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은 꽃이다 - 초고
모든 순간은 꽃이다
1 강우식 백담사 계곡음(吟) (국방일보 2004. 02. 17)
2 강인순 생수에 관한 명상 (국방일보 2009. 05. 18)
3 강현덕 낙동강 (국방일보 2010. 07. 15)
4 강혜규 능소화 (국방일보 200 6. 11. 28)
5 공광규 수종사 풍경 (국방일보 2010. 06. 24)
6 권갑하 물방울 속의 사랑 (국방일보 2008. 04. 21)
7 권영준 웃음 (국방일보 2005. 05. 23)
8 금사랑 어머니의 손맛 (국방일보 2010. 08. 12)
9 김경수 낚시 (국방일보 2006. 01. 25)
10 김계정 달맞이꽃 (국방일보 2010. 05. 27)
11 김광섭 저녁에 (국방일보 2008. 01. 21)
12 김광수 낚시 백서(白書) (국방일보 2004. 09. 13)
13 김교한 봄산 (국방일보 2009. 04. 20)
14 김기산 파도 한 장을 접어 보냈다 (국방일보 2011. 12. 26)
15 김남규 마젠타, 마젠타 (국방일보 2010. 05. 20)
16 김남환 김시습의 푸른 기침 (국방일보 2006. 03. 15)
17 김년균 마음의 부자 (국방일보 2010. 07. 01)
18 김동인 화석도시를 위하여 (국방일보 2006. 11. 12)
19 김동호 ‘물음’연가(戀歌) (국방일보 2008. 08. 11)
20 김몽선 우리집 화단 (국방일보 2006. 08. 29)
21 김민정 예송리 해변에서 (국방일보 2004. 07. 05)
22 김보영 감자밭을 매다가 (국방일보 2006. 07. 04)
23 김복근 외출 (국방일보 2006. 06. 26)
24 김삼환 길 (국방일보 2006. 03. 20)
25 김석철 가을 산책 (국방일보 2004. 09. 20)
26 김선화 해-바래기 (국방일보 2011. 11. 14)
27 김선화 우선멈춤 (국방일보 2011. 07. 11)
28 김선희 냉이꽃 병원 (국방일보 2010. 04. 22)
29 김세진 삶에는, 망설임이 있다 (국방일보 2009. 03. 23)
30 김수자 외사랑 (국방일보 2006. 06. 21)
31 김술곤 잠적 (국방일보 2011. 10. 17)
32 김양수 자랑스런 이등병 (국방일보 2005. 07. 18)
33 김여정 석류나무 한 그루 (국방일보 2005. 11. 21)
34 김연동 바다와 해녀 (국방일보 2006. 09. 19)
35 김영덕 강가에나 나가 보자 (국방일보 2004. 06. 28)
36 김영재 흔들림 (국방일보 2005. 12. 19)
37 김영철 촛대바위 (국방일보 2011. 11. 07)
38 김영탁 푸른 잎 하나가 (국방일보 2011. 01. 17)
39 김용범 하늘을 나는 새 (국방일보 2011. 01. 24)
40 김윤성 나무 (국방일보 2006. 05. 03)
41 김은숙 조선의 소나무 (국방일보 2009. 12. 01)
42 김인구 풍천 장어 (국방일보 2006. 02. 15)
43 김인숙 바람이 쉬어 가는 섬 (국방일보 2006. 02. 20)
44 김인자 연밥 (국방일보 2011. 08. 08)
45 김일연 가은 역 들국화 (국방일보 2009. 10. 19)
46 김정자 그대 푸른 바람소리 (국방일보 2004. 05. 25)
47 김종연 죽림의 주춧돌 (국방일보 2011. 12. 12)
48 김종원 동화댐 망향비 앞에서 (국방일보 2005. 01. 24)
49 김주석 우주에의 정관(靜觀) (국방일보 2008. 11. 10)
50 김 준 남도 가는 길 (국방일보 2004. 07. 12)
51 김진광 역전 번개시장 (국방일보 2008. 10. 27)
52 김진길 담쟁이 덩굴 (국방일보 2006. 11. 07)
53 김차순 고향에게 (국방일보 2009. 12. 28)
54 김태수 도계 (국방일보 2008. 09. 29)
55 김호길 딱따구리 (국방일보 2008. 06. 16)
56 김홍일 명중시켜라 (국방일보 2004. 02. 03)
57 남진원 나뭇잎과 연못 (국방일보 2006. 09. 12)
58 노선관 미시령 고개 (국방일보 2005. 03. 21)
59 노인숙 세여울 (국방일보 2005. 09. 26)
60 노중석 정원에서 (국방일보 2010. 09. 30)
61 리강룡 가곡리(佳谷里)에서 (국방일보 2006. 04. 10)
62 문무학 비비추에 관한 연상 (국방일보 2008. 07. 21)
63 민병도 저 산에 (국방일보 2004. 06. 21)
64 민병찬 하늘재 눈 내리다 (국방일보 2006. 01. 16)
65 박권숙 마음의 뒤란 (국방일보 2008. 12. 08)
66 박근모 철마 (국방일보 2011. 02. 14)
67 박기섭 책 (국방일보 2011. 07. 25)
68 박상문 붓대로 피운 돌 (국방일보 2005. 03. 14)
69 박선양 참수리 357호 (국방일보 2009. 06. 22)
70 박수진 봄꽃 지는 날 (국방일보 2004. 04. 27)
71 박시교 다시 수유리에서 (국방일보 2005. 01. 17)
72 박영교 민족 (국방일보 2004. 11. 22)
73 박영록 춘면 (국방일보 2005. 03. 28)
74 박우현 나무와 산 (국방일보 2008. 06. 02)
75 박재삼 내 사랑은 (국방일보 2008. 02. 18)
76 박재화 전갈의 노래 (국방일보 2006. 10. 31)
77 박현덕 빈집 (국방일보 2008. 09. 08)
78 박희정 U턴하는 여자 (국방일보 2008. 12. 29)
79 배인환 바람 말씀 (국방일보 2010. 07. 08)
80 백이운 벚꽃 길 (국방일보 2011. 04. 25)
81 변현상 을숙도 3 (국방일보 2011. 07. 04)
82 서공식 촉석루에 올라 (국방일보 2004. 08. 30)
83 서 벌 어떤 경영 (국방일보 2006. 05. 18)
84 서연정 돌의 미소 (국방일보 2010. 07. 29)
85 서정택 카네이션 (국방일보 2006. 05. 10)
86 선정주 중랑천 하루 (국방일보 2009. 07. 27)
87 성철용 수련 (국방일보 2009. 07. 13)
88 손증호 샘(국방일보 2009. 04. 13)
89 신필영 명장 (국방일보 2009. 07. 20)
90 신현필 존재 (국방일보 2005. 05. 16)
91 심응문 바램 (국방일보 2005. 02. 21)
92 안상근 바다에서 (국방일보 2004. 06. 14)
93 양선희 무늬가 발목을 잡는다 (국방일보 2009. 08. 24)
94 양점숙 난(蘭) (국방일보 2006. 06. 28)
95 양진모 황지못 (국방일보 2011. 09. 05)
96 엄창섭 바람의 초상 (국방일보 2005. 08. 29)
97 오만환 운주사에서 (국방일보 2006. 07. 11)
98 오승철 비양도 (국방일보 2010. 02. 18)
99 오영민 11월 (국방일보 2010. 12. 02)
100 오점록 선사시대 암사동엔 (국방일보 2010. 07. 22)
101 오종문 연필을 깎다 (국방일보 2010. 02. 25)
102 오태환 천마산 물소리 (국방일보 2011. 04. 04)
103 옥경국 다도(茶道) (국방일보 2006. 07. 25)
104 우은숙 밤에 눈 뜨는 강 (국방일보 2008. 07. 28)
105 원용문 아차산성 (국방일보 2004. 10. 11)
106 유권재 외암리 시편 (국방일보 2004. 08. 16)
107 유재영 물총새에 관한 기억 (국방일보 2008. 02. 25)
108 유한나 봄 (국방일보 2005. 04. 11)
109 윤금초 파랑새, 탱화 그리다 (국방일보 2008. 10. 20)
110 윤제철 북한강 (국방일보 2005. 10. 17)
111 윤종남 아버지의 강 (국방일보 2011. 05. 23)
112 이근구 달과 함께 (국방일보 2006. 07. 18)
113 이근덕 첫눈 (국방일보 2006. 02. 13)
114 이근배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국방일보 2009. 03. 30)
115 이길원 새가 되고 싶어요 (국방일보 2009. 09. 21)
116 이남순 마중물 (국방일보 2011. 02. 21)
117 이달균 낙타 (국방일보 2010. 04. 29)
118 이상범 오두막집행 (국방일보 2008. 02. 04)
119 이상진 몽골 테르찌에서 (국방일보 2011. 06. 27)
120 이석구 커다란 잎 (국방일보 2010. 08. 26)
121 이송희 모래의 여자 (국방일보 2010. 12. 30)
122 이승은 청어의 시 (국방일보 2005. 12. 12)
123 이승현 할아버지 눈썹 (국방일보 2008. 05. 19)
124 이영지 바리바리 비 (국방일보 2005. 06. 27)
125 이옥진 그대에게 가는 법 (국방일보 2006. 02. 22)
126 이우걸 거울 2 (국방일보 2006. 08. 08)
127 이원식 풍장(風葬) (국방일보 2006. 05. 22)
128 이은방 유민(流民)의 꽃 (국방일보 2005. 09. 26)
129 이인웅 질경이 (국방일보 2005. 07. 25)
130 이인자 빗방울의 노래 (국방일보 2004. 04. 13)
131 이일향 애월(涯月)에서 (국방일보 2008. 12. 22)
132 이정환 후박나무에게 (국방일보 2009. 09. 28)
133 이종문 봄날도 환한 봄날 (국방일보 2010. 05. 13)
134 이지엽 해남에서 온 편지 (국방일보 2008. 06. 23)
135 이청화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국방일보 2004. 12. 13)
136 이혜선 가을이 뚜벅뚜벅 (국방일보 2008. 10. 06)
137 임성구 자귀꽃 (국방일보 2010. 06. 10)
138 임성화 아버지의 바다 (국방일보 2009. 08. 17)
139 임종찬 대숲에 사는 바람 (국방일보 2004. 07. 26)
140 임채성 서바이벌 게임 (국방일보 2011. 04. 11)
141 장명웅 세포자멸사를 생각하며 (국방일보 2008. 06. 23)
142 장중식 추전역 (국방일보 2010. 01. 28)
143 장지성 법주사 (국방일보 2005. 12. 05)
144 전재동 한강 (국방일보 2008. 04. 07)
145 정경화 봄,수묵화 (국방일보 2010. 04. 08)
146 정공량 안개 (국방일보 2009. 08. 31)
147 정근옥 바람의 숨결 (국방일보 2004. 01. 20)
148 정기영 동백꽃 (국방일보 2011. 03. 07)
149 정남채 경춘선·1 (국방일보 2004. 11. 15)
150 정성채 목련, 너 너는 (국방일보 2006. 04. 05)
151 정수자 시집을 읽는 시간 (국방일보 2008. 09. 22)
152 정연수 흐뭇한 밥상 (국방일보 2010. 02. 11)
153 정연휘 오십천·1 (국방일보 2011. 04. 18)
154 정완영 감 (국방일보 2005. 10. 31)
155 정용국 몸이 나를 불러 놓고 (국방일보 2010. 03. 25)
156 정위진 아가야 (국방일보 2010. 06. 03)
157 정인관 섬 (국방일보 2005. 01. 31)
158 정일남 억새 숲을 지나며 (국방일보 2010. 10. 28)
159 정정용 소양호 사람들 (국방일보 2010. 12. 16)
160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국방일보 2006. 01. 18)
161 정형석 전정 (국방일보 206. 12. 19)
162 정휘립 詩, 통신1호 (국방일보 2009. 03. 09)
163 조동화 흰 동백 (국방일보 2009. 06. 15)
164 조영일 원천리 (국방일보 2009. 12. 21)
165 조주환 고향길 (국방일보 2005. 06. 20)
166 주강식 오륙도 (국방일보 2005. 01. 10)
167 주원규 성자(聖者)처럼 나무는 (국방일보 2004. 03. 16)
168 지성찬 대화동 일기 (국방일보 2009. 10. 12)
169 차윤옥 채석강 (국방일보 2011. 10. 31)
170 채천수 인간 독서 (국방일보 2010. 01. 14)
171 천숙녀 독도 사랑 (국방일보 2009. 08. 10)
172 최길하 노루귀꽃 (국방일보 2009. 01. 19)
173 최원익 송탄역 (국방일보 2010. 08. 19)
174 추창호 그대에게 (국방일보 2006. 06. 05)
175 하순명 오월 (국방일보 2006. 05. 29)
176 하순희 어머니의 기도 (국방일보 2011. 12. 19)
177 한분순 기적(汽笛) (국방일보 2011. 03. 21)
178 허 명 강을 노래하고 싶지 않은가 (국방일보 2006. 03. 08)
179 허 일 전설 (국방일보 2009. 03. 16)
180 홍성란 편지 (국방일보 2010. 11. 18)
181 홍오선 사막의 불꽃 (국방일보 2011. 01. 31)
총작품 345편 총작가 181명
머리말
그 동안 여러 시인님들의 따뜻한 협조로 2004년 2006년까지 3년 동안 《국방일보》에 【詩의 향기】라는 제목으로,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년 동안【詩가 있는 병영】이란 제목으로 시해설을 주1회 연재하였습니다.
7년 동안 《국방일보》에 시해설을 연재하면서 70만 국군장병들의 정신건강을 책임지고 좀 더 건강한 마음으로 건전하고 밝고 행복한 군대 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작품을 연재했습니다. 학교에서 만난 수많은 제자들을 대하듯, 그리고 자식을 군에 보낸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으로 이 시의 독자들인 젊은 국군장병들이 읽으면 좋을 만한 작품들을 골라 싣도록 노력했습니다. 또한 쉬운 시풀이를 통해 독자들이 시와 문학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가능하면 많은 시인들의 시를 소개하여 다양한 시를 맛보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고유의 문학인 시조를 많이 소개하여 우리 문화와 문학에 대한 정체성과 긍지를 갖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2004~2005년 2년간 게재되었던 내용은 ‘시의 향기’라는 책으로 이미 출간된 바 있으나 이번에 나머지 5년 간의 게재내용까지 정리해 보니 총 350여 편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에 좋은 작품들을 추려서 176편을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작품들을 추려서 싣는 만큼 독자들도 다시 한 번 감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작품을 싣도록 허락해 주신 여러 시인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출판을 맡아주신 고요아침 이지엽 교수님과 송지훈 편집자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2013년 10월 1일 국군의 날
우현(宇玄) 김민정(金珉廷)
국방일보 2004년 02월 17일
백담사 계곡음(吟)
강우식
물은 초지일관이다
초지일관으로
단풍나무숲을 지나며
아 님은 갔습니다
탄식하기도 하고
어느 굽이에 이르러서는
울대목을 세워
정선아라리의 한 대목으로
포말 짓기도 한다
사람들아 사람들아
우리도 가진 것 한마음으로
끝을 보고자 한다면
생명의 물줄기로 농울지기로는
저러할진저
강우식
詩 풀이
백담사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보고 읊은 시이다. 한용운 스님이 머물며 <님의 침묵> 시집을 탈고한 곳이 바로 백담사이다. 물은 항상 흘러간다. 흘러가는 것이 물의 속성이며 고이면 썩게 되어있다. 그 처음의 마음으로 계속 흘러가는 것이 물이라는 것이다. 단풍나무숲을 지나며 한용운의 시를 생각나게 하기도 하고, 어디에선가는 정선아라리의 서러운 느린 가락처럼 너울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들도 초지일관, 처음의 마음으로 끝까지 가고자 한다면 저 생명의 물줄기처럼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도 흐르며 순리로 농울져 갈 일이라고 시인은 읊고 있다. (시조시인, 문학박사 김민정)
강우식
강원도 속초 출생. 《현대문학》등단. 시집 『사행시초』『고려의 눈보라』『꽃을 꺾기 시작하면서』『설연집』『종이학』『살아가는 슬픔, 벽』등과 논문집 『한국현대시의 상징성 연구』『한국현대시의 존재성 연구』등 출간. 한국시인협회상, 한국펜클럽문학상 등 수상. 성균관대 문학박사 및 성균관대 교수역임.
국방일보 2009년 05월 18일
생수에 관한 명상․ 5
강인순
새재를 오르다가 계곡 물에 손 담근다
손 씻다 물 위에 쓴 글씨 ‘너무 맑다’
피라미 한 마리 나와 그걸 물고 사라진다
한 철을 이 골에서 보냈으면 하다가도
금방 집 생각나는 변변치 못한 속물
저렇게 물이 되어서 그대 손끝 적시고 싶은
강인순
詩 해설
이 시를 읽으면 맑은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화자는 문경새재, 그 고개를 오르다가 맑은 물속에 손을 담근다. 그리고 물이 맑음을 찬탄하여 물 위에 ‘너무 맑다’고 쓴다. 물론 그 글씨는 보이지도 않고 남아있지도 않고 금방 사라지겠지만, 화자의 마음속엔 언제까지나 남을 있을 것이다. 그것을 화자는 ‘피라미 한 마리 나와 그걸 물고 사라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피라미가 노는 맑은 계곡물의 모습이 눈에 보이듯 잘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물이 맑고 좋은 곳에서 한 철을 보내고 싶다가도 금방 집 생각이 나는 변변치 못한 속물이라고 자신을 탓하고 있다. 하지만 저렇듯 맑은 물이 되어 그대 손끝을 적시고 싶다고, 그 맑은 물과 하나가 되고 싶은, 즉 자연에 동화되고픈 마음이 나타난다. 물처럼 맑은 심성으로 그대를 사랑하고픈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수가 맑은 계곡물의 모습을 이미지화(서경 묘사)하고 있다면 둘째 수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이미지화(심경 묘사)를 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조시인, 문학박사 김민정)
강인순
경북 안동 출생. 1985년 《시조문학》으로 등단. 시조집『서동이후』『초록시편』등. 문협 안동지부장 역임.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오늘>시조동인. 제17회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수상.
국방일보 2010년 07월 15일
낙동강-우륵에게
강현덕
한 점
수묵화처럼
낙동강에 밤이 왔다
늘어진
강줄기로
달빛은 풀려 있고
이제는
낡은 나룻배
흔들리지 않는다
한 그루
오동나무로
이 강을 건너와서
하늘을
강물을
풀잎을 잠재우고
저 혼자
바람도 없이
울고 있는 악사여
소리
소리가 깨어
나를 일으킨다
목 타는
12현금
어둠에 잘리고
가락국
그 먼 나라가
내게로 오고 있다
※우륵: 가야금을 만든 옛 가야국의 음악가
강현덕
詩 풀이
흐르는 낙동강에 밤이 오고 그곳에 옛날 가야금을 만든 우륵이 나타난다. ‘한 그루 / 오동나무로 / 이 강을 건너와서 / 하늘을 / 강물을 / 풀잎을 잠재우고 / 저 혼자 / 바람도 없이 / 울고 있는 악사여’라고 해 화자는 가야금 12현금 그 소리가 깨어 자신에게 다가옴을 느끼고 있다. 먼 가야국, 그 소리가 다가와 화자를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는 음악을 사랑하던 우륵의 마음을 사랑하며, 가야금 소리 같은 아름다운 선율의 작품을 빚고 싶은 화자의 마음이라 볼수 있다. (시조시인, 문학박사 김민정)
강현덕
경남 창원 출생. 1994년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 1995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조집『한림정역에서 잠들다』『안개는 그 상점 안에서 흘러나왔다』『첫눈 가루분 1호』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한국시조작품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06년 11월 28일
능소화
강혜규
아주 잊으라니요 하필 이 뜨거운 날에
담장 밖 세상을 향해 겁도 없이 넘나들던
그 더운 핏줄을 모두 뎅겅뎅겅 자르라니요
내 몸 속 어디쯤에 그런 열정 숨었는지
나무고 돌담이고 흐벅지게 타고 올라
진종일 그대를 향해 손나팔을 하던 날들
질 때는 미련 없이 뒷모습 보이지 말고
피 배인 울음조차 허공중에 달지 말고
캄캄한 그늘 속으로 화인이나 찍으라니요
강혜규
詩 풀이
능소화의 피고 지는 모습과 능소화의 전설 등 속성을 아주 잘 알고 쓴 작품이다. 필 때는 활짝 아름답게 피고, 질 때는 깨끗이 꽃 자체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능소화.
이 시에서는 그러한 능소화가 화자가 되어 있다. 첫째 수에서는 ‘아주 잊으라니요’로 시작하여 질문형식을 취하는 설의법을 사용하고 있어 독자의 관심을 집중한다. 곧 이어 ‘하필 이 뜨거운 날에’라고 하여 ‘아직도 한창 뜨겁게 피고 있는, 사랑의 감정을 뜨겁게 간직하고 있는 이 때’를 말하고 있다. 담장 밖을 향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던 그 더운 핏줄을 모두 ‘뎅겅뎅겅 자르라니요’라고 하여 ‘뜨겁게 사랑하다가 뜻밖의 이별 경고를 받은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곧 떨어져야 할 모습의 꽃이 안타깝게 외치고 있다.
꽃송이채 깔끔하게 지는 낙화의 아름다움, 떠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깨끗한 이별의 아름다움…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의 입장일 뿐, 떠나는 자에겐 얼마만한 아픔일까. 이 작품을 읽으면 그 아픔을 생각하게 된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비난하지 말라는 말도 생각난다. 우리가 바라보고 해석하는 타인이나 사물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 (시조시인, 문학박사 김민정)
강혜규
국방일보 2010년 06월 24일
수종사 풍경
공광규
양수강이 봄물을 퍼 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
공광규
詩 풀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가면 멀지 않은 곳에 수종사가 있다. 청량리에서 중앙선 전철을 타고 운길산역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도 되고, 또 찻길을 따라 차로 올라가도 된다.
그곳에 가서 특이하게 느꼈던 점은 앞의 전면이 유리로 돼 있어 절에 앉아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에 너무 좋다는 점이었다.
이 작품의 화자는 수종사의 풍경인 물고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절의 처마 끝에 매달린 물고기 형상의 풍경,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잔다는 물고기처럼 항상 마음이 깨어 있으면서 도를 닦으라고, 그래서 절에서는 물고기 형상의 풍경을 단다.
이 작품의 화자는 풍경을 물고기가 참선을 하는 것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아진 몸’ 그러한 참선의 결과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자기희생 위에 맑은 소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조시인, 문학박사 김민정)
공광규
서울 출생. 동국대 국문과,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문학박사. 『동서문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대학일기』『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소주병 말똥 한 덩이』와 시창작론『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등 출간.
국방일보 2008년 04월 21일
물방울 속의 사랑
권갑하
갈 수 있겠니, 둥글게 지붕을 얹고
벽조차 문이 되고
문마저 하늘이 되는
빈속이,
헛것이 아닌,
사라져도 다시 뭉쳐질
얼마나 좋겠니, 물방울처럼 투명하게
우리 하나로 맺혀질 수 있다면
서로가 제 얼굴처럼 비춰질 수 있다면
만날 수 있겠니, 다시
설렘만으로
세상의 그 곳, 그 눈빛 맑은 곳으로
길 하나 낼 수 있겠니
마음에
마음이 가 닿는
권갑하
詩 풀이
사랑을 아름답게, 둥글게 표현한 작품이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물방울처럼 뭉쳐질 수 있는 사랑, 벽조차 문이 되는 사랑이다. 물방울처럼 하나로, 더 큰 하나로 뭉쳐지고 제 얼굴을 서로서로 비춰줄 수 있는, 투명한 거울 같은 사랑을 화자는 꿈꾸고 있다. 그 뿐인가. 설렘만으로, 그 눈빛만으로도 ‘마음에 마음이 가 닿는’길 하나 낼 수 있는 사랑을 바라고 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내용도 좋지만, 대화체로 표현한 점도 신선해서 좋다. (시조시인, 문학박사 김민정)
권갑하
경북 문경 출생. 한양대문화콘텐츠학과 박사과정 수료. 《조선일보》,《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세한의 저녁』『외등의 시간』『아름다운 공존』등과 평론집 『현대시조 진단과 모색』등. 중앙시조대상, 한국시조작품상 등 수상.
초등학교 5-1 국어 읽기 국정교과서에 동시조 『비 오는 날』수록됨. 계간《나래시조》회장 겸 편집주간. 농민신문 논설위원.
국방일보 2005년 05월 23일
웃음
권영준
한 뼘 척박한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난다
섬뜩한 뼛조각 속에서
순을 밀어 올리는 그것은,
일그러진 주름의 골을 헤집고
제 몸보다 몇 배나 큰 사랑꽃을 피워 올리는
보기만 해도 눈부신 그것은
아스팔트 위에서
콘크리트 속에서
세상을 떠받히고 있다
권영준
詩 풀이
인간의 웃음이란 그 하나만으로도 우주를 떠받히는 힘이 되나 보다. 웃음은 확실히 기적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삶이 삭막할 때 부드러운 미소가 있다면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부드러워지는가. ‘제 몸보다 몇 배나 큰 사랑꽃을 피워 올리는/ 보기만 해도 눈부신’ 것이 바로 웃음이고 미소인 것이다. 많이 웃는 것이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삶이 척박할수록, 웃을 일이 없더라도 자꾸만 웃다보면 생은 정말로 행복해질 것이다. (시조시인, 문학박사 김민정)
권영준
국방일보 2010년 08월 12일
어머니의 손맛
금사랑
어머니의
쌀 씻는 소리가 들린다
쌀뜨물 한 바가지에
된장을 휘휘 저어
어머니의 손맛을 낸다
지난 가을에
땅속에 묻어 두었던 묵은지
그리고, 된장 바른 호박쌈에
사랑의 맛 하나
그리움 맛 하나
살이 되고 피가 되겠지
툭툭 친 감자밥에
강낭콩 한 옴큼이 전부인 것을
그렇게도 그리워하며
먼 길을 달려가
앞마당에 모닥불을 지폈나 보다
그것은, 그립도록
애절하게 기다리실 내 어머니!
어머니를 사랑하는 까닭일 테지
금사랑
詩 풀이
우리는 익숙한 것에 대해 그리움을 갖는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들의 눈에 익어 오랫동안 머릿속에 간직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입맛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어머니의 손맛을 가장 좋아한다. 평생 좋아하는 음식들을 보면 어렸을 때 길들여진 어머니의 손맛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그러한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하고, 또한 ‘툭툭 친 감자밥에 강낭콩 한 옴큼이 전부인’데도 고향집 밥맛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곳엔 어머니의 손맛이 있고, 자식을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소박한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마음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2010년 08월 12일 국방일보)
금사랑
국방일보 2006년 01월 25일
낚시
김경수
바늘 끝으로
물을 낚는 자 누구인가
한번쯤 누군들 물살 당겨 보지 않았던가
누군들 한번쯤 던져 보지 않았던가
적막으로 밀려오는 어둠을 거술러
잠식된 의식을 낚아 챌
이 밤 바늘 끝은 流露처럼
헛물을 켜 대며
쏟아지는 별빛에 일격을 가하지만
어느 골짜기 대대로 자리잡은
저수지 고인 물을 퍼 올리기란
새벽까지도 어찌 하지 못하는
욕망의 눈빛으로
파동을 일으키는 사람 사람
사람들 마음일거다.
김경수
詩 풀이
우리는 무엇을 낚기 위해 늘 낚시 바늘을 드리우는가. 그것은 물에만 드리우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삶의 바다, 삶의 강물에도 끊임없이 낚시 바늘을 드리우고 있다. ‘한번쯤 누군들 물살 당겨 보지 않았던가/ 누군들 한번쯤 던져 보지 않았던가’ 대어가 낚기기를 소망하면서, 우리가 꿈꾸는 욕망...
시인은 잠식된 의식을 낚아채고 싶어하지만 ‘이 밤 바늘 끝은 유로처럼 헛물을 켜 대며’ 쏟아지는 별빛에 일격을 가할 뿐이다. ‘저수지 고인 물을 퍼 올리기란/ 새벽까지도 어찌 하지 못하는/ 욕망의 눈빛’으로 괴로워할 뿐이다. <2006년 1월 25일, 수요일>
김경수
전북 장수 출생. 시인. 문학평론가. 종합문예지『착각의 시학』발행인
한국문인협회 ․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시집 『도돌이표』외 6권, 평론 다수,
월간동리문학상 수상
국방일보 2010년 05월 27일
달맞이꽃
김계정
달 없는 들판에 등불 켜는 꽃이 있다
길 잃은 개미며 여치 밤낮 우는 풀벌레들
노란 등 불빛 따라서 집을 찾아 떠난다
겨우내 품고 있던 간절한 기도는
가는 계절 끝자락에 숨겨 놓은 꽃씨 하나
빈 가지 황금초롱을 등불로 밝히는 것
살아 온 세월만큼 흔들림 무거워도
조금쯤 비워 두면 조금씩 채워지고
하얗게 눈부신 얼굴 달도 차면 꽃이 된다
김계정
詩 풀이
달맞이꽃은 여름을 알리는 꽃으로 보통 오월 말에 핀다. 이제 곧 달맞이꽃들이 필 계절이다. 사월은 바람 불고 춥던 잔인한 달이더니, 오월은 화창해 어느 사이 녹음이 우거지고 있다. 해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계절의 신비 앞에 늘 감탄과 찬사를 보낸다.
긴 겨울의 간절한 기도는 여름에 꽃을 피우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보람이 있는 것이리라. 달 없는 들판에도 달빛을 닮은 환한 등불의 꽃이 핀다.
황금빛 달맞이꽃이 피어 짙어가는 녹음과 함께 더욱 아름다운 들판이 되고 더욱 아름다운 산천, 아름다운 계절이 될 것이다. <2010년 05월 27일 국방일보>
김계정
2006년 《나래시조》신인상 당선. 백수시조 백일장 장원 당선.
국방일보 2008년 01월 21일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詩 풀이
밤하늘에는 참으로 많은 별들이 있고,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산다. 그 많은 별들 중의 하나가 나를 유심히 내려다보고, 나는 그 별을 유심히 쳐다본다. 그 수억의 별들 중에서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별은 단 하나인 것이다. 때문에 그 별이 소중하고 정다운 것이리라. 왜 하필 그 별이고, 왜 하필 나였을까. 그것이 만남이고 인연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물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중에서 나와 정말로 깊은 인연을 가지고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되고 사물은 얼마나 될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내가 만난 인연을 어찌 소홀하게 대하고,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서로에게 정다운 존재, 소중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정다운 너와 나도 언젠가는 이별하게 되고 이별한 후에,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지, 아니면 영영 이별이 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곁에 있을 때 잘 할 수 밖에... <2008. 01. 21>
김광섭
함북 경성 출생. 1935년 《시원》등단. 시인, 번역문학가, 문학평론가. 대학교수. 예술원 회원. 시집 『동경』『마음』『해바라기』『성북동 비둘기』『반응-사화시집』『김광섭 전집』『겨울날』등. 자전문집 『나의 옥중기』
국방일보 2004년 09월 13일
낚시 白書
김광수
물안개 사물사물
고요를 짜는 물가에서
낚대 드리우고
종일 찌나 바라보다
시라도
한 수 건지면
그 또한 보람 아니랴
일상사 무거운 사념
구름 끝에 실어 두고
수초에 매달려 놀던
바람도 잠 든 한 낮
한 생각
죄 풀어 놓고
물에 나를 비춰 본다
낚아 챈 물고기 몇 수
수심으로 돌려보내고
기다림도 설렘도 접고
하루해를 다 거둬도
내 안에
푸득거리는
월척꿈은 놓지 못하네
김광수
詩 풀이
중국 주나라 때의 강태공은 천하를 다스리고 싶다는 큰 꿈을 간직한 채 미끼도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향의 강가에 앉아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자신이 나라를 위해 펼칠 꿈을 이리저리 설계해 보곤 했다. 마침내 그는 주나라 임금인 서백을 만나게 되고, 그 동안 마음속으로 설계해 왔던 병법이나 인재등용법 등의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탁월하게 왕을 보필하였다. 그리하여 ‘스승’의 의미가 담긴 ‘태공’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고, 그가 쓴 ‘육도’라는 책은 그 후 정치가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강태공이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았듯이 시인은 시를 낚고 있는 것일까. 일상사 무거운 사념을 벗어놓고 시를 생각하고 시를 건져 올리고 있는 것일까. 화자인 시인자신은 낚은 고기들을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고 기다림도 설레임도 접고 하루해를 거두면서도 좋은 시를 낚고 싶은 월척의 꿈은 저버리지 못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고 사랑받을 수 있는 시, 월척 같은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욕망, 하루해가 저물어 가도 저물 줄 모르는 시인의 꿈은 아름답다. <2004년 9월 13일>
김광수
경남 하동 출생. 197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조집 『등잔불의 초상』『길을 가다가』등.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수상. 『시조문학』편집주간, 씨얼문학회회장, 관악문인협회장 역임.
국방일보 2009년 04월 20일
봄산
김교한
아침 산은 말 없어도 넌지시 눈짓한다
꽃물감 들인 능선을 지나는 구름이 멎어
불그레 빗물을 적시고 풍선처럼 이동한다
손에 접은 시 한 쪽을 간간이 펼쳐 보고
또 다른 삶의 빛을 새순처럼 대하면서
기나긴 시간을 밀친 적막함을 다 모은다
진달래 앞장세워 천주산 등에 서니
숨 가쁜 오르막길 젖은 땀의 보람만큼
세상은 열리어 있다 누군가의 외침이 있다
김교한
詩 풀이
봄산의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화자를 만날 수 있다. 아침 산을 건너다보는 화자의 모습이 첫 수에서 나타난다. 거기에 봄산은 넌지시 눈짓한다. 아름답게 꽃들이 피어 꽃물감을 들인 것 같은 봄산의 능선으로 구름이 지나다 멈추어 비를 뿌려주고 산은 불그레 빗물에 젖고 구름은 풍선처럼 다시 이동하는 한가로운 봄 아침 산의 모습이다.
그 가운데 시인은 한편으로는 시를 생각하며 시상에 잠기고, 또 한편으로는 또 다른 삶을 새순처럼 준비한다. 그 가운데 기나긴 시간의 삶의 여정, 삶의 적막함이 모이고…. 셋째 수에 오면 화자는 ‘숨 가쁜 오르막길 젖은 땀의 보람만큼 / 세상은 열리어 있다 누군가의 외침이 있다’고 한다. 숨 가쁘게 열심히 오르막의 삶을 살면 그 노력한 보람만큼 나의 삶 앞에 펼쳐지는 미래는 환하게 열리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2009. 04. 20>
김교한
경남 울산 출생. 1964년 『시조문학』3회 추천. 시조집『대』『분수·도요를 찾아서』『미완성 설경 한 폭』『잠들지 않는 강』등. 성파시조문학상, 노산문학상, 경상남도문화상, 경남문학상, 경남시조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마산문인협회장, 노산시조연구회장 등 역임.
국방일보 2011년 12월 26일
파도 한 장을 접어 보냈다
김기산
배낭을 지고 소래포구로 갔다
민박집에 짐을 풀고
끊어진 옛길을 따라 걸었다
협궤열차의 기적은 물밑으로 가라앉고
시든 철길만 누워 있다
빗장을 지른 역사(驛舍)를 지날 때
바람소리가 바짝 다가왔다
해를 삼킨 저녁바다는 목청을 높이고
비틀거리던 그날처럼 창문도 밤새 덜컹거렸다
낯선 방에 엎드려 친구에게
노을을 베끼고 파도 한 장을 접어 보냈다
혼자서 살만하냐고
추운 날들이 쌓이면 볕이 드냐고
그 밤, 바람소리를 깔고 잠이 들었다
도시를 떠난 지 며칠
겹겹 쌓이는 파도에 밀려 먼 곳까지 흘러갔다
그 해 겨울은 너무 길었다
김기산
詩 풀이
해마다 김장철이면 소래포구와 젓갈들이 떠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이 시의 화자는 ‘배낭을 지고 소래 포구를 갔다’고 하여 독자로 하여 잊었던 소래포구를 기억나게 한다.
