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띄우는 ‘죽서루 편지’
김민정(시조시인, 문학박사)
연두빛 발을 담근 오십천은 더 푸르고
바위도 앉은 채로 놓여 있는 누각에는
한 천 년 받쳐 든 시간 망울망울 부푼다
양지귀 물들이는 산수유 눈을 뜨고
첫마음 못 다한 말 홍매화 옅은 기침
파릇한 햇살 속에서 숨바꼭질 한창이다
돌을 찧어 구멍 내며 소원을 빌었다던
옛사람 그 손길이 뜰에 아직 남았는데
절반은 눈물꽃 맺혀 그렁그렁 피어있다
하늘 향해 돛을 단 관동별곡 가사 터엔
송강의 푸른 노래 봄볕 속에 새순 돋고
오십천 아침을 연다 햇살무늬 반짝인다
- 졸시, 「죽서루 편지」 전문
송강 정철의 유명한 가사인 ‘관동별곡’의 발생지이기도 한 죽서루에 내가 처음으로 가 본 것은 몇 년 전, 오늘 같이 따스한 봄날이다. 삼척이 고향이면서도 사진으로만 보던 죽서루는 찾아온 나를 더욱 반겼다.
삼척시의 서편을 흐르는 오십천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위치한 죽서루는 보물 213호이며 조선시대 누각이다.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지만, 12세기경 고려 충렬왕 때 ‘제왕운기’로 유명한 이승휴가 처음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1403년(조선 태종3)에 삼척부사 김효손이 중창했다고 한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자연친화적인 건축양식을 사용하여 17개 기둥의 길이가 제각각이다. 13개는 바위 위에 그냥 세워져 있고 나머지는 초석 위에 올려져 있다. 울퉁불퉁한 암반 터를 고르지 않고 기둥의 길이를 달리해 높이를 맞춘 조상들의 여유와 융통성이 돋보이는 건물,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살린 멋스러움이 그리움처럼 아련하게 다가온다.
‘덤벙주초’라고 하는 양식의 기둥을 보면서 인간의 삶의 모습도 생각해 본다. 정확하고 반듯하게 맞추는 것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자연미를 살리며 자연과 조화를 맞출 줄 아는 조상들의 지혜가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봄날….
앞마당의 산수유가 눈을 뜨고 노랗게 봄을 피워내고 있고, 옆에는 목련이 그 우아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홍매화는 ‘나 안 죽고 살아 있음’을 알리며 옅은 기침하듯 망울망울 부푼 꽃망울을 내밀고 있고, 나무는 저마다 뾰족뾰족 봄을 틔우고 있다.
죽서루 뜰 한 편에는 “돌을 찧어 구멍 내며 소원을 빌”던 “옛사람 그 손길”도 여전히 남아 있다. ‘성혈’이라고 하는 구멍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돌을 찧으며 소원을 빌던 선사시대 암각화다. 움푹하게 파인 ‘성혈’에는 봄비가 고여 마치 소원을 빌던 이들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모습 같다. 그들의 소원은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은 어떤 차이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문화관광부에서 1991년, 2월을 송강 정철의 달로 정하고 우리나라의 가사문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그를 기념하는 표식을 두 곳에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인 죽서루 경내이다. 송강 가사의 터 표석은 종전의 일반적인 시비와는 달리 팔각형의 장대 표석과 8각형의 기단으로 이루어졌고, 8각의 각 면마다 송강의 대표작과 친필, 수결, 세움말, 가사 창작의 배경을 담아 그의 생애와 문학을 알게 한다.
그 비에 새겨진 ‘관동별곡’을 읽노라니, 마치 그의 푸른 노래가 생명이 있어 새순이 돋아나고 있는 느낌이다. 단절된 과거와 현재가 이렇게 접맥이 되어 아름답고 우아하게 망울망울 부풀어 오른다. 아름다운 글은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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