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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기 붉은 기침(5번째 시조집)

백악기 붉은 기침

by 시조시인 김민정 2015. 5. 24.

 

 

 

 

 

백악기 붉은 기침


|한국대표정형시선 028 |

백악기 붉은 기침

김민정 시집

 

■시인의 말
2006년에 발간한 ..사랑하고 싶던 날..은 한국현
대시조 100주년을 기념하여 단시조 100편을 실었
던 단시조집이었고, 2008년에 발간한 ..영동선의
긴 봄날..은 아버지의 삶과 필자의 유년을 그린 서
정서사시조집이었다.
다섯 번째 시조집 ..백악기 붉은 기침..에 게재한
작품은 2005년.2014년에 쓴 작품으로 시의 본질
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작품들이다.
이 가을, 독자들에게 가을꽃 향기와 함께 환한 가
을 한 잔을 권하며, 투명한 가을하늘처럼 맑고 행
복한 미소를 함께 나누고 싶다.
2014년 9월 1일
우현 김민정(宇玄 金珉廷)

■차례

시인의 말 05

제1부 죽서루 편지

죽서루 편지 13
심포 협곡 14
추전역에서 15
연어처럼 16
구절초 벌초 17
주목 앞에서 18
움집의 내력 19
백비 20
빗살무늬 토기 21
붓자루 놓고 22
풀의 노래 23


제2부 아침, 정동진

아침, 정동진 27
심포리 기찻길 28
금강시편 29
억새 이야기 30
선운사 아침 31
초심에 들다 32
타클라마칸 사막 33
낙타 34
모래울음을 찾아 35
천불동에 무릎 꿇고 36
우루무치에서 37


제3부 길이 춤춘다

길이 춤춘다 41
봄까치 42
꽃잎 밥상 43
폭포와 시 44
휘굽은 봄 45
사람이 그립거든 46
가끔가끔 47
안개에 젖어 48
의문부호 49
가을 한 잔 50
겨울숲 인상 51


제4부 몽돌을 위한 명상

몽돌을 위한 명상 55
화석 56
점멸등 57
그리고, 별 58
청보리처럼 59
행운의 꽃잎 60
생의 한 가운데서 61
머나먼 약속 62
커피 한 모금 63
두물머리에서 64
나비 날다 65


제5부 꽃,그순간

꽃,그순간 69
정월 보름 70
해빙기 71
마중한 봄 72
천지에 와서 73
가을 뎃생 74
가을 종소리 75
가을산빛 76
타이스 명상곡 77
은반 위의 나비 78
굴렁쇠를 굴리는 밤 79

■해설_시원의 시간으로 통하는
길위의 시 /황치복 80


1부 1부
죽서루 편지


죽서루 편지

연둣빛 발을 담근 오십천은 더 푸르고
바위도 앉은 채로 놓여 있는 누각에는
한 천 년 받쳐 든 시간 망울망울 부푼다

양지귀 물들이는 산수유 눈을 뜨고
첫마음 못 다한 말 홍매화 옅은 기침
파릇한 햇살 속에서 숨바꼭질 한창이다

돌을 찧어 구멍 내며 소원을 빌었다던
옛사람 그 손길이 뜰에 아직 남았는데
절반은 눈물꽃 맺혀 그렁그렁 피어있다

하늘 향해 돛을 단 관동별곡 가사 터엔
송강의 푸른 노래 봄볕 속에 새순 돋고
오십천 아침을 연다 햇살무늬 반짝인다


심포 협곡

바람 타고 날던 익룡
이곳 미처 몰랐을까
백악기 붉은 기침
이제 막 터져올 듯
오래된 미래 같은 곳
푸드득 활개친다

태고적 물소리로,
그때 그 바람이
늠름하고 장엄하게
원시림을 키워낸다
물안개 깊은개 적셔
아침을 열어놓고

일렁이는 햇살아래
반쯤 눈뜬 미인폭포
몸을 날린 절세미인
그 전설이 다시 살아
벼랑을 뛰어내린 물결,
긴 잠을 깨워준다

14


추전역에서

바람을 켜고 있는 색동의 바람개비
온 종일 일렬종대 누구를 맞고 있나
고향역 아리는 눈길 저 너머 언덕을 본다
산정보다 높게 앉은 잔설 위 햇살처럼
두고 떠난 옛길들이 얼굴 환히 돌아오고
윤이월 깨무는 속살, 봄의 촉이 트고 있다


연어처럼

구만리 대장정길 연어의 푸른 질주
모천으로 가는 길은 치솟는 파도의 갈기
오십천 두고 온 물길,
아득하다
아직은

심포리
기찻길 옆
아버지 산소에는
지금쯤 낙엽송이 한겨울로 기울 텐데
사랑엔 이유가 없듯 피 흘리며 닿고 싶다


구절초 벌초

동해바다 환히 펼친
백두대간 마루에서

하늘 품어 보거라
바다 또한 품어봐라

가슴엔
우주를 품어
해도 달도 키워봐라

구절초를 가득 피워
현손녀를 반긴 할배

요렇게 예쁜 산소
본 적이 있느냐고

톡, 톡, 톡
가을 햇살로
문자 보내오신다


주목 앞에서

살아서 이루고픈 꿈이 무엇이길래
이미 죽은 가지 끝이 뭐라고 말을 한다
그 말을 받아쓰느라 바람결이 움찔한다
내 생의 발자국에 우기가 지나간다
사막을 건너느라 부르튼 시간의 발
죽어도 여기 보란 듯, 그 맨발을 내보인다


움집의 내력

몽촌의 봄기별이 꽃 피듯 건너오는
붉어진 배롱나무 기대어선 선사시대
투명한 살결만 같은 그 내력을 읽는다

아리수 물굽이로 경계들은 무너지고
흘러가는 시간 속을 흘러가는 사람들이
해 돋는 강동마을로 덩굴손을 뻗는다

햇살 따라 얼키설키 엮어가는 역사의 장
그 속에 피던 사랑 배롱꽃에 어리는지
이 아침 한강변 어귀 옛사람의 숨결 깊다


백비

웅크렸던 붉은 울음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역사의 소용돌이
부유하는 그날들이