'낯선 방에 엎드려 친구에게 / 노을을 베끼고 파도 한 장을 접어 보냈다 // 혼자서 살만하냐고 / 추운 날들이 쌓이면 볕이 드냐고’에서는 시인의 따스한 감성이 드러난다. ‘그해 겨울은 너무 길었다’는 시인의 말에서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그해 겨울을 생각한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는 셸리의 시구를 외우면서, 계절의 추운 겨울을 견디며 따뜻한 봄이 오기를 기다려 본다. <2011. 12. 26>
김기산
국방일보 2010년 05월 20일
마젠타,마젠타
김남규
너의 이름 고딕체로 입력한 오늘 밤은
간절함 볼륨 높여 아침까지 춤추고파
이따금 들썩이는 어깨
손 올리는 너와 함께
흰 이빨 드러낸 어제에 손을 물려
어둠을 장작 삼고 눈물을 돌로 찧어
얼굴에 붉은 선 세 가닥
단호하게 긋지만
썰물로 달이 훔쳐 간 너의 파도 끌어 와
디덤디덤 심박동에 알맞게 포갤 때
명도만 높아지는 피돌기
너의 이름 마젠타
김남규
詩 풀이
우리 마음을 색감으로 나타낸다면 순간순간 어떤 색감일까. 이 작품을 읽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물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붉은색 계통은 정열이나 열정을, 푸른색 계통은 냉정이나 지적인 것 등을 상징한다고 보고 있다. 또 분홍색 계통은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물감을 섞어 마젠타를 만들 듯 마음도 감산혼합과 가산혼합을 매 순간 하면서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때로는 열정적이다가, 때로는 냉정하다가, 때로는 명도가 높아지기도, 낮아지기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높은 명도만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낮은 명도만이 좋은 것도 아니라는…. 우리는 그때그때 아름다운 색을 골라 적당히 잘 표현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 마젠타:명도가 낮아지는 색의 감산혼합(CMYK) 원색(Cyan·Magenta·Yellow·blacK) 중의 하나로, 명도가 높아지는 가산혼합(RGB)에서 빨강(Red)과 파랑(Blue)을 동일하게 혼합했을 때 마젠타(분홍색 계통)가 나타난다.
김남규
충남 천안 출생. 2008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국방일보 2006년 03월 15일
김시습의 푸른 기침
김남환
한 가닥 생각을 타고
바람을 거슬러 가면
복사꽃 자욱히 드는
한 필지 봄이 열려
극명한 임의 무지개
성큼성큼 다가온다.
피 묻은 모반의 땅에
눈물 뿌린 하얀 등뼈
목숨을 삭발하고
깊은 절망을 건너
청산을 걸어 잠그고
홀로 뚫은 피리 구멍
무시로 휘청거리는
창백한 강물 아래
불현듯 살아 서는
조선의 심줄 하나
두고 간 푸른 기침 소리
가슴 깊이 울린다.
김남환
詩 풀이
지금 화자는 김시습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세조의 모반에 눈물 뿌리며 돌아섰던 김시습, ‘목숨을 삭발하고 / 깊은 절망을 건너’ 그는 끝내 세조의 유혹에도 돌아가지 않는다. ‘청산을 걸어 잠그고 / 홀로 뚫은 피리 구멍’으로 그는 방외문학인으로 살아간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은 무시로 휘청거리는 창백한 강물인지도 모른다. 그의 지조만이 ‘조선의 심줄 하나’로 강하게 서고, 그의 ‘푸른 기침’만이 가슴 깊이 울린다는 화자는 그의 지조, 그의 정신을 그리워하고 있다.
김남환
경북 김천 출생. 1972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조집『시간에 기대어 흐르는 사랑을 듣네』등 8권. 정운시조문학상, 이호우시조문학상, 한국문학상 등 수상. 한국여성시조문학회 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국방일보 2010년 07월 01일
마음의 부자
김년균
깊은 밤
아무도 아니 오는 밤이면
저 혼자 외로울 것 같지만
도리어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구름 떼 가득 싣고
떼 몰려 온다
깊은 밤
아무도 아니 오는 밤이면
저 혼자 서글플 것 같지만
도리어 남부러울 것 없이
세상 욕심 다 가지는
부자가 된다
김년균
詩 풀이
이 작품의 화자는 아무도 아니 오는 깊은 밤 외로울 것 같지만, 마음의 떼 구름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외롭지 않다고 한다.
아무도 아니 오는 밤 서글플 것 같지만, 세상 욕심 다 가지는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된다고 한다. 자기의 마음가짐에 따라 외로움도 서글픔도 생겨나고, 또 마음으로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도 못 가질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임을 말함으로써 마음먹기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김년균
전북 김제 출생. 시집『장마』『갈매기』『바다와 아이들』『사람』『풀잎은 자라나라』『아이에서 어른까지』『사람의 마을』등과 수필집 『날으는 것이 나는 두렵다』 『사람에 관한 명상』등 출간. (사)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역임.
국방일보 2008년 11월 17일
화석도시를 위하여
김동인
이미 떠난 새들을 위해 아직도 도시는
상흔만 어루만질 뿐 시린 가슴 하고 있다
젖었던 어깨를 말릴 온기마저 식어가고
막장은 닫혀 있고 갱목은 젖어들어
쓴 물이 된 과거는 주름 위로 묻혀 간다
다시 또 퇴적되는 시대 내 영혼의 화석도시
이제 와 푸른 맥이 아니어도 괜찮다
밤새워 불 밝히던 검붉은 열정으로
떠나간 새들을 위해 불사조가 되어 다오
김동인
詩 풀이
예전에는 쥐라기시대 동식물의 화석이 화석연료가 돼 비록 힘든 노동이긴 했지만,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줘 희망을 갖게 하고, 삶에 활력을 넘치게 하고, 난방의 효력을 발생해 사람들에게 따스함을 선사하던 석탄, 그 석탄일을 하며 살아가던 광산촌 산마을.
하나 둘 외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도시를 만들더니 석탄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지금은 다시 또 고요한 화석도시가 돼 가고 있다. 떠나간 새들을 위해 도시는 상처의 흔적만 어루만질 뿐 시린 가슴을 하고 있다. ‘젖었던 어깨를 말릴 온기마저 식어 가고’ 있는 탄광촌, 그러한 도시를 바라보는 시인의 안타까움이 잘 나타나고 있는 시다.
‘막장은 닫혀 있고 갱목은 젖어들어/다시 또 퇴적되는 시대 내 영혼의 화석도시’인 것
이다. 그러나, 그러나… 푸른 맥이 아니어도, ‘떠나간 새들을 위해 불사조가 되어 다오’라는 표현 속에는 그 도시가 영원하기를, 새롭게 거듭 태어나는 도시이기를, 화석도시가 아니기를 시인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김동인
강원 삼척 출생. 2007 농민신문 신춘문예 등단. 2011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 지원금, 오늘의 시조시인상. 시조집 『작은 쉼표,』
국방일보 2008년 08월 11일
‘물음’ 연가(戀歌) 6
김동호
큰 짐 하역하는 대형 크레인의 손가락이
어쩌면 저리도 보드라울까
우리 아기 고사리 손보다도 더 보드랍네
두더지에겐 땅을 파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
딱따구리에겐 나뭇결을 파는 정교한 부리가 있다
사람에겐 존재의 근원을 파는 보드라운 물음이 있다
얼음이 녹아 물방울 되는 모습, ?의 모양이다
슬픔이 녹아 눈물방울 되는 모습, ?의 모양이다
0의 실태래 막- 풀어지기 시작하는 모습, ?의 모양이다
사람들은 한 점 종지부로 우주를 닫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닫기가 무섭게 여는 것이 있으니 ?.?.?.
?은 지상최대의 열쇠일까
네발나비, 뒷날개 아래쪽에
?모양의 은빛 무늬가 있다 해서
밤늦게까지 찾고 찾던 날 밤
나는 꿈속에서 구멍 숭숭 난 색안경을 썼다
김동호
詩 풀이
시의 제목이 ‘물음’연가(戀歌)이다. 화자는 ‘사람에겐 존재의 근원을 파는 보드라운 물음이 있다’고 한다. 얼음이 녹아 물방울이 되는 모습도 물음표(?)의 형상을 하고 있고, 슬픔이 녹아 눈물방울이 되는 모습도, 둥근 실타래에서 실이 막 풀어지기 시작하는 모습도 ?형상이라고 한다. ‘사람은 한 점 종지부로 우주를 닫기를 좋아한다’고 하여 인간은 살아가면서 의문이 가는 것에 대해 답을 내리기를 좋아한다. 그런 다음에는 또 다른 것에 의문을 갖는다. 의문을 갖고, 풀고, 갖고, 풀고를 반복한다. 그래서 의문을 갖는 물음(?)은 지상최대의 열쇠가 아닐까 하고 화자는 역설적으로 생각한다. 마지막 연의 ‘구멍 숭숭 난 색안경’이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세상에 대한 색안경을 끼고 삶을 살아가면서도 존재의 근원 또는 진실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 화자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동호
충북 괴산 출생. 1975년《현대시학》등단. 시집『꽃』『시산일기』『노자의 산』『한 쌍의 새가 날아간다』『나는 네가 좋다』『호호의 집』『나의 뮤즈에게』등. 성균문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등을 수상.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 역임.
국방일보 2006년 08월 29일
우리집 화단
김몽선
우리집 녹색 뜰엔
남의 손이 전혀 없다
얻어온 자식처럼
키운 정이 하도 커서
민들레
증손, 고손들
활개치며 살고 있다
바랭이 씀바귀
질경이에 냉이까지
먼 산비알 한 자락을
대청 앞에 앉혀 두면
충혈된
세상 인심도
넉넉하게 걸러낸다
김몽선
詩 풀이
위 시의 화자는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그러면서도 한국적 정서가 잘 살아나는 화단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화려한 꽃들로 가득찬 화단이 아니라, 자칫 화려한 화단 속에서 잡초라고 뽑혀지기 쉬운 민들레, 바랭이, 씀바귀, 질경이, 냉이 같은 우리의 토속적이고 친숙한 풀꽃들이 자라는 화단을 소개함으로써 우리에게 친숙함을 주고 있다. 또한 그것은 그대로 먼 산비알 한 자락을 옮겨다 놓은 모습이기도 하다. 꾸미지 않은 자연풍광을 그대로 정원처럼 둘러놓고 보던 우리 조상들의 슬기와도 맛닿아 있는 이 작품은, 작고 소박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시인의 아름다운 심성이 잘 나타나는 작품이다.
김몽선
경북 울릉 출생. 1977년 《월간문학》등단. 시집 『한지』외. 한국시조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대구시조문학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04년 07월 05일
예송리 해변에서
김민정
돌 구르는 밤의 저쪽 퍼덕이는 검은 비늘
등솔기며 머릿결에 청청히 내린 별빛
저마다 아픈 보석으로 이 한 밤을 대낀다
낙지회 한 접시에 먼 바다가 살아오고
맥주 한 잔이면 적막도 넘치느니
물새는 벼랑에 자고 어화등(漁火燈)이 떨고 있다
당신의 말씀 이후 살이 붙고 피가 돌아
삭망의 별빛 속에 드러나는 능선이며
때로는 샛별 하나쯤 띄울 줄도 아는 바다
가슴속을 두드리며 깨어나는 말씀들이
맷돌에 갈린 듯이 내 사랑에 앙금지면
바다도 고운 사랑 앞에 설레이며 누웠다
김민정
詩 풀이
아무도 없고, 달빛조차 없는 밤바다 앞에 그대 서 본 일이 있는가. 먼 하늘에 별빛만이 반짝이는 밤, 우주의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 끊임없이 철썩이는 파도소리…. 그 파도소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몇 천 년, 아니 몇 만 년 전부터 철썩였을 것이고, 우리가 가고 없는 몇 천 년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자연에 비해 백 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을 살다가는 인간은 자연의 영원성 앞에 서면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예송리 해변'은 보길도에 있다. 소나무가 예술적으로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시조시인 윤선도가 유배생활을 하면서 어부사시사를 지은 곳이다. 그 해변의 특이한 점은 검은 자갈해변이라는 것이다. 작고 고운 자갈이 깔려있는 해변에선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갈 때마다 ‘짜르륵짜르륵'하고 그곳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파도소리를 낸다. 1984년에 쓴 이 글은 ‘시조문학25주년기념 지상백일장 장원(1985)' 작품으로 필자의 등단작품이기도 하다.
김민정
강원 삼척 출생. 성균관대 문학박사. 1985년《시조문학》지상백일장 장원 등단. 시조집『나, 여기에 눈을 뜨네』『지상의 꿈』『사랑하고 싶던 날』『영동선의 긴 봄날』, 논문집『현대시조의 고향성』『사설시조 만횡청류의 변모와 수용 양상』, 수필집『사람이 그리운 날엔 기차를 타라』. 한국공간시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강동문인회 부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한국여성시조문학회 회장.
국방일보 2006년 07월 04일
감자밭을 매다가
김보영
감자꽃 / 필 무렵에 / 처연한 뻐꾸기가
꽃 지면 / 망연스레 /울어 예던 생각에 젖어
야릇한 / 비감에 잠긴다 / 전설 속의 사연에
예사로 / 들어 넘긴 / 멧새의 그 여운에
어쩌면 / 꿈만 같은 / 그림을 그리다가
휘황한 / 석양 원반만 / 감자밭에 심는다.
김보영
詩 풀이
6월 21일은 ‘하지’로 낮이 가장 긴 날이다. 그날은 햇감자를 처음 먹는 날이기도 하다. 유월이 되면 감자꽃이 피고, 하지무렵엔 ‘하지감자’라 하여 감자밭에서 감자가 얼마나 굵었나, 잘 크고 있나를 점검해 보는 날이며, 첫감자를 먹어보는 날인 것이다. 물론 그 후에도 감자는 계속 자라야 하므로 뿌리부분의 흙을 부드럽게 긁어서 감자알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면서 굵은 감자 한 두 알을 캐내고 다시 흙을 북돋아 주어야지만 캐지 않은 감자는 계속해서 자라고 여물게 된다.
지금 화자는 감자밭을 매다가 감자꽃이 필 때쯤 뻐꾸기가 많이 울던 생각을 하고, 그 전설을 생각하며 비감에 잠겨본다. 또한 멧새의 울음도 예사로 들어 넘기며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산골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둘째 수 종장의‘휘황한 석양원반만 감자밭에 심는다’고 하여 황혼녘의 아름다운 석양을 ‘감자밭에 심는다’는 뛰어난 표현으로, 힘든 노동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밀레의 ‘만종’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김보영
국방일보 2006년 06월 26일
외출
김복근
집을
나설 때는
창 하나
열어둔다
나 없을 때
찾아오는
길손을 위하여
나 대신
방에 들어올
내 작은
달을 위하여
김복근
詩 풀이
시인의 넉넉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집을 나설 때 ‘창 하나 열어두는’ 마음이 현대인들의 삭막하고 타인에 대해 신뢰성 없는 삶에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때문에 시인의 그 마음이 더욱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나를 찾아오는 귀한 친지들인 길손을 위하여 창문을 열어 둠으로써 그들은 내가 없는 시간에도 나를 찾아왔다가 허탕치고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찾아오는 친지가 없다고 할지라도 창문을 열어두면 내가 없는 동안에도 내 방에 들어와 환하게 비춰줄 작은 달을 위하여 시인은 창문을 열어두겠다고 한다. 시인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친인간, 친자연, 친환경의 시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강호가도의 시조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복근
경남 의령 출생. 창원대 문학박사. 《시조문학》천료. 시조집『는개, 몸속을 지나가다』『클릭! 텃새 한 마리』『비상을 위하여』『인과율』『손이 큰 아이』, 평론집『생태주의 시조론』『노산시조론』, 패관문집『바람을 안고 살다』등. 경상남도문화상, 한국시조문학상, 한국문협작가상 등 수상. 거제교육청 교육장 역임.
국방일보 2006년 03월 20일
길
김삼환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
열리는 새벽 바다 그 꿈의 자리로
옹이 진 시간의 돌멩이를 닦으며
길 위에 길을 만들어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
멍울져 내린 깃발 그 어둠을 툭툭 털어
물결 없는 지평선에 둥실 뜨는 푸른 희망으로
망각의 날개를 접는
섬 같은 그리움으로
무심한 벽을 넘어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며
불끈 솟는 힘줄 마디마디에
깊고 깊은 노동의 환한 미소로
길 위에 길을 만들듯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
김삼환
詩 풀이
길 위에 길을 만들어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새로운 날일 수도 있고, 내 앞에 다가오는 새로운 운명일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인생길,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언제나 우리가 새로운 각오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만들며 가야 하는 것이다. ‘멍울져 내린 깃발 그 어둠을 툭툭 털’며, ‘물결 없는 지평선에 둥실 뜨는 푸른 희망’과 그리움과 아픈 상처와 환한 미소를 간직하며 삶의 길이 걸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망각의 날개를 접는/ 섬 같은 그리움으로/ 무심한 벽을 넘어/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며’ 오는 그것은 절망과 어둠을 넘어 오는 밝음이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지닌 화자를 이 시에서 만난다.
김삼환
전남 강진 출생. 한양대 박사과정 수료. 《한국시조》에 시조가, 《현대시학》에 시가 추천되어 등단. 시집『적막을 줍는 새』『풍경인의 무늬 여행』『비등점』『뿌리는 아직도 흙에 닿지 못하여』『왜가리 필법』등 출간. 한국시조작품상, 바움작품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04년 09월 20일
가을 산책
김석철
수줍은 코스모스
서리 아침 들국화도
눈 시린 쪽빛 하늘
머리 위에 받쳐 이고
저마다
저린 사연을
그려내고 있나니
울밑의 귀뚜라미
저문 뜨락 낙엽들도
계절의 깊은 뜻을
온몸으로 그려내며
밤새껏
푸른 달빛에
부대끼고 있나니
김석철
詩 풀이
이 세상에 쉽게 피는 꽃은 없다. 길가의 코스모스 꽃 한 송이도, 서리를 맞으며 피는 들국화도 여름의 긴긴 해를 견디고 비바람 폭풍우를 견뎌낸 후에야 해맑은 꽃을 피운다. 결국 세상에는 함부로 된 것은 없고, 의미 없이 피는 꽃도 없다.
저마다 저린 사연들을 가지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흔하게 울어대는 울밑의 귀뚜라미도 우는 사연이 있고, 뜨락의 떨어진 한 잎 낙엽도 온몸으로 뜨겁게 자기의 계절을 살아왔을 것이며, 가을이면 떨어져야 하는 섭리를 깨닫고 있을 것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크든 작든 저마다의 사연으로 흔들리며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만물의 살아가는 모습이며, 화자는 이 작품을 통해 그러한 모습을 관조하고 있다.
김석철
전북 부안 출생. 1980년《월간문학》신인상 등단. 시조집『바다 풍경』『바람처럼 구름처럼』『참 선비의 그 뜻은』『가을 산책』등 출간. 황산시조문학상, 경기문학상, 노산문학상, 백양촌문학상, 한국시조문학상, 경기예술대상 등 수상.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문학본부 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경기도문인협회 자문위원, 경인시조시인협회 고문
국방일보 2011년 11월 14일
해-바래기
김선화
반지하 지하셋방 창가에 핀 제라늄
세상 환해지라고 온몸으로 얘기하듯
분홍꽃
서넛 송이가 분을 돌며 피어난다
"어허! 요놈 여간 예쁜 게 아니네"
꼬불꼬불 좁다란 길 구부정한 실루엣
백발의
깊은 주름에도 햇살 출렁, 고인다
김선화
詩 풀이
꽃이 피는 곳은 어디든 아름답다. 지하셋방 창가든, 부자집 안방이든, 시골 길가든…. “세상 환해지라고 온몸으로 얘기하듯” 피어나는 작은 제라늄. 온몸으로 얘기하며, 온몸으로 웃으며 세상 속으로 꽃은 피어난다. 세상을 향해 환하게, 뜨겁게 웃는다. 작은 꽃 한 송이가 세상을 환히 밝힌다.
그것이 꽃이 가진 강한 생명력이며, 꽃이 가진 매력이며, 꽃이 줄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물론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 기분에 따라, 순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보는 인간은 대체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쁘다고 느끼고 기쁨을 느낀다.
골목의 꼬불꼬불 좁다란 길로 허리 굽은 노파가 지나가다 그것을 바라본다. 누군가의 눈길이 닿아 아름다움이 발견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 꽃도, 그리고 백발의 깊은 주름살에도 햇살이 출렁이며 고인다. 노파의 미소가 번진다. 서로의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순간 세상은 햇살이 출렁이며 또 한 번 아름다움이 핀다. 서로의 생명이 핀다.
김선화
출생 2006년《유심》등단. 2011년 가람시조문학상신인상 수상.
국방일보 2011년 07월 11일
우선멈춤
김선화
제동장치 풀려버린
빨간색 마티즈가
여명의 도로 위를
폭군처럼 달리는 아침
주황색 양심의 소리가
깜빡깜빡거린다.
빨강과 초록 사이
희망과 절망 사이
신호등 어깨 위로
우뚝 선 서른아홉
초록색 화살표 따라
세상 밖을 나선다.
김선화
詩 풀이
우리의 삶은 초록색, 빨간색 신호등을 기다리듯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가야 할 때가 있고, 가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옆에서 오는 차들과 충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동장치가 필요하다. 제동장치가 풀린 것처럼 질주하는 차들을 보면 그것은 폭군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 시의 화자는 상황도 모르고 제동장치 풀린 듯이 달리는 마티즈를 보고 ‘폭군처럼 달리는 아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럴 때 ‘주황색 양심의 소리가/ 깜빡깜빡 거린다’고 한다. 가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분명히 알아야 실수하지 않는 삶,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둘째 수에 오면 ‘신호등 어깨 위로 우뚝 선 서른아홉/ 초록색 화살표 따라 세상 밖을 나선다’고 표현해 서른아홉의 나이, 희망일 수도, 절망일 수도 있는 나이를 생각하며 또한 세상 밖을 향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나이는 분명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가기엔 희망적일 수도, 절망적일 수도 있는 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의 관점이다. 굳건한 의지만 있다면, 살아갈 날이 더 많다는 것을 안다면 서른아홉은 결코 절망의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선화
부산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한얼지 작품발표. 제주 젊은시조문학회, 시조갤러리 편집장. 작품 사랑도 타이밍, 우선멈춤, 사과, 한남동 바닷가, 손잡이가 야위다 등
국방일보 2010년 04월 22일
냉이꽃 병원
김선희
녹다 만 잔설들이 그늘에 머뭇대는데
성미 급한 냉이 꽃대 작은 깃발 치켜든다
바람은 매몰차지만 발돋움 연습 중인가
애지중지 키웠어도 나중엔 혼자 목숨
허허벌판 한가운데 부모를 모셔 놓고
밤마다 요양병원이 꿈속으로 왔다 간다
밤 속의 보늬 같은 어머니는 나의 허물
자식 돈 아깝다고 발목에 또 힘주신다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흔들리는, 한낮
김선희
詩 풀이
부모와 자식은 전생에 어떤 인연이기에 부모와 자식이란 질긴 연으로 만났을까?
녹다 만 잔설 속,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내며 냉이꽃이 피는 봄날, 어머니를 허허벌판 같은 요양병원에 모셔 놓고 애틋해하는 화자를 만난다. 애지중지 키웠어도 나중에는 돌봐 주는 자식 하나 없이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신 어머니가 안타까워 꿈에서도 만난다. 나의 허물 같은, 밤 속의 보늬 같은 어머니는 마치 한 송이 냉이꽃이 허허로운 봄 들판에서 피어나듯이 피어난다.
자식 돈 아깝다고 발목에 힘 주시며 요양비를 아끼려는 어머니의 마음, 아픈 중에도 자식을 생각하는 내리사랑의 따뜻함이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흔들리는, 한낮’으로 표현돼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식의 애틋함이 잘 나타나는 작품이다.
김선희
출생. 2001년《시조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시조집『토담조각』『숨은 꽃』『봄 밤 속을 헤매다』등 출간. 제4회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한국시조시인협회 간사, 한국여성시조문학회 사무국장 역임
국방일보 2009년 03월 23일
삶에는, 망설임이 있다
김세진
늘 반경 15km, 그 안에 놓여 있다
수축과 이완으로 하루를 되풀이하며
이제는
낯익은 길을
멀리 바라보고는 한다
아침 일곱시에서 저녁 여덟시까지
탄성의 한계점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가끔은
지친 더듬이
세워 보고는 한다
김세진
詩 풀이
‘삶에는, 망설임이 있다’라는 제목이 시선을 끈다. 생활의 포물선, 그것은 반경 15Km 안에 놓여 있다고 한다. 출퇴근의 거리, 하루 생활의 거리, 그 거리 안에서 수축하기도 하고 이완하기도 하며 하루를 되풀이하고 있다. 대체로 아침이면 낯익은 길을 통해 정해진 곳으로 출근하였다가 같은 길로 퇴근하는 모습이 눈에 어린다. ‘이제는 낯익은 길을 멀리 바라보고는 한다’고, 그렇게 다니던 길을 한 번쯤 거리를 두고 관찰해 보는 화자를 만난다.
하루의 일과를 벗어나지 못하고 쳇바퀴 돌듯 ‘아침 일곱시에서 저녁 여덟시까지’ 활동하는 시간은 줄곧 ‘탄성의 한계점’ 속에 갇혀있어, 생활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시가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독자도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 날에는 자신의 직업과 삶에 대해 많은 선택의 망설임을 갖기 때문이다. 어느 길이 더 보람 있고, 더 가치 있는지 늘 생각하며 <선택과 집중>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김세진
김세진
대구 출생. 1998년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장원. 시집『메타세카이어에게』『점자블록』.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
국방일보 2006년 06월 21일
외사랑
김수자
나는 안다 그의 속내 날 버거워 한다는 걸
맘 상해 울다 보니 그가 불쌍해진다
잔등에
날 지고 사는
그는 나의 달팽이.
김수자
詩 풀이
‘외사랑’은 짝사랑의 또다른 말이다. ‘짝사랑만 하고 있다고… 상대방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늘 툴툴거리며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을까. 부부 사이에서도, 연인 사이에서도 늘 내가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주는 것만큼 받지 못한다고 섭섭해 하면서 우리들은 사는 것이 아닐까. 사랑은 같은 비율로 주고받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렇다고 대가를 바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닌 나의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기에… 상대방이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한쪽에서만 하는 사랑인 짝사랑은 문제가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내가 준 마음만큼 돌려받지 못함을 서운해 하다가도, ‘잔등에/ 날 지고 사는/ 그는 나의 달팽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래고 상대방을 안쓰러워하는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남편을, 아내를, 연인을 그런 눈으로 바라본다면 사랑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김수자
전북 전주 출생. 1983년 시조 등단. 시조집『산나리』『내일은 안개꽃 찾아가리라』『햇살은 깨금박질로 징검다리 건너간다』『사랑법』『꽃씨봉투』등 출간.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숙명문학상 등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한국여성시조문학회 회장 역임.
국방일보 2011년 10월 17일
잠적
김술곤
휴대폰 전원 끄고 행선지도 불분명한
낙엽이 굴러가듯 맘따라 발길 주면
고독이 쓸리는 길로 생각 하나 숨어든다
산책로 허리 자른 출입금지 붉은 푯말
이승 저승 구분 짓듯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잡새들 경을 외우다 깃털 툭 떨구고 간다
마음을 접고 보니 무인도가 따로 없다
눈 감아도 다 보이는 물빛 깊은 이 가을날
닻 올린 거룻배 한 척 삐걱대며 가고 있다
김술곤
詩 풀이
가을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절이다. 봄에 돋았던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고 힘을 새롭게 축적해 봄을 틔울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도 지금 ‘낙엽이 굴러가듯 맘따라 발길 주면 / 고독이 쓸리는 길로 생각 하나 숨어든다’고 한다. 복잡다단한 현실과 외부와의 접촉을 단절하고 자신에 대해 깊은 사색에 잠겨보는 계절이 가을이기도 하다.
외부와의 접촉을 단절하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욕망을 접으면 ‘마음을 접고 보니 무인도가 따로 없다 / 눈 감아도 다 보이는 물빛 깊은 이 가을날 / 닻 올린 거룻배 한 척 삐걱대며 가고 있다’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고요한 사색 가운데 우주 속의 작은 점 하나 같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우주의 이치, 삶의 이치가 보인다. 그런 가운데 돛도 달지 아니한 작은 배 한 척이 삶의 바다를 건너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비록 삐걱대는 작은 배일망정 이미 닻을 올렸기에 망망대해 같은 생의 바다라 할지라도 헤쳐가야만 하는….
가을날 시인의 깊은 사색과 생에 대한 겸손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김술곤 경북 청도 출생
2009년 《나래시조》신인상 당선 제36회 샘터상, 2011년 시조문학 신인작가상. 시조집 『수몰 저쪽』『은빛 실루엣』출간.
국방일보 2005년 07월 18일
자랑스런 이등병
김양수
안개서린 긴 터널을
숨가쁘게 빠져나와
씩씩한 아들의
거수경례 받고서
아비는
가장 진실된 반가움을 보았다
아픔과 눈물로
떨리는 손으로
이등병 계급장을
가슴에 달아주며
아비는
가장 귀하디귀한 보물을 만졌다
45년의 역사 속에
함께 한 단 하루는
언뜻언뜻 보이던
그 어떤 행복처럼
영원한
화석으로 남아 우리 곁에 누웠다
김양수
詩 풀이
이 시 속의 화자는 면회 간 이등병 아들에 대한 회포를 말하고 있는 아버지이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놓고 가슴 조이며 면회를 가 씩씩한 아들을 만나보고 이등병 계급장을 달아주며 흐뭇해하고 행복해 하는 이 땅의 모든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남자는 군에 갔다 와야만 비로소 철이 들고 남자다와진다고 하시던 어른들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전방에서 이 땅의 평화를 지키고 있을 늠름하고 씩씩한 우리 장병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김양수
강원 춘천 출생. 시인. 아동문학가. 《시조문학》천료, 저서『생명』외 5권 출간. 강원시조문학상, 강원문학상 수상. 강원문인협회, 강원교원문학 사무국장.
국방일보 2005년 11월 21일
석류나무 한
김여정
언제 누가 심었을까
나도 몰래
나도 몰래
석류나무 한 그루
내 가슴 속에 자라서
어느새 탐스럽게 열린
석류에
노을이 스며들고
일몰의 태양이 빠져들어
터진 껍질 속에서
번뇌의 별들 알알이 빛날 때
아, 그제야
나도 몰래
석류나무 한 그루
내 가슴 속에 자라고 있었음을
알았네
김여정
詩 풀이
화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자신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슴 속에 자라서 석류는 노을이 스며들고 일몰의 태양이 빠져들어 터진 껍질 속에서 빛나는 것은 번뇌의 별들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삶의 번뇌, 석류알처럼 알알이 익어 빛나고 있음을 시인은 이 시에서 말하고 있다. 붉게 익어 보석처럼 빛나는 석류알을 자신 속의 ‘번뇌의 별들’로 표현한 시인의 비유적 표현법이 뛰어난 시이다.
김여정
경남 진주 출생. 성균관대. 196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화음』『바다에 내린 햇살』『해연사』『봉인 이후』『내 안의 꽃길』『초록 묵시록』『눈부셔라, 달빛』『미랭이로 가는 길』등과 수필집 『고독이 불탈 때』『너와 나의 약속을 위하여』『오늘은 언제나 미완성』등 출간. 월탄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동포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성균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06년 09월 19일
바다와 해녀
김연동
뒤척이던 해 하나를 순산한 아침나절
고운 이 손길 같은 미풍을 맞은 바다
밤새운 낮달을 끼고
몸을 열고 누웠다
해녀는 발기하듯 물옷을 입었다
한낮의 정사는 거품으로 부서지고
올가즘
휘파람 소리
소라
전복
해삼
멍게...
김연동
詩 풀이
위 시조 첫째 수는 제목이 보여주듯 ‘바다’를 둘째 수는 ‘해녀’를 노래하고 있다. 아침해를 순산한 바다, 그리고 미풍이 이는 잔잔한 바다, 밤새운 낮달을 끼고 몸을 열고 있는 바다이다. 그 바다 속으로 물옷을 입은 해녀가 들어간다. 바다 속에서 해녀의 물질하는 모습을 ‘한낮의 정사’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녀들이 만족을 느끼고 흐뭇해하며 건져올리는 소라, 전복, 해삼, 멍게 등을 ‘올가즘/ 휘파람 소리’로 표현하여 풍부한 상상력으로 인해 신선함을 주는 작품이다.
김연동
경남 하동 출생.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및≪시조문학≫≪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저문 날의 구도』『바다와 신발』『점묘하듯, 상감하듯』『시간의 흔적』등과 평론집『찔레꽃이 화사한 계절』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경남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경남문학상 등 수상. 경남도교육연구정보원원장 역임.
국방일보 2004년 06월 28일
강가에나 나가 보자
김영덕
시름겨워 울컥 치밀 때 강가에나 나가 보자
올망졸망 모여 앉아 대중조차 잊고 사는,
자갈과 자갈 사이의 여유쯤은 갖고 살자
제 살을 깎아 내어 얻어 낸 풍요로움
얼만큼 굴러봐야 저 소릴 들을 건가
하루쯤 강가에 서서 손바닥을 펴 보자
부딪쳐 터진 상흔 물살에 씻어 내고
이제는 가슴 열어 이웃하는 저 틈새로
작아도 거침없이 넓게 가는 바람소리 들어보자
김영덕
詩 풀이
삶은 늘 즐겁고 기쁜 일만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고,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울컥울컥 화가 치밀 때도 있고 시름에 겨울 때도 있다. 인간이기에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화자는 화가 치밀 때, 시름에 겨울 때 '강가에 나가보자'고 한다. 그곳에 가면 올망졸망하게 모여 사는 자갈을 만날 수 있고, 오랜 세월을 다듬고 깎이어 모나지 않고 둥글어진 자갈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건 바로 제 살을 깎아내는 아픔 후에 얻은 평화이다. 그 자갈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움켜쥐었던 손바닥을 가만히 펴며 응어리진 마음의 울화와 근심을 풀어보자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부딪치며 얻는 상처 물살에 씻어내고 이웃해 앉는 자갈들처럼 그렇게 거침없이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들어보는 여유를 갖자고 화자는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김영덕
충북 단양 출생.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법학 복수전공 졸업. 1996년 《시조문학》2회 천료. 시집 『나무거울1』『나무거울2』등 출간. 역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
국방일보 2005년 12월 19일
흔들림
김영재
흔들리며 사는 일이 때로는 아름답다
더불어 살아가면 더불어 흔들리고
혼자서 길을 걸으면 혼자서 흔들리겠지
느리게 기어가면 느리게 흔들리고
빠르게 달려가면 빠르게 흔들리는
이것이 사람살이의 또 다른 깨달음인 것을
김영재
詩 풀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선남선녀들은 늘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며 살아간다. 작은 일 하나에도 언제나 망설이며, 외부에서 불어오는 작은 바람 하나에도 늘 부대끼며 흔들리며 그러한 가운데서 자기정체성, 자기중심을 잡아가며 살고 있다. 더불어 살아가면 더불어 사는 대로의 흔들림이 있고, 혼자서 살아가면 혼자서 사는 대로의 흔들림이 있으며, 느리면 느린 대로의 흔들림이 있고, 빠르면 빠른 대로의 흔들림이 있음을, 그것이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임을 이 시의 화자는 깨닫고 있다.
김영재
전남 승주 출생. 1974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오지에서 온 손님』『겨울 별사』『화엄동백』『참나무는 내게 숯이 되라네』『다시 월산리에서』『홍어』등과 시화집『사랑이 사람에게』 시조선집『참 맑은 어둠』 2인 시조집『가람시조문학상 이호우시조문학상 수상 작품집』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한국작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11년 11월 07일
촛대바위
김영철
그대에게 가는 날은 할 말이 많아서네
목 놓아 소리쳐도 들어주기 때문이지
왜냐고 묻지 않아도 풀어놓는 비밀들
그대가 보고픔은 눈물마저 말라서네
고이다 터진 설움
버릴 곳 없어서네
다시는 아프지 말라고
격려하는 큰 가슴
천 년을 뿌리박고 만년을 솟아올라
모두에 내어주고 저 홀로 버틴 세월
생인발 안으로 감춘
화톳불 같은 등대
김영철
詩 풀이
강원도 동해시 추암바다의 촛대바위. 이 시의 화자는 첫째 연(수)에서 ‘그대(촛대바위)에게 가는 날은 할말이 많아서네 / 목놓아 소리쳐도 들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촛대바위와 넓고 푸른 동해를 바라보면 스스로 마음이 풀려 마음의 근심이나 비밀초자 풀어버리는 곳, 곧 마음의 안식처로 인식된다.
