취급할 수 있는 보통역으로 승격했지만, 여객도 화물도 많지 않았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도계시장을 가게 되면, 나한정역에서 약 3.2Km이고, 한 정거장 밖에 안 되어 기차시간이 맞으면 기차를 타고 가고, 걸어가는 것이 빠르다고 판단되면 걸어가곤 하였다.

  심포리역 북쪽에 있는 마을 나한정은 심포리역 뒷편, 돈각사라는  절의 뜰 앞에서 건너다보이는 산세가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나한"("아라한" - 소승불교에서 최고 경지에 이른 수행자)과 흡사하다 해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을(乙)자형/ 철도에서/ 뒤로 가기 위한 기차//

정차하는 잠깐 순간/ 신호기만 흔들리는//

아무도/ 내리지 않는/ 그런 역이 있었고//

 

역 아래/ 마을에는/ 흥전사택 있었지만//

까만 아이 까아만 물/ 세월 속을 흘러가고// 쓸쓸한/ 바람소리만/ 선바위골 흔들었다//  <흥전역 - 영동선의 긴 봄날 48, 전문>

 

  스위치백의 구간인 흥전이란 역은 사람들이 타거나 내리지 않는 신호장 역으로 예전에는 역장이 나와 붉은색과 녹색 깃발을 들어 신호를 하면 깃발색에 따라 기차를 움직여 지그재그 철로를 운행한다. 나한정역을 지나 흥전역을 향하면서 앞장서던 앞머리 기관차가 꽁무니가 되고, 꽁무니가 앞이 되어 경사면을 올라간다. 나한정역~흥전역 구간을 처음 타보는 승객들은 당황하기도 하는데, 기차가 갑자기 뒷걸음치기 때문이다. 기차는 기차굴 입구, 흥전역 근처, 나한정역의 후진에서 주로 서행을 한다. 때문에 가끔 동네 젊은이들은 차표도 끊지 않고, 그곳에서 기차를 슬몃슬몃 타고 내리는 무임승차를 하기도 했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뽀얗게 먼지 피고//

화물차가 지나가면/ 꺼멓게 탄재 날려도//

오십천/ 낭만이 흐르고/ 미인폭포 흐르고//

 

가루탄을 반죽하여/ 주먹탄을 만들고// 

나무기계로 찍어내던/ 십구공탄 추억 속을// 

달려라,/ 달려라 심포역까지/ 칙칙폭폭 꽤애-액// 

                         <달려라, 심포역까지 - 영동선의 긴 봄날 40, 전문>

 

  50년대 후반~70년대 후반까지가 심포리 탄광촌은 전성기였던 것 같다. 탄을 많이 캐어내는 석탄굴 주인에게 말을 하고, 바로 캐내어 가공되지 않는 주먹탄이나 가루탄을 얻어다가 다시 가루탄으로 잘게 부수어 묽게 반죽하여 19공탄을 찍어 말렸다가 그것으로 난방을 하며 겨울을 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나무로 만든 기계였던 것 같았으나, 나중에는 쇠로 만든 기계였던 것 같다.

  물로 적당히 이겨 반죽한 가루탄을 기계에 넣고 큰 망치로 여러 번 내려치며 단단하게 19공탄을 만들어 내던 추억이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즐거웠다고 기억되는 것은 그것이 지나간 과거인 까닭도 있겠지만, 어른들이 주로 하고 어린 나는 구경을 하든가, 아니면 나도 해 보겠다고 설치며 어른들께 졸라서 해 본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초에 서울로 전학을 왔으므로 힘든 삶의 경험은 별로 없었고, 그것은 심심산골 탄광촌의 삶을 살아낸 어른들의 몫이었다.  

  이 시조의 마지막 부분은 ‘철도 노래’인 ‘달려라, 달려라 삼척역까지, 도계년들 밥만 먹고 똥만 싼다. 칙칙폭폭 꽤애-액’이라는 ‘삼척철도 노래’에서 인용해온 것이다. 도계 탄광촌의 여자들이 일은 안 하고 탄광의 남편들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쌀밥만 먹고 편하게 지낸다는 데에 질투를 느낀 사람들이 만든 노래 가사인 것 같다. 늘 질투하는 쪽은 좋은 쪽만 보고 그것을 부러워할 뿐, 이면의 고달픔․애환․노력은 애써 생각해 보려 하지 않는 면이 있다.

 

  요즘 강릉역까지 가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지그재그 철로구간(나한정역, 흥전역, 심포리역, 통리역)을 없애고 동백산에서 도계까지 16.3Km의 긴 루프식 터널을 뚫고 있다고 한다. 그 터널이 완성되면 그 터널로 기차가 운행될 것이다. 나한정역, 흥전역, 심포리역, 통리역은 ‘영동선의 역사’속으로 다시 한 번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그렇게 되면 기차로 통리역을 지나면서 멀리 백봉산 쪽으로 바라다보이던 미인폭포의 하얀 물줄기와 때로는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산들이 여미며여미며 틔워놓은 것 같이 아스라이 보이던 아름다운 도계읍과 심포리 전경은 영원히 다시 경험하기 힘든 모습이 될 것이다. 또한 심포리역에서 나한정역까지의 지그재그로 운행되던 기찻길의 낭만도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다만 역사현장의 학습장과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 생각을 강원도에서 추진하고 있다니 빠른 실행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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