아득히
사월을 부르며
저물어만 가는데

제주들녘 물길들은
어디쯤서 다시 만나

저릿저릿 떨려오는
목울대를 적시울까

는개비
어둠을 걷고
네가 일어설 때까지

20


빗살무늬 토기

눈길 덥석 잡아끄는 육천 년 먼 길 너머
죽어서도 죽지 않는 집념어린 토공의 혼
그 손길 둥근 고요가 서려 있다, 암사동

움집 틈새마다 퍼져오는 햇살들이
사선으로 비스듬히 춤을 추는 이랑마다
아리수 고운 파문도 새겨보고 싶었을까

물결로 바람으로 잎맥으로 생선뼈로
신석기 생의 무늬 나긋나긋 굽는 동안
못 이룬 사랑도 몇 닢 얹어놓고 싶었을까


붓자루 놓고

― 허난설헌
살아생전 그 사랑은
아득도 하였거니

붓자루 쥔 손도 놓고
꽃송이로 저문 그대

잔디 빛
푸른 슬픔에
온 들녘이 환합니다

하늘도 품을 열어
가랑비를 흩뿌리고

그 비에 젖는 시비
고즈넉한 저녁 한 때

물안개
피는 발자국
점점이 머뭅니다

22


풀의 노래

― 실미도
하루 한 번
가슴 열고
하늘과 땅을 잇는

나지막한 능선 너머
혼곤함을 감춘 바다

파도는
넋을 달래며
밤새 울다 가시는가

라단조 저민 악보
모래알을 조율한다

숲에는 무성한 비밀
잡풀들이 길을 열고

그 누구 생을 건너듯
종일토록 비 내린다


2부 2부
아침, 정동진


아침, 정동진

 

왈칵,
바다를 열자
찬바람이 뺨을 갈긴다
군마가 달려간 자리 뽀오얗게 이는 포말
언덕 위 썬크르즈가 그 속으로 빠져 든다

천지의 자궁문이 조심스레 열린다
신의 손이
밀어 올리는
저 싱그런 햇덩이!
뚝, 뚝, 뚝
듣는 황금물 온 바다가 환하다

청춘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자리
너와 나 달려가야 할 붉은 이유 거기 두고
신년호 닻을 올린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심포리 기찻길

기찻길 아스라이
한 굽이씩 돌 때마다

아카시아 꽃내음이
그날처럼 향기롭다

아버지
뒷모습 같은
휘굽어진 고향 철길

돌이끼 곱게 갈아
손톱끝에 물들이고

새로 깔린 자갈밭을
좋아라, 뛰어가면

지금도
내 이름 부르며
아버지가 서 계실까

28


금강시편

비무장 지대

화해와 긴장 속에 철책선은 뻗어 있다
보고가 필요 없는 갈매기들 이착륙이
사는 건 공존이라고 끼룩끼룩 일러준다

상팔담

천 년을 곰삭여도 사랑은 늘 아픈 것
적막강산 달이 뜨면 선녀는 돌아올까
개골산 수척한 그림자, 나뭇꾼이 얼핏 뵌다

만물상

온산 가득 풀어 내린 겨울햇살 기운으로
미인송 숲을 돌아 이곳까지 이르는 길
오늘은 나도 봉우리, 금강 위에 우뚝 섰다


억새 이야기

― 명성산에서
역사는 승자의 몫 패자는 말이 없다
산자락에 수런대는 궁예의 옛이야기
한 시대
스러져간 사내
큰 울음이 나부낀다

억새가 휘는 대로 나를 잠시 흔들다가
바람 한가운데 그 가을도 흔들다가
잊혀진
고구려 낮달,
오두마니 뜨고 있다

옅게 깔린 새털구름 산등성이 걸터앉아
제풀에 휘날리는 머리털을 빗는 오후
계절도
이쯤에 서면
제 나이를 잊는구나


선운사 아침

말갛게 언 산사 아침 감나무끝 앉은 까치
동백숲에 내린 햇살 담뿍 받아 입에 물고
이른 봄

푸른 적막을
하늘에다 옮겨 심네
선명하게 도드라져 빗금으로 그어지는

귀퉁이 두어군데 헤지고 닳아져도
음각된
울음소리가
하늘 가득 번지네


초심에 들다

내 속에 숨겨 놓은 피리 하나 꺼내들고
신명나게 불고 싶네 이 언덕에 서고 보니
동해도 만물상 앞에 오지랖을 열고 있네

물은 같은 물이건만 위아래가 갈라져서
뱃길도 끊어지고 바람도 멈칫대니
흰 구름 서너 장 뜯어 종이배나 접을거나

금강산 줄기 따라 남녘으로 내려가면
두고 온 고향 산천 품을 열어 반길 텐데
망양대 아무 말 없이 풀끝에 조는 가을


타클라마칸 사막

한 때는 물이 흘렀을
건천을 지나가며

내 생도 지고 가는
목마른 낙타 등에

사막을 가로질러 온
낮달 저만 드높다

이리주 한 모금에
길은 자꾸 늘어지고

죽비로 치는 햇살
온 몸으로 견뎌내며

시간을 되감아간다
모랫바람 비단길


낙타

겨운 삶 등에 지고 모래밭을 타박이며
얼마나 느린 발길로 너는 걸어 왔을까
시간은 모래바람 속, 온 길이 다 묻힌다

너를 통해 흘러왔을 나의 강을 바라보며
뜨거운 고도 향해 휘파람을 불어가며
혹처럼 굽은 생애가 신기루로 흐른다

오랜 어둠을 깨며 멀어지는 밤 같은
한 생애 푸른 비단을 펼쳐놓은 저 달빛
속눈썹 짙게 젖어든 외로운 등이 휜다


모래울음을 찾아

돈황 명사산 鳴沙山에
모여 사는 바람 있다

잔양殘陽이 능선 위로
저미듯 스며들 때

발자국 남기지 않는
길목을 따라 간다

아랫녘은 푹푹 빠져
발목이 다 잠겨도

바람들이 다져놓은
언덕으로 오를수록

단단한 울음의 뼈가
문양으로 드러난다


천불동에 무릎 꿇고

― 돈황 막고굴
지평선은 가이없고 푸나무도 없는 이 곳
혜초가 더듬어 간 사막의 열기 속에
천 번을 꼽는 손가락 소원마다 꽃을 단다
앉고 서고 모로 누운 부처님 납의 衲衣 그늘
어쭙잖은 내 속말을 가려 덮어 주시는지
보일 듯 보이지 않게 눈을 뜨고 계시네