둘째 연(수)에서는 ‘그대가 보고픔은 눈물마저 말라서네 / 고이다 터진 설움 버릴 곳 없어서네’라고 한다. 역시 울고 싶거나 남에게 말하기 곤란한 일, 설움이 있을 때 찾아가면 촛대바위와 동해는 ‘다시는 아프지 말라고 격려하는 큰 가슴’이 된다.
셋째 연(수)에서는 푸른 동해에 ‘천 년을 뿌리박고 만 년을 솟아올라’ 있으면서 필요한 것은 모두에게 내어주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만 홀로 버텨온 촛대바위를 화자는 ‘생인발 안으로 감춘 화톳불 같은 등대’라고 한다.
이 시에서 촛대바위는 슬프고 고독하고 힘들고 외로운 인생의 길을 환하고 따뜻하게 밝혀주는 ‘화톳불 같은 등대’로 표현되고 있다. 촛대바위와 넓은 동해를 근심과 설움을 풀어버리는 마음의 안식처로, 또 스스로는 아픔을 감추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앞길을 환히 밝혀주는 희망의 등대로 인식하고 있어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김영철
강원 동해 출생. 2007년 《자유문예》 시 신인상. 2011년 《한국동시조》신인상. 2011년《샘터》 시조상. 2012년 《시조시학 》신인상 등단. 시집『붉은 감기』.한중대학교 한국어 다문화학과 재학 중.
국방일보 2011년 01월 17일
푸른 잎 하나가
김영탁
푸른 잎 하나 눈 시릴 때가 있다
푸른 잎은 햇살을 타고 날아가
유리창 하나 푸르게 하길 바란다
멀면서 가까워지는 바람 소리가 유리에
들어와 스스로 갇힌다 갇혀서 자유로운 소리는
푸르게 살아 움직이며 눈을 뜬다
잎으로부터 뻗어 있는 길들을 믿을 수 없구나
그 길 위엔 바퀴가 굴러가고 바퀴 위에 내가
누워 있지만 바퀴는 바퀴의 의지로만 굴러간다
그러나 전혀 바퀴에서 내릴 기미가 없는 나
푸른 잎 하나가 내 이마를 스쳐갈 때
푸른 잎 하나 눈이 시릴 때
잎의 시원을 그려본다
지나온 모든 길 위에 내가 있었다.
김영탁
詩 풀이
이 시에서 우리는 푸른 잎 하나를 보며 그 잎의 시원을 그려보는 화자를 만날 수 있다. 이 시에서 ‘푸른 잎 하나’는 푸른 영혼, 곧 시인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잎으로부터 뻗어 있는 길들을 믿을 수 없구나/ 그 길 위엔 바퀴가 굴러가고 바퀴 위에 내가/ 누워 있지만 바퀴는 바퀴의 의지로만 굴러간다’고 한다.
여기서의 바퀴란 세월을 의미한다. 곧 삶이, 세월이 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굴러간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시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삶이 흘러갈지라도 시인은 그 바퀴에서 전혀 내릴 기미가 없다고 한다. 타고 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온 모든 길 위에 시인은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자아에 대한 긍정과 자존감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김영탁
경북 예천 출생. 1998년 《시안》등단. 시집 『새소리에 몸이 절로 먼 산 보고 인사하네』
국방일보 2011년 01월 24일
하늘을 나는 새
김용범
새라고 공중에 하루 종일 떠 있을 수는 없다
새들이 모과나무 가지에 잠시 앉아 쉬는 것은
그냥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번 쉬어야 할 나무를 찾고 있는 것이다
새들이 다리 위 가로등 위에 내려앉아
날개를 접고 쉬는 것도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다
새들은 강을 내려다보며 재빨리 낚아챌
물고기를 찾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목표가 정해지기 전에
새들은 절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새들은 제 몸의 무게와 날개의 힘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공중에 날며 똥을 누는 이유도
몸무게를 가능하면 줄이려는 치밀한 전략
새들은 절대 경솔하게 날지 않는다
김용범
詩 풀이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새들도 그들의 삶을 살기에 치열하다. 화자는 그들은 자신의 몸무게와 날개의 힘을 분명히 알고 치밀한 계획하에 하늘을 날고, 나무에 앉아 쉬고, 먹이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새들도 하루 종일 공중에 떠 있을 수가 없기에 적당히 앉아 쉬기도 하는데 생각 없이 쉬는 것이 아니라 다음번 쉴 나무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다리 위 난간에 앉아 쉬는 것은 물고기를 발견하고 재빨리 낚아채기 위한 것이다. 날면서 똥을 누는 것도 몸무게를 줄이기 위한 행동이며, 분명한 목표가 있는 새들은 절대로 경솔하게 날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새를 관찰하고 있다. 우리가 조금만 여유를 갖고 살펴보면, 지구상의 새 한 마리, 풀 한 포기도 함부로 살지 않는다.
자연은 함부로 된 것이 하나도 없고 함부로 살지도 않는다.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인간은 더 많은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산다. 주변의 사람들도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보면 나와 다른 뜻을 가진 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만의 삶의 이유와 목표가 있을 것이다.
김용범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교수. 1974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보허자』『김용범 시작집』『지천명의 바람』 등 12권의 시집과 소설창작집 1권, 동화집 2권, 에세이집 2권 등 출간. 2003년 한국시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디지털대학 문예창작과 석좌교수로 재임 중
국방일보 2006년 05월 03일
나 무
김윤성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황금색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다.
누가 나를 찾지 않는다.
또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결같은 망각(忘却)속에
나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다.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한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고 한다.
김윤성
詩 풀이
성인은 혼자 있어도 행동이 게으르지 않으며 칭찬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성인은 될 수 없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개성과 자존심을 지니고 살고 있다.
다른 이에게 자랑하거나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닌,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스스로에게 황홀을 느끼는 나무의 견고하고 의연한 자세처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아름답게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때로는 자신을 위로하는 삶의 자세도 필요함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김윤성
서울 출생. 1945 《백맥》에 ‘들국화’ 발표 등단. 시집『바다가 보이는 산길』『예감(豫感)』『애가(哀歌)』『자화상』『돌의 계절』『돌아가는 길』『저녁노을』등 출간 . 한국문학가협회상, 월탄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민족문학상 본상 등 수상. 예술원 회원, 한국문협부이사장, 월간『문학정신』주간 등 역임.
국방일보 2008년 12월 01일
조선의 소나무
김은숙
오천 년 역사가 소용돌이치던 날
송두리째 뽑혀와 차마 울지도 못한
옹이진 상처 가슴에 품은
조선의 소나무야
눈 감으면 잊을까 ! 마디마디 서러워
바람 불면 목울음 고향 뜰을 적시는
그 사랑 어찌 잊으리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보고픈 마음이사 간절한 기도인데
처연한 몸짓으로 태평무를 추었더냐
자욱한 송림 사이로
하늘 끝이 붉었네라
김은숙
詩 풀이
시인은 일본 에도공원에서 수천 그루 우리 소나무를 보는 순간, 말하는 식물이라면 엄마야! 엄마야! 하고 울며불며 떠났을 것을 생각하니 그보다 더 절박하고 억울했을 종군위안부들이 생각나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지나간 날의 옹이진 상처로 남은 역사, 그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교훈을 얻어야 한다.
사람들은 외국을 여행하면서 조국애를 배워 갖고 온다. 외국에서 만나는 우리 것이 반갑고, 눈에 익은 것이 좋아 정겹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많은 외국의 아름다운 곳을 둘러본 후에 한국이 새삼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한다. 국수주의자라서가 아닐 것이다.
김은숙
강원 삼척 출생. 1991년 《문학세계》시조부문 신인상 및 《시조문학》천료. 시조집『강물 위의 시간들』『네가 오기로 한 날에』『작은 나무이고 싶네』『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어머니의 바다』등 출간. 강원시조문학상, 나래시조문학상, 한국계관시인상 등 수상. 한국여성시조문학회 이사, 강원여성문학회, 강원문인협회회원.
국방일보 2006년 02월 15일
풍천장어
김인구
어느 강가 한 귀퉁이를 몽유하다
이 곳에 누웠을까
내장까지 말끔히 발리어진 몸매를
자랑이라도 하듯
소금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랑 누워 있다 아니 나를 향해 서 있다
몸을 지탱하는 중심축 뼈대까지 제거된
무척추증으로 벌건 숯불을 등에 지고
나를 바라보며 서 있다
어느 강기슭을 거슬러 올라가다
인간의 덫에 걸리었을까
축소된 세상으로 녀석을 교란시켰을 수족관에서
열닷새를 굶주리며 토해낸 세상살이
녀석이 살다 간 흔적이
뿌옇게 부유하는 공간에서
소주잔을 들어 녀석의 어느 한 생애
둥근 몽유의 고리를 끊는다
끊어준다.
김인구
詩 풀이
지금 화자는 풍천 장어를 앞에 놓고 그 풍천 장어가 화자의 앞까지 온 과정을 생각한다. 인간은 한 생명을 즐기며 먹고 있지만 그 한 생명이 살아온 과정은, 그렇게 녹녹하지가 않을 것이다.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어느 강기슭을 거슬러 올라가다/ 인간의 덫에 걸리었’고, 인간에게 잡힌 다음에도 ‘수족관에서 열닷새를 굶주리며 토해낸’ 녀석이 살다 간 흔적으로서 뿌옇게 부유하는 공간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녀석의 어느 한 생애 둥근 몽유의 고리를 끊는다/ 끊어준다’고 하여 인간과 장어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화자는 그것이 ‘옳다, 그르다’의 판단은 내리지 않는다. 다만 그 모습을 제시만 하고 있는, 사물의 이면을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김인구
전북 남원 출생. 1991년 《시와 의식》등단. 시집 『다시 꽃으로 태어나는 너에게』『신림동 연가』『아름다운 비밀』외 다수. (사)한국문인협회, 은평문인협회 회원.
국방일보 2006년 02월 20일
바람이 쉬어 가는 섬
김인숙
먼 바다 항해에 지친
바람이 쉴 수 있는 섬
거센 파도를 다둑이는
작은 섬이 되고 싶다
그 섬은 산림녹화 중
아직은 황량한 돌섬입니다
천지를 주유하던 바람이
세상이야기 들려주면
가만히 귀 기울이며
들꽃처럼 웃고 싶다
작지만 아름다운 섬
아직은 척박한 돌섬입니다
김인숙
詩 풀이
지금 화자는 자신이 바람이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섬이기를 꿈꾸고 있다. 그 바람은 항해에 지치기도 하고, 천지를 주유하기도 하던 바람이다. 그래서 세상이야기도 들려주면 들꽃처럼 가만히 웃으며 귀 기울여 주고 싶은, 거센 파도를 다둑이는 작지만 아름다룬 섬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황량한 돌섬이고, 척박한 돌섬이라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보이고 있다. 또한 지금 산림녹화 중이라고 희망을 보이고 있다. 언젠가는 숲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흐르는 숲이 되어 온갖 새가 지저귀는 낙원이 될 것이다.
김인숙
경기 김포 출생. 시조집『멀어지는 연습을 위해』『바람에게 띄운 연가』 출간. 나래시조문학상, 김포문학상 등 수상. (사)한국문인협회. (사)한국펜문학, 나래시조 회원. 시 쓰는 사람들 동인.
국방일보 2011년 08월 08일
연(蓮)밥
김인자
푸르디푸른 연잎 보듬어 감싸 안은
찹쌀과 대추와 밤 그 깊은 천연의 맛
아까워
먹지 못하고 부처님만 만났네
중생의 어리석음 묻어나는 푸른 향기
살며시 베어 물면 오도독 씹히는 건
깊은 혼
가슴에 담은 삼천 년의 미소였네
김인자
詩 풀이
또다시 연꽃이 피는 여름철이다. 흙탕물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을 보면서 부처는 말없이 손끝으로 연꽃을 가리켰고, 제자 가섭은 역시 말없이 미소 지음으로써 서로의 마음을 전했다. 이 때문에 생겨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관계는 아름답다.
이 작품의 화자는 그 푸르디푸른 연잎으로 감싸며 정성껏 만든 찰밥인 연밥을 보면서 아까워 차마 먹지는 못하고, 부처님을 생각한다. 둘째 수에 오면 그 연잎에서는 중생의 어리석음이 묻어난다고 한다.
‘중생의 어리석음 묻어나는 푸른 향기/살며시 베어 물면 오도독 씹히는 건/ 깊은 혼/ 가슴에 담은 삼천 년의 미소였네’라고 표현하고 있어 마치 흙탕물 속에서도 맑게 피는 연꽃처럼, 그 어리석은 중생의 향기일망정, 살며시 베어 물면 깊은 혼 가슴에 담은 삼천 년의 미소를 만난다는 것이다.
모든 중생의 어리석음도 아름답게 받아들이며 미소 짓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연밥 하나에서도 중생의 어리석음을 발견하고, 그럼에도 그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시인의 넉넉한 마음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김인자
경북 대구 출생. 시조문학 신인상 등단. 시조문학 공로상
(사)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 (사)한국문인협회회원. 현대여성작가협회원
아산시 외암짚풀문화제 문학의 밤 시화전 주최
국방일보 2009년 10월 19일
가은 역 들국화
김일연
바람 연풍 지나고 가을 성당 지나서
벼논이 지쳐가는 녹슨 철길 끝에는
마지막 눈물방울로 피어나는 연보라
굴곡 많은 생애는 비록 아닐지라도
저무는 금빛 속에 들려오는
나의 첼로,
어둠이 긴 활을 안고 너를 켜고 있으니
더 좋은 때 있으랴 우리 사랑하기에
짧은 추억 뒤에는 검고 긴 밤 오리니
더 이상 좋은 때 있으랴
우리 이별하기에
김일연
詩 풀이
보라색 들국화가 핀 철길가의 아름다운 가을날이 연상되는 작품이다. 살랑살랑 부는 가을바람, 성당이 있는 풍경을 지나 벼논을 지나 아득히 녹슨 철길이 보이는 곳에 보라색으로 핀 들국화, 그것을 화자는 “마지막 눈물방울로 피어나는 연보라”라 표현하고 있어 청순하면서도 애상한 느낌이 든다.
둘째 수에 오면 그것은 화자의 생의 비유로 나타난다. “어둠이 긴 활을 안고 너를 켜고 있으니”라고 하여 곧 다가올 어둠(늙음)이 있기에 “더 좋은 때 있으랴 우리 사랑하기에, 더 좋은 때 있으랴 우리 이별하기에”라고 하여 지금이 사랑하기에도, 이별하기에도 좋은 계절임을 말하고 있다.
김일연
대구 출생. 1980년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조집 『명창』『빈들의 집』 『서역 가는 길』『엎드려 별을 보다』『달집태우기』등 출간. 한국시조작품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04년 05월 25일
그대 푸른 바람소리
김정자
뻐꾸기 울음소리에
솔가지 사이로 일렁이는
그대 물결치는 머리칼
푸른 오월은
산등성이 무성한 잎새들을
맑은 웃음으로 흔들어대고
깃발로 나부끼는 자유의 바람은
구비치는 바다를 넘어
골짜기 맑은 물줄기에
눈부신 날개로 내려와 앉는다
낮은 데로 흐르는 세월
끝끝내 아름다운 인생임을 깨닫게 해준
그대에게 감사하며
이 아침
먼 산 봄새들이 다투어 노래하는
푸른 숲에서
내 아득한 그리움의 편지를 띄운다
김정자
詩 풀이
바람소리도, 초록빛 나뭇잎들의 흔들림도 가장 맑고 상쾌한 계절이 오월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산 속 뻐꾸기 소리 들려오고, 솔가지 사이로 물결치는 오월 머리칼의 아름다움과 무성한 잎새들을 흔들어 대며 웃는 산의 웃음소리. 이 작품에선 마냥 싱그러운 오월의 푸르름과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골짜기 맑은 물줄기에도 눈부신 날개처럼 살랑이며 내려와 앉는 바람, 물처럼 낮은 곳으로 세월은 흐르지만, 끝끝내 인생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계절에 화자는 감사한다.
산새들의 노래소리로 더욱 푸른 숲의 아침, 잊었던 사람에게, 싱그러운 자연에게, 이 아름다운 자연을 인간에게 선물로 준 신에게 '아득한 그리움의 편지'를 띄우는 화자여! 나도 이 푸르고 싱그러운 오월 아침엔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리움의 편지를 띄우리라, 띄우리라.
김정자
경남 통영 출생. 1990 《월간문학》에 평론 「金明淳, 그 사랑과 어둠의 思辨家」로 등단. 2011《창조문학》에 시 「콩나물 산조」로 신인상 등단. 시집 『모짜르트를 들을 수 없는 날들』『세상은 온통 아름다운 비딱 걸음』『멀수록 네 얼굴은 가깝고』『프리지어 꽃을 사고 싶었던 날』등과 소설『내 시간의 푸른 현』, 수필집『내 생에 아다지오 논 몰토』, 논문집 『한국근대소설의 문체론적 연구』『한국여성시조 연구』등 다수. 부산시문화상, 일맥문화대상, 한국여성문학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11년 12월 12일
죽림의 주춧돌 - 이인로
김종연
한림별곡 첫 구절에 이름이 오를 만큼
고려의 문신들에게 시문의 전범이 된 그
파한집*, 최초의 시화집 문학사에 새길 내고
하루살이 목숨처럼 생명은 기약 없고
무신난 날 선 칼끝 세상을 베고 베도
시심은 우주의 심연 고요하고 깊었다
용사를 즐겨 썼으나 모방에만 그치지 않고
뜻 풀고 심상 더해 점화*에 이르렀다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을 시작(詩作)의 틀로 삼고
도잠을 좇았으나 은일을 꿈꾸지 않고
세상과 마주서되 사물에 얽매임 없이
공명은 천명을 기다릴 일, 화귀거래사* 그의 삶
김종연
詩 풀이
*파한집: 이인로가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 비평문학서로도 가치가 높다.
*점화(點火): 옛사람의 시구나 의경을 들어 새롭게 고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해 내는 성공한 용사(用事).
*화귀거래사: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화운한 작품.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이나 이인로의 ‘화귀거래사’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거기에서 정신적 위안을 얻고자 했다.
고려중기 무신집권기의 문인 이인로는 호는 쌍명재였고, 문벌귀족의 가문 출신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정중부의 난을 피해 승려가 되기도 했으나 환속해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에 보직하며 중국의 죽림7현을 흠모한 죽림고회를 만들기도 했다. 최초의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을 저술, 한국문학사에 본격적인 비평문학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이인로를 노래한 이 작품은 최초의 시화집인 ‘파한집’을 만들어 시문의 전범이 됐다며 그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수에서는 도잠(도연명)을 좇아 도연명이 썼던 귀거래사를 모방하면서도 현실도피가 아닌 현실에서의 정신적 위안을 찾고자 한 그를 ‘도잠을 좇았으나 은일을 꿈꾸지 않고 / 세상과 마주서되 사물에 얽매임 없이 / 공명은 천명을 기다릴 일, 화귀거래사 그의 삶’이라며 옛 문인의 삶을 기리고 있다.
김종연
경남 합천 출생. 2010년 나래시조 신인상. 작품 「가덕도 로슬린」「재봉사 이희정의 꿈」「무국 끓이는 아침」「줌인」등
국방일보 2005년 01월 24일
동화댐 망향비 앞에서
김종원
눈 감으면 떠오르는
동구 밖 느티나무
기와집 뒤란에는
장독들 모여 앉고
지붕엔
박넝쿨마다
주렁주렁 열려라
눈 뜨면 시퍼런 물
물오리만 한가롭고
철없는 낚싯꾼들
태연히 앉았으니
백운천(白雲川)
드렝이 마을
어디 가서 찾을거나
어머니 살강 닦고
할머니 길쌈하던
정겹던 고향 집은
어디에 숨어 있나
물 위에
비친 달 보며
그 시절을 그리네
*드렝이 마을 : 전북 장수군 번암면 동화댐에 수몰된 마을
김종원
詩 풀이
지금 화자는 물 속에 잠긴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고향, 동구 밖 느티나무와 뒤란의 장독들과 지붕의 박넝쿨마다 주렁주렁 열리던 박들의 모습 속에 존재하던 순박하고 정겹던 고향집은 물 밑에 깊이 가라앉아 숨어 있고, 화자는 물 위에 비친 달을 보며 그 밑에 가라앉아 있을 옛날의 고향을 추억하고 있다. 화자의 삶의 터전이었고, 정신적 안식처인 고향을 상실한 허전함과 안타까움을 나타낸 작품이다.
김종원
전북 장수 출생. 1973년 《청야》시 ‘거울’ 추천. 1996년 《월간경향》수필 ‘비단 하니씨 거적 자손’ 추천. 1997년 《시조생활》 ‘광주풀이’ 신인상 등단. 시집 『그대 마음밭에 사랑 씨앗 심은 뜻은』『당신을 알고부터』『청매실 따는 날』 『동해로 오렴』등 출간. 강서문학상, 한국참여문학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08년 11월 10일
우주에의 정관(靜觀)
김주석
우주는 동심원
정 중앙에 나는 섰다
그것은 마치 우물
던져지는 돌과 같다
그렇게 파문이 된다
수억 리를 울리는.
우주는 인간의 눈
동공 속엔 내가 섰다
그것은 흡사 지문
에워싸는 숙명이다
그처럼 빛이 퍼진다
수억 년을 알리는.
김주석
詩 풀이
인간은 자기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산다. 때문에 ‘우주는 동심원/ 정 중앙에 나는 섰다/ 우주는 인간의 눈/ 동공 속엔 내가 섰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자신이고, 또한 그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때문에 나로 하여 세상 속으로 파문은 번져나고, 나로 하여 세상 속으로 빛도 퍼져 나간다.
위의 시에서처럼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때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주변도 사랑하게 된다. 지나친 자만이나 지나친 비굴을 피하여 중용의 미덕을 지니며 진정한 자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요즘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을 보면서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좀더 깊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적어도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수억 개의 정자들 중에서 선택된 것이다. 그렇게 힘든 관문을 통과해 태어나서, 한 때 사는 것이 힘들다고 자살로 마감하는 것은 우주의 질서에 대한, 신에 대한, 자신의 생명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죽을 정도의 각오라면 더 멋있게 살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자기가 선택한 방향으로 책임지고 끌고 갈 줄 아는 긍정적이고 현명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김주석
경기도 여주 출생. 세종숭모제전기념 전국시조백일장 장원(1990),『동양문학』, 『현대시조』 신인상, 『시조문학』 천료. 2005년 문예진흥기금 신진예술가지원 받음. 시집『배추 속의 고갱이』
국방일보 2004.년 07월 12일
남도 가는 길
김 준
금만경 뒤로 하고 정이 앞서 가네
한 자락 청산이 기우뚱 춤을 추네
가로수 행렬을 타고 파도로 길을 넘네
삼복 허허롭다 비껴간 자리마다
은혜의 빛을 받아 저리도 자족한 삶
칠백 리 설레는 길이 초록으로 나를 잡네
외진골 초옥마다 바람 자는 저 물소리
천심 강심 불러놓고 새소리 돌을 쪼네
저 건너 설레는 놀이 나를 앞서 지르네
김 준
詩 풀이
‘남도에 가는 길'은 푸른 여름의 길이다. 정이 앞서 달려가는 길, 청산도 즐거운가 기우뚱 춤을 추고, 가로수는 파도처럼 길을 넘는 즐거운 여행길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화자는 즐거운 여행길에 올라 남도로 가고 있는 것이다. 허허로움을 달래며 자족할 줄 아는 삶, 그러한 가운데 온통 초록으로 물결지는 칠백리 길이 화자를 설레게 한다. 초가집들이 있는 평화로운 마을은 바람도 없는 고요한 물소리와 새소리만 들릴 뿐이다. 또한 하루가 저물어 설레는 놀이 나를 질러 앞서 가고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하루해가 끝나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작품은 남도 칠백 리를 가면서 보고 느낀 여행의 설레임과 푸르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경을 보면서 시인의 마음도 고요하고 평화롭고 한가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김 준
전북 정읍 출생. 문학박사. 1961년 ≪시조문학≫ 추천 완료 등단. 시집 『고향에서 마신 술』『석우시조전집』 평설집 『시인따라 시조따라』출간. 가람문학상, 동백문학대상, 황산시조문학상, 월하문학상 등 수상. 한국시조시인협회장 역임. 서울여대교수 역임.
국방일보 2008년 10월 27일
역전 번개시장
김진광
새벽 6시에서 8시 사이 매일 그맘때
바다가 손수레를 끌고 들어온다
살아서 마구 펄떡펄떡 뛰는 놈들은
연신 사람들에게 바다의 말을 한다
사람들도 어둠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말로 무어라고 떠들어댄다
삶에 숨이 차 바다 위로 솟구쳐 오르다 ‘
그물에 아가미가 걸린 어부들의 아침해를
누군가 어시장 고기덕장에 걸어놓고 있다
여인들의 재빠른 칼질에 어둠이 잘려나가고
사람들은 햇덩이를 하나씩 들고 돌아간다
새벽 6시에서 8시 사이 잠시지만
삼척 역전 번개시장에서는 고기도 사람도
살아서 마구 펄떡펄떡 뛰는 바다의 말을 한다.
김진광
詩 풀이
이 시에서 보면 새벽 바닷가 어시장풍경이 싱싱하고 선명하게 나타난다. 새벽바다 어망에서 건져 올려진 펄떡펄떡 뛰는 생선들을 거래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역시 그렇게 펄떡펄떡 살아뛰는 것처럼 느껴져 생동감이 있다. 싱그러운 새벽 동해의 아침해가 솟아오를 무렵의 모습이다. ‘여인들의 재빠른 칼질에 어둠이 잘려나가고’ 아침 어시장에 가 그 싱싱한 생선, 동해 햇덩이를 하나씩 들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역시 살아서 펄떡펄떡 뛰고 있다. ‘새벽 6시에서 8시 사이 잠시지만/ 삼척 역전 번개시장에서는 고기도 사람도/ 살아서 마구 펄떡펄떡 뛰는 바다의 말을 한다./고 하여 독자에게 힘차게 살아서 파도치는 싱싱한 삼척바다와 삼척 역전 어시장의 풍경을 생동감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 시를 읽는 독자에게 그들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숨소리가 전해지는 듯한, 동해처럼 푸르고 싱싱한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을 주는 좋은 작품이다.
김진광
강원 삼척 출생. 시집『바람개비』『시루뫼마실이야기』『물새는 이쁜 발로 시를 쓴다』『벽은 가슴에 박힌 못을 사랑으로 만든다』『참매미는 참말만 한다』『모시나비』등 출간. 관동문학본상, 월인문학상, 이육사문학상, 강원문학상, 강원펜문학상 등 수상.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강원지부 이사, 한국문인협회 삼척지부장, 관동문학회 회원, 두타문학회 회장 역임.
국방일보 2006년 11월 07일
담쟁이 덩굴
김진길
길이 막혔다고 불평하지 말라
여기 고독의 벽 아니면 나서지 않는
유별난 생애 앞에서는 그 조차도 사치다
기침소리 한 방에 무너져 내릴 듯한
돌담 위 켜켜이 쌓인 침묵의 계단을
담쟁이, 자일도 없이 맨손으로 오른다
낙상의 순간들을 안으로 도닥이며
점자 벽을 읽어가는 부르튼 손바닥
때로는 이슬 한 방울도 감당 못 할 무게다
등에 진 세상 하나 발그레 타올라도
벽이 높아지면 그만큼만 더 오를 뿐
준법의 경계를 딛고 월담하지 않는다
김진길
詩 풀이
길 없는 길을 만들면서 가는 것이 어디 담쟁이 덩굴뿐이랴.
화자는 이 작품에서 ‘길이 막혔다고 불평하지 말라/ 여기 고독의 벽 아니면 나서지 않는/ 유별난 생애 앞에서는 그 조차도 사치다’라며 담이 있어야만, 기댈 것이 있어야만 비로소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의 고독한 생을 말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담쟁이의 모습을 ‘자일도 없이 맨손’으로 오르고 있다고 화자는 안쓰러워하고 있다. 넷째 수에서는 ‘벽이 높아지면 그만큼만 더 오를 뿐/ 준법의 경계를 딛고 월담하지 않는다’고 하여 분명한 자아인식과 자기통제의 담쟁이덩굴을 찬양하고 있는 감정이입법의 작품이다. 우리는 자신이 가는 길이 조금만 힘들어도, 조금만 길이 막혀도 투덜대지는 않는지, 자신을 한 번 돌아볼 필요를 느끼는 시이다. 담쟁이덩굴처럼 고독해도, 힘들어도 자신의 길을 만들면서 분수를 알고 책임감과 준법성을 지니면서 살아가는 인생은 분명 가을날 단풍든 담쟁이덩굴보다도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김진길(
강원 영월 출생. 2003년 ≪시조문학≫ 신인상. 200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집시』『은하를 걷다』『밤톨 줍기』등 출간. (사)한국문인협회, (사)한국시조시인협회, 애지문학회 회원.
국방일보 2009년 12월 28일
고향에게
김차순
붉은,
고요가 흐른다
탯줄의 기억 아득한
물빛노을 벼리고 달려온 별무리 가득
만삭의 배를 터뜨리며 차오르는
합포만*
어미가 된 아이가 팔매질한 물수제비
와락와락 쏟아놓은 봄꽃 엽서로 건너오면
팽팽한 낯선 하루의 꿈의 겨눈다
꽃 사월!
기억의 저편을 돌려세운 풀․ 꽃․ 별․ 달
노을 길 술래 잡이
저 홀로 떠다니던
등불 켠 불씨로 남은
아, 환한 날
환한 날
*합포만 : 경남 마산의 옛 이름
김차순
詩 풀이
시인은 ‘탯줄의 기억 아득한’ 고향을 노래하고 있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정겹고 늘 그리운 곳이다. 어렸을 때를 회상하며 지금은 ‘어미가 된 아이’가 물수제비를 뜨며 고향을 그리고 있다. 그곳은 사시사철 늘 봄이며 환한 ‘꽃 사월’이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 흐르는 고향은 ‘풀,꽃,별,달’이 있는 술래 잡이로 즐겁던 곳이다. 고향은 늘 우리들에게 환한 웃음을 주는 포근하고 따뜻한 곳이다.
김차순
경남 마산 출생. 2001년 《시조문학》으로 등단. (사)한국시조시인협회, 경남시조시인협회, 마산문인협회, 나래시조, 오늘의 시조 회원.
국방일보 2008년 09월 29일
도계
김태수
밤하늘의 별들이 모두
지상으로 소풍 온 걸까.
북극성, 작은곰, 사자, 고니
견우, 독수리, 남쪽물고기...
늦은 밤 통리고개에서 보면
도계는 송이송이 영롱한
별들의 세상이다.
형형색색 찬란한
빛의 물결에
폐허가 된 사택도 사라지고
저탄장도 자취를 감춘다
밤하늘보다 더 칠흑 같은
막장에서 별빛을 찾아
온몸에 피멍 들도록
어둠을 캐내던 광부들이
깊이 잠든 시각
도계는 광부들의 꿈으로 피어난
별들의 천국이다.
김태수
詩 풀이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은 일제강점기에 석탄생산지로 개발되었고 현재는 우리나라 최대 석탄생산지이다. 통리고개에서 내려다보면 까마득히 보이는 도계의 밤은 마치 밤하늘의 총총한 별떨기들이 지상으로 소풍을 온 듯 송이송이 영롱한 별들의 세상이라고 한다. 도계의 아름다운 불빛은 밤하늘의 그 많은 별자리처럼 형형색색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된 옛 광부들이 쓰던 사택도, 가루탄을 쌓아두는 저탄장도 자취를 감추고 빛나는 별들만이 반짝인다.‘밤하늘보다 더 칠흑 같은/ 막장에서 별빛을 찾아/ 온몸에 피멍 들도록/ 어둠을 캐내던 광부들’의 그 고단한 노력이 있어 그들이 잠든 시각, 도계는 광부들의 꿈으로 피어난 별들의 천국이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공기가 맑아 유난히 밤하늘의 별들이 많이 보이는 강원도 산골, 탄광촌의 밤이 건강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
김태수
강원도 삼척 출생. 시집『그대는 나더러 눈송이처럼 살라지만』『사람의 길』『흐르지 않는 강』(3인 공저) 등 출간. 월인문학상, 한국농촌문학상 등 수상. 현재 강원작가회의, 동해삼척작가 동인. 삼척박물관장 재직
국방일보 2008년 06월 16일
딱따구리
김호길
내 영혼의 수풀 속에 딱따구리 한 마리 산다
피로와 나태가 감겨
혼곤해진 순간이면
딱,
딱,
딱,
부리로 쪼아
번쩍
불침을 놓는다
김호길
詩 풀이
딱따구리가 나무에 앉아 나무를 쪼듯 내 영혼이 '피로와 나태가 감겨 혼곤해진 순간이면 딱따구리처럼 영혼을 쪼는 것은 늘 깨어있는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항상 깨어있기를 바라는 정신 때문에, 생활에서의 긴장과 시적 긴장을 둘 다 늦추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늘 깨어있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이 이 짧은 단시조 한 작품 속에 그대로 살아난다. 그리고 행배열도 재미있게 하고 있다. '딱,/딱,/딱'으로 처리된 종장의 행갈이는 청각적 시어에다가 시각적 배열의 효과를 확보한 품격 높은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 이용되고 있는데, 모든 작품에 이러한 배행법이 맞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는 이미지가 적절하게 잘 살아나고 있어 내용의 신선함과 함께 작품 배열 또한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김호길
경남 사천 출생. 시집『하늘 환상곡』『수정 목마름』『절정의 꽃』등 출간. 세계시조사랑협회 명예회장 역임. 현재 (사)한국문인협회, (사)한국시조시인협회, (사)한국펜클럽, 미주한국문인협회, 한국육군항공협회 회원.
국방일보 2004년 02월 03일
명중시켜라
김홍일
화살이 되어라
바람을 일으키며 과녁 한가운데를 꿰뚫는
우레 같은 갈채가 되어라
삶은 이미
시위 떠난 팽팽한 가속도,
절정을 치달리는 긴박감으로
더욱 향기로운 음악이다
현을 당겨라
터질 듯 아름다운 음률 속으로
네 모든 춤을 던져라
먹이 쫓는
맹수의 눈빛처럼
바람 앞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무게가 되어라
김흥일
詩 풀이
우리의 삶은 이미 태어나면서 목표점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인지도 모른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 날아가 목표점에 꽂힐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삶의 목표를 잃고 허둥대기도 하고, 방향감각을 잃고 삶을 헤매기도 한다.
이 시에서는 삶의 목표를 향해, 삶의 절정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또 일으키며 가는 화살이야 말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음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아름답다고 보는 것이다. 또 그러한 목표를 위해 춤추듯 모든 정열을 쏟고, 목표물을 결코 놓치지 않는 맹수의 눈빛처럼 바람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굳건한 삶의 자세가 되기를 권하고 있다. <2004년 2월 3일>
김홍일
경북 상주 출생. 1992년 시집 『내 책상 옆의 휴지통』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내 책상 옆의 휴지통』 『사랑고파 우는 새야』『서울의 비둘기는 쓰레기더미에 둥지를 튼다』『아버지, 우리 도둑질 딱 한 번만 더해요』『길 위의 길』『세 번째 계단에 떨어져 있는 슬픔 하나』『얼큰한 풍자』『농담처럼』등 출간. 『정신과 문학』작품상 수상.
국방일보 2006년 09월 12일
나뭇잎과 연못
남진원
나뭇잎들이 물위에 사뿐히 내려앉았어.
아아무 소리가 없이
바람이 무엇을 했느냐구?
가만히 나무 뒤에 숨어 구경만 했대
연못이 나뭇잎을 가만히 놓아두고
나뭇잎도 연못을 가만히 놓아두고
서로 틈을 두고 편안하게 있는 걸 구경만 했대.
남진원
詩 풀이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란 도교철학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우리가 길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길이 될 수 없고, 이름이라 하는 것도 항상 이름이 될 수 없다는 도교의 철학. 무위자연설을 주장하는 도교철학이 이 작품의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도교에서 주장하는 가장 상위의 善은 <上善藥水>이다. 즉, 가장 높은 선은 물 흐름과 같다는 뜻이다. 인위가 전혀 개입되지 않아 물 흐름과 같이 자연스러워 막힘이 없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보는 것이다. 누구를 시비하지도, 누구에게도 간섭받지도 않는 삶, 자연스럽게 생겼다가 자연스럽게 스러지는 삶이 곧 도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선, 최고의 삶이다. 이 작품에서 나뭇잎과 연못의 관계가 그러하다. 서로의 삶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그저 조용한 관찰과 포용으로 받아주며 서로가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남진원
강원 정선 출생. 《월간문학》 시조 신인상, 1983년 《강원일보》 시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통스토이 태교 동시』『장자의 하늘』과 저서『현대시조 창작법』등 출간. 계몽사 어린이문학상, 강원아동문학상, 강원도문화상, 관동문학상 등 수상. 강원아동문학회 부회장, 문학동해안시대연구소 소장 역임.
