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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大成路의 봄 - 사람이 그리운 날엔 기차를 타라

by 시조시인 김민정 2009. 9. 21.

           大成路의 봄

 

                            -문단사가 아닌 문학사에

 

                                        宇玄 김민정 

 


                            맑은 공기

                            달려 와서

                            악수를 청하고는


                            바쁜 듯

                            달아나다 

                            은행 앞에 딱 멈추네  


                            육백 년

                            햇살 모으며

                            날개 돋는

                            잎, 잎, 잎



                            봄날을

                            기다리며

                            야위어 온 아지랑이


                            코끝부터

                            발끝까지

                            봄바람이 간지러워


                            대성로

                            재채기 하네    

                            환하게 필

                            꽃, 꽃, 꽃    

 

                           「大成路의 봄」전문

 

    스물여섯, 친구들이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 나의 대학생활은 시작되었다. 대학진학에 대한 꿈은 늘 가지고 있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던 중 1981년 졸업정원제가 생겨나면서 입학의 문이 넓어졌기 때문에 결심을 하게 되었고, 공부를 시작하고 7개월후에 시험을 보아 성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1학년 때는 유난히 영어과목이 많고, 대학교재에 한자가 많아 힘들었다. 동구여상출신이라 영어가 약했고, 한글전용 세대라 한자를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전혀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8,000자 짜리 동아사전을 등하교 길에 두 번을 외운 후에야 대학교재나 신문의 한자를 웬만큼 읽을 수 있게 되어 한자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학년 때 잠깐 과대표를 했는데 국어국문과 1학년은 79명이나 되었고 유난히 데모를 많이 하던 시절이었다. 단 한 명이라도 강의를 원하는 학생이 있으면 진행하겠다는 교수님, 데모를 하러 나가야 된다고 우기는 학생들, 공부하기를 원하는 학생 등을 모두 만족시켜야 했다.

  “데모를 하면 다칠 수 있으니 하지 말라.”고 했더니,

  “누나는 광주사태를 몰라서 그래! 이 상황에 어떻게 데모를 안 할 수가 있어!”라며 평소에 나를 많이 따르며 ‘누나, 누나’하던 과학생들은 흥분했다.

  “좋다, 데모를 하되 앞장서지도 말고, 끝에 서지도 말고 중간에 서서 해라! 다치면 너희들 보호해줄 사람 아무도 없다!”고 주의를 주어야했고, 교수님께는 도저히 수업을 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려드리고, 공부하기를 원하는 학생에겐 “조용히 도서실에 가서 공부하라!”고 하여 아무도 다치지 않고 보낸 1년이었다.

4년 동안의 단짝, 미스국문과 윤관숙과 함께 문과대 앞

                             동기들인 윤옥선, 백승연과 함께 

 

 대성리의 MT

 

    2학년이 되자 나를 아끼는 교수님들은 과대표를 하면 다치기 쉽다고 공부만 하라고 조언의 말씀을 해 주셨다. 나도 힘들게 입학한 대학이라 공부만 열심히 하고 싶었다.