우루무치에서

낫가리를 쌓은 듯한
천막 속이 궁금하다

하늘을 열고 닫는
카자크족 천장에는

밤마다 별과 달들이
이웃처럼 드나든다

양탄자를 둘러놓은
집안이 아늑하다

말려놓은 우유 조각
한 입씩 씹어가며

웃음을 서로 나누는
정겨움이 살고 있다


3부 3부
길이 춤춘다


길이 춤춘다

끝없이 이어지는 8차선 고속도로
아지랑이 봄날처럼 넌출대기 시작한다
튕겨져 나갈 것 같다, 가속도의 두려운 힘

그 무슨 리듬처럼 발바닥을 옴죽옴죽
가끔씩 브레이크 살짜기 밟곤 하는
길 끝에 나풀거리는 저 노랗고 흰 나비 떼


봄까치

산사를 찾아오는
가만가만 저 발자국

가지 내린 회화나무
속 깊은 말 새기는지

오늘은 다 벗어 두고
네 생각도 한 겹 접고

제비보다 먼저 오신
까치 너댓 마리

봄을 종종 물고 와서
풍경끝을 기웃 댄다

무슨 말 전하려는가,
꽁지깃이 바쁘다

42


꽃잎 밥상

오랍뜰
봄나물로
차려낸 점심상에

씀바귀와 원추리
꽃향기가 따라왔다

비로소 열린 두 마음 봄빛마냥 정겹다

파들파들 살아나는 봄기운 받쳐 들고

다듬고 손수 씻어
무쳐내 온 접시마다

웃음도
한 덩이 피어
아자창이 환하다


폭포와 시

단 한 번 직활강 直滑降으로
내려 뛰는 저 단애 斷崖

고생대 불던 바람
회오리로 찾아들어

물보라 무지개 건넌다
두 눈이 멀지라도

내 몸의 관절마다
푸른 별이 돋는다

그 몸속 지층 어디
울렁이는 어지럼증

시 앞에 고꾸라진 채
목숨 놓을 지라도

44


휘굽은 봄

해미읍성 호야나무*
구부정히 자라온 봄
순교의 가지마다
잎눈이 늘 새롭다
휘굽은
해안선 너머
흰 피를 쏟는 파도

동백꽃에 내려꽂는
직활강의 햇살들도
침묵도 모자라는
원적외선 네 사랑도
굽어져
생이 서러운
호야나무 닮았다

* 호야나무 : 회화나무의 사투리

사람이 그립거든

설레는 봄바람이 아롱이며 피어날 때
사람이 그립거든, 그대여 기차를 타라
보고픈 마음 하나로 모든 것 용서하며

금빛햇살 타고 오는 대자연의 향연 속에
빛 부신 날개 펴고 불꽃처럼 비상할 때
믿으며 깨달아가며 가쁜 생을 껴안으며

등불 켜듯 환하게 너를 켜는 유리창 밖
초록빛 어린 왕자 그 숨결이 다가 온다
바람은 낮은 곳으로 휘파람을 불며 가고


가끔가끔

허물 벗은 매미처럼
촉촉하게 청초하게

그대의 심장 속에
붉은 피로 돌고 있는

고 작은
은빛 꽃씨 하나
채송화로 나는 핀다

처음 스친 손길처럼
처음 나눈 입맞춤처럼

서로의 존재감을
묻고 있는 이 봄날

저 들녘
아지랑이 속
아롱아롱 너는 핀다


안개에 젖어

생애의 선택 집중
그 속을 질주하다

질주에 놓쳐버린
갈림길의 분기점

분기점
그 자리마다
선연하게 길이 핀다

길이 피자 짙은 안개
푸른 산을 뜸들이고

뜸이 오른 산중턱에
수증기가 퍼질 무렵

퍼져서
감싸인 산허리
젖은 길이 봉긋하다

48


의문부호

소나기를 머금은 듯
먹빛 구름 여름 한낮

적막도 접어놓고
안부를 묻고 있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무더운 날의 악수

내 명치 한가운데
감히 네가 들어앉다

불길은 불길대로
물길은 물길대로

그렇게 가고픈 곳으로
흐르거라 마음껏,


가을 한 잔

하늘은 마냥 높고
물빛마저 여문 계절

가을햇살 등에 업고
유유히 날고 있는

잘 익은
가을 한 잔을
그대에게 따릅니다

내미는 손길마다
디디는 걸음마다

꽃등처럼 환해지는
저 가을 한가운데

더러는
열매로 남는
기도가 있습니다

50


겨울숲 인상

펄펄 끓는 흰 눈발이
자작나무 숲에 얹혀
귀 대이고 부푼 고요 적막의 성을 쌓아
거대한 신운의 무게 말문의 벽 허문다

작은 길 오솔길에 숨어든 작은 짐승
새끼들 건사한 채
속삭이는 뜨거운 사랑
겨울숲 까마득한 벼랑 뚝뚝 꺾인 실가지

바람이 거센 밤은 꿍꿍 산이 울었다
눈보라 뿌연 비상 나무 끝에 맺는 흰꽃
저 깊은
화엄의 썰물
태어나는 돌부처


4부 4부
몽돌을 위한 명상


몽돌을 위한 명상

널 보며
생각한다
세월이 둥글다는 걸

널 보며
생각한다
세상이 둥글다는 걸

생명을
키우는 힘은
둥금 속에 있다는 걸


화석

폼페이
최후의 날
껴안고
맞은 죽음

천 년
시간 밖을
거슬러 와
여기 누운

너와 나
실핏줄 속에
다 못 감은
눈길 속에

56


점멸등

뽀얀 기운
서려오는
저 미지의 순수 속을

말랑한
숨결이 되어
유영하고 싶은, 한 때

환하게
점멸등 켜듯
내 안의 너를 켠다


그리고, 별

내 마음
활주로에
너는 뜨고 내리는가

시간의
하얀 촉루
밤하늘을 닦는 동안

가슴엔
스멀거리는
별이 하나 돋았다

58


청보리처럼

내사랑
청보리처럼
풋풋하면 참 좋겠다

오월의 하늬햇살 싱그럽게 일렁이며

네 안에
늘 푸름으로
살았으면 참 좋겠다


행운의 꽃잎

내 생의
어느 갈피
네가 날린 하얀 미소

저 연보라 꽃잎 같아
저 행운의 꽃잎 같아

슬픔도
눈이 부시어
차마 차마 눈 못 뜨는

60


생의 한 가운데서

내 생의
중심에는
언제나 네가 있다

하늘보다 높게높게
물보다도 낮게낮게

있는 듯
너는 없었고
없는 듯 너는 있었다


머나먼 약속

너와 나
전생에서
옷깃 몇 번 스쳤을까

발목 시린
여울목
몇 번이나 건넜을까

아득한
