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는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전문
이 시는 황지우의 작품으로 1985년 『겨울-나무에서 봄-나무에로』에 실려 있다. ‘겨울-나무에서 봄-나무’가 되는 과정을 형상화하여, 혹독한 겨울의 시련을 스스로 이겨 내고 봄을 맞아 꽃을 피우는 나무의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나무’의 상징적 의미와 시상의 전환을 살펴보면, ‘겨울-나무’는 영하의 날씨 속 무방비의 나무로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는 상태며, 부정적 현실에 처한 상태다. ‘봄-나무’는 영상의 날씨 속에 꽃 피는 나무로, 고난과 시련을 극복한 충만한 생명력을 지닌 상태이며 주체성을 지닌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대가리 쳐들고’, ‘기립하여’, ‘밀고 올라간다’,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등 상승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여 시련을 견디면서 주체적 의지로 극복해 가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의 표현상 특징을 보면 나무를 의인화하여 삶의 교훈을 드러내고 있고, 상승적ㆍ역동적 이미지와 상징적ㆍ대립적 시어를 사용하여 화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반복과 점층적 표현으로 주제의식을 강조하며, 계절의 순환이라는 자연 현상을 통해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천천히, 서서히, 문득’과 ‘마침내, 끝끝내’란 단어의 의미는 나무가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된다는 것은 느리지만 꾸준히 자신의 힘으로 노력한 결과 어느 날 갑자기 푸른 잎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나무가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노력한 것이 언젠가는 좋은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마침내, 끝끝내’는 단순히 믿고 바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 위하여 부단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한 것을 의미한다.
계절이 순환함에 따라 겨울나무가 봄나무로 변화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겨울을 견뎌 내며 꽃을 피우는 나무는 봄이 되면 당연히 꽃을 피우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겨울을 이겨 내고 스스로 싹과 잎을 피워 내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의지를 지닌 존재다. 따라서 부정적 현실은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혹독한 자기 시련과 치열한 고뇌의 과정을 이겨내야먄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겨울을 견뎌 내며 꽃을 피우는 나무를 의인화하여 암울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드러낸다. 또한 존재의 자기 정체성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주제를 통해 나무가 가진 자율성과 주체성을 긍정하고 있다. 봄으로 가는 나무를 바라보며 이 시를 음미해 보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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