국방일보 2005년 03월 21일
미시령고개
노선관
굽이굽이 오르는 길
오르라고 있는 길
지나온 세월만큼
힘이 부친 이 길을
오늘은 마음 다 덜고
정(情)으로만 오른다
산도 읽고 숲도 보며
새소리도 들으며
물소리 맑은 골에
발도 잠시 담가 보며
야생화 진한 향기를
가슴 풀고 마주 서며
오를 듯 떨어질 듯
땀을 한 줌 움켜쥐고
아찔한 벼랑 끝에
매달린 저 나무들
나무야 손에 쥔 땀을
식힐 줄도 알아라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졌다 다시 숨는
저 길이 갈 길인가
아닐세 이 쪽일세
구름이 바람 따르며
한 수 짚어 가르친다
노선관
詩 풀이
서울에서 속초로 가는 길, 속초에서 서울로 오는 길 설악산의 유명한 언덕길이 미시령이다. 미시령에 서면 동해바다와 속초시내가 훤하게 내려다 보인다. 그 미시령에서 화자는 인생을 생각하고 있다. 힘들게 오르는 길이 인생길이라면, 그것은 오르라고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동안 미시령(인생의 정상)까지 오르느라 힘든 길이라면 이제는 힘에 부친 욕망 등은 모두 덜고, 자연을 즐기는 여유를 가지고 자연이 가르쳐주는 지혜로 인생을 살아가야겠다는 것이다.
노선관
충남 서산 출생. 1999년 《문학공간》으로 등단. 시집 『산비둘기』『천수만 이야기』 외 다수 출간. 미래, 황인부락 동인화동. (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방일보 2005년 09월 26일
세여울
노인숙
여울져 굽이치며 나래 펴고 너울너울
물소리에 몸 씻으며 마른 바람 설레누나
여름내 모래를 달구던 불길조차 다스리고
갈대들 흐느끼듯 속삭이는 노래 가락
세월의 모래 벌에 나지막이 스며들고
햇살에 잎새 떨구며 줄지어 선 그림자
찬 빗방울 맞으며 강바닥에 누운 돌 틈
야윈 몸 뒤채이다 몸져누운 풀잎 사이
시리게 머언 하늘 끝 까마득히 날아가라
백제와 신라 사이 고구려의 물줄기가
산과 산 이어져서 퍼덕이며 깃든 골에
하루 또 하루를 걸어 천 년에 닿은 여울
*충청북도 단양군 삼탄리에 있는 여울물
노인숙
詩 풀이
작은 물줄기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세여울, 여름내 모래를 달구던 불길조차 다스리며 조용히 가을을 흐르고 있다. 여울가엔 갈대들이 흐느끼듯 속삭이는 노래 가락이 세월의 모래 벌에 나지막이 스며드는 조용한 가을, 그림자는 길게 늘어지고 있다. 가을의 여울가의 모습이 눈에 보이듯 이미지가 잘 묘사되고 있다. 백제와 신라시대, 아니 그 이전부터 흘러오던 고구려의 물줄기, 하루하루 쌓여 천 년 이상을 조용히 흐르는 여울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노인숙
충북 00 출생. 2002년 《고불맹사성기념 전국시조백일장》일반부 장원. 2002년 《시조문학》신인상 등단. 시집 『희명의 노래』와 논문집 『면암 최익현 한시 연구』 『한국시가연구』등 출간. (사)한국시조시인협회, 씨얼문학회, 여강시가회 회원
국방일보 2010년 09월 30일
정원에서
노중석
두 손을 뻗쳐 들고 먼 하늘 내밀던 가지
물무늬 하나 없이 바람 속을 휘젓더니
한 송이 싱싱한 꽃을 낚아 올려 보이고,
꽃잎을 창으로 열고 내다보는 눈이 있어
주름진 조약돌 곤한 잠에 빠져들고
바람만 혼자 나와서 가지 사일 누빌 때,
기진한 짐승처럼 햇빛 아래 누운 연못
한 마리 소금쟁이 재빨리 달아나고
아득한 태초의 넋이 뒤척이는 물빛 속
노중석
詩 풀이
고요한 정원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작품이다. 화자는 정원의 조용한 움직임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다.
첫 수에서는 하늘로 가지를 내밀던 나무가 바람 속을 휘젓고 드디어 꽃을 피우는 싱싱한 장면을, 둘째 수에서는 '꽃잎을 창으로 열고' 내다보는 눈이 있다고 한다. 꽃잎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신의 눈, 또는 하늘의 눈, 또는 땅의 눈일 수도 있다. 꽃잎을 창으로 하여 세상을 내다보는 그 눈에는 '주름진 조약돌 곤한 잠에 빠져들고’의 정적과 그 사이에 바람은 가지 사이를 누비며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셋째 수는 기진한 짐승처럼 햇빛 아래 조용히 누운 연못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조용한 가운데 ‘한 마리 소금쟁이 재빨리 달아나고 / 아득한 태초의 넋이 뒤척이는 물빛 속’이라고 표현해 아주 조용한 것 같으면서도 움직임이 있는 ‘정중동(靜中動)’을 말하고 있다.
조용한 가운데 끊임없이 활발하게 생명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평화로움과 여유가 존재하는 작품이다.
노중석
경북 김천 출행. 1983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조집『비사벌』『하늘다람쥐』『꿈틀대는 적막』등 출간. 1993년 금복문화상, 2011년 이호우문학상등 수상.
국방일보 2006년 04월 10일
가곡리(佳谷里)에서
리강룡
하늘 그리운 사람들이 / 산새, 멧새 데불고 산다.
동해 속살 그 빛 같은 / 물빛 투명한 풍경 속에
순수로 마름질한 옷을 / 편히 입은 사람이 산다.
별 보기만 가르쳐 온 / 뉘우침의 십여 년을
꽁지 깃 하얀 새 / 부리 끝에 물려 보내고
무채색 / 도화지 한 장 / 사서 들고 앉는다.
때때로 적막을 우는 / 먼 산꿩 / 풀빛 목청 따라
멧미나리 파란 눈이 / 봄을 여는 그 소리에
하던 일 / 일손을 놓고 / 귀를 높이 세운다.
리강룡
詩 풀이
가곡리라는 곳에는 멧새들을 데불고, 물빛 투명한 풍경 속에 순수로 마름질한 옷을 편히 입은 사람이 산다고 한다. 얼마나 세속에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그들의 마음은 아이들의 마음 마냥 무채색의 도화지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람들이 사는 산골에 ‘때때로 적막을 우는/ 먼 산꿩’이 있고, 멧미나리 파란 눈이 봄을 열고 있다. 그리하여 화자는 ‘하던 일/ 일손을 놓고’ 봄이 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높이 세운다고 한다. 가곡리라는 한 순박하고 조용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오는 평화로운 봄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영화 ‘동막골 사람들’의 그 순박한 모습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리강룡
경북 성주 출생. 한국교원대 대학원.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한지창에 고인 달빛』 등과 수필집, 평론집, 논문집 등 다수 출간. 나래시조문학상, 현대시조문학상 등 수상. 나래시조시인협회장, 경북외국어고등학교장 역임.
국방일보 2008년 07월 21일
비비추에 관한 연상
문무학
만약에 네가 풀이 아니고 새라면
네 가는 울음소리는 분명 비비추 비비추
그렇게 울고 말거다 비비추 비비추.
그러나 너는 울 수 없어서 울 수가 없어서
꽃대궁 길게 뽑아 연보랏빛 종을 달고
비비추 그 소리로 한번 떨고 싶은 게다 비비추.
그래 네가 비비추 비비추 그렇게 떨면서
눈물나게 연한 보랏빛 그 종을 흔들면
잊었던 얼굴 하나가 눈 비비며 다가선다.
문무학
詩 풀이
비비추는 백합과의 다년생풀로서 옥잠화와 비슷하며, 7-8월에 꽃을 피운다. 연보라색 꽃을 달고 있는 비비추.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정말 새 이름 같은 느낌도 들었다. 연약한 대궁에 꽃을 피워 올린 모습, 여름 소나기라도 맞은 후면 청초함을 더한다. 1연에서 화자는 ‘만약에 네가 풀이 아니고 새라면 비비추 비비추’하고 울었을 것이라고 한다. 보통 우리는 울음을 따서 새 이름을 짓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2연에 오면 새로서 울 수 없는 비비추의 현실에서 ‘꽃대궁 길게 뽑아 연보랏빛 종을 달고/ 비비추 그 소리로 한 번 떨고 싶은 게다 비비추’라고 하여 꽃이 몸을 흔들때면 꽃끼리 부딪치는 모습이 ‘비비추’임을, 또 종모양의 꽃이라 종처럼 떨며 울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화자는 상상한다. 그렇게 연약하게 흔들리는 꽃의 모습이 3연에 오면 ‘잊었던 얼굴 하나가 눈 비비며 다가선다’고 하여 그리운 이의 모습으로 환치된다. 연약한 여인같이 생긴 비비추를 보면서 그리운 이의 모습을 연상하고 있는 것이다.
문무학
경북 고령 출생. 대구대 대학원 문학박사. 1982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가을거문고』『낱말』『풀을 읽다』『달과 늪』『벙어리 뻐꾸기』『눈물은 일어선다』『설사 슬픔이거나 절망이더라도』등과 저서『예술이 약이다』『예술의 임무』등 다수 출간. 윤동주문학상, 이호우시조문학상 등 수상. 현재 대구 예총 회장.
국방일보 2004년 06월 21일
저 산에
민병도
스스로 물러앉아 그리운 이름이 된
산에, 저 산에 향기 나는 사람 있었네
수없이 나를 깨워 준 늘푸른 사람 있었네
법구경을 펼쳐두고 비에 젖은 저 빈 산에
휘젓고 간 바람처럼 가슴 아픈 사람 있었네
드러난 상처가 고운, 눈이 먼 사람 있었네
만나서 빛이 되고 돌아서서 길이 되는,
날마다 내 곁을 떠나가는 산에 저 산 안에
영혼의 맑은 노래로 창을 내는 사람 있었네
민병도
詩 풀이
산은 사철 변화를 가지면서도 늘 그 자리에 의젓하게 앉아 있다. 그곳은 스스로 물러앉을 줄 아는 그리움으로 남는 향기로운 사람이 있는 곳, 수없이 나를 깨워 준 늘푸른 사람이 있는 곳이다. 휘젓고 간 바람처럼 가슴 아픈 사람이 있는 곳, 드러난 상처가 고운, 눈이 먼 사람이 있는 곳, 영혼의 맑은 노래로 창을 내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언제보아도 푸른 산은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간직하며 법구경처럼 자비롭게 앉아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나무들을 키우고, 새를 키우며 향기롭고, 푸르고 맑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아픔도 감싸안고 상처도 포용하며 '만나서 빛이 되고 돌아서서 길이 되는' 산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산은 실제의 산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상징일 수도 있다.
민병도
경북 청도 출생. 영남대 미술대학, 대학원 졸업. 1976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갈 수 없는 고독』 『슬픔의 상류』『들풀』『내 안의 빈집』등과 수필집 『고독에의 초대』등, 시화집『매화 홀로 지다』등, 평론집『형식의 해방공간, 그 실험의지』등 출간. 한국시조작품상, 정운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현재 한국문인협회시조분과 회장.
국방일보 2006년 01월 16일
하늘재 눈 내리다
민병찬
어둔 밤 불빛 속에 홀연한 왈츠 리듬
너울너울 쏟아지며 말씀의 저자 서느니
길 떠난 장꾼 모이듯 들에 길에 하얀 손님.
사랑의 빙점(氷點)에서 얼지 않은 꽃잎으로
이 겨울 황사에도 결지 않은 저음(低音)으로
오소서 첫사랑 약속인양 설레이는 몸짓으로.
내리는 첫눈으로 깊은 밤이 눈을 뜨듯
적막한 영혼의 숲에 하얀 길을 내는 불빛
포개며 더욱 포개며 쌓여지는 말씀의 탑.
민병찬
詩 풀이
화자는 문경새재의 하늘재에서 첫눈이 내리는 모습과 감회를 말하고 있다. 밤하늘에 내리는 눈, 불빛 속에 바라보는 눈은 꼭 왈츠의 리듬을 타고 춤을 추는 모습이다. 그 너울거리는 모습을 말씀의 저자가 서고 장꾼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화자는 보고 있다. 눈 내리는 모습을 꽃잎으로, 저음으로 첫사랑 약속인양 설레이는 몸짓으로 표현하여 첫눈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적막한 영혼의 숲에 하얀 길을 내는 불빛’이라고 하여 첫눈 내리는 날의 포근한 대화의 말씀들이 쌓여짐을 얘기하고 있다.
민병찬
경북 문경 출생. 1986년 ≪시조문학≫ 등단. 시집『사모곡』『가을비 그 뒤』『산 좋고 물빛 고와서』『백자리의 푸른 일기』등 출간. 나래시조문학상 등 수상. 나래시조문학회장 역임.
국방일보 2008년 12월 08일
마음의 뒤란
박권숙
그리움도 맑은 때가 앉을 법한 마흔 고개
단선행 기억 저편 덜컹이는 문죽리는
여섯 살 눈발에 갇혀 아직 넘지 못합니다
깡마른 어둠의 뼈로 동향바지 가난 지고
첫새벽 무를 써는 희디흰 초가 한 채
문풍지 떨리는 귀로 빛을 받아 모읍니다
뒤란 빈 외지래기에 사투리로 쌓이던 눈
때로 꿈의 밑바닥이 환해진 겨울이면
가슴엔 아아, 고향이란 뒷마당이 생깁니다
박권숙
詩 풀이
고향은 인격이 태어나고 자라고 또 일반적으로 계속 집으로 가지고 있는 삶의 영역이다. 고향은 그에게서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등과 같은 가족 내에서의 친밀한 인간관계와 함께 시작된다. ‘그리움도 맑은 때가 앉을 만한 마흔 고개’라고 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잊힐 만한 40대 임에도 가고 오지 않는 단선행의 기억 저편, 여섯 살의 문죽리 유년에 갇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고향에 대한 기억은 둘째 수에 오면 ‘동향바지 가난 지고/첫새벽 무를 써는 초가집’으로 나타난다. 깡마른 모습으로 무를 써는 이는 어머니일까, 아버지일까?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화자의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리움으로 전율됨을 ‘문풍지 떨리는 귀로’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면의 소리를 빛으로 받아 모으고 있다고 한다.
어린 날의 가난하지만 단란한 희디흰 초가의 모습을 귀로 모은다고 하여 시각을 청각화시키고 있으며, 고향집 뒤란처럼 늘 마음 깊은 곳, 즉 마음의 뒤란에 남아 있는 곳이 바로 고향임을 이 작품에서는 말하고 있다.
박권숙
경남 양산 출생. 1991년 중앙시조지상백일장 연말 장원 등단. 시조집『겨울 묵시록』『객토』『시간의 꽃』『홀씨들의 먼 길』『그리운 간이역』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한국시조작품상 ,최계락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올해의 좋은 작품집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11년 02월 14일
철마
박근모
백년을
하루같이
레일을 지치면서
내일을 여는 발길
재를 넘어 닫는 눈길
끝없는
평행선 위에
꿈을 안고 나는 철마
박근모
詩 풀이
철길을 따라 달리는 기차는 철로 만든 말, 철마다.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레일 위를 달려가는 기차는 백 년 전과 변함이 없다.
인간의 지혜와 문명의 발달에 의해 속도와 편안함이 더해졌겠지만 두 레일, 평행선을 달리는 모습에는 변함이 없다.
녹색 생활의 실천을 위해, 기차를 타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하지 않는다는 장점과 큰 사고가 없다면 정체됨이 거의 없어 정확한 약속 시간을 지킬 수 있다.
언제나 변함없이 평행선 위로 내일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 편안함과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국민들의 사랑을 더욱 많이 받아야할 탈거리라 생각된다.
박근모
강원 춘천 출생. 2000년 《문학공간》 등단. 시집 『봄내골 가는 길』『춘화가향 사랑가』『아름슬픔 금강산』『못다한 7말의 에움길』등 출간. 문학공간상 본상, 세종문화예술대상 문학상 등 수상. (사)한국예술문화연구원 부이사장, 한국공간시인연대 고문
국방일보 2011년 07월 25일
책
박기섭
아버지, 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
어머니, 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
그 밖의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
건성으로 읽었던가 아버지, 라는 책
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
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
면지가 찢긴 줄은 여태껏 몰랐구나
목차마저 희미해진 어머니, 라는 책
거덜난 책등을 따라 소금쩍이 일었다
밑줄 친 곳일수록 목숨의 때는 남아
보풀이 일 만큼은 일다가 잦아지고
허기진 생의 그믐에 실밥이 다 터진 책
박기섭
詩 풀이
아버지, 어머니를 책에 비유했다. 아버지는 ‘표지가 울퉁불퉁했다’고 한다. 어머니란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조금 거칠고, 어머니는 늘 눈물겨운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지금 화자는 둘째 수에서는 거칠기 때문에 건성으로 대충 읽었던 아버지, 늘 강하고 거친 존재로만 인식했기에 무심했던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성찰하며 그리움을 갖는다. 셋째 수에 오면 늘 젖어있던 어머니기에 면지가 찢기고 목차마저 희미해지고 거덜난 책, 그러한 어머니의 존재와 은혜를 성찰하고, 그 은혜를 모른 채 잊고 살아온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 인생의 중요한 대목에서는 더 많은 고생과 은혜가 들어 있음을 화자는 ‘밑줄 친 곳일수록 목숨의 때는 남아/ 보풀이 일 만큼은 일다가 잦아지고’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늙고 지치고 자식들에게 줄 것은 다 준 상태의 아버지, 어머니를 ‘허기진 생의 그믐에 실밥이 다 터진 책’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부모를 책에다 비유해 비유의 참신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며,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나 은혜라는 말은 한 마디도 들어가 있지 않으면서도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은혜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작품이다.
박기섭
대구 달성 출생. 1980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키 작은 나귀 타고』『묵언집』『비단헝겊』『하늘에 밑줄이나 긋고』『엮음 수심가』『달의 문하』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오늘의 시조문학상 등 수상. 오늘의 시조시인회의의장 역임.
국방일보 2005년 03월 14일
붓대로 피운 꽃
-일연의 삼국유사
박상문
천하에 하나뿐인
오래갈 큰 집 한 채
그 집 속에 나라가
생긴 연유 설계도 있어
오천 년
훨씬 넘어간 척도
기록 되어 남아 있다
내 얼굴 보이어 줄
연륜 쌓인 뿌리 족보
사생아가 될 뻔 했던
민초들의 원류 찾아
시조(始祖)가
누구인가도
조목조목 밝혀 놨다
신령스런 곰․호랑이
쑥․마늘 먹고 인도 환생(還生)
햇빛 없는 굴속에서
어엿한 웅녀로 변해
마침내
환웅과 결혼
단군왕검 태어났다
박상문
詩 풀이
‘일연’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곰을 섬기는 토템신앙에 의해 단군왕검이 태어나고 그가 우리나라의 시조가 되어, 오천 년이 넘는 역사를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일연이 우리의 역사를 더듬어 붓으로 ‘삼국유사’를 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그러한 업적을 남겨 민족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일연의 위대성을 화자는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박상문
경남 거창 출생.동국대 문학박사.
(사)국제 펜 한국본부 (사) 한국문인협회 (사)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시집 『심우송』『봄눈 트는 소리』『형상에 덮인 진면목』『붓대로 피운 꽃』 과 산문집 『정신적 분출구는 어디에서 찾나』『설계한 꿈은 이루어진다』와 서예교본 『금산예술정화』 등 출간. 학롱시가문학상, 한국시대상, 노산문학상, 일붕문학상 등 수상.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조숭수필문학, 씨얼문학회장, 서울시문화예술진흥기금 지원 심의위원 등 역임.
국방일보 2009년 06월 22일
참수리 357호
박선양
1
멈춰선 뱃머리는 연평해 건너다보며
말 없이 누웠어도 전할 말이 하 많은 듯
진회색 좌절을 안고 6월 하늘 누워 있다
2
명중당한 조타실 화염으로 휩싸일 때
관통된 육신으로 방향타 끌어안고
침잠(沈潛)한 애정(愛艇)을 따라 먼저 떠난 외아들
면사포 씌워준다는 약속 누가 있어 지키며
새 집에 이사 간들 누구 함께 등불 밝히나
아련한 안개 속으로 떠나버린 당신이여
3
잘려 나간 왼손가락 손등으로 총신 누르고
탄창 갈아 끼우며 쏘아대던 부릅뜬 분노
탄알이 소진된 후엔 울부짖던 사자후
갑판 위 나뒹구는 군화 신은 내 오른쪽 다리
아침에 출동할 때 함께 왔던 나의 분신
그 다리 잘려 나간 채 남은 장병 지켜냈다
4
연평 해역 떠도는 앞서 간 영혼들아
그대들 시퍼런 넋이 이 하늘에 맴돌 때
늘 푸른 우리 산하는 남은 자가 지키리다
박선양
詩 풀이
참수리 357호는 우리 해군이 보유했던 고속정(高速艇)이다. 2002년 6월 29일 북한군의 기습공격(제2연평해전)으로 침몰되었다가 인양됐다. 당시 윤영하 소령 등 6명이 전사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이러한 불행한 일이 이 땅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작품이다.
박선양
전북 00 출생. 2004년 중앙시조 백일장 장원. 2004년 나래시조 신인상, 2007년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시조 『더덕』 당선. 시집『개구리밥』출간. (사)한국문인협회, (사) 한국시조시인협회, 나래시조시인협회, 전라시조문학회 회원.
국방일보 2004년 04월 27일
봄꽃 지는 날
박수진
누가 후득후득 울고 있는가
이 아름다운 시절에
우리들 청춘도 저러하거늘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
쓰린 이별의 자리
지금은 피 흐르고 눈물 나지만
상처마다 추억같은 등불 매달고
그 자리에 아름다이 열매 맺는
눈부신 가을날도 있으리니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오늘은 눈물이 난다
바람에 하염없이
봄꽃 지는 날
박수진
詩 풀이
우리는 피는 꽃을 보고 있으면 기쁨을 느끼지만, 지는 꽃을 보고 있으면 슬픔이 느껴진다. 눈부시게 순결한 화려함으로 피었다가 금방 시들고 마는 이른 봄의 목련이나 일시에 화려하게 피었다가 금방 지고 마는 벚꽃이나 첫여름의 정열을 느끼게 하는 담장의 붉은 장미꽃 등 모든 꽃이 필 때는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시드는 모습은 초라하고 슬프다.
그러한 꽃을 보면서 우리가 슬퍼하는 건 꽃의 피고짐을 인생과 연결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청춘도 저러하거늘/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꽃잎이 짐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이 열매 맺는 눈부신 가을날도 있으리니'라고 화자는 스스로 위로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눈물이 난다고 화자는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아무리 열매 맺는 가을날이 있다지만 꽃이 지는 것, 인생의 아름다운 청춘이 사라지는 것은 슬픈 일임을 화자는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박수진
경북 예천 출생. 시집『혼자 우는 목어』『나의 별에 이르는 길』『망종 무렵』『밝은 거울』『사랑초 키우기』등 출간. 순수문학 신인상, 영랑문학상, 순수문학 작가상, 대한민국동요대상 등 수상. (사)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사)펜클럽한국본부 회원. 서울원문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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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 2005년 01월 17일
다시 수유리에서
박시교
수유리에 오시려거든 되도록 비 내리는 날
우산은 받지 마시고 그냥 오십시오
가슴은 술로 데우게
겉만 젖어 오십시오
우거진 상수리나무 숲길 지나 어느 등성이
굳이 정상 아니더라도 도봉 마주해 앉으면
마음속 은밀한 앙금도
녹아나게 마련입디다
비 오는 날 수유리에 오실 때에는 또 한 가지
잊지말고 시계는 풀어놓고 오십시오
어차피 흐르는 세월은
물 같은 것이기에
박시교
詩 풀이
‘수유리’하면 생각나는 것은 4.19탑이지만, 이 시에서 화자는 수유리에 비오는 날 술 마시러 오라고 권유한다. 정철의 ‘장진주사’라는 사설시조에 비견될만한 작품이다. 화자는 비오는 날 우산도 받지 말고, 마음도 풀어 놓고, 시계도 풀어 놓고 와서 술로 가슴을 데우자고 한다. 도봉을 마주해 앉으면 마음속 깊은 앙금들도 녹아나고, 시계도 풀어놓아 현대인의 바쁜 일상을 잊고, 세월을 잊으며 여유롭게 술을 마시자고 권유하고 있어 우리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시다.
박시교
경북 봉화 출생. 197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겨울강』『가슴으로 오는 새벽』『낙화』『독작』『아나키스트에게』등 출간. 오늘의 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등 수상.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의장 역임.
국방일보 2004년 11월 22일
민족
박영교
출렁이는 강물을 보면
푸른 말이 살아 오릅니다
바닥에 깔려 있는
돌과 자갈 모래들이
짓눌린
역사만큼이나
살아있는 긴 숨결
우리네 손목에 뛰는
혈맥을 짚어 가면
가슴마다 푸득이는
제 여끔 찬 할 말들이
강바람
쌓인 울분 쓸어
온몸 앓아 흐릅니다
캄캄한 곳 어디서나
환한 당신의 얼굴 모습
이 어둠 다 지새고 나면
우린 한 줄기 여명의 밧줄
하늘 땅
하나로 녹이는
폭이 깊은 울림의 강
박영교
詩 풀이
끊임없이 출렁이며 강물이 흘러가듯 우리 민족의 역사도 끊임없이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음을 이 시에서는 말하고 있다. 흘러가는 강물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돌과 자갈 모래들의 삶 만큼이나 긴 숨결을 지니며 살고 있는 우리 민족. 민족의 역사 앞에서 우리는 저마다 한도
많고 하고 싶은 말들, 쌓인 울분의 말도 많을 것이다. 많은 한과 울분들을 쓸어안고 가슴을 앓으면서도 강물은 흐르고 있다.
그러나 아픔이 많은 역사 앞에서도 항상 환하고 밝은 우리 민족의 모습이다. 시련들을 슬기롭게 극복하며 헤쳐 아픔의 역사, 어둠의 역사를 지새고 나면 우리 민족 앞에 펼쳐질 여명의 밧줄같이 튼튼하고 희망찬 시간이 올 것과 하늘과 땅이 하나로 되듯 어우러지고 함께하는 민족 역사의 큰 강이 흐를 것을 이 시의 화자는 확신하고 있다.
박영교
경북 봉화 출생. 고려대 대학원 졸업. ≪현대시학≫등단. 시조집『가을 우화』『사랑이 슬픔에게』『겨울 허수아비』등과 평론집『문학과 양심의 소리』『시와 독자 사이』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시조시학상 등 수상. (사)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경북문인협회장 역임.
국방일보 2005년 03월 28일
춘면(春眠)
박영록
탐라의 유채향기 사립문을 들어서면
따스한 양지쪽에 아장대던 병아리도
개나리
노란 향에 취해
까닥까닥 졸고 있다
흰나비 담장 너머 규방을 훔쳐보고
햇살의 기척에 놀라 선잠깬 종달새는
유사(遊絲)의
꽁무니잡고
수직으로 솟구친다
박영록
詩 풀이
봄날의 화사하고 평화로운 모습이 나타나는 작품이다. 멀리 남쪽 제주로부터 유채꽃 소식이 전해지면 봄은 이미 한반도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양지쪽에는 개나리가 피어나고 그 개나리 색상을 닮은 노란병아리들이 아장대다가 개나리 모습과 봄햇살에 취해 졸고 있다. 그런가 하면 봄나비들은 규방을 훔쳐보고 있고, 종달새는 높이 날아오르며 ‘지지배배’를 지저귄다. 화자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농촌마을의 봄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박영록
충남 논산 출생. 《월간문학 》등단. 시집 『굴렁쇠에 걸린 세월』『허정불여虛靜不如』『瑞堂逸錄』『黙齊實紀』『義谷遺文』등과 씨얼문학 동인시조집 『가던 길 잠시 멈추고』 외 13권. (사)한국문인협회, (사)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사)신라오릉보존회 부이사장, (사)신라문화선양회 이사
국방일보 2008년 06월 02일
나무와 산
박우현
나무는
바람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는다
늘 흔들리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산은
바람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는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늘
스스로 제 온 몸을 흔드는
박우현
詩 풀이
나무는 늘 흔들리면서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나뭇잎을 흔들어 줄 뿐, 바람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으며 순리를 거역하지 않는다. 햇빛 부신 날에는 햇빛을 받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비를 맞으며 안으로 자란다.
산은 바람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는다. 스치는 바람에도, 스치는 구름에도 산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아니, 바람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스스로 제 온 몸을 흔들고 있다고 한다. 시인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세상의 유혹에 거부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흔들리지도 않는 삶, 아니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늘 스스로 제 온 몸을 흔드는 삶. 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만들어 가는 주체적인 삶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다.
박우현
대구 출생. 경북대 사범대 국어과, 동대학원 졸업. 2008년 《사람의 문학》, 《녹색평론》으로 등단. 시집『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았다』출간. 현재
원화여고 교사.
국방일보 2008년 02월 18일
내 사랑은
박재삼
한빛 황토(黃土)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萬)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 자는 조약돌을
날 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쳐 주리라
가다가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박재삼
詩 풀이
‘슬픔의 미학’이 느껴지는 박재삼의 작품 중 하나이다. 첫째 연은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마음과 기다리다 지친 슬픈 마음이 ‘여울 아래 가라앉’고, ‘가야금 저무는 가락’의 하강 이미지로 나타나 기다림의 절망감이 나타난다. 둘째 연의‘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이란 표현 속에는 ‘그까짓 사랑’때문에 사내 장부가 운다는 ‘사랑에 대한 무시’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겉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고 속으로 깊이 우는 장부의 큰 울음을 말하며, 들기름불이 타듯 타들어가는 마음과 만갈래 시름이 앉듯 좌절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3연에 오면 실패한 사랑에 좌절하고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조약돌’을 통하여 끝없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밝은 이미지의 ‘햇볕에 비쳐’와 ‘가다가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주는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 이 시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우리 가슴에 남게 하는 것이다.
박재삼
일본 도쿄 출생, 삼천포에서 성장했다. 1953년 ≪문예≫에 시가 추천되고, 1955년≪현대문학≫에 시조가 추천되어 등단. 시집『춘향이 마음』『햇빛 속에서』
『천년의 바람』『추억에서』『내 사랑은』등 출간. 고향 삼천포에 박재삼문학관이 세워졌고, 2012년 박재삼문학상이 제정.
국방일보 2006년 10월 31일
전갈의 노래
박재화
전갈이 사막을 파고들 듯
나 숨었네
무엇 때문에 숨어야 하는지
왜 자꾸 숨을 일만 생기는지
팍팍한 날들 피하듯
나 사막에 들었네
길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
건너온 한 세상
왜 눈물 없이는 평화가 없는지
왜 마른 땅에 바람만 더욱 세찬지
사막은 가르쳐주질 않았네
그러나 건기가 끝날 무렵
어둠에 쓸리며
사막은 입을 열었네
천지에 진정 숨을 곳은 없고
또한 숨고 나면 그 견딤 위에
비로소 모든 존재는
생존 자체로 말하는 것임을.
박재화
詩 풀이
언제나 자신 있고,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간다면 좋겠지만, 인간이 사는 이 지구에 낮과 밤이 있듯이, 또 양지와 음지가 존재하듯이 삶에도 굴곡이 있지 않겠는가. 드러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고 숨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사막속의 전갈처럼 숨고 싶어한다. 그리고 궁금해 한다. ‘왜 눈물 없이는 평화가 없는지/ 왜 마른 땅에 바람만 더욱 세찬지’를... 그리하여 건기가 끝날 무렵 사막으로부터 답을 듣는다. ‘천지에 진정 숨을 곳은 없고/ 또한 숨고 나면 그 견딤 위에/ 비로소 모든 존재는/ 생존 자체로 말하는 것임을.’ 생존에 대한 깨달음이다. 생존에는 숨을 곳이 없음을, 현실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박재화
충북 옥천 출생. 성균관대 및 동대학원 졸업. 1984년《현대문학》추천 등단. 시집 『도시의 말』『우리 깊은 세상』『전갈의 노래』등 출간. 기독교문학상, 성균문학상 등 수상. (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성균행문회 회장 역임.
국방일보 2008년 09월 08일
빈 집
박현덕
반쯤 헐린 돌담 너머 옛 마당 펼쳐진다
마음 깨진 장독대, 무너진 푸른 우물
빗물에 민들레 키워 함초롬 꽃 피운다
입이 자꾸 써지며 그림자도 사라진 밤
가위 바위 보 하는 폐가의 혼불들이
우물 속 크고 작은 별을 도르래로 올린다
박현덕
詩 풀이
요즘은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는 바람에 시골에 가면 빈집을 많이 볼 수 있다. 돌담도 헐려 있고, 장독대는 깨져 있고, 우물도 푸른 물이끼만 끼어 있는 곳이다. 그것을 지키
고 있는 건 빗물에 키워진 민들레이다. 이것을 바라보는 화자는 ‘입이 자꾸 써지며 그림자도 사라진 밤’이라고 하여 희망이나 꿈이 사라진 안타까움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폐가의 혼불들이 ‘우물 속 크고 작은 별을 도르래로 올린다’고 하여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곳, 그러나 지금은 자연만이 살아 숨 쉬는 쓸쓸한 폐가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박현덕
전남 완도 출생. 광주대 대학원 졸업. 1987년 ≪시조문학≫ 천료 등단. 시집『겨울삽화』『밤길』『주암댐』,『수몰 지구를 지나며』『스쿠터 언니』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한국시조작품상, 시조시학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08년 12월 29일
U턴하는 여자
박희정
가속도로 내달리는 신천대로 가장자리
이제 와서 직진이란 허락되지 않는 건지 낯선 길을 감당하기엔 갈 길이 너무 멀다 저만치 당도할 길은 눈 부릅뜨고 다가오는데 점멸등 바라보며 잠시 술렁댄다. 길은 길을 열어 놓아 무수히 넘나들며 막무가내 밟아대던 저린 발 줌춤거리다 이게 아닌데, 정말 이게 아닌데 사는 것이 이슬 같은 길섶에서….
과감히 U턴하는 여자, 길은 다시 반전이다.
박희정
詩 풀이
우리들은 보통 바쁘게 직진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러나 가끔은 삶을 살면서 U턴하는 경우가 생긴다. 살아가면서 방향이 잘못 잡혔다고 느낄 때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주춤거리면서도 계속 갈 때가 있다. 그러나 아니라고 생각될 때면 과감하게 U턴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자기가 마음먹은 차선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 모든 일을 항상 그렇게만 할 수는 없지만, 꼭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삶에서 U턴도 필요한 것이다.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가 힘들겠지만, 늦더라도 바로잡아 가는 것이 더 큰 후회를 하지 않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스스로 결단하고, 지혜롭게 살려고 노력할수록 가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박희정
경북 문경 출생. 고려대 대학원 졸업. 200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길은 다시 반전이다』등 출간.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신진예술가 지원 받음.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오늘의 시조시인상, 청마문학상 신인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10년 07월 08일
바람 말씀
배인환
성북구
동선동 골짜기
신선(神仙)이 살았다던 곳
한옥(韓屋)에
전기가 들어온 지금도
신선 같은 분
한 분 사시네
흰 한복에
학같이 조금만 잡수시고
잠도 잘 주무시지 않고
시(詩)만 쓰시는
동선동 스승은
막걸리 드시며
바람 말씀하시네
배인환
詩 풀이
문단에 그렇게 유명하게 알려지진 않으셨지만 성균관대에서 시론을 강의하시며 “이 시 참 좋다. 나 같으면 이렇게 표현 못해. 어쩌면 이렇게 표현을 잘 했을까?”라며 다른 시인들의 시를 칭찬하시곤 하던 교수님, 제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으시던 구용 선생님은 대학 시절 은사님이기도 하다.