세월을 베면
거기 솟는 하얀 피…

62


커피 한 모금

진한 커피
한 모금,
네 생각을 마시다

궁금함을 삼킨다 그리움을 삼킨다

영롱한
사리 한 방울
내 안에서 커 간다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서로 만나 얼싸안는

두물머리 이곳에서
우리 사랑 배워가자

천천히 아우르면서
서로 깊게 흐르는 법

64


나비 날다

내 꿈속의 그대와
그대 꿈속 나 사이

강물이 출렁이고
흰 구름도 흘러갔다

혀끝에
나비 한 마리
침묵을 깨고 날다


5부 5부
꽃, 그 순간


꽃, 그순간

하늘의 벅찬 숨결
그대로 땅이 받아

홀로된 꽃대궁도
꽃씨를 받아 둔다

순간은 모두 꽃이다
네 남루도 그렇다


정월 보름

맑은 실핏줄에
스민 햇살 짜릿하다

대보름 부럼 깨듯
껍질 속 봄을 열면

소원을 들어줄 듯이
맨 먼저 뜨는 달님

70


해빙기

쩌~엉쩡
금이 간다
오랜 날 기다림 끝

아슴아슴
눈을 뜨는
갯버들 솜털의 봄

햇살에
감전된 고요
볼그족족 꽃눈 뜬다


마중한 봄

마알간
햇빛 속을
자박자박 걸어온 봄

마중하듯 답청하듯
그 앞에 마주 서면

피어날
붉은 동백꽃
귓속말도 보인다

72


천지에 와서

하늘도 여기 와선
제 얼굴을 알아 본다

구름의 둥근 뒷태
슬쩍슬쩍 비춰보고

나 또한
못 다한 안부
목청껏 물어 본다


가을 뎃생

바람도 만취인가
갈밭길이 술렁인다

높을 대로 높은 하늘
저도 잠시 취하는지

흰 구름 몇 송이 뜯어
제 멋대로 널어놨다

74


가을 종소리

파란 하늘
한 자락이
사르르 내려온다

단풍 물든
산 하나가
파르르 떨려온다

참,
느린
깨달음 하나
동그랗게 앉는다


가을산빛

단풍이 익을 무렵
하늘은 멀어지고

햇살이 소슬하게
마른 하품 하는 날은

가을이
산빛을 따라
맨발로 오십니다

76


타이스 명상곡

늦가을 의림지가
가을을 탄주한다

제 빛깔로 물이 오른
오후의 햇살 아래

낙엽이 구르는 소리
현악기의 갈색 파문


은반 위의 나비

― 김연아
그대도 보셨나요
은반 위의 나비춤을

두려움도 실수도 없는
거침없는 자유 속에

비로소
나비의 춤은
꽃과 하나 된다는 걸

78


굴렁쇠를 굴리는 밤

마음 속
굴렁쇠 하나
천천히 굴려가며

저공으로 날고 있는 금빛시간의 오아시스

둥글고
둥글고 싶어
몽돌처럼 나를 깎는 밤


80
■해설
시원始原의 시간으로 통하는
길 위의 시
황치복
문학평론가ㆍ고려대 교수
1. 과거로 가는 기차여행, 혹은 둥근 시간
김민정 시인은 1985년 ..시조문학.. 창간 25주년기
념 지상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등단한 후 ..나, 여기 눈
을 뜨네..(1998), ..지상의 꿈..(2005), ..사랑하고 싶던
날..(2006), ..영동선의 긴 봄날..(2008) 등 네 권의 시
조집을 발간한 바 있다. 그러니까 이번 시조집 ..백악
기 붉은 기침..은 그녀의 다섯 번째 시조집이라고 하
겠다.
그동안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 평자들은 그녀의 시
조가 탁월한 이미지스트로서의 특장점을 지니고 있으
며, 정갈하고 청정한 시적 태도 속에 우아한 아름다움
을 발현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민정 시인의 특징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표현은 “철
도 시인”이라는 명명일 것이다. 시인은 이미 ..영동선

81
의 긴 봄날..이라는 시집에서 “영동선”과 관련된 연작
들을 통해서 철도가 민초들의 삶의 역사를 대변해주
는 훌륭한 상징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바 있다.
철도의 시인답게 이번 시조집에서도 “발로 쓴 시”
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휘굽은 봄.
에서 시인은 서산군 해미읍성을 방문하고 거기에 있
는 “호야나무(회화나무)”에서 순교자의 “하얀 피”를
상상하기도 하고, 포천의 명성산을 산행하면서 “산자
락에 수런대는/ 궁예의 옛이야기”(.억새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또는 강원도 정동진에 들어 “신의 손이/
밀어올리는 /싱그런 햇덩이!” (.아침, 정동진.)를 감
상하기도 하고 고창의 선운사에 들러 “말갛게 언 산사
아침”(.선운사 아침.)에 울러 퍼지는 까치의 울음소
리를 듣기도 한다. 금강산에 올라서는 “사는 건 공존
이라고 끼룩끼룩 일러주”(.금강시편.)는 갈매기들의
전언을 새기기도 하고, 백두산 천지에 올라서는 “하늘
도 여기 와선/ 제 얼굴을 알아 보”(.천지에 와서.)는
대자연의 조응照應을 발견하기도 한다. 특히 돈황의
명사산과 타클라마칸 사막 등의 실크로드 여행을 통
해서 시인은 생명의 조건과 시간과 공간의 근원에 대
해서 사유하기도 한다.
이처럼 김민정 시인의 다섯 번째 시조집 ..백악기
붉은 기침..에 실려 있는 시조 작품들은 대부분 “길 위