    우리가 시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학년 2학기 때였다. 김구용 교수님은 서정주, 박용래, 조지훈, 박두진, 조병화 시인 등의 시를 읽어 가시면서, “아! 참 좋다! 나는 이렇게 표현 못해! 참 표현 잘 했어.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며 칭찬을 하시곤 하였다. 시에 대한 냉정한 분석보다 훨씬 더 감동을 주는 명강의였다. 이론을 통한 냉정한 분석강의야 누군들 못하겠는가. 다른 시인의 시적 표현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해 주는 인격적인 모습이야 말로 내가 은연중에 배운 김구용 교수님의 시론이었다. 김구용 교수님은 박사학위를 받지 않으신 분이지만 누구도 무시를 하지 않았다. 한문에 대한 조예도 깊으셨고, 붓글씨는 본인만의 필체를 갖고 계셨다. 본인은 나 같으면 이렇게 표현 못한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면 철학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시가 너무 어려워서 이렇게 저렇게 엎어보고 뒤집어보면서 해석을 하기도 했다. 선생님 시집은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어서 “선생님 시집, 꼭 읽어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어렵게 부탁을 드려서 겨우 모든 시집을 다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내게 원고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현대시학』 전봉건선생님께 시를 매달 2편씩 직송하는 것이었다. 꼭 차비를 1,000원씩 손에 쥐어주시면서 원고봉투를 주시곤 하셨다. 나는 그것을 수업이 끝나는 대로 즉시 전봉건 선생님께 전해 드리곤 하였다. 서대문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서 나무계단이 삐걱거리는 2층으로 올라가면 거기에는 가끔은 손님도 계셨지만, 거의 전봉건 선생님 혼자 낡은 책상에 앉아 원고를 집필하시든가, 교정을 보실 때가 많았다. 나는 원고만 전해 드리고 곧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꽤 오래 이런 심부름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4학년 4월달쯤 나는 『시조문학』창간25주년 기념지상백일장에 ‘예송리 해변에서’라는 작품을 출품했고, 그 작품이 장원이 되어 단 1회로 등단이 인정되었다. 이 말씀을 들으신 선생님께선 『시조문학』이 시조에만 국한된 너무 폭이 좁은 잡지라고 생각하셨는지, 얼른 전봉건 선생님께 편지를 한 통 써 주시면서 『현대시학』에 정완영선생님의 추천으로 등단을 시키도록 부탁하셨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나를 부르시더니 전봉건 선생님께 직접 전해드리라며 건네 주시는 것이었다.

 

 리태극 선생님으로부터 상패 수여(시조문학창간25주년기념지상백일장 금상 수상)

 최동권교수, 박병순 시인님, 김민정, 리태극시인님, 이상범시인님    


    자존심이 아주 강한 분이라 좀처럼 그런 편지를 쓰지 않고 또 제자들을 함부로 등단시키지 않는 까다로운 분으로 알고 있었기에 아예 등단 부탁도 드리지 않았는데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나의 시를 지켜보시고, 인정하시고, 나를 무척 아껴주신 것 같아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굴러온 복인데도 나는 사양했다. 한 번만 등단하면 됐지, 두 번, 세 번 등단하는 것은 등단을 시켜준 시조문학사에 대한, 리태극 선생님에 대한, 추천을 해 주신 심사위원 다섯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결국 편지를 전하지 않았다. 나의 말씀을 들으시고 구용 선생님은 고개만 끄덕이시더니 더 이상 채근하지 않으셨다.

    구용 선생님은 원고를 일부러 내게 심부름 시키셨다. 문학작품을 계속 접하게 하고, 그리고 잡지사와도 친하게 지내라는 뜻으로, 나에게 진정한 문학의 길을 걷게하고 싶으셔서 우편으로 보내도 될 것을 늘 나에게 직송시키셨던 것이다. 그리고 내게 늘 말씀하셨다. “돈에 집착하면 시를 못 쓴다.”고. 어떤 제자가 시를 쓰는 게 좋으냐, 방송작가가 되는 게 좋으냐고 물어와 화를 내셨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리고 사랑이나 그리움이나 여자들이 많이 쓰는 그런 시는 쓰지 말라고. 여자들의 시 중에서 강은교의 시를 칭찬하시곤 해서 강은교의 '허무집' 등을 나도 열심히 읽었었다. 


 


    교수님이나 웃어른에게 언제나 겸손한 나였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만 하지 않는 고집이 있어, 사랑에 대한 시를 많이 썼더니 어느 날엔가는 사랑시든 어떤 시든 열심히만 쓰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시인은 모름지기 문단사가 아닌 문학사에 남아야 한다고. 문단에 쫓아다니지 말고 시를 열심히 쓰라고…. 그러나 늘 마음이 여려 모임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가입해 놓고, 때때로 바빠 참석을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다.  

    문학을 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아니 외로울 때라야만 문학다운 문학이 나오는지도 모른다. 혼자서 깊은 생각에 잠겨야 하고, 다른 작품을 많이 읽고 작품에 대해 끝없이 고뇌하고 다듬고 고치면서 새롭게 창작해야하는…. 문학을 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이며, 고독한 작업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하기 힘든 일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하는 작업이다. 그러자면 혼자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선생님은 그걸 내게 강조하시며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돈에 집착하면 시를 놓치게 된다는 것도 단단히 주지시키신 셈이다.