구용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쓴 위의 시는 제자인 배인환 시인님의 작품이다. 문단에도 잘 나다니지 않으시고 잘 잡숫지도 않고 학처럼 여위시며 막걸리를 드시고 시만 쓰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이 시에서는 직설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새삼 선생님의 인품이 그리워지는 작품이다.
배인환
국방일보 2011년 04월 25일
벚꽃 길
백이운
누가 이 길을 지나간 걸까
투명한 속울음 점점이 맺혀
하늘 땅 그들먹하니 몸부림치는 대낮
자전거바퀴에 감기는 햇살의 눈부심도
오묘한 조화로움에 가볍게 몸을 떨고
종소리 기척을 내어 다시 여는 꿈색(色) 길
누가 이 길을 떠나간 걸까
아름다운 상처가 사랑의 묘약으로
허공에 뜸을 뜨면서 살신(殺身)하고 있구나
백이운
詩 풀이
벚꽃이 아름답게 피는 계절이다. 벚꽃을 즐기기 위한 인파가 여의도로, 경주로, 진해로 모여들어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봄 한철을 보낸다.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그 길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간 길일까.
그 길은 ‘자전거바퀴에 감기는 햇살의 눈부심도 / 오묘한 조화로움에 가볍게 몸을 떨고 / 종소리 기척을 내어 다시 여는 꿈색(色) 길’이다. 아름다운 길이다. 셋째 수에 오면 ‘누가 이 길을 떠나간 걸까’라고 설의법을 사용한다.
결국 이 길을 지나간 사람들도, 그리고 아름답게 피었던 꽃도 모두 떠나감을 강조한다. 이 길을 떠남으로 후손을 키우고, 열매를 맺어 ‘아름다운 상처가 사랑의 묘약’이 되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모습을 보인다.
백이운
서울 출생. 1977년 월간 ≪시문학≫ 추천완료로 등단. 시집『슬픔의 한복판』『왕십리』『그리운 히말라야』『꽃들은 하고 있네』등 출간. 한국시조작품상, 이호우시조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계간 ≪시조세계≫ 발행인.
국방일보 2011년 07월 04일
을숙도 3 - 일몰 그리고
변현상
저무는 어둠을 보며
듣그럽게 떨고 있는
물버들 우듬지를 움켜잡은 바람의 손
자욱한 해무 속에서
자꾸 멈칫거린다
폴더 없는 바탕 화면
길카리로 찾아와서
입 다문 침묵으로 모든 걸 말하지만
운명이 꾸미는 장난에 강물 같은 웃음뿐*
강을, 건넌다는 건 또 하루 지우는 일
느리게 몸 흔들던
갈대밭 샛강을 따라
강 건너 / 도시의 불빛
물 위에 꽃등을 건다
* 유안진의 시 「조각달」에서 따옴
변현상
詩 풀이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 얼마나 많은 일이 하루 동안 우리를 지나갔을까. 귀에 거슬리는(듣그러운) 소리는 몇 번이나 들었을까. 또 즐거웠던 순간, 괴로웠던 순간은 얼마나 됐을까. 화자는 ‘물버들 우듬지를 움켜잡은 바람의 손/ 자욱한 해무 속에서/ 자꾸 멈칫거린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둘째 수에 오면 ‘입 다문 침묵으로 모든 걸 말하지만/ 운명이 꾸미는 장난에 강물 같은 웃음뿐’이라고 한다.
살다 보면 운명을 피해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자신의 의지에 의해 운명을 어느 정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한다. 우리의 생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채워지지도 않고, 또 의지 없는 운명만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은 강을 건너는 일과 같고, 우리의 생에서 또 하루를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안 좋았던 하루든, 좋았던 하루든 모두가 지나가는 시간 위의 길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강 건너 도시의 불빛을 물 위에 비치는 꽃등으로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 삶을 긍정적이고 여유롭게 사는 방법이 아닐까.
변현상
경남 거창 출생. 2007년 ≪나래시조≫ 신인상 및 ≪농민신문≫과 ≪국제신문≫에 당선 등단.
국방일보 2004년 08월 30일
촉석루에 올라
서공식
누대를 휘 감도는 매미 소리 잦아들면
마침내 붉은 석류 타는 가슴 터트리고
사백년 거슬러 올라 대 숲으로 서는 충절
풋바람 끌어안은 강물도 숨을 죽여
청청한 하늘조차 물 깊이로 잠잠할 때
선홍빛 자귀꽃 하나 의암되어 솟았다
다시금 이 자리는 능소화 피어나고
푸른 솔 가지끝에 새순 돋는 매미 소리
도도히 물굽이 치며 뻗어가는 저 남강
서공식
詩 풀이
진주 촉석루에 서면 역사를 굽이 돌아흐르는 남강이 한 눈에 보인다. 일찍이 변영로는 진주의 의기 ‘논개’를 기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이하 생략>
화자는 촉석루에 올라 대숲을 바라보며 석류 가슴처럼 붉은 사 백년 전의 논개의 충절을 새겨보고 있다. 강물도 숨을 죽이고 하늘도 잠잠할 때 선홍빛 자귀꽃은 의암으로 솟고 있다. 왜장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든 지름 2미터도 안되는 바위인 의암, 이 작품에서 의암은 논개(선홍빛 자귀꽃)로 상징되어 나타난다. 셋째 수에서는 논개의 마음은 능소화꽃으로 나타난다.
붉은 석류, 선홍빛 자귀꽃, 능소화 등은 모두 논개의 충절을 상징하는 시어이며, 이러한 역사 속에 강물은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이 시의 화자는 말하고 있다.
서공식
00 00 00 출생. 2002년 시조문학 신인상 등단. (사)한국문인협회 (사)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사)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 씨얼문학회, 펜넷문학동인회, (사)한국음악저작권협회, 한국예술가곡연합회 이사
국방일보 2006년 05월 18일
어떤 경영 1
서 벌
목수가 밀고 있는
속살이 환한 각목.
어느 고전의 숲에 호젓이 서 있었나
드러난
생애의 무늬
물젖는 듯 선명하네.
어째 나는 자꾸 깎고 썰며 다듬는가.
톱밥
대팻밥이
쌓아가는 적자더미.
결국은
곧은 뼈 하나
버려지듯 누웠네.
서 벌
詩 풀이
시를 쓰는 일, 그것은 목수가 속살이 환한 각목을 만들 듯, 시인의 의식이라는 숲 속에 있던 생각들을 깎아내고 썰고 다듬어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야하는 것이리라. 속살이 환한 각목이란 잘 다듬어진 시조이리라. 그 작품 속에는 나이테 무늬가 들어가듯 시인 생애의 무늬가 들어가 있게 된다. 즉 시인의 삶도 작품 속에 훤히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의미는 둘째 수에 오면 확연히 드러난다. 결국 시를 쓴다는 일은 ‘톱밥/대팻밥이/쌓아가는 적자더미’인지도 모른다. 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시를 쓰는 가난한 시인의 삶에 대한 표현이다. 종장의 ‘결국은/ 곧은 뼈 하나/ 버려지듯 누웠네.’라는 표현 속에는 그러한 힘든 삶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이 썩지 않고 남을 ‘곧은 뼈 하나’임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경영이 시작(詩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 모든 예술, 모든 삶의 전반적인 모습으로 확대 해석해 볼 수도 있는 작품이다.
서벌
경남 고성 출생. 1964 《시조문학》에 시조 <연가>, <관등사>, <가을은>이 추천되어 등단. 시조집 『하늘색 일요일』『각목집』과 시집『어제와 오늘과 내일과』등 출간. 1965 공보부 신인예술상 수상, 정운시조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중앙시조대상 수상. 한국시조시인협회장 역임
국방일보 2010년 07월 29일
돌의 미소
서연정
엉거주춤 남아서 절터를 지키고 있다
차마 짐작했으랴
홀로 천 년 건널 줄
이끼 낀 돌부처 손을 가만히 잡아 본다
노을 젖은 그리움 부슬부슬 내려와
뭉개진 이목구비 그 흔적에 스밀 때도
슬픔을 참으로 몰라 우직하게 웃을까
틈새마다 오밀조밀 시간의 실뿌리들
향연처럼 피워올린 작은 풀꽃 속으로
순금빛 허허벌판을 눈부시게 숨긴다
서연정
詩 풀이
시의 제목을 보면서 ‘신라의 미소’가 생각났다. 아니 경주 남산의 돌부처들이 생각났다. 경주 남산에는 많은 부처상들이 천 년도 더 넘는 세월을 건너가고 있다. 목이 잘린 부처도, 귀와 코가 닳아 뭉개진 돌부처도, 얼굴만 남은 돌부처도 있다.
화자가 보고 있는 것은 어느 빈 절터, 이끼 낀 돌부처다. 이목구비가 뭉개진 그 돌부처를 보며 ‘슬픔을 참으로 몰라 우직하게 웃을까’ 하고 이 작품의 화자는 설의법 을 쓰고 있다.
부처님의 미소는 그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건너뛴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던가? 세상의 기쁨, 노여움, 슬픔, 괴로움, 즐거움을 모두 극복한 다음에 비로소 변치 않는 온화한 자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돌부처의 틈새에서 오밀조밀 시간의 실뿌리들이 풀꽃으로 자라고 있음으로 하여, ‘순금빛 허허벌판을 눈부시게’ 만드는 것이다.
서연정
광주 출생. 1997년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 1998년 《서울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 등단. 시집『먼 길』『문과 벽의 시간들』『무엇이 들어 있을까』『동행』『푸른 뒷모습』등 출간. 무등시조문학상, 광주문학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06년 05월 10일
카네이션
서정택
빠진 지 참, 오래된
빗살무늬 내 어금니
혓바닥 스칠 때마다 그리움 샐샐 샌다
따뜻한 커피 안에서 닮은 맛을 찾는다
연하디 연한 컵의 물
온통 휘저어 놓고
본딧말 숨겨 놓은 가루 설탕처럼
비밀 저, 밀림스러운 아득한 아마조네스여
종이 컵 운도에 걸린
월척짜리 여운 한 모금
크게 버둥거리다 달콤한 맛 밀어 올린다
어머니 생애만 같은 겹겹 포갠 빨간 향,
서정택
詩 풀이
이 작품은 커피맛 속에서 카네이션을 찾는, 그리고 어머니를 떠오르게 하는 참신한 발상을 하고 있다. 화자는 커피를 마시며 그 닮은 맛을 찾고 있다. 달콤한 가루 설탕이 커피에 섞여지듯 자연스레 나의 삶에 녹아있는 어머니의 달콤함,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목에 걸리는 ‘월척짜리 여운 한 모금’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리라. 화자는 카네이션을‘어머니 생애만 같은 겹겹 포갠 빨간 향,’이라고 표현하여 어머니와 카네이션을 오버랩시키며 어머니를 간접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서정택
경기 오산 출생. .2006년 《농민신문》신춘문예 당선 등단. 작품 책 읽는 소녀상 외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사)한국문인협회, (사)한국시조시인협회, 나래시조 회원. 동인 이천 회원.
국방일보 2009년 07월 27일
중랑천 하루
선정주
폭우 쏟아진 날에
흙탕물이 된 강을 보다가
문득 이소(離騷)*를 쓴 屈原이 생각난다. 같이 흐리지 아니한 굴원, 강은 한 번도 흐린 적이 없다. 강이 흐린 것은 허물을 쓴 것뿐이다. 허물을 쓰고도 굳이 변명하지 않은 것뿐이다. 강은 한 번도 죽은 일이 없다. 그 많은 오명을 받고도 느긋한 것뿐이다.
한 번도 다급해지지 않고
느긋한 강을 보다가.
* 이소(離騷):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쓴 시집 이름.
선정주
詩 풀이
위 작품의 화자는 폭우로 흙탕물이 된 중랑천을 보고 있다. 폭우로 흙탕물이 된 강을 바라보면서, 굴원이 쓴 이소라는 시집을 생각한다. 굴원처럼 흐리지 않는 강, 강이 흙탕물로 변한 것은 폭우가 쏟아져서 여기저기서 흘러온 오물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화자는 그것은 강물의 잘못이 아니라, 강물이 허물을 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허물을 쓰고도 굳이 변명하지 아니하고, 한 번도 죽은 적도 없는 강. 그러면서 오히려 느긋하게 흐르는 강을 화자는 찬양하고 있다. 살아 숨쉬는, 죽는 일이 없는 중랑천을 꿈꾸면서 말이다. 중랑천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선정주
경남 고성 출생. 시집『겨울 靑山圖』 『겨울 中浪川』『겨울 三十年』『겨울 處容舞』『겨울 月印千江之曲』『非詩』『中浪川 詩人이라 하기에』등 출간. 현대시조문학상, 문예한국문학대상 백자예술상, 한국크리스찬문학상 대상, 가람시조문학상 등 수상. 『현대시조』주간.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역임.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국방일보 2009년 07월 13일
수련
성철용
물 속에
뿌리 하여
햇살로
피는 꽃잎
붉은 웃음
하얀 설움
우러러 해를 그려
잎새도
태양을 닮아
둥근 원을 둘렀다.
성철용
詩 풀이
연꽃이 피는 여름철이다. 흙탕물 속에서도 아름다운 연꽃송이는 핀다. 부처는 말없이 손끝으로 흙탕물속에서 핀 아름다운 연꽃을 가르켰고, 제자 가섭은 말없이 미소로서 답했다. 그것으로 이심전심이란 말이 생겨났다. 말이 없어도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관계는 아름답다. 탁한 물속에서도 아주 맑게 피는 연꽃, 특히 물면 가까이 꽃을 피우는 수련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화자는 이 작품에서 물속에 뿌리를 두면서 해를 사모하듯 피는 연꽃을 ‘붉은 웃음, 하얀 설움’이라 하여 연꽃을 열정과 순수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꽃을 둘러싸고 있는 잎새는 ‘태양을 닮아/ 둥근 원’이라고 하여 모나지 않은 원만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아름다운 수련의 모습을 묘사한 이미지시라고도 볼 수 있고, 또한 아름다운 여인을 수련에 빗대어 표현한 상징시라고도 볼 수 있다.
성철만
00 00 00 출생. 《시조문학》《한국수필》로 등단. 시조집 『하루가 아름다울 때』 출간. 시조문학진흥회, 한국수필작가회 회원, 경기케이블TV방송 자문위원. 《문학저널》에 국립공원산행 포토에세이 연재 중.
국방일보 2009년 04월 13일
샘
손증호
선생님 줄인 말로 아이들은 샘이란다
남도 억양으로 쌤이라고도 하는데
버릇은 없어 보여도 샘이란 말 참 좋다
그렇지 선생님은 샘이라야 마땅하지
깊디깊은 산골짝에 샘물로 퐁퐁 솟아
어둠을 길닦이하며 흘러가는 푸른 노래
눈 비비고 찾아온 어린 짐승 목 축이고
메마른 봄 들판을 푸릇푸릇 적시는
샘 같은 선생이라야 아이들 가슴 살아나지
손증호
詩 풀이
요즘의 아이들은 인터넷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인터넷에서 유행시키고 자기들끼리 그러한 언어를 쓰면서 즐거워한다. 학교라는 현장의 선생님들은 그러한 언어를 다 알아듣지 못한다. 늘 그런 면에서는 아이들이 앞서 가고, 유행도 아이들이 이끌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화자는 학생들이 만든 말인 선생을 줄인 말 ‘샘’을 좋아한다.
화자는 깊디깊은 산골짝에 맑게 퐁퐁 솟아나는 ‘샘’같은 선생이 되기 위해 안테나의 방향을 늘 아이들에게 둘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들에게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아름답다. 아이들이 있어서 살맛나는 세상! 아이들이야말로 우리의 미래이고 시의 바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인은 행복하다.
화자는 시가 ‘눈 비비고 찾아온 어린 짐승들의 목을 축여 주고/ 메마른 봄 들판을 푸릇푸릇 적셔 주는’ 샘물 같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어둠을 길닦이하며 흘러가는 푸른 노래’가 돼 누군가의 가슴에 가 닿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손증호
경북 청송 출생. 시조집『침 발라 쓰는 시』출간. 2002년 ≪시조문학≫ 신인상, 부산문학상 우수상. 이호우시조문학상 신인상 등 수상. (사)한국문인협회. (사)한국시조시인협회, 부산문인협회, 부산시조시인협회 회원, 볍씨·시조사랑 동인.
국방일보 2009년 07월 20일
명 장
신필영
조팝나무 꽃그늘에 허기지는 늦봄 하루
물 잡아 부푼 논두렁 삽질 따라 윤을 내며
버려진 농경의 조각보 잇고 다려 주름 편다
한 시절 다 바쳐서 살점이 된 논바닥에
모 한 춤 구름 한 춤 거친 손이 놓는 자수
눈썰미 녹록잖은지 개구리 첨벙 뛰어들고
신필영
詩 풀이
한 세월 다 바쳐서 농사를 짓는 농부를 명장에 비유한 작품이다. 모를 심어가며 논농사를 하는 우리의 농부들은 그 논바닥이 자신의 살점처럼 애틋하게 느껴질 것이다. 비가 안 와 가뭄이 들어도 걱정, 비가 너무 많이 와 장마가 들어도 걱정인 농부들. 모두들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떠나가 버려진 듯한 농경, 그 조각보를 잇고 다리는 농부의 마음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기계식이 아닌 재래식 모심기 방법으로 ‘모 한 춤 구름 한 춤’ 놓는 농부의 마음은 여유가 있어 보인다. 자수판을 메꾸어 가듯 모를 심으며 농경지를 메꾸어 가는 농부의 일손이 보이는 듯 이미지가 나타난다. 거기에 철없이 첨벙대는 개구리 한 마리가 등장해 모심기를 하는 시골의 풍경을 더 정겹게 해 주고 있다.
신필영
경북 안동 출생. 1983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지귀의 낮잠』『누님 동행』『둥근 집』등 출간. 오늘의 시조문학상, 이호우시조문학상 등 수상. (사) 한국문인협회회원, (사)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국방일보 2005년 05월 16일
존재(1)
신현필
고무줄 한 자락을
살짝 당겨본다
손끝에 미세하게
당겨오는 지구자락
감지한
고만큼으로
존재하는 나의 우주
바람은 꽃가지를
꽃가지는 꽃가루를
흔들림은 흔들림으로
온 우주를 흔들어,
우리의
아름다운 생도
출렁이고 있다
신현필
詩 풀이
이 시의 화자는 작은 것으로부터 커다란 우주 모습을 감지하고 있다. 작은 고무줄 하나의 튕김만큼이나 삶은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 안에서 우리의 삶은 흔들리고 있다. 한 인간의 삶이란 비록 넓은 우주에서 보면 아주 사소한 작은 존재지만 그것은 나(화자)에게 있어서는 전 우주인 것이다. 때문에 나의 흔들림은 전 우주의 흔들림이 되고 그 흔들림 속에 생이 출렁이고 있는 것이다.
신현필
경북 문경 출생. 1978년 시조문학 천료. 저서 『이영도 시조연구』와 수필공저『삶의 조각보』 등 출간. (사)한국문인협회, (사)한국시조시인협회 한국아동문학연구회, 중앙수필문우회 회원, 씨얼 동인
국방일보 2005년 02월 21일
바램
심응문
따스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음 좋겠다
눈길을 받기보단 눈길 주는 그런 사람
울 밖의 벙근 매화 꽃잎 나였으면 좋겠다
폭풍우 친 다음날 시름에 겨운 이에게
땅 끝을 부여잡고 보란 듯 웃음 짓는
낮은 곳 붉은 채송화 나였으면 좋겠다
잊었던 정감들도 나를 보면 푸근해져
잠시 서서 명상케 하는 그런 꽃이 되고 싶다
햇살에 간지럼 타는 길섶의 구절초처럼
바람 부는 긴 겨울밤 그대 생각 부풀릴 때
서재의 한 켠에서 발등에 툭 떨어지는
지난 날 네잎 크로바 나였으면 좋겠다
심응문
詩 풀이
이 시의 화자는 따스한 눈빛을 지닌 사람, 위안이 되는 미소를 지닌 사람, 푸근한 정감을 살아나게 하는 사람, 지난 날의 네잎 클로버 같은 행운을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시 전체에 따스한 정감이 흐르고 있다. 올 해에는 풍요롭고 따스하고 행복한 이웃들이 많았으면 좋겠고,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도록 마음속의 네 잎 클로버를 각자가 챙겨갖는 한 해였으면 좋겠다.
국방일보 2004년 06월 14일
바다에서
안상근
칼바람 부는 땅 끝 섬
안개에 묻힌 오름
비 오는 바닷가
언제나 그 자리에
나는 없고
춥고 배고픈 가슴만이 있다
하늘과 맞닿은 바다
그 너머의 시간,
바다는
그저 자기 모습만 보여 주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바다를 본다
안상근
詩 풀이
하늘과 맞닿은 푸르고 끝없는 수평선, 다가가도 다가가도 그만큼의 거리가 항상 남는 아득한 거리, 끊임없이 파도는 만들어지고 부서지고…. 그 역동성으로 늘 깨어있는 생동감과 신선함이 느껴지는 곳이 바로 바다이다.
우리는 사물을 대할 때 얼마나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까.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사물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의 범위에다가 자신의 주관을 가미하여 그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 이 시 속의 화자는 비 오는 바닷가에서 '나는 없고/ 춥고 배고픈 가슴만이 있다'고 표현하여 비 오는 바다의 쓸쓸함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마지막 연에서 '바다는/ 그저 자기 모습만 보여 주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바다를 본다./'로 표현하여 나와 바다의 거리감을 표현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바다와 그 바다를 주관적 정서로 바라보고 있는 화자를 만나 볼 수 있다. 모든 사물은 나의 밖에 존재하며 그것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인 것이다.
안상근
제주 출생. 《현대시문학》시 등단. 시집 『바람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간』, '현대시문학상' 수상. 2007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에 '지삿개의 교향악' 시화전 출품. 현재 제주문인협회 부회장,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교감.
국방일보 2009년 08월 24일
무늬가 발목을 잡는다
양선희
단조로운 삶을 조롱하듯
무늬는 내 발목을 붙든다
나는 무늬 앞에서 오래 머문다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무늬는 아름답다
색이 있는 무늬
색이 없는 무늬
다 감탄사를 만든다
때로 나는 무늬 옷을 산다
거울 앞에 서면 내 몸은
무늬 옷 속에서 겉돈다
무늬를 소화하기에는 아직
내 삶이 너무 바탕만 요란한 것이다
무늬 옷은 옷장 안에서 썩고
나는 쇼윈도 밖에서 곪는다
양선희
詩 풀이
생은 요란한 무늬, 요란한 색깔로 항상 떠들썩하다. 눈에 잘 띄는 무늬로, 색깔로 사람들은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한다. 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보편적 욕망인지도 모른다.
옷을 골라 입을 때도 자기에게 맞는 것을 골라 입어야 자신이 더 돋보이듯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에게 맞는 무늬로 살아야 자기의 삶이 겉돌지 않을 것이다. 남들보다 화려하게 살고 싶어한다든가, 자기의 능력 밖의 일을 추구할 때, ‘거울 앞에 서면 내 몸은 무늬 옷 속에서 겉돈다’의 모습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내 삶과 어울리는 무늬는 어느 것일까?
양선희
경남 함양 출생. 시인. 방송작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7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일기를 구기다』『그 인연에 울다』등 출간.
국방일보 2006년 06월 28일
난(蘭)
양점숙
꽃이파리 벌었다
애쓰는 줄 몰랐는데
정갈한 마음일까 대물린 열망일까
조촐한 꽃 한 송이에 그 하루는 환한 봄
햇살 알갱이 삼킨 꽃망울에
금이 간다
파열의 흔적일까 적멸의 여진일까
또 한 번 이별을 위해 꽃대 하나 올린다
양점숙
詩 풀이
꽃이 하나 피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세월의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것인가. 우리가 무심히 보아 넘기는 보잘 것 없는 들꽃 하나에도 그 꽃을 피우기 위한 들꽃 나름대로의 애씀이 있었을 것이다. 화자는 난이 핀 것을 보면서 그동안 꽃잎을 열기 위한 ‘애씀’을 생각하며 화려하지 않은 ‘조촐한 꽃 한 송이에’환한 봄을 느끼고 있다. 또한 꽃이 피어남을 ‘또 한 번 이별을 위해 꽃대 하나 올린’다고 하여 아름다움의 순간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피는 꽃을 보면서 지는 꽃을 상상하는 시인의 깊은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양점숙
전북 익산 출생. 1989년 《익산 문예백일장》장원. 『꽃 그림자는 봄을 안다』『아버지의 바다』등 출간. 한국시조시인협회 협회상, 한국시조시학상 등 수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한국여성시조문학회부회장, 열린시학회 수석부회장, 가람기념사업회 수석부회장, 가람시학 주간.
국방일보 2011년 09월 05일
황지못
양진모
이른 새벽
황지못 맑은 물 어디서 와
이끼 낀 만상을 쓰다듬으며
어디로 바쁘게 가는 겁니까?
낙동강
천 삼백 리 머나먼 길
가다 큰 바위 만나 뒤돌아서서 쉬어가고
가끔 절벽 만나 폭포수 이루건만
물과 세월 흐르지도 가지도 않거늘
물 따라 세월 따라
나만 바쁘게 흘러갑니다
황부자의 옛터에서
내가 또 다른 나를 찾으려는데
못 속 보름달
잉어떼 길을 비춰줍니다
양진모
詩 풀이
이 시에서는 황지못을 바라보며 화자는 자신의 모습을 찾고 싶어 한다. 황부자의 전설이 있는 황지의 연못에서 끊임없이 맑은 물이 솟아나 낙동강 천 삼백 리를 적시며 흘러간다.
물은 흘러가도 늘 그 자리엔 물이 있는데, 그리고 세월은 흘러가도 언제나 그 자리엔 세월이 차 있는데, 인생인 나만 바쁘게 흘러감을 느끼고 무상을 느끼고 있다.
나를 찾고 싶은 화자는 ‘황부자의 옛터에서/ 내가 또 다른 나를 찾으려는데/ 못 속 보름달/ 잉어떼 길을 비춰줍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황지못을 바라보며 자신을 찾고 싶어하는, 자신의 본성에 이르고 싶어 하는 화자, 세상을 비추는 환한 보름달과 그리고 물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잉어떼가 길을 비춰주고 있다고 한다. 환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양진모
강원 삼척 출생. 2006년 《좋은 문학》 등단. 태백 한마음 문학회 회장.
국방일보 2005년 08월 29일
바람의 초상
엄창섭
피곤한 내 영혼이
상한 갈꽃처럼 쓰러져 누운
혼탁한 세기의 늪에
푸른 월광은 쏟아지고
깊은 밤, 불 꺼진 창 두드리며
눈물 묻은 상기된 볼에
감미롭게 입맞춤하는
긴 머리카락 날리는
얼굴 없는 당신은 누구신가요
엄창섭
詩 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얼굴 없는 바람의 모습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첫째 연에서는 피곤한 영혼이 쉬는 푸른 월광(달빛)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밤을 표현하고 있으며, 2연에서는 깊은 밤 부드럽게 부는 바람을 노래하고 있다. 바람을 ‘눈물 묻은 상기된 볼에/ 감미롭게 입맞춤하는/ 긴 머리카락 날리는 얼굴 없는 당신’이라고 의인법을 사용하여 부드럽고 감미로운 바람의 이미지를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엄칭섭
강원 강릉 출생. 성균관대 문학박사. 1977년 《시문학》등단. 시집『탈』『바다와 해』『생명의 나무』『열매따기』『신의 나라는 열매을 팔지 않아』등과 저서 『김동명 문학연구』『현대시의 현상과 존재론적 해석』『삶과 문학, 그리고 잠언』『민족시인 심연수의 문학과 삶』등 다수 출간. 한국현대시협상, 후광문학상, 서포문학상, 허균문학상, 순수문학상, 흰돌문학상, 소월문학상, 박인환 문학상 수상. 관동대 교수역임, 한국시문학회 회장 역임. (사)국제펜클럽한국본부 및 한국문예비평학회 고문, 심연수선양사업 위원장, (사)강원도립대합창 이사장
국방일보 2006년 07월 11일
운주사에서
오만환
솔밭 밑으로 내려가면
옷도 걸치지 못하고 달려온
한 오백년
전원일기의 식솔들
묘옥은 누구이며
장길산의 한은
어디에 잠들었던가
누이, 삼촌, 이모
복길이 아빠
금동이는 가재를 잡아오고
분가했던 둘째는
맞벌이를 위해 아기를 맡긴다
의를 세우기 위해 배를 타고
머리를 거꾸로 누우신
미륵님 미륵님
우리들의 미륵 부처님
그만 일어나셔서
우리 양촌리에
큰 어른이 되십시오
오영민
詩 풀이
운주사에 가면 여러 형태의 부처의 모습이 있다. 이 작품의 화자는 그러한 운주사에서의 부처의 모습을 인간의 사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그것은 <전원일기>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 같은 수더분한 분위기의 사람들이다. 그런가 하면 황석영의 대하 역사소설 <장길산>과 묘옥 등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은 조선시대 민중들의 힘없는 삶과 그 안에 미륵신앙의 유토피아적 의식을 또한 부처들의 모습에서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 누워있는 미래에 나타난다는 부처님인 미륵보살에게 <전원일기>속의 평화스럽고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양촌리의 큰 어른이 되어 의를 세우고 실현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오만환
충북 진천 출생. 1982년 《우리 함께 사는 사람들》등단. 시집『작은 연인들』, 『나의 봄』과 평론집『식탁 위에 올라온 시』등 출간.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선정고교 교사 역임.
국방일보 2010년 02월 18일
비양도 3
오승철
길은 비양도에서 저 혼자 걸어 온다
세월도 밀려 왔다 이문이 없었는지
덩그렁 집게의 헌집 지고 가는 길이 있다
지구의 하루가 24시간이라면
그보다 40분 길다는
지금은
화성의 시간
사십 분, 섬을 돌아도 제자리인 내 그리움
화성에 물이 있다면
펄랑못 같을 게다
화산섬 밀썰물 따라 숨을 쉬는 바다 연못
그 안엔 술일(戌日)에 찾는 할망당도 놓인다
사족이리
섬에 와 무릎 꿇는 하늘도
가을날 신목에 올린
지전도 사족이리
딱 한 번 고백하려고 왔다 간다, 바다의 혀
오승철
詩 풀이
제주의 비양도는 인구 171명의 작은 섬이다. 1002년(고려 목종 5년)에 분출한 화산섬이며 단조로운 암석해안이다. 시인은 `세월도 밀려 왔다 이문이 없었는지 / 덩그렁 집게의 헌집 지고 가는 길이 있다'고 표현해 조금은 쓸쓸하고 단조로운 섬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한 바퀴 도는 데 40분, 섬을 다 돌아도 그리움은 제자리인 즉, 그리움을 남게 하는 섬이다. 바닥으로 바닷물이 스며들어 형성된 펄랑못은 조수운동과 반대로 밀물에는 수위가 줄고 썰물에는 높아진다.
화자는 화성에 물이 있다면 바다의 썰밀물에 따라 숨을 쉬는 펄렁못 같을 것이라고 상상의 폭을 확대한다. 그리고 `딱 한 번 고백하려고 왔다 간다, 바다의 혀' 라는 표현에서 보여 주듯 외부에서의 무릎 꿇은 찬양이나 경배보다 사랑의 실천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즉, 화자는 바다의 혀가 되어 비양도가 아름답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왔다 간다는 것이다. 비양도의 아름다움을 돌려서 표현하고 있다.
오승철
제주 위미 출생. 1981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개닦이』『사고 싶은 노을』『누구라 종일 흘리나』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한국시조작품상, 이호우시조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사)한국시조시인협회 (사)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정드리문학 동인.
국방일보 2010년 12월 02일
11월
오영민
예보 없는 늦은 비에 젖은 몸을 추스르는
귀청을 긁고 있다. 시가 아닌 것들이
오래된 유행가처럼 휘파람으로 말을 걸며
“아니라예 아니라예 낙엽이 아니라예”
훌훌 털고 가야 하는 윤회를 모른다면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
그래 그럴 수 있겠다.
글피 또 어제 오늘 하고 또 내일
눅눅한 시간들이 먼 노을에 몸을 묻고
떨어져 뒹구는 것들의 방언을 듣는 저녁
오영민
詩 풀이
가을이 깊을 대로 깊었다. 늦은 가을비에 남았던 나뭇잎마저 낙엽이 되어 뒹굴고 있다. 훌훌 털고 가야 하는 것이 낙엽만은 아닐 것이다. 인생도 그렇고, 순간순간의 삶도 그러하다. 만남이 있으면 떠남이 있는 것이고, 새싹이 피는 봄이 있으면 잎 지는 가을도 있는 것이 윤회사상이며 우주 자연의 이치일 것이다.
“아니라예 아니라예 낙엽이 아니라예”라고 부인해 보지만 우리의 생도 나뭇잎을 너무나 흡사하게 닮아 있다. “글피 또 어제 오늘 하고 또 내일”로 연속되는 삶,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눅눅한 시간들. 그 시간들이 ‘먼 노을에 몸을 묻고/ 떨어져 뒹구는 것들의 방언을 듣는 저녁’이라고 한다. 낙엽이 주는 의미를 이 시에서는 ‘방언’이라고 했다. 독자 나름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색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번쯤 자연과 인간의 삶을 대비해 보며 읽어야 할 작품이다. 이제는 12월, 겨울이다. 우리들의 전우를 보내야 했던 우울한 11월을 내려놓으며, 다가오는 겨울의 추위를 강한 인내심과 용기로 견뎌 내고 봄이면 새로운 싹을 피울 희망과 각오로 건강하고 행복한 겨울을 맞아야겠다.
오영민
경남 창원 출생. 2010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한국시조시인협회. 오늘이 시조시인회의. 나래시조시인협회. 경남문인협회 경남시조시인협회 사무차장. 창원문입협회. 회중련 편집위원
국방일보 20010년 07월 22일
선사시대 암사동엔...
오점록
눈빛 언어들이 모여서
손
발
몸짓으로
소꿉놀이하듯
움막을 짓고
암사동 사람들은
그 두레 정신
육천 년을 이어왔다
강 물길이 돌아가고
폭풍우도 빗겨 가니
부족한 듯
모자람이 없는
천혜의 자연은
동네를 살찌웠구나
사람 살기 좋은
그 선사시대 암사동엔
강동(江東)의 숨결이 흐른다
오점록
詩 풀이
선사시대 유적이 모여 있는 강동의 암사동, 육천 년을 오순도순 정답게 모여 살며 서로 돕던 두레의 정신, 그 정신을 이으며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강 물길도 돌아가고, 폭풍우도 피해가는 살기 좋고 아름다운 동네임을 강조하고, ‘부족한 듯/ 모자람이 없는/ 천혜의 자연’의 혜택을 받는 동네이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시 속에 흐르고 있다. 장마철, 전국적으로 장마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전국의 장마 피해가 최소화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위 시를 소개해 본다
오점록
전북 남원 출생. 《문학세계》《문예사조》시 등단. 시집『쉼표가 머무는 해우소解憂所』『나 머물던 그 자리』등 출간.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강동문인회 사무국장 역임. 산티 동인.
국방일보 2010년 02월 25일
연필을 깎다
오종문
뚝! 하고 부러지는 것 어찌 너 하나뿐이리
살다 보면 부러질 일 한두 번 아닌 것을
그 뭣도 힘으로 맞서면
부러져 무릎 꿇는다.
누군가는 무딘 맘 잘 벼려 결대로 깎아
모두에게 희망 주는 불멸의 시를 쓰고
누구는 칼에 베인 채
큰 적의를 품는다.
연필심이 다 닳도록 길 위에 쓴 낱말들
지간에 삶의 쉼표 문장부호 찍어 놓고
장자의 내편을 읽는다
내 안을 살피라는.
오종문
詩 풀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나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연필심이 쉽게 부러지듯 잘 부러진다. 살아가면서 결심도, 자존심도 부러지는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누군가는 무딘 맘 잘 벼려 결대로 깎아'처럼 부러진 마음을 다시 깎아 '모두에게 희망 주는 불멸의 시를 쓰고/ 누구는 칼에 베인 채 큰 적의를 품는다'고 한다.
펜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삶이 그러하듯이 누구든 칠전팔기의 용기로 부러진 삶을, 결심을, 자존심을 다시 결대로 깎아 모두에게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또한 남을 원망하며 모든 것을 타인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점은 없는지, 자신을 잘 살펴보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함을 이 작품의 화자는 강조하고 있다.