82
의 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가 직접 걸어다니
며 보고, 듣고, 사유한 다양한 세계들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인이 태어난 고향과 고향을 상징
하는 기찻길에 대한 경사傾斜가 “길 위의 시”가 지향하
는 본질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심포리에서 출생한 시인은 철도 공무
원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철도에 대한 남다른 애
착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인에게 기찻길은 단순한 길
이 아니라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가능케 하는 타임머
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아름다운 시간여행의 기찻길
로 들어가 보자.
바람을 켜고 있는 색동의 바람개비
온 종일 일렬종대 누구를 맞고 있나
고향역 아리는 눈길 저 너머 언덕을 본다
산정보다 높게 앉은 잔설 위 햇살처럼
두고 떠난 옛길들이 얼굴 환히 돌아오고
윤이월 깨무는 속살, 봄의 촉이 트고 있다
― .추전역에서. 전문

시인의 고향 마을에 있는 “추전역”을 그리고 있는
작품인데, “아리는 눈길”이라는 시어가 고향에 있는
추전역에 대한 시인의 내면 풍경을 대변해주고 있다.
고향역은 시인에게 가슴 아리는 듯한 감동으로 다가
오는 것이다. 하지만 더욱 주목되는 것은 고향에 있는
기차역인 “추전역”은 “두고 떠난 옛길들이” 돌아오도
록 하고, 봄이라는 계절의 속살들까지 보이도록 한다
는 점이다. 고향역은 차곡차곡 포개진 과거의 시간들
이 실마리가 풀리듯 현재의 시공으로 틈입해 오도록
하고, 땅의 속살, 계절의 속살이 느껴지도록 감각을
깨어나게 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추전역
이 이와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고향역으로
의 기차 여행이 사실은 시간여행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기찻길 아스라이
한 굽이씩 돌 때마다


아카시아 꽃내음이
그날처럼 향기롭다


아버지
뒷모습 같은
휘굽어진 고향 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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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끼 곱게 갈아
손톱끝에 물들이고
새로 깔린 자갈밭을
좋아라, 뛰어가면
지금도
내 이름 부르며
아버지가 서 계실까
― .심포리 기찻길. 전문
심포리는 시인이 태어난 고향 마을이다. 고향으로
뻗어 있는 기찻길은 과거의 시간으로 뻗어 있는 길이
다. 그래서 시적 자아는 “아카시아 꽃내음”이라는 향
기를 감각하면서도 현재의 그것이 아니라 과거의 향
기를 상기한다. 시인이 굳이 “그날처럼 향기롭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심포리로 향하는 기찻길이 과거
로의 여행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
하여 심포리의 기찻길은 “휘굽어진 고향 철길”의 모습
을 하고 있는데, 기찻길이 휘굽어졌다는 것은 여러 가
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휘굽어진 기찻길은 “아버
지의 뒷모습”처럼 고단하고 쓸쓸한 정서를 야기하기
도 하지만, 좀 더 주목되는 점은 그것이 휘굽어졌기
때문에 기차가 나아갈수록 숨겨두었던 풍경들을 조금

씩 펼쳐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직선으로 뻗어있는
길은 미래로 향하는 곧은 길이라면 휘굽어진 길은 과
거로 향하는 순환적인 길의 형상을 표상하고 있는 것
이다.

그리하여 그 휘굽어진 기찻길을 돌아서면 시적 자
아가 지나온 유년의 시간이 펼쳐진다. “돌이끼 곱게
갈아/ 손톱 끝에 물들이”는 행동이나 “새로 깔린 자갈
밭을/ 좋아라, 뛰어가는” 행동은 시적 자아가 유년시
절의 그때로 돌아가 있음을 알려주는 표현들이다. 그
리고 그러한 유년시절로 돌아가 시적 자아는 다정했
던 아버지를 찾는다. 고향의 철길, 유년 시절, 아버지
등의 기표들은 모두 기찻길이 단순히 공간을 이동하
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이동을 위한 것임을 강조해주
고 있다. 심포리의 기찻길을 따라 여행을 하는 것은
연어의 회귀 같은 근원으로 거슬러 오르는 행위와 다
르지 않는 것이다.