    나는 강의시간이 아닌 구용선생님과의 개인시간을 통해 문학에 대해, 창작태도에 대해 제대로 배웠던 것이다.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정도(正道)임을 믿는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이 게걸음이었다면 지금부터라도 正道로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돈에 대한 집착도, 문학상이나 인기에 대한 집착도 하지 않고, 문학다운 작품을 써서 문단사가 아닌 문학사에 남는 작품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니, 그것도 지나친 욕망이라면 그냥 편하게 작품만을 쓰겠다.

 

결혼식에 참석하신 김구용 교수님

 

     김구용 선생님의 글씨

 

    구용선생님은 늘 술이 취하시면 “내 원수를 갚아달라.”고 말씀하신다. 당신보다 나은 시를 쓰라는 뜻이다. 당신이 못 쓴 좋은 시를 써 달라는 부탁이시다. 술을 드시면 옆에 사람 손을 잘 잡는데 금방 쓰러질 것 같은 가랑가랑한 몸매에 어찌나 팔 힘이 센지 한 번 잡으면 놓지를 않으시고, 계속 말씀을 하셔서 구용선생님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제자들도 선생님께서 술에 취하시면 슬슬 옆자리를 피해 앉기도 했다.

    결혼식날은 장대비가 쏟아졌는데, 그 속에서도 우리과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거의 참석을 하였고, 시조시인들도 많이 오셨는데, 구용 선생님은 폐백실까지 따라오셔서 “아! 신부 예쁘다, 아! 신부 참 예쁘다!”를 연발하시며 나를 기쁘게 해 주시고 나의 미래를 축복해 주셨다.

 

    대학4년 동안 나의 자리는 늘 제일 앞자리 정가운데였다. 그래서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누가 늦게 오는지 나는 전혀 모른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개근하여 3년개근상을 받았고, 대학 강의시간에 늦어본 적도, 강의시간을 빼 먹은 적도 없다. 너무 융통성(?)없는 학생이다. 교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교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눈빛을 마주치며 강의를 듣곤 했었다.

    고전문학의 최진원 교수님은 나의 시조를 무척 좋아하셨다. 「을숙도」「예송리 해변에서」등을 특히 칭찬하셨다. 김시업 교수님은 참여시집을 많이 추천해 주시고 참여시도 써 보라고 말씀해 주시곤 했다. 그래서 많은 참여시도 읽었다. 이등용 교수님은 내가 순위고사 공부를 하도록 종용하시고 도와주신 분이다. 김학성 교수님 덕분에 신라향가 등 고전문학에 대한 이해가 많이 깊어졌다. 농담이나 유머를 잘 사용하시던 평론가 윤병로 교수님은 내게 성균문학상을 주시기도 했다. 강신항 교수님은 박물관장을 하시면서  박물관장실을 나에게 지키도록 해 주셔서 비원 사계를 내려다보며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결혼주례를 서 주시기도 하셨다. 조건상 선생님은 소설을 잘 쓰셨고 후배와 제자들을 많이 아끼셨는데, 대학원석사 입학 때는 내게 장학금을 주시기도 하셨다. 교수님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대학생활을 하였던 행복한 대학시절이었다. 강우식 교수님은 학부때가 아닌 박사과정의 지도교수님이셨고, 논문을 빨리 쓸 수 있도록 많은 조언을 해 주셨다. 

 

 성균문학 시상식(강우식, 윤재근, 윤병로, 조건상, 조규일 교수님)

 

대성리 국어국문학과 1985년 MT(김학성,김시업,이등룡,윤병로 교수님)


대성리 국어국문학과 1985년 MT(김학성, 강신항, 윤병로 교수님)


    세월이 가고 모든 것들이 추억으로 남는다. 최진원, 김구용, 윤병로 교수님 모두 돌아가셨다. 가을이면 성대 행문회 동문들은 김구용 교수님의 산소를 찾는다. 교수님은 제자들이 청출어람의 작품을 쓰길 원하셨는데……. 나 자신을 반성해 본다. 나를 아껴주시고 문학을 하도록 격려해주신 김구용 교수님과 그 외의 다른 교수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앞으로 최선을 다하고 도전하여, 문단사가 아닌 문학사에 남는 작품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지금, 여기서 새롭게 해 본다.  

 

2009년 8월 14일 최종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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