오종문
광주 광산 출생. 1986년 『지금 그리고 여기』를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조집『오월은 섹스를 한다』『지상의 한 집에 들다 』등과 저서『이야기 고사성어 3권』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수상.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사)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국방일보 2011년 04월 04일
천마산 물소리
오태환
내 그대의 물소리 안으로 들어가리 상수리나무 물푸레나무 푸른 그늘 사이사이 저렇게 달빛이 환해서 그대 물소리의 내장까지 찬란히 비쳐보이는 밤이면 그대 물소리의 붉고 고운 실핏줄 조심조심 헤치며 내 그대의 물소리 안으로 들어가리 들어가서 그대 물소리의 서늘한 냄새에 취하며 놀리
내 그대의 물소리 안으로 들어가 살리 달빛 저렇게 밝아서 휘파람새 티끌같이 긁힌 울음 하나에도 내 가슴 가죽 미어지도록 두근거리거든 그대의 물소리 안으로 들어가 살리 철벅철벅 그대의 물소리 밟으며 들어가서 내 살아 있음의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아린 살 벗듯이 한 겹씩 한 겹씩 모두 벗어 버리고 다시는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
드디어 내 몸의 살가죽이며 가슴뼈며 아름답게 썩어지리 썩어져 그대의 물소리 되리 그리하여 무릎까지 흰 달빛에 빠지며 한누리 그대 물소리의 즐거운 무덤 이루리
오태환
詩 풀이
하나의 사물에 깊이 몰입하는 것, 합일하는 것은 아름답다. 일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무엇인가에 깊이 빠지고 그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는 것은 진실로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소리 속으로 들어가 물소리가 되고, 달빛 속으로 들어가 달빛이 될 수 있다면, 물아일체의 경지가 되고 그런 경지가 된다면 바랄 것이 더 무엇이겠는가.
이 시의 화자는 천마산의 물소리와 합일이 돼 ‘드디어 내 몸의 살가죽이며 가슴뼈며 아름답게 썩어지리 썩어져 그대의 물소리 되리 그리하여 무릎까지 흰 달빛에 빠지며 한누리 그대 물소리의 즐거운 무덤 이루리’라고 한다. 나를 버림으로써 또 그 사물을 위해 내가 썩어짐으로써 세상과 자연과 사물과 사람과 합일이 이뤄지며 하나로 융합될 수 있는 것이고, 그 속에서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국방일보 2006년 07월 25일
다도(茶道)
옥경국
선비의
붓끝에서
피어나는 난향을 닮아
여백의
너른 공간
펼쳐진 녹향을 따라
서둘던
구름 한 무리
찻물소리에 귀를 씻네
옥경국
詩 풀이
이 작품은 ‘다도’를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다도는 차를 우려 마시는 풍속을 지닌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한 동양권에서 발달한 차문화다. 작품에서 난이 피어 있는 고풍이 짙은 서재에서 단아한 차림새의 선비가 정좌해 차를 마시는 모습이 연상된다. 선비는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선비의 기질과 정신과 기품을 마시고 있는 듯하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시는 한 잔의 차 속에는 ‘서둘던 / 구름 한 무리 / 찻물 소리에 귀를 씻고’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옥경국
국방일보 2008년 07월 28일
밤에 눈 뜨는 강
우은숙
검푸른 이마 위에 별빛을 따서 담고
물결 따라 일렁이는 오늘의 발자욱들
총총히 물을 건너며 하나 둘 깨어난다
계절의 뜰 안에서 혼절한 목마름
물굽이 돌아돌아 밤으로 향하는데
스며라 깊은 숨소리, 밤의 허울 속으로
달빛에 아롱지는 등 시린 환한 속살
어둠을 마시며 끝없이 달려가는
숨쉬는 강물 사이로 내 비치는 숨은 내력
투명한 거울 속에 또 다른 내일 위해
길게 누워 서성이다 허공 가른 기침소리
밤에만 눈을 뜨는 강, 그 강에 내가 있다.
우은숙
詩 풀이
밤에만 눈을 뜨는 강, 그것은 어떤 것일까. 낮은 사물들의 시간, 만상이 북적대며 저마다 바쁘게 살아 움직이는 시간이다. 그러나 밤이 오면 모든 것이 잠드는 고요함 속에 오늘 하루의 삶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삶은 늘 목마르고 우리는 무엇인가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둠을 마시며 끝없이 달려가는’모습, 시지프스의 신화가 늘 우리 곁에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내일을 꿈꾸며, 사유하고, 고뇌하고, 행동하는 삶이라는 강에 내가 실존하고 있음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우은숙
강원 정선 출생. 경희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8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 등단. 시집『마른 꽃』『물무늬를 읽다』등 출간. 2007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등 수상. (사)한국문인협회, (사)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국방일보 2004년 10월 11일
아차산성
원용문
천년 전 기왓장들이
다시 살아 눈빛 주고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다람쥐가 넘나든다
아직도
긴장감 도네
바람마저 숨죽였네
저 건너 풍납토성엔
백제군의 아우성 소리
그 앞을 가로 지르는
한강물은 유유하다
온달이
마셨을 옹달샘에
내려앉은 햇살이여
취사병의 밥 짓는 연기
산성 위를 뒤덮고
평강공주 통곡하며
쓰러졌을 그 자리에
군사들
도열해 서듯
거목들만 버텨 섰다
詩 풀이
원용문
詩 풀이
아차산은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전설이 있는 산이다. 고구려의 울보공주, 그래서 농담처럼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아버지 평강왕(평원왕)의 말을 들으면서 크던 그녀는 혼기에 이르러 바보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우겨 궁전에서 쫓겨나게 된다. 평강공주는 마침내 숯구이 총각 바보온달이 산다는 마을에 도착하여 그를 만나 함께 살면서 그를 훌륭한 장수로 키워내고 아버지 평강왕에게도 온달은 부마로 인정을 받게 된다.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여 한강유역 탈환을 위한 군사의 출정이 있자 그는 자원하여 참전하였으나 아단성(지금의 아차산성)전투에서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죽은 그의 시신이 움직이지 않아 평강공주가 와서 그의 혼을 달래자 그때서야 시신은 움직였다고 한다.
이 시의 화자는 한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역사 앞에서 죽어서도 평강공주를 사랑하고 그의 말을 믿고 따랐던 온달의 사랑, 충직함, 성실함과 또 그러한 지아비의 죽음 앞에서 슬퍼했을 평강공주를 그리고 있다. 역사상 실존인물을 다루었던 역사설화이며 인물설화인 바보온달설화가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원용문
경기 여주 출생. 《월간문학》등단. 시조집『여름일기』,『신록앞에서』,『그리움의 미학』등과 저서 『우물 속의 사랑』『우리 역사 탐방기』등 출간. 황산시조문학상, 월하시조문학상, 경기문학상 대상, 경기예술대상, 여주문화상 수상,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경기도문인협회 부회장. 광진문인협회 회장. 여주문인협회 회장. 한국시조학회 회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여주문화원장, 경상대 국문과 교수, 한국교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역임.
국방일보 2004년 08월 16일
외암리 시편(詩篇)
유권재
누가 지난 역사(歷史)를 기록이라 하였나요
어제라는 수레위에 오늘이 실려가는
아산의 설화산자락 외암리에 와보세요
구태여 기억하려 꺼내보려 하지 않는
다락에 쌓아 놓은 좀먹은 비망록처럼
아득히 지난 내력을 잊은 듯이 살다가
세상의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
오래 전 그리움이 간절하게 샘솟듯이
소진한 기억 속으로 향수가 스며들면
저물녘 산마루의 자욱한 안개 아래
고가(古家)의 밥 짓는 연기 밀어처럼 속삭이는
한편의 과거 속으로 길을 찾아 나서 봐요
유권재
詩 풀이
충청도 아산의 설화산자락 외암리를 시인은 읊고 있다. 세월은 흘러가고 흘러간 과거의 기록들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을 기억하려고도 꺼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제가 있어 오늘이 존재함을 우리는 잊은 듯이 살고 있다. 그러다가 현실이 지루해질 때, 과거로의 여행이 그리울 때, 아니 과거에 대한 향수가 스며들 때 아직도 옛 향수를 그대로 간직한 이곳 외암리를 찾아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 외암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시인은 마지막 수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수는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저문 황혼녘 산마루엔 자욱한 안개가 끼고 고가(古家)에선 나무를 때어 밥 짓는 연기가 밀어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한 편의 영화 같은 외암리의 고즈넉한 저녁 풍경이 고향집을 보듯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 작품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좀먹은 비망록’, 밥 짓은 연기를 ‘밀어처럼 속삭이는’ 등의 참신한 표현이 돋보이며, 작품 전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귀결되고 있다.
유권재
경기 안성 출생. 《시조문학》등단. 시조집 『때로는 하루도 길다』와 저서『옛시조 인물요람』등 출간. 시조문학 편집장 역임.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사)한국시조시인협회 (사)한국시조문학진흥회 회원.
국방일보 2008년 02월 25일
물총새에 관한 기억
유재영
작자 미상 옛 그림 다 자란 연잎 위를
기름종개 물고 나는 물총새를 보았다
인사동 좁은 골목이 먹물처럼 푸른 날
일곱 문 반짜리 내 유년이 잠겨 있는
그 여름 흰 똥 묻은 삐딱한 검정 말뚝
물총새 붉은 발목이 단풍처럼 고왔다
텔레비전 화면 속 녹이 슨 갈대밭에
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간다
길 없는 길을 떠돌다 되돌아온 물총새
유재영
詩 풀이
이 시의 시적화자는 인사동 좁은 골목에서 작자 미상의 옛그림을 보고 있다. 연잎 위를 기름종개를 물고 유유자적하게 날고 있는 물총새는 자연과 함께 자연의 일부가 되어 날고 있어 아름답게 느껴진다. 2연에서는 시인의 유년 체험과 관련되는 ‘흰 똥 묻은 검정 말뚝’이라고 하여 물총새의 흰 똥마저도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로 느껴지며, 물총새의 붉은 발목과 붉은 단풍의 유사성을 통하여 오염되지 않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연에서는 텔레비전 화면 속에 비치는 물총새의 모습이다. 1,2연에서 보여주던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닌 녹이 슨 듯한 갈대밭과 악취가 풍기는 지저분한 폐수가 흘러가는 물총새가 내려앉을 만한 공간도 없는 도시의 풍경이다.‘길 없는 길을 떠돌다 되돌아온 물총새’의 모습을 통해 환경파괴로 생존권마저 위협받는 생태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높은 서정성을 지닌 서정시면서 환경문제를 다룬 환경시라고 볼 수 있다. 또 한편 이 시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인간의 모습, 고향을 상실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유재영
충남 천안 출생. 1973년 《현대시학》과 《시조문학》에 등단. 시집『한 방울의 피』『지상의 중심』『고욤꽃 떨어지는 소리』『햇빛시간』『절반의 고요』와 명시선집『변성기의 아침』등 출간. 오늘의 시조문학상, 이호우 문학상, 편운문학상,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현재 도서출판 동학사 대표. 오늘의 시조학회장 역임.
국방일보 2005년 04월 11일
봄
유한나
어두운 지층을 뚫고
뛰쳐나오는 빛의 향연
메마른 땅에 무지개를 띄우고 있다
긴 기다림의 가지 끝에 맺히는
애틋한 그리움의 봉우리
애절한 사랑의 사연 품은
나비 한 마리,
춤추는 날개 짓으로
꽃잎 사이 날아다니며
바람결로 그려진 오선지 따라
비발디의 봄을 연주하고 있다
유한나
詩 풀이
봄이면 어두운 대지에 묻혀있던 갖가지 빛들이 땅위로 솟아오른다. 그러한 빛의 향연은 메마른 땅에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뜬다. 겨울의 긴 기다림을 견딘 나무들은 아름다운 봉우리로 꽃을 피우고 잎새를 단다. 나비들은 꽃잎 사이를 날아다니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춤을 추며 마치 바람결로 그려진 오선지 같은 비발디의 음악, 아름다운 봄을 연주하고 있다고 화자는 보고 있다.
유한나
서울 출생. 이화여대 대학원 독문과 졸업. 2008년 계간 《문학과 창작》 시부문 신인상. 시집 『아침을 여는 새』『꿈의 농부』, 수필집『라인강에서 띄우는 행복편지』 번역시집 『한국현대시』, 제4회 재외동포문학상, 2005년 번역문학상 수상.
국방일보 2008년 10월 20일
파랑새, 탱화 그리다
-월출산 무위사
윤금초
돌길 짧은 돌계단을 잠언의 발길로 내딛는다.
떠난 줄 알았던 가을이 여기 모여 앉아 논다.
덜고 또 훌훌 덜어내면 무위 극락 다다를까.
낡고 낡아 황량함도, 비좁아 옹색찮은 절집
가끔 늙은 팽나무며 은행나무 늙은 그리메가
낙낙한 묵언 수행의 안마당을 쓸고 간다.
무위사 극락보전 눈동자 없는 관음보살
먹지도 자지도 않고 창살문 걸어 잠근 환쟁이 늙은 스님, 아미타 후불 벽화에 주야장천 매달리던 떠돌이 환쟁이 그 스님. 세상에, 노승은 간데 없고 입에 붓을 물고 탱화 그리던 파랑새 한 마리, 지금 막 극락보전 관음보살 눈을 그리려다 그리려다 인기척에 놀란 새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지,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 버렸지.
무위사 관음보살은 여직도 당달봉사라나?
윤금초
詩 풀이
시인은 유홍준의 남도답사일번지에 나오는 월출산의 무위사에 대해서 쓰고 있다. 첫째 수와 둘째 수에서는 어쩌면 시인 자신의 비유일 수도 있는 가을날의 조용한 무위사 절집풍경을 읊고 있다. 셋째 수에 오면 눈동자 없는 관음보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무위사에 눈동자 없는 보살이 있다고 한다. 또한 사설시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첫째 수와 둘째 수는 평시조의 형식을 셋째 수는 사설시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한 작품 안에 평시조와 사설시조가 함께 존재하는, 형식의 옴니버스를 취하고 있다. 환쟁이 노스님이 그리려다 못 그린 관음보살의 눈, 파랑새도 그리려다 놀라 날아가 버린 그 눈, 그래서 ‘무위사 관음보살은 여즉도 당달봉사라나?’고 의문형으로 끝내고 있어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다.
윤금초
전남 해남 출생. 1966년《공보부 신인예술상》및 1968년《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조집『어초문답』『해남 나들이』『땅 끝』『이어도 사나』『무슨 말 꿍쳐 두었니』『주몽의 하늘』과 에세이집『갈봄여름없이』등 출간. 가람시조문학대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이호우문학상, 현대 불교문학상 등 수상. 민조시사관학교 대표.
국방일보 2005년 10월 17일
북한강
윤제철
가을 옷을 벗은 산 중턱에
숨어 있던 몸을 들어 내놓고
북한강 물에 비추는 그림자는
작은 물오리를 이끌고 건너간다
강물에 던져버린 마음의 쓰레기를
상류에서 하류로 끊임없는 빗질로
쓸고 쓸어도 치워지지 않고
빨갛게 물들이고 가슴을 적시던 일몰은
겨울 문턱에서 칙칙하게 문을 닫아
메마른 호흡을 갑갑하게 한다
색채가 선명하게 살아 움직이는
햇살 아래 빛깔들이 눈에 차더니
어둠이 몰려드는 강변에
걸어놓은 풍경들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상상에 얹힌 의미를 토해낸다
윤제철
詩 풀이
화자는 지금 저무는 강가에서 강을 바라보고 있다. 가을 옷을 벗은 산은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강물에 마음의 쓰레기들을 던지고 상류에서 하류로 쓸어내리지만 마음의 쓰레기들은 쉽게 치워지지 않고 겨울문턱에서 화자의 호흡을 갑갑하게 하고 있다. 그렇게 쉽게 흘려버릴 수 없는 것이 마음의 쓰레기들임을 일깨우고 있다. 밝은 햇살 아래서는 빛깔들이 선명하게 살아나지만 어둠이 오면 그것은 어둠에 묻혀 상상에 얹힌 의미만을 토해낼 뿐이라고, 어둠 속에 묻혀가는 가을강가의 모습을 보고 있는 화자는 말하고 있다.
윤제철
대전 출생. 1988년 시와 시론 시추천 등단. 시집 『고향생각 한 잎』『꼭 끼는 삶의 껍질』『나를 앉힐 공간 하나』외 (사)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사)국제펜클럽한국본부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동작문인협회 부회장. 사랑방시낭송회 상임 회원.
국방일보 2011년 05월 23일
아버지의 강
윤종남
꽃샘바람이 불면 아버지는 들로 나가
잠을 덜 깬 흙을 깨워 햇볕을 쐬게 하고
겨우내 눈 녹은 물을 논두렁에 가두셨다
천보산 그늘이 앞마당을 덮을 때면
지게에 풀내음 한 섬 지고 오는 아버지
이 봄은 먼 강을 돌아 물소리만 보내신다
도랑물 소리에도 쟁기가 먼저 풀리고
호미자루 놓지 못하는 어머니의 옹이진 손
감자꽃 하얀 웃음이 슬픔인 듯 어려온다
윤종남
詩 풀이
봄이면 누구보다 부지런히 논밭으로 나가 일을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일 년 농사를 위해 봄빛이 산에 들에 돌면 ‘잠을 덜 깬 흙을 깨워 햇볕을 쐬게 하’던 아버지셨다.
눈 녹은 물도 논두렁에 가두고 농사지을 채비를 하고, 봄빛이 푸르러지면 지게 풀을 한 짐 지고 오던 아버지. 그러나 화자가 바라보는 봄에는 아버지는 돌아가 안 계시고 그리운 물소리만 보내오신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어려 있다.
그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해 오시던 어머니, 아버지가 안 계셔도 여전히 ‘도랑물 소리에도 쟁기가 먼저 풀리’는 어머니시다. 호미 자루를 놓지 못하고 손에 옹이가 지도록 농사를 지으시는 어머니에 대한 애잔함이 ‘감자꽃 하얀 웃음이 슬픔인 듯 어려온다’고 표현되고 있다.
봄이면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는 작품이라 독자에게도 공감을 준다.
윤종남
경기 양주 출생. 1995년 문화일보 신춘, 1997년 농민신문 신춘, 시조집 <겨울귀소>. 이어도문학회 부회장 제주인뉴스 논설위원, 현재 윤종남의 시 읽기
국방일보 2006년 07월 18일
달과 함께
이근구
땅거미 짙어
쟁기놓고 들어와
늦은 저녁 식사
상추쌈 입에 넣다
열하루
고운 달님께
들키고 말았네
달도 나도 외론 행복
한 마디 말 없어도
이 한밤 길동무되어
동행하는 청한(淸閑)이여
초부는
선(禪)에 잠기고
풀벌레는 시를 읊고
이근구
詩 풀이
정년 퇴임을 하고 나서 농막에서 농사를 지으며 욕심 없이 살고 있는 시인의 넉넉한 삶이 느껴진다. 도시의 번잡한 삶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한가롭게 사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시인은 ‘달도 나도 외론 행복’이라고 읊고 있다. ‘상추쌈을 입에 넣다’달에게 들키고 마는, 달이 뜬 조용한 산골의 정경, 적막하지만 평화로운 산골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정감이 가는 작품이다.
국방일보 2006년 02월 13일
첫눈
이근덕
산새도 날지 않는 고즈넉한 첩첩 산중
적요한 산자락에 설렘이 내리는 밤
벽난로 장작불꽃은 밤새 활활 타오르고
법화경 한 소절이 고운 인연 빚었을까
감잎에 놓인 찻잔 저토록 정겨울까
은은한 설록차향이 몸에 가득 배이는 밤
솔바람 솔솔 불어 애간장을 다 녹이고
촉촉이 젖는 이 마음 하늘마저 아는지
하늘엔 흰 꽃이 피네 범종소리 퍼지네.
이근덕
詩 풀이
첫눈이 오는 산속의 정경이 잘 나타나는 작품이다. 첫째 수에서는 고요한 산속의 눈이 내리는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화자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설렘이 내리’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눈 내리는 바깥 정경과 함께 안의 정경은 벽난로의 장작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 차가움과 뜨거움의 대조이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고, 또한 서정성이 짙게 나타난다.
둘째 수에서는 설록차향을 음미하는 밤의 정겨움이, 그리고 셋째 수에서는 눈 내리는 밤의 낭만에 젖는 마음과 흰 눈이 내리는 모습을 하늘에 피는 꽃으로, 세상을 향해 퍼지는 범종소리로 묘사하고 있는, 눈 내리는 밤을 정감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국방일보 2009년 03월 30일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이근배
돌엔들 귀 없으랴 천 년을 우는 파도소리, 소리….
어질머리로다, 어질머리로다, 내 잠 머리맡의 물살을 뉘 보낸 것이냐. 천 년을 유수라 한들 동해 가득히 풀어 놓은 내 꿈은 천(阡)의 용의 비늘로 떠 있도다. 나는 금(金)을 벗었노라, 머리와 팔과 허리에서 신라 문무왕(文武王) 그 영화 아닌 속박, 안존 아닌 고통의 이름을 벗고 한 마리 돌거북으로 귀먹고 눈멀어 여기 동해바다에 잠들었노라. 천 년의 잠을 깨기는 저 천마총(天馬 ) 소지왕릉(炤知王陵)의 부름이었거니 아아 살이 허물어지고 피가 허물어져 불타는 저 신라 어린 계집애 벽화(碧花)의 울음소리, 사랑의 외마디 동해에 몰려와 내 귀를 열어,
대왕암(大王巖) 이 골짜기에 나는 잠 못 드는 한 마리 돌거북.
이근배
詩 풀이
사설시조이며, 화자는 동해 바닷속의 돌거북이다. 동해 바닷속에 있는 대왕암은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의 능이며, 나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왕의 유언을 받들어 동해바다에 수장한 유일한 바닷속 무덤이다. 화자인 문무왕은 바닷속의 돌거북으로 머리와 팔과 허리에서 빛나던 ‘금’을 벗고, ‘영화 아닌 속박, 안존 아닌 고통’의 이름을 벗고자 한다.
그러나 돌거북으로 귀먹고 눈멀어 동해 바다에 잠들었지만, 천 년을 우는 파도소리로 어질머리를 앓는다. 잠을 깬 이유로는 ‘천마총(天馬 ) 소지왕릉(炤知王陵)의 부름이었거니’라고 한다. ‘살이 허물어지고 피가 허물어져 불타는 저 신라 어린 계집애 벽화(碧花)의 울음소리, 사랑의 외마디’라고 한다.
8000점이 넘는 장신구와 1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고, 어린 계집애의 순장까지 함께 해, 당시의 영화를 상상케 하던 신라 소지왕의 무덤인 천마총 속 벽화(碧花)의 울음이라고 한다. 결국 시 속의 화자인 돌거북을 잠 못 들게 하는 것은 소지왕이 지녔던 ‘영화’와 ‘사랑의 외마디’인 ‘벽화의 울음소리’라고 한다. 이 작품은 역사의식과 사랑을 아울러 표현하고 있다.
이근배
충남 당진 출생. 호는 사천(沙泉).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1~1964년 《경향신문》《서울신문》《조선일보》등에 시조, 《조선일보》에 동시,《한국일보》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동해 바닷속의 돌 거북이 하는 말 』『한강』『달은 해를 물고』『노래여 노래여』『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등 출간. 제3회 문공부신인예술상. 가람문학상, 중앙시조대상, 한국문학 작가상, 육당문학상, 월하문학상, 고산문학대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200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국방일보 2009년 09월 21일
새가 되고 싶어요
이길원
새고 되고 싶어요
그대 가슴 호수 하늘을 훨훨 날며
춤추는 새가 되고 싶어요
하늘 화선지 삼아
난(蘭)을 치다가
둥글게 선회하다가
그윽이 바라보는 그대 눈짓에
끝없이 비상하는 새가
되고 싶어요
그대 가슴 호수엔
갈대가 자라고
때때로 지친 내가 숨어들면
그대는 따사로운 물결
새가 되고 싶어요
갈대숲에 젖은 어둠도
아침 햇살로 날리며
춤추는 새가 되고 싶어요
얼어붙은 하늘 억센 바람 가르며
자유롭게 춤을 추다가
때로는 이슬로 남는 새가
되고 싶어요
아침이 물가로 날아와
장미 햇살로 둥지를 틀면
내 춤은 환희
그대 가슴에 묻힐 거요
이길원
詩 풀이
그대 가슴 호수 하늘을 훨훨 날며 춤추는 새가 되고 싶다는 화자의 소망, 그것은 사랑하는 이에게서, 즉 사랑하는 이를 배경으로 자유롭게 춤을 추고 싶다는 것이다. 춤추다 지치면 숨어들 수 있는 따사로운 물결 같은 그대가 있기에, 아침이 물가로 날아와 장미 햇살로 둥지를 틀면 환희가 돼 그대 가슴에 묻힐 수 있기에 그 춤은 가능하다.
사랑하는 그를 무대로 끝없이 비상을 꿈꾸기도 하고, 얼어붙은 하늘 억센 바람 가르기도 하면서 마음껏 자유롭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즉 사랑하는 이가 화자 삶의 힘차고 활기찬 무대가 되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연시다. <시풀이:김민정 -시인·문학박사>
충북 청주 출생.《시문학》등단. 시집 『어느 아침 나무가 되어』『계란껍질에 앉아서』『은행 몇 알에 대한 명상』『‘하회탈 자화상』『해이리 시편』등. 월간 《주부생활》편집부장,《펜문학》주간 역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 역임
국방일보 2011년 02월 21일
마중물
이남순
살아 네 가슴에 푸르게 가 닿기 위해*
어수선한 욕망의 깃발, 하나 둘 걷어내고
무저갱 아래로 아래로 조심 조심 내려간다
지상의 교만함도 지하의 비굴함도
기꺼이 마음 열어 함께 하고 싶었네
내 먼저 너를 만나서 큰 강이 되고 싶었네
이제 길을 열어 흘러가고 흘러오고
우리 서로 비우면 이토록 깊어지나
하늘과 땅이 맞닿아 한 몸으로 출렁인다
*하순희 시 <편지>에서 빌려옴
이남순
詩 풀이
이 시의 화자는 ‘살아 네 가슴에 푸르게 가 닿기 위’한 방법으로 어수선한 욕망의 깃발을 걷어내고 악마가 벌을 받아 떨어진다는 밑바닥 없는 구렁텅이인 무저갱으로 자진해 조심조심 내려간다. 죄인처럼 스스로를 낮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제목처럼 자신의 희생으로 다른 물을 퍼올리기 위한 ‘마중물’이 되고자 함이다.
화자는 지상의 교만함과 지하의 비굴함을 걷어내고 낮은 자세로 내 마음을 먼저 열어 함께 흘러가는 큰 강이 되고 싶어 한다. 셋째 수에 오면 ‘이제 길을 열어 흘러가고 흘러오고/ 우리 서로 비우면 이토록 깊어지나/ 하늘과 땅이 맞닿아 한 몸으로 출렁인다’. 서로
가 길을 열어 교류하고 화합하면, 즉 서로를 비우면 서로가 깊어지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 한 몸으로 출렁이며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희생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내가 더 큰 인물이 되고 세상이 평화롭게 화합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남순
경남 함안 출생. 2008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국방일보 2010년 04월 29일
낙타
이달균
등짐이 없어도 낙타는 걷는다
고색한 성채의 늙은 병사처럼
지워진 길 위의 생애 여정은 고단하다
생을 다 걸어가면 죽음이 시작될까
오래 걸은 사람들의 낯익은 몸내음
떠나온 것들은 모두 모래가 되어 스러진다
모래는 저 홀로 길을 내지 않는다
동방의 먼 별들이 서역에 와서 지면
바람의 여윈 입자들은 사막의 길을 만든다
낙타는 걸어서 죽음에 닿는다
삐걱이는 관절들 삭아서 모래가 되는
머나먼 지평의 나날 낙타는 걷는다
이달균
詩 풀이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를 연상케 하는 시이며 동시에 힘겨운 삶의 모습을 낙타로 상징해 나타내는 작품이다.
고단한 여정 끝에 우리가 다다르는 것은 죽음일시 분명하다. 때문에 ‘떠나온 것들은 모두 모래가 되어 스러’지고, ‘삐걱이는 관절들 삭아서 모래가 되는’ 소멸의 날들이지만, 그러한 속에서도 ‘머나먼 지평의 나날 낙타는 걷는다’고 표현된다.
비록 힘든 삶일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걷고 또 걸으며 생을 살아내는 강인한 모습의 낙타, 즉 인생을 노래하고 있다.
이달균
경남 함안 출생. 1987년『지평』과 시집 『남해행』출간 문단 활동 시작. 1995년《시조시학》시조 신인상 당선. 시집『문자의 파편』『말뚝이 가라사대』『장롱의 말』『북행열차를 타고』『남해행』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경남문학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08년 02월 04일
오두막집행
이상범
눈 내리는 밤엔
변두리행 버스를 타자
마른 꽃 다발다발
바람의 눈망울로
흰 커튼 사이로 불빛이
손짓하는 오두막집.
소꿉 살림 창가에 앉아
시를 호호 불어대고
산냄새 살냄새 사이
시집들이 키를 재는
고뇌도 갈색으로 익어
잎이 지는 작은 방.
때로 미친 바람이
산자락을 뒤흔들어도
색종이 꼬깃꼬깃
아픈 시가 눈뜨는 곳
저물면 끈끈한 숨결이
놀라 깨는 작은 집.
이상범
詩 풀이
정겨움이 가득 느껴지는 작품이다. 눈 내리는 밤에는 변두리행 버스를 타고 그 변두리로 달려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멀리, 아스라이 산 밑의 호롱불이 비치고… 호롱불이 아니라도 따스한 전등 불빛이 새어나오는 작은 집. 그 집은 산의 냄새와 사람의 살냄새가 나는 소꿉살림을 사는 것 같은 아기자기한 집, 시집들이 키를 재며 꽂혀있는 아담하고 정겨운 집을 보러 가자는 것이다. 그곳은 미친 듯이 산자락을 뒤흔드는 겨울바람 속에서도 시인은 색종이를 접듯 아름다운 시어를 찾아 끙끙대며 시를 쓰는 곳이다. 또한 ‘저물면 끈끈한 숨결이 놀라 깨는 작은 집’이라고 하여 사람다운 삶의 숨결이 느껴지는 집, 인정이 느껴지는 집. 그런 집을 보러가자고 한다. 눈 내리는 밤의 고요하고 따스한 정서가 물씬 풍겨오는 작품이다.
이상범
충북 진천 출생. 호는 녹원(錄原). 1964년 ≪시조문학≫과 196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일식권』『가을입문』『별』『신전의 가을』『풀무치를 위한 명상』 『햇살시경』『풀꽃시경』등 출간. 한국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등을 수상. 한국시조시인협회장,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 역임.
국방일보 2011년 06월 27일
몽골 테르찌에서
이상진
테르찌 국립공원 게르 밖 아침햇살
야생화 풀벌레 소리 대자연이 숨을 쉰다
톨 강의 긴 물줄기는 바이칼로 흐르고…
쩍 마른 땡볕 속에 양떼들이 한가롭다
양치는 목동의 질주 한낮의 고요 깨고
아득한 초원의 대륙 고금(古今)이 공존한다
고원의 밤하늘서 별빛들이 쏟아진다
은하수 북두칠성 초롱초롱 환한 대낮
저 멀리 모린호르에 삶의 애환 달래며…
이상진
詩 풀이
화자가 노래하듯이 몽골의 테르찌 국립공원은 아름답다. 하얀 게르 밖에는 맑은 아침햇살이 비추고, 야생화와 풀벌레 소리가 대초원의 아침을 깨운다. 바이칼로 이어지는 톨 강의 긴 흐름도 있다.
강수량이 적은 몽골은 한낮에는 땡볕이지만, 그래서 풀도 충분히 자라지 못하지만 양떼들도 구름도 한가롭다. 가끔 목동의 질주만이 그들의 고요를 깨운다.
세계 정복을 꿈꾸었던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사는 땅은 고금(古今)의 역사가 공존하는 땅이다. 그들은 지금도 칭기즈칸을 존경하고 있어, 그의 이름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밤이면 고원의 별빛들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몽골초원.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은 공기가 맑아 더 또렷이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별빛이 빛나는 초원의 밤에 들려오는 모린호르 소리는 삶의 애환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국방일보 2010년 08월 26일
커다란 잎
이석구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뿌리였기 때문에
너는 자꾸 하늘까지
뻗는 줄기이기 때문에
단단한 껍질을 깨고
씨앗들을 풀어낸다
플라타너스 양쪽으로
가득하게 길을 덮은
내 키의 높이보다
높게 달린 잎사귀들
한 바퀴 반쯤 돌아야
손이 닿을 수 있어
길고 둥글게 만든
의자에 누웠다가
파문을 불러일으킨
나이테 둘레마다
그늘을 돌돌 만 내 몸
잎사귀가 가득하다
이석구
詩 풀이
화자는 자신의 몸이 하나의 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뿌리였다는 것이며 하늘까지 뻗는 줄기, 그래서 단단한 껍질을 깨고 씨앗들을 풀어내며 위로 위로 자라고 싶어 하는 것일까? “내 키의 높이보다 / 높게 달린 잎사귀들”이라고 하여 늘 현실보다 높은 것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말하고 있다. 연륜을 더해 가는 나이테 둘레에는 그늘만 돌돌 말고 있지만 늘 푸름을 꿈꾸며, 빛을 원하는 잎사귀가 무성함을 말하고 있다. 자신 안의 푸른 잎사귀를 화자는 관조하며 바라보고 있다.
이석구
2004년 《월간문학》, 2005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커다란 잎』
국방일보 2010년 12월 30일
모래의 여자
이송희
남자는
길앞잡이 벌레를 찾아 나선다.
빛도 없고 벽도 없는 그 황량한 미궁 속 옹글게 버틴 시간 망루를 향하고 저어기 문이 보인다 꿈이 보인다 그러나 여자의 캄캄한 모래 웅덩이 속 차가운 자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삶은 어쩌면 끝없이 암호를 풀어 가는 것일까 플러스 마이너스 알파와 오메가의 공간에서 자꾸만 모래를 퍼내고 시간을 퍼내고 나를 퍼내고 또 모래를 퍼내고… 사계절 내내 낯선 여름의 길 불가해의 길 상처의 길 모래의 길 갈고 갈며 새 길을 내는 그 길목은 밖으로만 뻗어 있다.
너와 나
시간의 손을 잡고
키워가는 소금 꽃
이송희
詩 풀이
삶의 길은 끝없는 미궁 속을 헤매며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빛도 없고 벽도 없는 그 황량한 미궁 속 옹글게 버틴 시간 망루를 향해 우리는 가고 있다. 저어기 보이는 문을 향하여, 꿈을 향하여 우리는 나아간다.
시인은 이 시에서 ‘삶은 어쩌면 끝없이 암호를 풀어 가는 것일까’ ‘플러스 마이너스 알파와 오메가의 공간에서 자꾸만 모래를 퍼내고 시간을 퍼내고 나를 퍼내고 또 모래를 퍼내고…’라고 표현해 자신에게 주어진 암호, 주어진 기호를 열심히 풀어나가며 반복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 길은 늘 낯설고, 불가해하고, 상처받고, 모래처럼 자잘하게 부서져 나가는 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 길을 갈고 갈며 새 길을 내고 있고 그 길은 언제나 밖으로만 뻗어 있다. 그러면서도 시간과 손을 잡고 가야만 하는 길이고 늘 새로운 길을 만들며 개척해 가야 하는 길이다. 이 시는 인간의 존재와 삶을 관망하는 자세로 쓴 작품이다.
한 해가 저물고 있네요. 새해에는 더 깊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장병 여러분을 뵙겠습니다. 장병 여러분! 더욱 건강하고 아름다운 새해 맞으세요.
이송희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2003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조집『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출간.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
국방일보 2005년 12월 12일
청어의 시
이승은
노릇하게 잘 구워낸 청어 살점을 뜯다
지나온 내 죄목인 양 목에 걸린 잔가시들
말 못할 저항만 같아 배앝지도 못하네
검푸는 물길 속에 넘실대던 그 자유를
목마른 식욕으로 삼켜버린 어스름녘
애꿎은 시간의 갈피에 다시 슬몃 가시는 돋고
이승은
詩 풀이
이 시는 노릇하게 잘 구운 청어를 먹다가 목에 걸린 가시가 시의 소재이다. 가시 많기로 유명한 생선 청어, 목에 걸린 청어의 가시를 화자는 ‘지나온 내 죄목인 양’하다고 하여 지나온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있다. 또한 목에 걸린 가시를 청어의 ‘말 못할 저항’만 같다고 느껴 ‘배앝지도 못하’고 있다.