구만리 대장정길 연어의 푸른 질주
모천으로 가는 길은 치솟는 파도의 갈기
오십천 두고 온 물길,
아득하다
아직은



86
심포리
기찻길 옆
아버지 산소에는
지금쯤 낙엽송이 한겨울로 기울 텐데
사랑엔 이유가 없듯 피 흘리며 닿고 싶다
― .연어처럼. 전문
“오십천”은 시인의 고향인 삼척시를 관통하는 하천
으로 연어의 “모천”에 해당되는 곳이지만, 이는 곧 “심
포리 기찻길”을 통해 시적 자아가 닿고자 하는 곳이기
도 하다. 그러니까 이 시조는 오십천을 향해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심포리의 기찻길을 통해 고향으로 돌
아가는 시적 자아의 유비적 구조를 통해 기찻길의 의
미를 선명히 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심포리 기찻길을
통한 여행은 연어의 모천회귀처럼 과거의 시간이 숨
쉬고 있는 고향으로의 회귀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연어가 모천으로 거슬러 오르는 물길이 결코 평탄
하지는 않다. 거기에는 “치솟는 파도의 갈기”가 있고,
아득한 거리를 소화해야 한다. 연어는 그처럼 쉽지 않
은 모천회귀의 “구만리 대장정길”에 대해 “푸른 질주”
를 통해 극복하려 한다. 시적 자아 또한 “피 흘리며 닿
고 싶다”고 표현하면서 과거의 시간이 살아 있는 고향
길에 대해 갈망을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처럼 과거의 시간이 숨어 있는 고향길에 대한 회귀의
갈망이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고향과 과거의 시간으로 나 있는 기찻길은 연어
의 모천회귀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그러한 회
귀의 근본적 동인은 본능적인 사랑임을 강조하고 있
는 셈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거의 시간과 고향으로의 회귀
에 대한 갈망과 그 가능성에는 길과 시간에 대한 시인
의 독특한 상상력이 내재되어 있다. 앞서 분석한 작품
에서도 기찻길이 “휘굽어진”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처럼 휘굽어졌기 때문에 기찻길은 시적 자아를 과
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었다. 미래를 향해
뻗어 있는 직선길이 아니었기에 기찻길은 과거의 시
간을 향해 흘러갈 수 있었으며, 굽어진 곡선길을 통해
숨겨 두었던 풍경들을 하나씩 내보일 수 있었다. 시간
에 대한 시인의 상상력 또한 굽어진 형상, 혹은 둥근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뒤에서 언
급하겠지만, 그것은 순환하는 시간에 대한 상념을 통
해 지금, 여기의 실존적 조건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널 보며
생각한다
세월이 둥글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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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보며
생각한다
세상이 둥글다는 걸
생명을
키우는 힘은
둥금 속에 있다는 걸
― .몽돌을 위한 명상. 전문
“몽돌”이란 다양한 요소의 마모 작용에 의해서 모
나지 않고 둥글게 변한 돌을 지칭한다. 따라서 몽돌의
형성에는 오랜 시간과 풍화작용, 마모작용 등의 다양
한 요소에 의한 변화가 내포되어 있다. 시적 자아는
이러한 몽돌을 보면서 “세월이 둥글다는” 것, “세상이
둥글다는” 것을 생각한다. “세상이 둥글다”는 것은 몽
돌의 형상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세월이 둥글다”는 것은 좀더 깊은 사유가 필요할 것
이다. 즉 거대한 지각변동, 혹은 화산 활동 등에 의해
서 돌이 생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시간의 마모
작용에 의해서 깎이고 몽돌과 모래로 변한다는 것, 그
리고 다시 그것들이 응결되어 암석이 될 것이라는 순
환의 자연질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필요한 것이다.
어쨌든 시인이 “세월”로 대변되는 시간의 형상을
“둥글다”고 인식하고 있는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그

것은 계기적 질서가 아니라 순환의 질서에 의해서 세
상이 운영되고 있다는 사고를 표상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서 지금이라는 순간에서 다양한 층위의 시간이
공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은 이와 같은 순환적 원리가 “생명을 키우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둥근 시
간이 생명을 키울 수 있는 것은 순환적 원리에 의해서
부활과 갱생의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둥
근 형상이 내포하고 있는 포용과 사랑의 원리가 작용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둥근
시간이 과거의 풍요로웠던 시간들을 복원함으로써 생
명이 지닌 모든 가능성을 펼쳐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생명’이란 단순히 생리작용을 영위하는 현상
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면의 심오한 정서적 작
용을 비롯하여 삶의 궤적이 그리는 다양한 시간의 축
적을 그것은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생명을 키우는
힘"이라는 진술은 생명적 가치의 풍요로움의 실현이
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마음 속
굴렁쇠 하나
천천히 굴려가며


저공으로 날고 있는 금빛시간의 오아시스


90
둥글고
둥글고 싶어
몽돌처럼 나를 깎는 밤
― .굴렁쇠를 굴리는 밤. 전문
“마음 속 굴렁쇠”라는 표현이 “금빛시간”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의 축
적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적 자아는 마음속의
행로를 쫓아 굴렁쇠를 돌리며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
간다. 둥근 굴렁쇠를 굴리는 행위는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시간 여행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거기에서 시적 자아는 “금빛시간의 오아
시스”를 발견한다. “금빛시간의 오아시스”라는 표현
은 과거의 시간이 지니고 있는 위상과 가치를 분명히
해준다. 즉 그것은 현재의 삭막한 현실을 견딜 수 있
도록 하고, 현재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원동력
이자 치유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시인은 오아시스와 같은 과거의 “금
빛시간”을 만나기 위해서는 둥글어지는 것이 필요하
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둥글어지기 위해서는 “몽돌처
럼 나를 깎는”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시인
이 말하는 “몽돌처럼 나를 깎는” 노력이 어떤 성격의
노력인지에 대해서 자세한 묘사가 없기 때문에 그 내
용을 짐작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저공으로 날고 있

는 금빛시간의 오아시스”라는 표현이나 “둥글고/ 둥
글고 싶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볼 때, “나를 깎는” 노
력은 잡다한 세속적 욕망과 갈망으로부터의 정화, 혹
은 삶의 가치에 대한 순수성의 회복을 위한 노력 등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자질구레한 지금, 여기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리하여 인간의 원초적
삶과 근원적 삶의 조건을 확인하는 작업 같은 것을 암
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주로 “사막”에 대한 경
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2. 사막 ― 존재의 토대, 혹은 시공의 근원
지금까지 우리는 김민정 시인의 이번 시조집에서
중심적인 모티프가 “기찻길”이라는 것, 기찻길을 따라
여행하는 것은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이
라는 점, 그래서 기찻길을 따라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
아가보면 유년의 추억과 마음속의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 등을 살펴보았다. 또한 시인이 주목하는 기찻길은
휘굽은 기찻길로서 숨겨진 풍경들을 하나씩 내보이듯
이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순환적 시간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 그래서 과거의 순수한 시간을 회복하
기 위해서는 몽돌과 같이 둥글어지는 노력이 필요하
다는 시적 논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를 깎는 노력은 곧 원형적인 삶의 본질을 찾는 노력
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원초적인 삶의 형식을
찾는 노력은 사막과 같은 원초적 대상의 경험을 통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 바 있다. 사막 시편을
살펴보기 전에 시로 쓴 시론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음
작품을 먼저 살펴보자. 다음 작품은 김민정 시인의 시
가 기본적으로 근원적 시원을 향한 갈망을 지니고 있
음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단 한 번 직활강 直滑降으로
내려 뛰는 저 단애 斷崖


