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가 추구한 한국의 여인상은
김민정(시조시인, 문학박사)
영산홍/ 꽃빛보다/ 더 붉게 타올랐지//
비온 후/ 산허리 감도는/ 안개처럼 피어났지//
하동땅/ 최서희 눈썹보다도 한 뼘쯤은 더 짙게// - 졸시「그대 그리운 날은」전문
『현대문학』이란 월간지에 연재되던 소설 『토지』를 고등학교시절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1969년 9월 『현대문학』에서 1부 연재가 시작되어 1994년 문화일보에서 5부가 완결되기까지 자그마치 25년간의 긴 여정 끝에 대한민국의 대하소설 『토지』는 완성되었다. 분량으로만 따져도 원고지로 총 3만 1천 매, 페이지 수로는 약 9,000페이지(나남출판사 본)에 이르는 실로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 대작이다.
지리산 자락의 하동땅, 최참판댁 최서희, 박경리는 그녀에게서 어떤 여인상을 원했던 것일까? 『토지』에는 8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최서희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와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며, 부자 양반인 최참판의 외동딸로 곱게 길러졌고, 사치스러우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고귀한 기풍을 지니고 있다.
외적인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었음에도 그녀는 어릴 적 구천이(종)와 집을 나간 어머니 별당아씨의 부재로 모정이 결핍되었으며, 아버지 최치수에게서도 별로 정을 받지 못하고 자라 부정도 결핍되어 있다. 그녀의 성격은 아버지 최치수의 성격을 닮아 오만하고 냉정한 성격과 자신에 대한 도전을 용납지 않는 강한 자존심과 뜻한 바는 반드시 이루어야하는 강한 집념과 원한은 아귀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반드시 갚아야 하는 독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또한 최서희는 사랑에 있어서도 결단력이 대단한 여자로 그려진다. 서희와 길상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였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서희는 길상과의 결혼을 결심하지만, 길상이는 그런 주변의 시선과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서희를 멀리하게 된다. 신분의 차이로 갈등이 생겼을 때 뜻밖에도 자존심 강한 서희는 “난 길상이상 둘이 멀리 도망갈 생각까지 했단 말이다.”라며 길상이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자존심보다 사랑이 중요함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경리의 최서희를 생각할 때면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가 떠오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안나카레리나는 일에만 몰두하는 고관인 늙은 남편과 단조롭고 틀에 박힌 결혼생활이 싫어 결국 그녀를 사랑하는 젊고 잘 생기고 부자인 청년과 재혼하였고, 새 남편은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두고 온 아들에 대한 모정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한다고 생각하며 계속 자책감에 시달리다 결국은 철도역에서 자살을 하고 만다. 이런 안나카레리나에 비한다면 토지 속의 최서희는 머슴이었던 길상을 남편으로 택했지만, 세상의 이목을 꿋꿋하게 헤쳐 나가는 지혜롭고 당찬 여인이다.
그녀는 역사의 격동기, 한 집안의 파란만장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도 가장 없는 집의 중심이 되어 기개와 절개를 잃지 않는 강단 있는 여인으로, 또한 최씨 가문을 이끌어가는 자애롭고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결국 박경리가 이상으로 삼았던 한국의 여인상은 『토지』를 통해 보여준 아름답고,지혜롭고 자애로움면서도 당차고 줏대 강한 최서희와 같은 여인 상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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