검푸르게 넘실대는 바다 속에서 자유롭게 살던 청어의 삶, 그것을 식욕으로 삼킨 인간의 대변자인 화자는 시간의 갈피, 삶의 갈피에도 문득 가시가 돋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승은
서울 출생. 1979년 KBS ‘전국민족시백일장’ 장원 등단. 시집『내가 그린 풍경』 『시간의 물그늘』『길은 사막속이다』『술패랭이꽃』『시간의 안부를 묻다』『환한 적막』『꽃 밥』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한국시조작품상, 이영도시조문학상 등을 수상.
국방일보 2008년 05월 19일
할아버지 눈썹
이승현
청록의 솔잎보다 물 빠진 노엽에는
광야에 바람소리 깊은 결 녹아 있다
함부로 범접치 못할 금강송의 기개처럼
아들아,
새겨보아라
축축한 네 눈썹보다
성성한 백발 아래 카랑카랑한 저 소리
물기는
다 빠졌다만
서슬 푸르지 않는냐
詩 풀이
이승현
詩 풀이
이 작품에선 할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한다. 할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할어버지의 아들인 나(화자)가 빠져있지만, 그래도 독자에겐 삼대(三代)가 느껴진다. 첫째 수에서는 '청록의 솔잎보다 물 빠진 노엽에는/ 광야의 바람소리 깊은 결 녹아 있다/ 함부로 범접치 못할 금강송의 기개처럼'라고 지금은 늙으신 할아버지의 눈썹인데도 기개를 느끼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아들에게 얘기해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설의법의 사용으로 내용이 강조된다.
한 장의 노엽(老葉)을 할아버지에 비유하여 자칫 업수이 여길 조상들에 대한 생각을, 망각되어가는 우리의 전통인 효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강조하고 싶어하는 화자의 마음이 잘 나타난다. 무릇 역사는 온고지신의 역사이다. 조상의 슬기, 기개의 전통을 이어받으며 새롭게 역사를 창조하고, 새로운 전통과 푸른 기개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승현
충남 공주 출생. 2003년 《유심》신인상 등단. 시집『빛 소리 그리고』출간. 이호우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05년 06월 27일
바리바리 비
이영지
단비를 좋아하는 바람이 나를 본다
후두둑
마음 창을 비단비 비비대면
부비어
한 아름으로 촉촉하게 젖어라
물방울 바리바리 싣고서 나를 본다
가뭄의 눈물비에 비날개 달아주며
초록비
바리바리 비 타는 들판 젖어라
후두둑 마음창을
비단비 비비대며
비알들 물알되어
부비며 비오신다
머릿결 촉촐히 적셔 초롱초롱 해져라
이영지
詩 풀이
이 시의 화자는 비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다. 비 오는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는 이 시조는 행갈이를 자유롭게 하고 있다. 첫 수에서는 비단비 같은 단비가 내리면 마음이 촉촉하게 젖기를, 둘째 수에서는 가뭄 끝에 오는 눈물비라고 하여 비를 기다리는 들판을 적셔 초록 들판이 되기를, 셋째 수에서는 비단비를 맞고 초롱초롱한 맑은 마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곧 장마철이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비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국방일보 2006년 02월 22일
그대에게 가는 법
- 간비오산* 봉수대에서-
이옥진
가막한 산봉우리 눈 멀도록 바라보며
늑골 안 생솔가지 울면서 태우는 날
그립다 깃발 달고서 수상한 배 떠 온다.
산 너머 *남산봉수 전할 방법 이것 뿐
병든 심장 꺼내어 섶에 넣어 태우리라
솟아라 푸른 나비 떼 그대에게로 날아라.
홀연히 는개 구름 산정을 둘러치고
내 사랑 비 속에서 길을 잃어 버렸다
쉼 없이 나부껴다오 깃발 다섯 꽂는다.
*간비오산 봉수 : 해운대에 있는 봉수대
*남산 봉수 : 부산 기장군 남산에 있는 봉수대
이옥진
詩 풀이
화자는 옛날 봉수대를 보면서 '그대에게 가는 법'을 생각했다. 그대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 그것이 곧 그대에게 가는 방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멀리 있는 그대에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산정상에 불을 피우는 것, 나비떼처럼 파란 불길이 솟을 때 그대에게 소식은 전해지리라. 그런데 는개가 둘러치고, 비가 내릴 때면 그러한 방법으로도 그리운 그대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안개와 비와 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전해지기를 바라고 다섯 곳에나 깃발을 꽂는다.
봉수대는 봉홧불을 올리는 곳이다. 변란을 알리기 위해, 큰일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를 보며 화자는 산 너머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듯 표현하고 있다. 즉 산 너머의 ‘남산봉수’와 ‘그리운 그대’를 동일시하고 있어 중의법이 사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법은 독자로 하여금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하게 하는 효과적인 표현법이다.
이옥진
경남 통영 출생. 2004년 《부산시조》신인상 등단. 시조집『먼 나무 숲으로』출간. 현재 부산 수영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사)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국방일보 2006년 08월 08일
거울 2
이우걸
샘물,
그 성찰의
차가운
마음의 샘물,
아침마다 가다듬는
이 정결한 빗질 앞에서
거울은
늘 새롭구나
내 영혼 모두 비추네
불꽃 같은 욕망도 삭은 결로 내려앉고
솜털 같은 시간도 골을 파고 누워 있는
거울은 늘 무겁구나
내 남루
모두 비추네
이우걸
詩 풀이
거울은 단순히 자신의 외면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반성해 보는 성찰의 샘물 같은 것이라고 화자는 보고 있다. 그리스의 미소년 나르키소스가 샘물을 들여다 보고, 나르시시즘에 빠졌다면, 이 시의 화자는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서 정결한 빗질을 하며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며 차갑고 냉정한 시선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
그러다가 젊은날의 '불꽃 같은 욕망도 삭은 결로 내려 앉고/ 솜털 같은 시간도 골을 파고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곧 젊음의 시간이 지나간 이제 남아있는 자신속의 남루까지도 발견하게 된다. 시인은 냉정한 성찰에 의해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생에 대한 성찰과 겸허함을 이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다.
이우걸
경남 창녕 출생. 1973년 『현대시학』등단. 시집『저녁 이미지』『사전을 뒤적이며』『맹인』『나를 운반해 온 시간의 발자국이여』『지금은 누군가 와서』『빈 배에 앉아』『그대 보내려고 강가에 나온 날은』등과 평론집『현대시조의 쟁점』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등 수상. 오늘의 시조시인회의 의장 역임. 밀양교육청 교육장 역임. 현재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국방일보 2006년 05월 22일
풍장(風葬)
이원식
유리창에 갇히어
박제가 된 무당벌레
화려한 계절은
아쉬움만 남기고
창 열자 꽃잎이 되어
날아가는
칠보단장(七寶丹粧)
이원식
詩 풀이
화자는 유리창을 열다가 그 속에 갇혀 박제가 되어 있는 무당벌레를 발견하고 있다. 무당벌레의 아름다운 색상, 그 색상을 펼치며 아름답게 생활했던 지난 날 화려했던 무당벌레의 계절은 아쉬움 속에 가고…. 창문을 열자 바스라져 꽃잎이 되어 날아가는 칠보단장의 무당벌레…. 무당벌레의 죽음을 바람에 장사 지내주고 있는 화자는 곧 한 작은 미물에게도 무심하지 않는 다감한 시인의 마음이다.
우리들의 모든 과거도, 우리들의 모든 지난 사랑도 박제된 무당벌레의 모습으로 비유해 볼 수 있다. 우리의 삶도 매일매일 어제를 풍장하며, 오늘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원식
서울 출생. 성균관대 대학원 졸업. 『불교문예』시,『월간문학』시조 당선 등단. 시집『누렁이 마음』『리트머스 고양이』『친절한 피카소』『비둘기 모네』등 출간.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국방일보 2005년 09월 26일
유민(流民)의 꽃
-연변 역사 전시관
이은방
용정 연길 간도 땅에
조선민초 혼을 본다
한자락 가난한 꿈
남녘 별로 여워두고
어쩌다 표류해 가는
부평초의 역사였다
길섶에 핀 개망초꽃 이슬 젖은 웃음들이
박물관에 모여 앉아 회고록을 쓰고 있다
시공을 넘겨다보면 피흘려 온 일대기다
밀려온 탯줄을 묻고 변성의 바람이 운다
해란강 낮달로 빠진 이민사의 젖은 불빛
난파된 죽지의 악몽도 그 멀미로 시달렸다
다시금 밟으리라는 눈 먼 화신 귀향 꿈도
먼 회역 강둑에 올라 흐린 눈을 자꾸 닦고
그 무슨 천형의 길은 눈발 속에 빠져 있다
이은방
詩 풀이
이 시의 화자는 연변 역사박물관의 모습을 보고 감회를 읊고 있다. 연변에는 일제 시대 이민을 가서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인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 용정, 연길, 간도 등은 박경리의 토지에서 주인공 ‘최서희’의 남편 ‘길상’이가 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곳이기도 하며, 또 ‘선구자’라는 가곡에도 등장하는 ‘해란강’이 있는 곳이며, 우리의 많은 선각자들이 가서 독립운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이민을 간 사람들은 조선의 힘없는 민초였으며 남의 땅에 가서 그곳을 개척하며 힘겹게 살아온 것이다. 그들의 역사를 모아놓은 ‘박물관’을 살펴보며 화자는 ‘시공을 넘겨다보면 피 흘려 온 일대기다’라고 표현하여 그들의 힘들었던 삶을 아파하고 있다.
국방일보 2005년 07월 25일
질경이
이인웅
전생에
무슨 죄로
밟혀만 사는 건가
기름진 땅
마다하고
길가에 뿌리내려
한 평생
꺾이는 아픔
길들이고 있으니
이인웅
詩 풀이
시골 길가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질경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 어디에서나 쉽게 자라고 뿌리 깊게 내려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기름진 땅에서보다 척박한 땅에 더 잘 자라는 습성이 있다. 생활력이 강하다고 ‘질경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아니면 잎맥의 줄기가 질겨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다. 4월 초순에서 봄․여름에 걸쳐 잎과 뿌리를 뜯어다가 데쳐서 쌈을 싸 먹기도 하고 무쳐서 나물로 먹기도 하고, 5월 상순에 다량채취하여 말렸다가 식용하는 구황식물이기도 하다. 또 어렸을 때는 그 잎맥의 줄기를 뽑아내서 누구 것이 질긴가 내기하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시의 화자는 ‘기름진 땅 마다하고 길가에 뿌리 내려’ 오가는 이의 발에 밟히고 꺾이면서도 강한 생활력을 지닌 질경이의 삶을 안쓰러워하고 있다.
이인웅
전북 정읍 출생. 1998년 월간 《한국시》 시조 당선 등단. 향토사 연구,
포천문인협회 이사, 포천노인복지관 문인반 강사,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국방일보 2004녀 04월 13일
빗방울의 노래
이인자
그늘진 하늘자락 한 꺼풀 벗겨내고
투명한 별빛 모아 숨결로 스며들면
또로롱
풀잎 끝마다
눈을 뜨는 초롱꽃
닫혀진 가슴 열고 희망을 꿈꾸는 날
은물결 찰랑찰랑 하늘과 입 맞추면
잔잔한
선율을 타고
피어나는 방울꽃
이인자
詩 풀이
빗방울의 모습을 초롱꽃, 방울꽃에 비유해 표현한 귀엽고 사랑스런 작품이다. 비가 내림으로써 구름진 하늘은 마치 한 꺼풀 그늘을 벗는 산뜻함을 지니게 될 것이고, 그 비를 맞는 풀과 나무들은 싱그러움을 더할 것이다. 그 비는 바로 투명한 별빛을 모아 만들어진 것, 그리하여 비를 맞은 풀잎들은 풀잎 끝에 귀여운 물방울 초롱꽃을 단다.
둘째 수에서는 비가 내리는 날 닫혔던 가슴도 열고 희망을 꿈꾸어 보는 물결은 비를 통해 하늘과 입맞춤을 한다. 그 황홀감은 잔잔한 선율을 타고 방울방울 방울꽃으로 피어난다. 조용히 비가 내리면서 물결 위로 아름답게 파문이 번져나는 모습을 방울꽃으로 표현하여 표현의 참신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인자
서울 출생. 아호 여심(여심). 2002년 《시조문학》신인상 등단. 작품으로「노을」 「부치지 못한 편지」「빗방울의 노래」등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사)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씨얼문학, 펜넷문학 회원, 한국예술가곡연합회 회원
국방일보 2008년 12월 22일
애월(涯月)에서
이일향
수평선 저쪽에서
누가 나를 기다리나
절벽은 여기 있는데
달은 아직 뜨지 않고
파도만
어둠을 몰고 와
발 밑에 부서지다
지는 해 바라보며
갈대는 목을 꺾고
뜨는 달 기다리다
돌처럼 굳은 슬픔
쌓았다
허무는 모래성
바람이 쓸고 있다
이일향
詩 풀이
지금 화자는 제주 애월의 바다를 보고 있다. 가고 없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회한에 잠기고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절벽 위에 달이 뜰 때도 되었는데 달은 뜨지 않고 파도만 어둠을 몰고와 발 밑에 부서지고 있다고. 달이 뜨기만을 기다리며 살아온 세월은 어쩌면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허무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끊임없이 부서지면서도 다시 밀려오는 파도처럼 삶은 또 그렇게 이어져 가는 것이다. 1년이 끝나가고 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자신을 반성해 보고 더욱 발전하는 새해를 기대해 보자.
작가는 현재 한국여성시조문학회 회장. 신사임당상·중앙시조대상 신인상·정운문학상·윤동주문학상 우수상·노산문학상 등. 시집으로는 ‘지환을 끼고’ ‘시간 속에서’ ‘목숨의 무늬’ ‘그 곳에서도’ 등이 있다.
이일향
경북 대구 출생. 1983년 시조문학 추천 완료. 시집 『아가(雅歌)』『지환을 끼고』『세월의 숲 속에 서서』『밀물과 썰물 사이』『석일당 시초』『구름 해법』『시간 속에서』『목숨의 무늬』『그곳에서도』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윤동주문학상. 노산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등 수상
국방일보 2009년 09월 28일
후박나무에게
이정환
너의 그늘은 기름지고 치렁치렁해 잎사귀에 볼 부비면 눈물 머금게 된다
이제는
죽어도 좋을
남도 여름날 한낮
후박나무여 후박나무여 완도 수목원 앞뜰을 지키고 선 후박나무여
찰진 잎사귀들을 온 사방으로 펼쳐 놓고 눈길을 붙잡은 채로 놓아줄 줄 모르는, 예순 날 예순 밤을 붙들어 두고 싶은, 마주 껴안고 깊숙이 연리목이고 싶은 후박나무여 네 앞에 서기까지 참고 기다려 온 반백 년
다시금
반백 년의 날을
네 그늘에 묻혀 갈지니…
이정환
詩 풀이
후박나무란 이름에서는 왠지 후덕함이 느껴진다. 넓은 잎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까. 이 시에서의 후박나무는 후박나무의 덕성을 지닌 인물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아마도 후덕한 덕을 지닌 여인일 것이다. “예순 날 예순 밤을 붙들어 두고 싶은, 마주 껴안고 깊숙이 연리목이고 싶은 후박나무”인 것이다. 화자의 아내 또는 연인에 대한 상징이다. 이 때문에 화자는 “다시금/ 반백 년의 날을/ 네 그늘에 묻혀 갈지니…”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풀이:김민정 -시인·문학박사>
이정환
경북 대구 출생. 1981년 《중앙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분홍물갈퀴』『물도 잠잔단다』『별안간』외 다수 출간.
국방일보 2010년 05월 13일
봄날도 환한 봄날
이종문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호연정(浩然亭) 대청마루를 자질하며
건너간다
우주의 넓이가 문득, 궁금했던 모양이다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호연정(浩然亭) 대청마루를 자질하다
돌아온다
그런데, 왜 돌아오나
아마 다시 재나 보다
이종문
詩 풀이
자벌레가 대청마루를 지나가는 모습이 꼭 대청마루를 재고 있는 모양으로 화자에게 비친다. 그것은 곧 우주의 넓이가 궁금해 재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호연정의 대청마루는 우주의 넓이가 된다. 그러다가 자벌레는 호연정 마루를 다시 돌아오는데, 화자는 그것을 대청마루를 다시 재고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자벌레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는 화자의 모습은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외를 느끼게 하고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사물은 보는 사람에 따라 깊게도, 옅게도 해석됨을 이 시조에서는 관찰할 수 있다.
이종문
경북 영천 출생. 고려대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93년 《경향신문》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저녁밥 찾는 소리』『봄날도 환한 봄날』『정말 꿈틀, 하지 뭐니』등 출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한국시조작품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현재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국방일보 2005년 04월 18일
해남에서 온 편지
이지엽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칸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달랑하고 지난 설에도 안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룽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안 그러냐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 잔 혔다 지랄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이지엽
詩 풀이
딸이 수녀원에 들어간다는 편지를 받고 나서 보내는 어머니의 편지형식 사설시조이다. 이 시조의 화자는 남편은 먼저 보내고 자식들은 멀리 도시로 나가 있어 외롭게 농사를 지으며 홀로 사는 시골의 어머니이다. 수녀원에 들어가겠다는 딸에게 인편으로 쌀을 보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푸념과 수녀가 되겠다는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보고픔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아들딸을 보고 싶어하며 외롭게 혼자 사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 작품의 종장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라는 사투리 속에 진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지엽
전남 해남 출생. 성균관대 대학원 문학박사. 1982년 《한국문학》,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씨앗의 힘』『샤갈의 마을』『다섯 계단의 어둠』『해남에서 온 편지』『떠도는 삼각형』『북으로 가는 길』등과 연구서『한국 현대문학의 사적 이해』『한국 전후시 연구』등 출간. 한국시조작품상, 중앙시조대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현재 경기대 국문과 교수.
국방일보 2004년 12월 13일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이청화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깊은 산 깊은 골에 산꽃처럼 피워 둘까
다섯 개 구멍을 뚫어 피리로나 불어 볼까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밤 뜨락 그대 날 찾아 풀벌레를 울려 놔도
난 고작 못물을 돌며 돌맹이나 던질밖에
말로써 말할 수 없는 한 마음이 있나니
씨앗처럼 떨구어서 바윗결에 심어두면
이 바위 금방 신령해 무지개가 돋아날까
이청화
詩 풀이
불교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한다는 말이다. 때로 입으로 하는 말보다 마음으로 하는 말이 더 오래갈 수도 있고 더 깊을 수도 있다. 말로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도 있고, 또 언외언(言外言)의 경우도 있다. 진심어린 마음을 담은 행동은 말보다 더 진실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도 하다. 이 시에서 화자는 차마 말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청화
1977년 《불교신문》신춘문예에 시조「 미소」당선 등단. 1978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시조 「채석강 풍경」당선. 1988년 산문집 『돌을 꽃이라 부른다면』출간. 씨얼문학 동인.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장 역임. 청평사 주지 역임.
국방일보 2008년 10월 06일
가을이 뚜벅뚜벅
이혜선
그녀는 입넓은 오지항아리에 꽃을 꽂고 있다
그녀 파란 물무늬위에
쏴아 물결이 인다
까만오지항아리안에서
샛노란 새들 한 무리 날아오르더니,
푸득푸드득 먼바닷물결이
새들의 날개아래로 출렁거린다
가느다란 가을손가락엔 경련이 일고 있다
천장에선 쇳소리내며 선풍기가 돌고 있다
벌써 문밖에선
큰걸음으로 뚜벅뚜벅 그가 걸어오고 있다
이혜선
詩 풀이
가을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 뚜벅뚜벅이 아니라 성큼성큼……. 영원히 가지 않을 듯 하던 더위도, 산들산들한 가을바람 앞에 어느 덧 자취를 감추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여름이 길어지고 있지만, 계절은 변함없이 찾아온다.
푸른 나뭇잎도 붉게 또는 노랗게 물들어 간다. 가을의 상징인 그녀와 그, 한편으로 가느다란 손가락에 경련이 일듯 섬세함으로 오지항아리에 꽃을 꽂듯 아름답게 산천을 수 놓는 가을, 그녀와 다른 한 편으로는 큰걸음으로 뚜벅뚜벅 가을 속으로 점점 깊이 걸어오는 그를 만난다. 아름다운 코스모스길과 벼 익는 논밭풍경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마음도 단풍처럼 곱게 물들고 황금벌판처럼 풍요로움으로 물결치는 가을날이다.
이혜선
문학박사.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감사. 강동문인회 회장역임. 자유문학상, 현대시인상, 선사문학상 수상. 시집: 『신 한 마리』,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 『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
국방일보 2010년 06월 10일
자귀꽃
임성구
연분홍 공작새 소쌀밥나무에 앉았다
날개를 펼칠 때마다 들려오는 워낭소리
투명한 마을들이 꿈꾸던
유년의 시작 노트 같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아련한 기억들
분녀의 웃음소리 가득한 산모롱이쯤
한가득 꽃짐을 지고 떠난
등이 굽은 아버지여
단절된 과거와 소통하는 유월 하순
낡은 카세트에서 흘러나온 노래에 맞춰
바람이 몸을 씻는다
막차 떠난 여음(餘音)을 물고…
임성구
詩 풀이
그 향기롭던 아카시아꽃도 피었다 지고, 밤꽃이 피어나는 6월이다. 어쩌면 봄도 없이 성큼 여름이 온 듯한 요즈음의 고온 날씨, 한 송이 자귀꽃이 피듯 계절은 피어난다.
이 시에 나타나는 자귀꽃의 모습은 마치 ‘연분홍 공작새’가 소쌀밥나무에 앉은 모습이다. 그 꽃이 피어나 바람에 날릴 때면 공작새가 날개를 펼치듯 아름답고 소의 목에 달아 놓은 워낭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화자는 이 꽃 속에서 어린 날의 아련한 기억을 되살리고, 아버지의 등 굽은 생애도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단절된 과거와 소통하고 있는 자신을 ‘낡은 카세트에서 흘러나온 노래에 맞춰 바람이 몸을 씻는다’고 표현한다.
임성구
경남 창원 출생.1994년 《현대시조》로 등단. 시집『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등 출간. 제14회 경남시조문학상 수상. 현재 (사)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차장.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국방일보 2009년 08월 17일
아버지의 바다
임성화
성난 파도 앞에 근육질이 살아난다
빛나는 작살 끝에 툭툭 튀는 구릿빛 생애
몇 해리 두고 온 고향 낮달로 돋아난다
집어등 불빛 쫓아 일상을 입질하던
풀려나간 삶의 궤적 밧줄을 되감아도
그물에 장미 꽃잎만 부서지며 오는 아침
만선의 기쁨도 잠시 실어증에 걸린 폐선
소금 친 지난 청춘 해무를 피워 물면
내항에 낮게 깔리는 뱃고동의 실루엣
좌판대에 몸을 굳힌 등 푸른 고기떼들
난바다 가로질러 회귀를 꿈꾸고 있다
흰 눈발 툭툭 쳐내는 저녁 불빛 아래서
임성화
詩 풀이
1999년 IMF 시절의 작품이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내일에의 희망을 꿈꾸고 있다. “난바다 가로질러 회귀를 꿈꾸고 있다/ 흰 눈발 툭툭 쳐내는 저녁 불빛 아래서”라는 표현에서 살아있는 싱싱한 바다, 역동적 힘이 느껴지는 시다.
삶이란 바다는 우리가 수없이 투망질을 거듭하는 곳이다. 그것은 “풀려나간 삶의 궤적”이며 “밧줄을 되감는” 반복적인 작업인 것이다. 만선의 기쁨보다 절망이 더 많을 수도 있는 우리들의 삶이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는 삶에 대한 자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임성화
경북 청도 출생 . 《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 등단. 2004년 《문예사조》에 동시 당선 . 시집『아버지의 바다』출간. 성파시조문학상 수상.
국방일보 2004년 07월 26일
대숲에 사는 바람
임종찬
대숲에 사는 바람은
사서삼경을 다 외는지
있는 듯 없는 듯이
살은 듯 죽은 듯이
세월에 나부끼면서
걱정없이 살더라
왕대밭에 왕대바람
퉁소대롱을 빠져나와
동구밖 미루나무
까치알을 굴리더니
어느새 대숲에 와서
살 비비며 살더라
세월이 심심하면
대숲으로 갈 일이다
대숲에 사는 바람
걱정없는 흔들림을
우리도 조금은 배워
몸 흔들며 살 일이다
임종찬
詩 풀이
대숲에 사는 바람은 늘 여유가 있다. 인간들처럼 공부에 쫓기지 않고 이미 사서삼경도 다 외워 넉넉하게 세월에 나부끼면서 있다. 바람은 왕대밭에 가면 왕대와 어울리고 또 어느새 빠져나와 동구밖 미루나무 까치알을 굴리더니 또 대숲에 와서는 대와 살 비비며 살고 있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바람은 아무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그저 넉넉하고 자유롭고 평화롭다. 셋째 수에 오면 바람은 남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흔들고 있다. 대숲의 바람소리, 그 소소한 바람소리는 바로 우리들 삶의 여유로움이다. 스스로를 흔들면서도 꼿꼿하게 서는 대나무, 그리고 그 대와 어울리며 대숲소리를 만들어 내는 바람의 여유와 조화, 자연에게서 인간은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임종찬
국방일보 2011년 04월 11일
서바이벌 게임
임채성
내 표독의 눈동자에 포박된 새 한 마리
털빛 하얀 가슴 복판 그 심장을 겨냥한다
타당, 탕!
파열음 속에 피를 쏟는 저녁놀
그러나 쓰러진 건 살진 새가 아니었다
풍선 같은 배를 안은 르완다의 소년병
더러는 바그다드의 히잡 찢긴 소녀였다
더딘 걸음 종종거리다 길 잃은 비둘기 떼
날 선 긴장 헝클어놓는 이 시대 허상 앞에
앙다문 입술을 뚫고 들숨 날숨 엇갈리고
장전된 거리만큼 한 생이 밀려날 때
검지 끝 감아 도는 저릿한 살의 하나
어스름 포복하는 숲
다시 총성이 울린다
임채성
詩 풀이
‘장전된 거리만큼 한 생이 밀려날 때/ 검지 끝 감아 도는 저릿한 살의 하나/ 어스름 포복하는 숲/ 다시 총성이 울린다’는 시구를 읽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의 삶은 분명 서바이벌 게임은 아닌데, 지구 한 구석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 실감난다. 그런 속에 서바이벌 게임처럼 쉽게 사람을 죽이고, 죽고 있다. 리비아 내전에서도, 또 다른 전쟁에서도, 당장 우리의 남북 현실에서도….
사람을 죽이지 않고,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하면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방법이 있다면 우리는 그 방법을 우선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목숨은 고귀한 것이고, 누구에게나 소중하며 존중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채성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세렝게티를 꿈꾸며』. 21세기 시조동인
국방일보 2008년 06월 23일
세포자멸사를 생각하며
장명웅
육십 조(兆) 한 목숨의 가녀린 세포덩이
갈래갈래 쓰임새 따라 맡은 일 다 달라도
정겹게 밀고 당기며 끌고 가는 수레바퀴.
거친 광야 아우르며 굽이굽이 재를 넘고
골골이 쌓인 응어리 흔적 없이 삭혀 주며
허욕의 너울 벗고서 홀로 걷는 의로운 길.
후미진 자갈밭 길 수신호로 알려주며
지켜야 할 식솔들이 어려움 당할 때면
한 목숨 버려서라도 구해내는 참사랑.
장명웅
詩 풀이
의학적인 면에서 시조의 소재를 찾았기 때문에, 소재 면에서 매우 신선하다. 우리 몸의 세포를 소재로 작품을 쓰고 있어 다른 시조에서 맛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신선한 느낌과 감동이 느껴진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 무심히 살고 있지만, 우리 몸 안에서 순간순간 세포는 죽고, 생겨나고… 반복하면서 하루를 살아간다.
이 작품은 자기를 희생하며 참사랑을 구현하는 신비로운 인체의 세포자멸사를 예찬하고 있다. 자기의 기능을 다 한 후에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는 희생이 있기에 우리는 건강한 몸으로 새로운 세포를 만들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사회에도 세포자멸사와 같이 자기희생으로 남을 살리는 미담이 많기를 바라는 시인의 아름다운 마음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장명웅
부산 출생. 2004년 《국제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 『물 파랑 치는 날갯짓』시인, 의학박사.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역임.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열린시조학회 부회장, 부산시조시인협회 회원.
국방일보 2010년 01월 28일
추전역
장중식
하늘 아래 첫 정거장 태백선 간이역엔
팔백오십 고도만큼 하늘 길도 낮게 열려
소인도 없는 사연들 눈꽃으로 날린다
한 때는 그랬었다, 무청 같이 시리던 꿈
처마 끝 별을 좇아 시래기로 곰삭을 때
산비알 삼십 촉 꿈이 온 새벽을 열었다
화전밭 일구시며 석 삼년을 넘자시던
이명 같은 그 당부 달무리로 피고 질 때
사계(四季)를 잊은 손들은 별을 향해 떠났다
자진모리 상행철로 마음이 먼저 뜨고
구공탄 새순마다 붉은 꽃이 피어날 때
그 얼굴 다시 살아나 온 세상이 환하다
장중식
詩 풀이
추전역(杻田驛)은 강원도 태백시에 해당하는 역이며 해발 855 미터에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철도역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기차역의 정상이다. 고한역과 태백역 사이에 위치하며 2008년부터 모든 정기 여객열차가 무정차 통과하는 역이다. 1973년 인근 장성 탄광에서 나는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완공되었으며, 한 때 화전과 석탄채굴로 고단한 삶을 영위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겨울철에만 하루 두 번 관광목적의 "눈꽃열차"가 정차한다. 지금은 열차가 서지 않는 그 역엔 ‘소인도 없는 사연들’이 눈발로나 날리고 있는 적막한 풍경을 보여준다. 화전밭을 일구며 살던 간이역 풍경, 그러나 겨울이면 ‘그 얼굴 다시 살아나 온 세상이 환하다’고 한다.
장중식
강원 영월 출생. 제1회 역동 신인문학상 당선. '뉴시스 통신’ 기자 역임. 현재 충청일보 대전주재기자.
국방일보 2005년 12월 05일
법주사
장지성
골도 깊은 골을 속리라 이름 하고
석등에 불을 밝혀 깨우친 누리라면
불이문 안과 밖에는 마음 넘쳐 비울 것도
탑돌이 후광 속에 기척 없이 오신 대불
오리숲 한나절에 되려 눈이 감아지네
적막도 시방 피는가 쇠북 소리, 그 파장…
빗장 푼 대웅전은 죄업들도 시름인 양
추켜올린 하늘 한점 기왓장에 골을 치고
그림자 밟히지 않는 인간 꿈은 어디인가
장지성
詩 풀이
속세를 떠난 곳에 ‘속리(俗離)’는 존재한다. 인간세를 떠난 속리, 그 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법주사. 석등에 불을 밝히며 깨우치는 세상, 속세와 속리가 둘이 아니듯이 마음은 넘칠 것도 비울 것도 없음을 깨닫고 있다. 탑돌이를 하다가 보면 대불은 어느새 내 안에 있다. 마음을 깨우치면 그가 곧 부처이고, 오리숲을 걷다보면 부처처럼 눈이 감기고, 적막 속에 울려 퍼지는 쇠북소리…. 모든 죄업을 받아들이려는 ‘빗장 푼 대웅전’에 하늘은 기왓장에 골을 치고 있다. 속세를 떠난 곳, 속리(俗離)에 와서, ‘그림자 밟히지 않는 인간 꿈은 어디인가’라고 하여 결국 이 세상 어느 곳도 속리가 되지 못함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장지성
충청 영동 출생.《시조문학》21집「과수원마을」로 3회 추천. 시조집『풍설기』『겨울 평전』『제목을 팽개쳐 버리고 싶은 시』『꽃 진 자리』등 출간. 정운문학상. 월하시조문학상. 시조시학상 수상. 한국 문인협회 이사. 계간『시조문학』심사위원
국방일보 2008년 04월 07일
한강
전재동
한강을 마시고 자라는
사람들의 심장에는
또 하나의 한강이 있다.
붉은 피 심장마다에
한강은 소리치고 굽이치고 있다.
꽃도 구름도 한 줄에 엮어
하늘도 땅도 함께 적시며
심장에 흐르는 한강
강물이 바람에 뛰어들면
언어의 물방울로 떨어지고
드디어 안개로 녹아들어
다시 심장으로 들어간다.
한강을 함께 마시는 우리는
눈빛도 언어도 사랑도
같은 길을 달리고 있다.
물위에 흐르는 빛은
새 얼굴이 되어 일어서고 있다.
전재동
詩 풀이
예부터 강 주변에서 인간은 살아왔고, 강 주변을 중심으로 인류의 문명이 발달되어 왔다. 또 강을 중심으로 국경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고구려와 백제도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번 전쟁을 하기도 했다. 한강은 우리의 아름다운 강이고 옛이름은 아리수이다.
강이 도심을 흐르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한강은 무척 크고 아름다운 강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하나의 강으로 흐르는 한강은 서울시민의 식수가 되고, 공업용수가 되고, 수력발전소의 물이 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붉은 피 심장마다에 / 한강은 소리치고 굽이치고 있다.’고 하며 한강은 그 물을 마시는 사람들의 심장에 흐른다고 한다. 한강은 서울 시민들의 몸속에서 피돌기로 돌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한강물을 함께 마시는 우리는, ‘눈빛도 언어도 사랑도 같은 길을 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 같은 시대, 같은 양식, 같은 범주 안에서 우리는, 우리민족은 살아가고 있다.
전재동
경북 경주 출생. 시집 『물의 철학』『한강』외 42권, 수필집 『사랑의 진실』외 12권 출간. 시인. 문학박사.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 역임. 한양대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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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 2010년 04월 08일
봄, 수묵화
정경화
다시는 피지 않을 마음의 등(燈)을 닦아
차가운 심지마다 먹을 갈아 불 붙입니다.
붓끝을 설레게 하는 저 색색의 향연들.
초승달빛 훔쳐다가 만삭이 된 벚꽃 망울과
천년의 고요를 숨긴 산사 뒤뜰 목련 그늘
먼 하늘 별빛 한 자락 추녀 끝에 그립니다.
솔새ㆍ박새 울음소리 여백 한 켠 적셔 오고
희미한 외길에선 사람 하나 오지 않아도
어느 새 화선지 가득, 물소리 들립니다.
정경화
詩 풀이
지난 겨울은 유난히 눈도 많고 추위도 심했는데, 오는 봄도 더뎠다.
기다릴수록 봄은 늦게 오는 것인지….
3월에도 펑펑, 철없는 눈이 계속 내리더니, 그런 속에서도 준비돼 있던 봄은 4월이 되니 성큼 다가와 보란 듯이 피어난다. 개나리도 활짝 피고, 목련도 어느새 활짝 피어 눈부신 봄날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봄의 수묵화를 그리고 있는 화자의 모습에서도 봄이 깊숙이 다가왔음을 보여준다. ‘붓끝을 설레게 하는 저 색색의 향연들’, ‘만삭이 된 벚꽃 망울’과 ‘화선지 가득 물소리’도 들려온다.
설레는 봄이 다가와 한창 전개되고 있는 봄날이다.
정경화
경북 대구 출생. 2000년《월간문학》, 2001년 《동아일보》, 《농민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풀잎』출간. 이영도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
국방일보 2009년 08월 31일
안개
정공량
멀리
세상 밖으로
자라나는
탄성의 잎들
조용히
꿈꾸고 있는
폭풍의
심장 하나
돌들의
거친 날개에
실핏줄,
힘을 겨눈
정공량
詩 풀이
‘안개’에 대한 표현이 다른 작품과 사뭇 다르다. 제목을 안 보고 작품만 읽는다면 안개를 표현했다고 보기 힘든 작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범주의 안개에 대한 설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개를 ‘세상 밖으로 자라는 탄성의 잎들, 조용히 꿈꾸고 있는 폭풍의 심장, 돌들의 거친 날개에 힘을 겨눈 실핏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인의 상상의 폭이 넓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안개는 보드랍고 금방 사라지는 모습의 안개가 아니라 힘 있는 실핏줄 같은, 언제 폭풍을 몰고 올지 모르는 폭풍의 심장 같은, 역동적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정공량
전북 완주 출생. 1983년 《월간문학》신인상 등단. 시집『우리들의 강』『절망의 면적』『기억 속의 투망질』『세상의 뜬소문처럼』『내 마음의 공중누각』『꿈의 공터』『마음의 정거장』『마음의 양지』, 시조선집『꿈의 순례』등 출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광명지부장 역임.