고생대 불던 바람
회오리로 찾아들어


물보라 무지개 건넌다
두 눈이 멀지라도


내 몸의 관절마다
푸른 별이 돋는다


그 몸속 지층 어디
울렁이는 어지럼증


시 앞에 고꾸라진 채


93
목숨 놓을 지라도
― .폭포와 시. 전문
“직활강直滑降으로 내려 뛰는 저 단애斷崖”는 물론
폭포가 떨어지는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를 의미하
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고생대의 지층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며, 그곳을 떨어지는 폭포는 “고
생대 불던 바람”을 불러오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이
보기에 직활강으로 떨어지는 폭포는 고생대의 바람을
부활시키고 있으며, 고생대의 회오리 바람은 “두 눈이
멀지라도” “물보라 무지개”를 건너려 한다. 폭포가 불
러일으킨 고생대의 바람이 폭포가 일으키는 물보라의
무지개를 건너가는 현상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공존
하고 공감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러한 폭포의 작용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변화이다. 시적 자아는 폭포가 일으키는
고생대의 바람과 물보라가 서로 섞이고 혼종混種하는
현상을 보면서 “내 몸의 관절마다/ 푸른 별이 돋는다”
고 느낀다. 그리고 시적 자아는 자신의 몸을 “지층”이
라 여기며 그 지층에 돋는 “푸른 별”로 인해서 “울렁이
는 어지럼증”을 느낀다고 고백하고, “시 앞에 고꾸라
진 채/ 목숨 놓을 지라도”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러한
진술은 생략과 압축으로 비약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자신의 시쓰기 작업에 대해 언급한 진술로 읽을 수 있
다. 즉 폭포가 떨어지는 낭떠러지는 고생대의 지층으
로 연결되어 있으며, 거기를 직활강으로 내려 뛰는 폭
포는 고생대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시쓰기란
자신의 몸의 지층을 탐사하는 작업이며, 자신의 몸 속
에 숨어 있는 “푸른 별”을 발견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
다는 생각을 담아놓고 있는 것이다. 폭포의 직활강이
고생대의 지층을 탐사하며 그때 불던 바람을 복원하
는 것처럼 시쓰기는 자신의 몸속 지층을 탐사하여 존
재의 근원적 조건을 복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시인을 사막으로 이끈 것
인지도 모른다.

한 때는 물이 흘렀을
건천을 지나가며


내 생도 지고 가는
목마른 낙타 등에


사막을 가로질러 온
낮달 저만 드높다


이리주 한 모금에
길은 자꾸 늘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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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로 치는 햇살
온 몸으로 견뎌내며
시간을 되감아간다
모랫바람 비단길
― .타클라마칸 사막. 전문
“타클라마칸 사막”은 생명의 원초적 의미와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알려준다. 그곳은 끝없이 일렁이는 모
래의 바다와 “한 때는 물이 흘렀을/ 건천”, 그리고 “목
마른 낙타”와 “사막을 가로질러 온, 낮달”이 황량하게
떠 있다. 그곳은 가물고 건조하고, 삭막하며 황량해서
생명의 풍요로운 기미를 전혀 발견할 수 없도록 한다.
하지만 그토록 삭막하고 황량하기에 역설적으로 생명
의 신비와 존재의 가치를 더욱 선명히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지도 모른다.
시적 자아는 이러한 원시적 공간을 “이리주 한 모
금”을 마시고, “죽비로 치는 햇살”을 “온 몸으로 견뎌
내며” 횡단한다. 그런데 시적 자아는 타클라마칸 사
막을 횡단하는 것이 단순히 사막을 걸어가는 것이 아
니라 “시간을 되감아가”는 시간 여행임을 표나게 내세
우고 있다. 그러니까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는 행
위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위로서, 연어가 모천
으로 회귀하는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파악

96
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장에서 사막에 몰아
닥치는 “모래바람”조차 “비단길”로 수용하고 있는데,
사막의 모래바람을 비단길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은 그
것이 원초적인 삶의 모습을 복원함으로써 시인에게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막이 지닌 원초적
성격은 다음과 같이 표출되기도 한다.
겨운 삶 등에 지고 모래밭을 타박이며
얼마나 느린 발길로 너는 걸어 왔을까
시간은 모래바람 속, 온 길이 다 묻힌다
너를 통해 흘러왔을 나의 강을 바라보며
뜨거운 고도 향해 휘파람을 불어가며
혹처럼 굽은 생애가 신기루로 흐른다
오랜 어둠을 깨며 멀어지는 밤 같은
한 생애 푸른 비단을 펼쳐놓은 저 달빛
속눈썹 짙게 젖어든 외로운 등이 휜다
― .낙타. 전문
삭막한 사막을 횡단하며 삶을 영위하는 낙타의 고
단한 삶이 전경화되어 있지만, 시인은 낙타에게서 자
신의 원초적 삶의 모습과 인류의 삶의 역사를 읽어낸
다. 시인이 둘째 수에서 “너를 통해 흘러왔을 나의 강
을 바라보며”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의 삶에서 자신의 원초적 삶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은 건조한 인생
의 과정을 강조하기 위해서 시인은 낙타의 “외로운
등”을 부조하기도 하고, “혹처럼 굽은 생애”를 강조하
기도 한다. 하지만 낙타의 굽은 등은 인생의 간난신고
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첫째 수의 종장에
서 “시간은 모래바람 속, 온 길이 다 묻힌다”라고 언급
하고 있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막을 지배하는
것은 “시간”이며, 모래바람과 같은 시간은 지나온 길
을 다 지워버리는 무화의 작용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막의 “모래밭을 타박이며” 걸어온 낙타의 삶의 궤적
은 모래바람에 휩쓸려 사라지게 되는데, 이러한 점에
도 사막은 삶의 궤적과 역사의 흔적을 지우는 무화 無
化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막을 굽은 등을 지닌 낙타가 “느린 발길”
로 길을 만들며, 혹은 강을 만들며 지나가고 있다. 낙
타는 곧 지워질 발자국을 남기며 사막을 걸어가고 있
는 것이다. 하지만 그 흔적 또한 사막의 모래바람에
곧 지워질 것이다. 낙타는 지워질 흔적을 만들며 사막
을 횡단한다는 점에서 원초적 삶의 형식을 상징하며,
그러한 점에서 낙타의 “굽은 등”은 본래의 시간으로
회귀하는 시간의 순환적 질서를 대변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사막을 지배하고 있는 이러한 순환적 시간의


질서에 대해서 시인은 셋째 수 초장에서 “오랜 어둠을
깨며 멀어지는 밤”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표현을 통해
서 강조하고 있다. 밤이 오랜 어둠을 깨뜨린다는 것은
새로운 밤이 기존의 밤을 대체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사막을 지배하는 시간의 무화작용을 적절히 표상해준다.