국방일보 2004년 01월 20일
바람의 숨결
정근옥
달빛의 서슬에
마음을 베이어
쓰라린 가슴 잠들지 못하는 날
진흙 속에서
어여삐 고개를 내밀고
환한 미소를 짓는 연꽃같은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눈 내리던 샤갈의 마을에
눈이 그치고
바람만이 생생히 살아
눈부시어 잠들지 못하고 헤매일 때
별들이 눈을 뜨고
아름다운 이승의 강물을 내려다 볼 때
나는
강물처럼 흐르는
바람의 숨결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뜨거운 숨결도 들었습니다
정근옥
詩 풀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참으로 많은 상처를 받게 된다. 작은 말 한마디에도 깊은 상처를 받고, 반대로 작은 말 한마디에도 기쁨이 넘치는 것이 인간의 나약한 마음이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아니면 사랑에서 상처를 받아 괴로울 때 진흙탕 속에서조차 맑게 피는 환한 미소를 짓는 연꽃 같은 얼굴을 발견한 기쁨을 위 시는 노래하고 있다. 그리하여 강물처럼 편안히 순리처럼 흐르는 바람의 숨결, 그것은 곧 당신의 뜨거운 숨결임을 깨닫는다. 새로운 만남의 기쁨, 발견의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삶에서 인연의 중요성, 만남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정근옥(
『한국시』 신인상으로 등단. 시인. 문학박사.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한국본부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서울교원문학회 회장. 탐미문학상, 열린문학상 수상. 현재 상계고등학교 교장, 시집 거울 속의 숲, 가을 산사나무 앞에서 외
국방일보 2011년 03월 07일
동백꽃
정기영
말 없어도
내 다 안다
네 마음 붉은 것을
야무진 봄
꿈꾸며
엄동 견딘 그 속내도
결국은
온 몸 태워낼
숨 막히는 그 절정도
정기영
詩 풀이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시인의 사물에 대한 깊은 천착이 느껴진다. 한 송이 뜨겁게 피어날 동백을 보며 시인은 그 붉은 동백의 마음을 읽고 있다. 한 송이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기 위해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며 엄동을 견뎌내는 동백꽃의 인내와 고뇌를 생각하고, 그 깊은 의지와 속마음을 또한 생각하고 있다.
언 땅에서 물을 빨아올려 추운 겨울 눈 속에서도 붉게 꽃을 피우는 동백꽃. 시인은 그 동백을 들여다보며 ‘말 없어도 내 다 안다 네 마음 붉은 것을/ 야무진 봄 꿈꾸며 엄동 견딘 그 속내도/ 결국은 온몸 태워낼 숨 막히는 그 절정도’라는 표현으로 온 열정을 사루어 자신의 몸을 태우며 활짝 만개해 절정을 보여줄 아름다운 동백꽃의 개화를 기다린다. 아니 확신하고 기대하며 축원하는 시인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동백꽃을 사람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서정주의 ‘선운사 동백’이란 시가 생각난다. 여수 오동도에서 본 동백, 해남 대흥사에서 본 동백, 남해 한려수도 주변의 동백, 통영 달아공원 일주도로에서 본 아름다운 동백꽃을 떠올려 본다. 지금쯤 아름답게 피고 있을 것이다. 악천후의 꽃샘 추위 속에서도 바야흐로 봄이 오고 꽃은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다.
정기영(
국방일보 2004년 11월 15월
경춘선·1
정남채
선연한 새벽안개 가르며 섬이 뜬다
북한강 허리 감아올린 비둘기호 등을 따라
물새떼 눕는 수평으로
기지개 켜는 아침
왁자지껄 웃음 묻힌 지폐 한 장으로
김밥 한 줄, 달걀 한 줄 비우던 유년의 시간
백양리(白楊里) 덜커덩 덜커덩
무동 태워 보낸다
종착지 알리는 방송, 졸던 아이 눈 뜬다
창틀 앉은 고추잠자리 아이 눈과 마주친다
눈알을 서로 굴리다
자릴 뜨지 못했다
정남채
詩 풀이
경춘선을 타고 가는 기차여행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는 시다.
첫째 수에서는 경춘선을 타고 가며 바라보는 북한강의 아침 모습이다. 새벽안개 속에 섬은 뜨고, 기찻길과 함께 수평으로 다가오는 북한강의 안개 낀 아침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고 하여 아름다운 아침강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기차간 안에서의 어린 시절의 풍경이다. 왁자지껄한 웃음과 함께 김밥과 달걀을 사 먹으며 즐겁던 시간, 백양리를 지나며 아름다운 지난날을 추억하고 있다. 셋째 수에 오면 기차여행의 종착지에 도착한 화자의 어린 시절, 아이가 등장한다. 그 아이는 창틀에 앉은 고추잠자리를 발견하게 되고 고추잠자리와 눈맞추다가 내려야 하는 것도 잊고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천진한 동심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화자는 지금 경춘선을 타고 가며 현재의 북한강 아침 모습을 보며, 또 경춘선을 탔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여 동심이 살아나고 있는 아름다운 시이다.
정남채(
국방일보 2006년 04월 05일
목련, 너 너는
정성채
부스스 일어서며
너의 웅크린 겨울
솜털로 떨고 있지
제 속의 자랑
저리 감추고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준비하는 속으로의 열정
가슴에 담고 담아
인생의 고단한 긴장
모처럼 풀어헤쳐
튀밥 터지는 분주함으로
뜨거운 가슴
풍성히 열어야지
내일을 심어
희망으로 속내 다 보이며
스러지고 있다 영원히.
정성채
詩 풀이
눈부시게 하얀 순결처럼 피고 있는 봄꽃의 여왕, 목련. 화자는 목련송이의 모습을 ‘웅크린 겨울이 솜털로 떨고 있는’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한 가운데서 묵묵히 준비하는 속으로의 열정으로 인생의 고단한 긴장을 참고 기다렸다가 때가 되면 하얗고 눈부시게 튀밥처럼 터지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생명으로 표현하고 있다.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며 아름답게 피었다가 또한 금방 스러지는 목련, 하지만 그 스러짐을 화자는 ‘내일을 심어’라고 하여 희망으로 보고 있다. 꽃의 짐은 내년을 기약하는 기다림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목련이 피는 4월, 국군장병들께도 아름다운 봄날이기를 기원해 본다.
정성채(
국방일보 2008년 09월 22일
시집을 읽는 시간
정수자
지금은 무릎 접고 시집을 읽는 시간
시정의 말 갈피를 영혼으로 닦아낸
으늑한 내통의 길에 혼을 깊이 들이듯
그가 걸은 우주에 나를 포개는 시간
바닥을 길어낸 듯 피 묻은 자리마다
말들의 음핵을 찾아 살뜰히 헤매는 밤
우주의 오솔길에 시의 알을 슬 동안
그 안팎 온 말들이 다시 붙어 노닐고
내 안도 저와 같아야 밤새 붉어 뛰놋다
정수자
詩 풀이
제목에서 보여주듯 타인의 ‘시집을 읽는 시간’이다. 어느 한 사람의 시집에는 그 사람이 지금껏 겪어온 삶이 녹아 있고, 닦아온 언어의 조탁이 있고, 그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한 권의 시집에는 그러한 작품을 쓰기 위한 그 사람만의 고통의 시간이 있다. 그래서 화자인 시인은 다른 사람의 시집을 읽으며 ‘그가 걸은 우주에 나를 포개는 시간’을 갖는다. 한 권의 시집 속에는 그 시인이 걸어온 온 우주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바닥을 길어낸 듯 피 묻은 자리마다/ 말들의 음핵을 찾아 살뜰히 헤매는 밤’이 된다. 화자는 한 편의 시 쓰기가 얼마나 고통인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도 그러한 고통을 이해하고 그 시 속에 들어있는 ‘말들의 음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 시인이 ‘우주의 오솔길에 시의 알을 슬 동안’ 즉 시를 빚어내는 동안 ‘그 안팎 온 말들이 다시 붙어 노닐고’처럼 한 시인의 내면에 있는 모든 언어들을 동원하여 붙여보고 떼어보는 짓을 되풀이 한다. 한 사람의 독자인 화자도 ‘내 안도 저와 같아야 밤새 붉어 뛰놋다’라고 하여 그 시인의 심정이 되어 그 시인을 이해하고자 하고 있다.
정수자(1957〜 )
경기 용인 출생. 아주대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84년 세종숭모제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등단. 시집『허공우물』『저녁의 뒷모습』『저물녘 길을 떠나다』『탐하다』등 출간. 저서『한국현대시인론』(공저), 『중국조선족문학의 탈식민주의 연구1』(공저). 중앙시조대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작품상, 현대불교문학상, 수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국방일보 2010년 02월 11일
흐뭇한 밥상
정연수
너의 정갈한 눈빛처럼 보리밥상은 정갈하다 보리밥에 갖은 나물과 새빨간 고추장을 버무려 세상의 병을 깊게 하는 고독과 가난 그리고 가장 두려운 불확실성까지 넣고 비빈다 너의 그 수수께끼 같은 웃음에도 참기름을 살짝 치고 나는 너를 비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먹는 보리밥 오늘 저녁의 흐뭇한 밥상 앞에서 왜 나는 목이 메는 거니 겨울을 이기고 푸르게 생명의 팔을 뻗던 보리 앞에서 요만한 아픔에도 주저앉아 맥을 놓는 나는 보리밥을 먹는 것조차 부끄럽다 오늘은 봄날의 푸른 보리밭이 되어 준 널 정성껏 비벼야지 날 속여 온 세상도 함께 말이다 시뻘겋게 밥 한 공기를 더 시켜 잔뜩 비벼댄다
두 그릇을 먹고 불어난 배처럼 나는 행복하다 이 행복을 너와 나눌 수 있을까 지나가는 숲길에서 아무나 떠 마실 수 있는 샘물처럼 내 삶도 누군가의 갈증을 덜어 줄 수 있을까 나는 다만 너의 마르지 않는 샘이고 싶은 걸
정연수
詩 풀이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보리밥을 비벼 먹으며 행복해하는 화자를 만난다. 물론 그 비빔밥에는 세상의 병을 깊게 하는 고독과 가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까지도 들어 있다. 긴 겨울 추위를 이겨낸 푸른 보리를 생각하며 작은 아픔에도 주저 앉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것은 보리보다 더 푸르게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화자의 깨달음일 것이다. 또한 화자는 자신의 삶이 ‘누군가의 갈증을 덜어 줄 수 있는 샘’이고 싶어 한다. 건강한 의식의 작품이다
정연수(
1991년 문학공간 등단. 탄전문화연구소장. 한국문협 태백지부장. 현 강원대학교(삼척캠퍼스) 및 강릉대학교 강사. 시집: 『꿈꾸는 폐광촌』
『박물관속의 도시』 편저: 『한국탄광 시전집』
국방일보 2011년 04월 18일
오십천·1
정연휘
산협을 굽이 굽이 흘러
가람 강변에서, 오십천은
무시로 죽서루를 만나
청량한 물결소리로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천 년을 두 곱한
세월이 잠겨 있었다.
이 굽이에 시가 흐르고
저 굽이에 역사가 흐르는
오십천 청정한 물에는
푸른 산이 잠겨 있었다.
푸른 산에는 고기떼가
실직(悉直)의 역사와 노닐고,
깍아지른 벼랑 위 선계
시인 송강 선생은
관동제일 죽서루에 앉아
은하수 서녘으로 흐르는 소리를
꿈속에 듣고 있었다.
물에 잠긴 푸른 산에
노니는 고기떼 서너 마리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읽고 있었다.
정연휘
詩 풀이
백병산에서 시작되는 오십천은 하나의 작은 물줄기가 바다에 이르면서 오십 개의 작은 개천을 만난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시의 화자가 바라보는 오십천은 산협을 굽이굽이 흘러 무시로 죽서루를 만나 청량한 물결소리로 정담을 나눈다. 또, 오십천 청정한 물에는 세월이 잠겨 있고, 시가 흐르고, 역사가 흐르고, 산도 잠겨 있다. 맑은 물속에는 물고기떼가 노닐며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읽고 있다.
오십천이 흐르는 두타산 천은사에서 고려 중기의 이승휴는 민족서사시인 ‘제왕운기’를 지었다. 지금 삼척문인들은 이승휴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여 조명하고 있으며, 이 시에서 거론되는 실직(悉直)은 삼척의 옛이름이다. 예전 이곳에는 실직국이란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오십천’과 ‘오십천변’의 역사, 풍경 등을 읊은 <오십천>이란 연작시의 서시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정연휘(
국방일보 2005년 10월 31일
감
정완영
그것은 아무래도
태양(太陽)의 권속(眷屬)은 아니다
두메 산골 긴긴 밤을
달이 가다 머문 자리
그 둘레 달빛이 실려
꿈으로나 익은 거다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다 못 달랠 회향(懷鄕)의 길목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돌담 위 시월(十月) 상천(上天)을
등불로나 밝힌 거다
초가집 까만 지붕 위
까마귀 서리를 내리고
한 톨 감 외로이 타는
한국(韓國) 천년(千年)의 시장기여
세월도 팔장을 끼고
정(情)으로나 가는 거다
정완영
詩 풀이
가장 아름다운 한국적 전원 풍경의 한 단면이다. 우리 민족의 농경문화 속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인 한국의 자연, 한국의 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모습이다. 이 작품의 소재인 ‘감’은 고향의 정서, 자연의 정서를 나타내 준다. 시각적 심상이 두드러진 이 작품에서 ‘감’은 ‘달이 가다 머문 자리’, ‘꿈으로 익은 것’, ‘돌담 위 시월 상천’, ‘핏빛 노을 마신 등불’, ‘한국 천년의 시장기’, ‘정’으로 나타내어 은유 및 상징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고향의 정서가 ‘감’으로 형상화 되어 있다. 감이 익어가는 공간은 한국의 어느 산비탈의 모습일 수도, 아니면 마을 한가운데의 모습일 수도 있다. 늘 우리들 마음이 달려가는 고향, 그곳엔 언제라도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고 넉넉하게 감싸주는 자연적 환경이 있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의 단면을 위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정완영(1919〜 )
경북 금릉 출생. 1960년 국제신보, 현대문학,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채춘보(採春譜)』『묵로도(黙鷺圖)』『산이 나를 따라와서』『꽃가지를 흔들 듯이』『엄마 목소리』등과 산문집『나비야 청산 가자』『시조창작법』『고시조감상』『시조산책』『백수산고』『기러기 엽신』등의 저서가 있음. 가람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육당문학상, 만해시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등과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국방일보 2010년 03월 25일
몸이 나를 불러 놓고 - 혓바늘
정용국
텁텁한 샛바람이 궁시렁대는 통에 웃자란 말 가지들도 제풀에 겨워합니다 한 마디 모자라는 것이 고마운 줄도 모르고
들이 씹고 내씹던 입말의 성찬들이 약은커녕 되돌아와 오금을 긁어대니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소태 씹은 꼴이겠지요
연하디연한 혀가 질긴 연(緣)도 끊는다는 향기로운 말씀을 업신여긴 죗값으로 혓속에 쇠바늘 하나 깊이 꽂아 두었소.
정용국
詩풀이
우리 속담에 한 치 혀 속에 도끼 들었다는 말이 있다. 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도 있다. 말 한마디로 촌철살인도 할 수 있다. 때문에 가능하면 고운 말을 쓰도록 노력하고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말은 삼가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연하디연한 혀가 질긴 연(緣)도 끊는다는 향기로운 말씀을 업신여긴 죗값으로 혓속에 쇠바늘 하나 깊이 꽂아 두었소”라고 해 마치 고운 말을, 좋은 말을 쓰지 않은 벌로 혓바늘이 돋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들이씹고 내씹던 입말의 성찬들이 약은커녕 되돌아와 오금을 긁어”라는 표현처럼 우리는 남의 좋은 점보다 안 좋은 점을, 즉 험담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약이 되지 않고 누워서 뱉는 침처럼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앞으로는 남의 허물보다 좋은 점을 칭찬하는 우리 모두의 혀가 됐으면 좋겠다.
정용국(1958〜 )
경기 양주 출생. 2001년 ≪시조세계≫로 등단. 시집『내 마음 속 게릴라』『명왕성은 있다』등 출간.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제1회 이호우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국방일보 2010년 06월 03일
아가야
정위진
밤낮없이 이은 태교
그 열 달의 정성으로
우리 아기 울음소리
사방에 울리던 날
산실은
자욱한 서기로
눈이 한참 부시다
아가야 산에 들에
모락모락 아지랑이
꽃 피고 새 우짖는
봄날 같은 둥지에서
훈풍에
죽순 치솟듯
곧고 맑게 자라거라
정위진
詩 풀이
세상의 모든 어버이가 태어나는 아기들에게 주는 축복일 것이다. 그러한 축복의 마음을 받으며 우리는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간다.
아니 그 따스함을 우리의 자손들에게 베풀며 살아갈 차례인지도 모른다. 봄날 같은 따뜻한 둥지에서 죽순이 자라듯 아기들이 자라기를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은 바라고 있을 것이다.
늘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어 세상은 삭막함 속에서도 따뜻한 훈풍이 도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러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듯이, 앞으로는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정위진(
펜클럽, 문인협회, 시조시인협회 회원. 여성문학인회, 시조문학 문우회, 여성시조문학회 이사,영남시조문학, 시조동인 연대 회원
국방일보 2005년 01월 31일
섬
정인관
지구,
흔들리는 점 하나
물에 떨구고
섬 하나 포옹하여
물새알 하나 낳고
땅과 땅 사이
기나긴 터널의 숨소리 들리고
수평선 너머 가만히 스러지는
뱃고동 소리
하얀 노래로 웃고 있는
파도
정인관
詩 풀이
화자는 이 시에서 섬을 지구의 흔들리는 점 하나로 보고 있다. 지구가 물에 떨어뜨린 점 하나인 섬, 그 섬을 포옹하여 물새알을 낳고 살게 하고, 또한 바다를 땅과 땅 사이의 기나긴 터널로, 파도를 그 터널의 숨소리로 보고 있다.
수평선 너머로는 뱃고동 소리 남기며 가만히 배가 떠나가고 파도는 ‘하얀 노래로 웃고 있는’섬의 평화로운 정경을 노래한 작품이다.
정인관(
국방일보 2010년 10월 28일
억새 숲을 지나며
정일남
저 풍경을 보살피지 못한 것이 불효 같다
삶이 물처럼 흐르지 못한 것도 죄스럽다
자식이 커서 스스로 아버지가 되는 이치에 놀란다
억새는 어떤 자식을 키우나
자식을 키워서 어디로 보내나
서울은 아니다, 추운 변방이다
억새는 변방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
바람 무덤에서 바람이 일어나고
바람이 나를 일으켰으니 스스로
거만하지 말자고 자각함이 옳다
난해한 것은 사귀고 싶지 않다
숲은 수줍음이 자심하다, 하지만
마디마디에 힘이 작동하여
거친 세파에도 꺾이지 않으니
약한 줄기가 놀랍게 강하다
한때 적소였던 고요는 불문에 부친다
꽃이란 것이 수(繡)놓은 듯 갈래진 머리
햇볕이 아끼고 쓰다듬고 그런다
분열을 조장하는 무리는 없고
서로 어우러져 사는 것이 염문 같다
순하고 연약한 마음들아
너희들 품속에 저마다 은장도 지니고 산다
정일남
詩 풀이
바야흐로 억새가 아름다운 계절이다. 강원도 정선의 민둥산과 경기도 포천의 명성산은 가을 억새로 유명한 산들이다. 지난 일요일 명성산의 억새밭을 찾았을 때 이 시가 생각났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밭이 가을임을 다시 한번 알려줬다.
이 시의 화자는 ‘억새는 자식을 키워서 서울이 아닌 변방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억새는 변방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 그리하여 억새는 그 자리에서 자식을 키워 억새끼리 어울리며 장관의 억새 군락지를 만들어 간다. 화자는 “숲은 수줍음이 자심하다, 하지만 / 마디마디에 힘이 작동하여 / 거친 세파에도 꺾이지 않으니 / 약한 줄기가 놀랍게 강하다”라고 해 억새의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강한 힘을 말한다.
또 억새밭엔 ‘분열을 조장하는 무리는 없고 / 서로 어우러져 사는 것이 염문 같다 / 순하고 연약한 마음들아 / 너희들 품속에 저마다 은장도 지니고 산다’며 분열하지 않고 서로 어우러져 군락을 이루고 사는 억새들이 아름다운 소문 같다고 한다. 또한 순하고 연약한 억새지만 그 속에는 그들만의 자존심을 지키려 은장도를 지니듯 꼿꼿함을 지니며 강인하게 살아가고 있는 억새를 찬양하고 있다.
정일남(
국방일보 2010년 12월 16일
소양호 사람들
정정용
그 어디 묻어 두었던
천만 가지 풍경인가
별무리 표정이 익어
둥지 틀고 사는 사람들
풍토의
어둠 너머에 눈물 깊은 세월이야
풍경이 풍경을
포개어서 첩첩산중이 되고
산 아래 또 어울린 산
사람보다 산이 많다
그쯤에
물이 물을 따라 호수 하나 안고 가네
정정용
詩 풀이
지난해엔 서울∼춘천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며칠 후면 복선전철 경춘선이 개통된다. 이제 춘천은 서울과 더욱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3면이 물로 둘러싸인 도시 춘천, 춘천 하면 떠오르는 것이 소양호다. 산이 많은 산도, 강원도.
그래서 시인은 이 작품에서 춘천과 소양호를 노래하며 ‘산 아래 또 어울린 산 / 사람보다 산이 많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많은 첩첩산골 산 사이에 ‘물이 물을 따라 호수 하나 안고 가는’ 도시 춘천, 그곳 사람들은 이 호수, 소양호를 사랑하고 있다. 빙어축제로 더 유명한 소양호, 곧 빙어철이다.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춘천이 경춘선 고속도로와 복선전철의 개통으로 도심 사람들의 아름다운 휴양도시, 산과 물을 모두 보고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휴양지로 발전하고 각광받기를 기대하면서 위 작품을 소개해 본다.
정정용(
시조지상백일장 장원. 문학박사. 장신대학교, 한림성심대학 출강. 황산시조문학상(본상) 강원문학 작가상. 춘천여성문학상 수상. 시조집 그대 위한 설악, 99년 강원국제엑스포기념시집 외 5권
국방일보 2006년 01월 18일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詩 풀이
그렇다. 삶은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 지나고 보면 그 모든 것들에 조금만 더 정성을 기울였다면 좀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 텐데...하는 후회를 할 때가 많다. ‘노다지’는 황금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황금처럼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화자는 이 작품의 말미에서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이라고 말하고 있다. 삶을 다 살고 난 다음에 이러한 것을 깨닫는다면 이미 늦는다. 일찍 깨달아 순간순간 성실하게, 보람있게 살아간다면 더 좋지 않을까.
정현종(
국방일보 2006년 12월 19일
전정
정형석
정원사 이씨 아저씨 전정을 하고 있다
짹 짹
짹 짹
짹 짹
짹
짹 짹
짹 짹
짹 짹
어느 새 뜰 앞 향나무 가득 참새가 앉아 있었다
정형석
詩 풀이
단시조인데 참 재미있게 나열을 했다. 이 작품의 중장은 ‘짹’이란 단어가 13번 반복되어 만들어진, 정원사가 전정을 하고 있는 가위 모습이다. 또한 전정을 하며 나무를 다듬느라 가위가 짹각거리는 것을 참새가 짹짹 거리는 모습으로 발상을 전환한 표현법이 신선해서 이 시가 살고 있다. 남들이 미처 하지 못한 생각을 잡아내는 것, 그것이 시를 참신하게 하는, 시의 생명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다.
전정을 하는 것은 나무를 아름답게, 품위 있게 다듬기 위해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두는 것도 좋은 일이나 때로는 곁가지 등을 쳐 줌으로서 더욱 올곧고 아름답고 멋있게 자라도록 도와주는 일, 그것은 나무에게도 필요하고, 자신의 인생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정형석(1960~ )
경북 문경 출생. 2001 전국공무원문예대전입상(시조), 2004 시조문학 등단, 고려대 대학원 문창전공, 오늘의 시조시인회의 , 나래시조, 충북시조 회원, 현 한국법무병원 근무
국방일보 2009년 03월 09일
詩, 통신1호
-만횡청류(蔓橫淸流)를 위한 따라지 산조 1
정휘립
시(詩)여, 읽을 수도 안 읽을 수도 없는, 지지리도 잘난, 시여, 그대는 왜 그토록 많은 헛소리를 잔뜩 들고 있나뇨
주둥이 가는 어깨 허리춤 엷은 등판 두 손모가지에 물로 이고 지고 메고 얹고 차고 끼고 또 그것도 모자라 윗도리 아랫도리 주머니란 호주머니 뒷주머니 속주머니 윗주머니 동전주머니 조끼주머니 속바지주머니까지 가득 잔뜩 철렁철렁 채워 넣고 울룩불룩 뒤뚱뒤뚱 거리면서도 꽉 쓰러져 엎어질 줄 모르나뇨
황당한 네 배포에 깔려 내 쥐포 될까 하나니
정휘립
詩 풀이
위 작품은 사설시조이다. 초장부터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시작된다. ‘시(詩)여, 읽을 수도 안 읽을 수도 없는, 지지리도 잘난, 시여, 그대는 왜 그토록 많은 헛소리를 잔뜩 들고 있나뇨’라고 초장부터 시에 대한 시비다.
수많이 쏟아져 나오는 시에 대한, 시인에 대한, 좀더 냉정하게 본다면, 자기자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다. 시인들이 시라는 그릇에 주워 담는 수많은 시어들, 어색하고 많은 내용을 집어넣어 ‘울룩불룩 뒤뚱뒤뚱 거리면서도 꽉 쓰러져 엎어질 줄 모른’다고 시를 비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읽으면 웃음이 나온다. 시에 대한 비판을 하는데도 다분히 해학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종장의 ‘황당한 네 배포에 깔려 내 쥐포 될까 하나니’라는 대목은 더욱 재미있다. 사설시조의 묘미는 풍자와 해학에 있는데, 이 작품은 풍자와 해학을 충분히 잘 살리고 있다.
시에 대한 비판, 그것은 달리 말하면 시에 대한 애정이다. 정(定), 반(反)의 과정을 거친 후에 얻게 되는 합(合)의 변증법은 시인이 바라는 시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시인. 199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 ‘뒤틀린 굴렁쇠 되어’
국방일보 2009년 06월 15일
흰 동백
조동화
낮 달,
사금파리,
물새 눈부신 죽지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의 큰 눈사태
천년 전 계림을 적신
이차돈의
핏자국
조동화
詩 풀이
짧은 시 속에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흰 동백은 하늘에 걸려 있는 낮달로, 햇빛 속에 반짝이는 사금파리로, 물새의 눈부신 하얀 죽지로, 또 절벽에 부서지는 흰 파도로, 또 천 년 전, 신라의 승으로 순교했던 이차돈의 하얀 피로 상징되어 나타난다. 제목을 숨기고 시만 보아서는 ‘흰 동백’의 의미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제목을 함께 놓고 보면 화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이 모든 시어들이 흰 동백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의 제목을 풀이하듯 쓰지 않았다는 점과 일상적인 흰 동백에 대한 사고의 일탈을 통한 새로움을 보여주고 있어 신선하게 느껴지는 시이다.
조동화(1949〜 )
경북 구미 출생. 1978년 중앙일보에 시조, 조선일보에 동시, 부산일보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눈 내리는 밤』『영원을 꿈꾸다』『나 하나 꽃 피어』『낙화암』『산성리에서』 『처용 형님과 더불어』『강은 그림자가 없다』『낮은 물소리』등 출간. 신라문학대상, 중앙시조대상신인상, 경북문학상, 경주시문화상, 이호우시조문학상, 경상북도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국방일보 2009년 12월 21일
원천리*
조영일
날이 맑으면 빈 들 가득히 돋아나는 키 작은 풀잎들의 아우성 반짝
이며 강물을 건너는 바람 온 몸으로 맞는다.
산이 풀어놓은 길 위로 남아 있는 고된 흔적 가물거리는 육사의 기
침소리 이따금 잎을 흔드는 나무들이 알린다.
한 장 그림으로 담기 어려운 풍경 마을이 모두 풀과 나무 한 뿌리로
살아온 날의 숨결을 볕에 널어 말린다.
*원천리: 시인 육사 이원록의 고향.
조영일
詩 풀이
화자는 이육사의 고향 안동 원천리를 노래하고 있다. 일제시대 윤동주와 함께 저항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육사의 기념관이 그의 고향인 안동 원천리에 있다. 독립운동을 하던 그 고된 흔적, 그 기침소리들을 이따금 잎을 흔드는 나무들이 알린다고 한다. 우리는 평소 잊고 살아가지만 지금의 우리가 정체성을 간직한 편안한 조국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이육사 같은 살신성인의 애국지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한장 그림으로는 담기 어려운 그 정신을 이어받으며 그것을 고결하게 간직하려는 마음이 셋째 수에서는 나타난다.
작가는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및 <시조문학> 추천. 경북문화상, 이호우시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등 수상. 시집: 바람의 길, 솔뫼리 사람들 외 다수. 현재 한국문협이사,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이육사문학관장.
국방일보 2005년 06월 20일
고향길
조주환
내 감성의 여울목에 푸른 불길로 타는
아직 마르지 않은 영혼의 탯줄 같은
아득한 경상도 길섶의
능금 꽃을 따 문다
칼 끝 같은 슬픔이 박혀 더욱 푸른 그 하늘빛
금호강 강물로 울던 내 젊은 날 상흔은 지고
보현산 산굽이 아득히 한 생애가 저문다
금 간 항아리처럼 등이 굽은 내 노모는
모진 세월로 퇴행성 관절을 앓고
바람은 눈발을 날리며
갈대처럼 흔들린다
조주환
詩 풀이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운 곳이다. 시인에게 있어서도 ‘내 감성의 여울목에 푸른 불길로 타는’ 곳이며, ‘마르지 않은 영혼의 탯줄 같은’ 곳이다. 첫 수에서는 그리운 고향을 그리는 모습이고, 둘째 수에서는 ‘금호강 강물로 울던’ 젊은 날을 지나 저물어가는 시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셋째 수에서는 고향과 함께 떠오르는 ‘금간 항아리처럼’ 늙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읊고 있다.
국방일보 2005년 01월 10일
오륙도
주강식
날마다 막을 여는 생명 이는 저 벌판에
턱 괴고 곧추앉아 세월을 기다렸다
억겁을 지켜선 길목 증언도 많았거니
연연한 그리움이사 간이 배면 돌도 되지
온 바다 가슴에 안고 바람에 이마 깨쳐
살과 피 닦고 절이며 푸른 넋을 다둑여 왔다
절영도 안개 젖은 뱃고동 목맨 울음이
오대양 파도를 타고 수평선을 넘나들 때
열망의 문턱에 서서 십자가로 자리한 별
주강식
詩 풀이
부산 앞바다의 섬인 오륙도는 조용필의 노래로 더 많이 알려지기도 했다. 5개로 보일 때도 있고, 6개로 보일 때도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오륙도’이다. 늘 생명이 파도치는 바다에 떠 있는 섬을 화자는 억겁의 세월동안 턱 괴고 고추앉아 세월을 기다리는 섬이라고 보고 있으며 또한 바람에 이마 깨치며 살과 피 닦고 절이며 푸른 넋을 다둑여 왔다고 한다. 오륙도는 오늘도 열망의 문턱에서 연연한 그리움으로 오고가는 배를 기다리는 것일까.
주강식(
《시조문학》천료(82 봄호). 부산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시조집『태산을 넘는 파도』외. 볍씨동인.
국방일보 2004년 03월 16일
성자(聖者)처럼 나무는
주원규
나무는, 더도 덜도 말고
생존에 꼭 필요한 물기만 빨아올린다
나무는, 고요히 바람 잔 날이나
가지가 휘는 바람 불 때에도
더도 덜도 말고 생존에 꼭 필요한
공기만 호흡한다
노란꽃은 노란꽃 피울 만큼만
호두나무는 호두알 익힐 만큼만
햇빛을 좇아 몸을 내어 민다
눈을 들면 눈 높이에서
내 혓바닥만한 나뭇잎들이
내 혓바닥보다 더 자유롭게
바람과 미어를 나누고 있다
전신으로 삶에 순응하며
나무는 공기와 진정으로 악수한다
나무는 햇살과 진정으로 입 맞춘다
나무는 토양과 진정으로 포옹한다
겨울 동구에
성자처럼 서 있는
나무
주원규
詩 풀이
한 그루 나무는 그에게 필요한 양만큼의 물만 빨아들이고, 그의 생존에 필요한 양만큼의 공기만 받아들이고, 또 그가 꽃 피우고 열매 익힐 양만큼의 햇빛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며 더 많이 차지하고 싶어하고, 더 많이 사랑받고 싶어하고,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싶어한다. 먹고 입고 살 만한데도 상대적 빈곤을 느끼고 좀더, 좀더 하고 욕심을 낸다.
그래서 늘 인간의 마음은 가난하고 허기가 진다. 물론 인간에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이 없다면 생활에 권태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현실의 자아에게 만족도 할 줄 알고 자기자신의 현재를 사랑할 줄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자기에게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도 당당히 성자처럼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를 보며 지나치게 욕심이 많은 우리의 삶을 한 번쯤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국방일보 2009년 10월 12일
대화동의 평화로운 모습을 주로 시각적으로 읊고 있는 작품이다. 첫째 수에서는 자유로 넓은 길에 피는 도라지꽃을 “보랏빛 아침을 여는 꽃/ 별리의 흰 손”으로 은유하고 있다.
습을 보여줌으로써 화자의 겸허한 심상이 드러나고 있다.
채석강은 강이 아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일깨워 주는 파도가 다시 밀려온다.
시집 『노래하는 삶』 『순간포착』 『맞닿는 평행선』 번역시집 『너를 위해 FOR YOU』
시예술상, 서초문학상, 사임당문학상 등 수상, 한국문인협회 편집국장
이 작품의 제목은 인간 독서, 즉 '사람 읽기'다. 이 작품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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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 출생. 중앙시조 시조백일장 장원.《충청일보》《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한국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시조문학》작품상. 샘터시조 심사위원.
경기 송탄 출생. 인하대 화학. 한국방송대 일본학 2008년《만다라문학》《월간문학21》시조 등단. 작품 송탄역,
사랑하는 아들아! 장한 아들아! 대한의 아들아!
용광로를 거친 쇠가 강철로 태어나듯이
고되고 힘든 훈련 이겨내고 강해져라
경남 산청 출생.《시조문학》천료 및 《경남신문》《서울신문》신춘문예 시조 당선 등단.
시조집『별 하나를 기다리며』『적멸을 꿈꾸며』등 출간. 경남시조문학상. 중앙시조신인상. 성파시조문학상 등 수상. 시조전문지 화중련 편집장, 경남시조시인협회장
허무를 가르고
낙하하는
밤의 긴 진동으로
흩어지는 자락 끝에
흔들며
떠는
문명의 파편
새벽은
다시
창세의 새벽은
먼 바람 속에 울리네.
첫째 수에서는 어린 날의 화자, 둘째 수에서는 늙은 날의 화자가 나타난다. ‘외딴섬/
바람결에 맘 설레’던 어른의 과정도 지나 눈썹이 희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뒤돌아보는
가을 산 앞에 서서
그대를 생각했습니다
빙그르 돌며 떨어지는 붉은 잎이 뭐라 해도
말없이
그대 뒤를 따라 낙엽길 걷고 싶었습니다
그저 산까치는
높은 가지에서 짝을 부르고
당찮게 애벌레는 떼그르 껍질 굴려 숨지만
샛노란
가랑잎에 올려 바윗섶에 넣었습니다.
마른 잎들 빗소리 내는
산허리 혼자 밟으며
그대가 눅눅한 내 마음 가만히 떠올려
양지쪽
마른자리에 뉘었으면, 생각했습니다
불 꽃 : 사막에 사는 야생마의 이름. TV에서 방영함.
한혈마 : 달리면 달릴수록 더 빨라진다는 천마. 달릴 때 피같은 땀을 흘린다하여 붙은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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