시인이 “한 생애 푸른 비단을 펼쳐 놓은 저 달빛”이
라고 묘사하면서 사막을 덮고 있는 달빛을 강조하고
있는 대목에서도 사막을 무화시키는 본질이 암시되어
있다. 낙타의 한 생애가 새겨지고 지워진 사막은 달빛
의 푸른 비단에 의해 덮여 있다. 달빛은 사막에 새겨
진 흔적을 덮어 지우는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모래바
람과 다르지 않다. 사막에 존재하는 달빛이나 모래바
람은 모두 흔적을 지우는 시간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
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막은 항상 본래의 모습으로 회
귀한다. 지나온 길 위에서 항상 처음처럼 길을 나서는
낙타는 영원회귀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셈인데, 그러
한 무한 반복의 삶의 형식을 그의 “굽은 등”이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사막은 항상 처음과 같은 생의 모
습을 복원함으로써 존재와 문명의 근원을 사유하도록
한다.

낟가리를 쌓은 듯한
천막 속이 궁금하다



99
하늘을 열고 닫는
카자크족 천장에는
밤마다 별과 달들이
이웃처럼 드나든다
양탄자를 둘러놓은
집안이 아늑하다
말려놓은 우유 조각
한 입씩 씹어가며
웃음을 서로 나누는
정겨움이 살고 있다
― .우루무치에서. 전문
사막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유목민 “카자크족”의 삶
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의 삶은 인류 조상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
으며, 소박하지만 생동감 있는 삶의 형태를 띠고 있
다. 시에 묘사된 카자크족의 모습 가운데, 그들이 사
는 가옥은 “하늘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천막이기 때문
에 “밤마다 별과 달들이/이웃처럼 드나든다.” 카자크
족의 삶은 자연과 어떠한 괴리도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삶의 방식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카자크족의 삶이 자연 그대로의 것은 아
니다. 자연과 연결된 천막 속에 그들은 “양탄자”를 깔
아서 집안을 아늑하게 한다.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통
해 생동감 있고 풍요로운 삶의 질을 누리고 있는 것이
다. 그들이 먹는 것은 “말려놓은 우유 조각”으로 빈약
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들은 그처럼 소박하고 빈한
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웃음을 서로 나누는/ 정겨움”
을 누리며 살고 있다. 이처럼 자연과 소통하면서도 문
명의 이기를 누리는 삶, 소박한 음식을 나누면서도 공
동체적 연대와 관계의 의미를 되새기는 삶의 모습이
야말로 인간의 원초적인 삶의 모습일 것이다. 오늘날
첨단의 현대문명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모습은 불
편하고 열등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원
초적 삶의 모습은 현대문명이 지닌 인위성과 그로 인
한 병폐를 반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 원시적 건강성을
지닌 삶의 원초적 모습은 “나를 깎는” 작업, 혹은 사막
이 체현 體現하고 있는 무화 無化와 방기 放棄의 정신이
필요함을 역설해주고 있다.

3. 태고 太古의 시간, 시원 始原의 시간
휘굽은 기찻길의 시간 여행, 그리고 사막 체험을
통한 금욕과 절제의 정신을 통해 시인은 원형적 시간

100


이라는 순환적 원리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처럼 과거
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회귀의 활동과 잡다한
세속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탈각의 노력을 통해서 시
인은 자연과 인간의 삶 속에서 태고의 시간을 발견한
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시원의 시간, 현재와 공존
하는 근원적 시간으로 인해서 시인은 세속의 낡음으
로부터 벗어나 근원적인 갱신의 체험을 하게 된다. 원
시적 시간의 복원은 그동안 인간들인 인위적 문명의
가면으로 인해서 잊고 있던 날것의 생동감과 생명력
을 눈앞에 현현시킴으로써 현대인을 문명의 피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원의 시간을
복원하는 작업은 현재와 과거의 공존을 통한 세속적
삶의 양식을 정화하고 근원적인 풍요로움을 획득하는
생생한 작업이 된다. 시원의 시간에 대한 발견은 자연
과 사회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왈칵,
바다를 열자
찬바람이 뺨을 갈긴다
군마가 달려간 자리 뽀오얗게 이는 포말
언덕 위 썬크르즈가 그 속으로 빠져 든다


천지의 자궁문이 조심스레 열린다
신의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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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 올리는
저 싱그런 햇덩이!
뚝, 뚝, 뚝
듣는 황금물 온 바다가 환하다
청춘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자리
너와 나 달려가야 할 붉은 이유 거기 두고
신년호 닻을 올린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 .아침, 정동진. 전문
새해를 맞아 정동진 해돋이를 보면서 새해의 힘찬
출발을 다짐하고 있는 작품이다. 해돋이를 보면서 힘
찬 새해의 출발을 다짐하고 있기에 시적 공간에는 “아
침”, “정동진”, “썬크르즈”, “황금물” “청춘” 등의 밝고
활기찬 이미지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더욱 중
요한 것은 “바다”와 “햇덩이”와 같은 원형적인 심상이
작품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바다”는 “찬바
람‘과 ”포말’을 일으키며 일렁이고 있는데, 그것은 “천
지의 자궁문”으로서 태초의 시간을 담고 있으며, 원초
적이고 원시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햇덩이” 또한 원
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대상인데, 그것은 “천지
의 자궁문”을 열고 나온 신생아와 같은 존재이며, “신
의 손이/밀어 올리는” 대상으로서 신성한 가치를 지

니고 있다. 새로운 생명으로서 신성한 성격을 지닌
“햇덩이”는 “뚝, 뚝, 뚝/ 듣는 황금물”과 함께 떠올라
“바다”를 환하게 밝혀주는데, 이처럼 해가 떠오르는
장면에 대한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묘사는 매일 아
침 떠오르는 일출의 장면을 태초에 떠오른 일회적 장
면처럼 생각되도록 한다. 천지창조의 결정적 순간에
우리가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새해에 떠오르는 태
양은 “싱그런 햇덩이”로서 전혀 진부하지 않는 원초적
태양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이
그려내는 자연의 모습은 원시적 자연으로서 그곳을
지배하는 시간은 곧 원형적 시간, 혹은 시원의 시간이
라고 할 수 있다. 시원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
곧 “바다”와 “햇덩이”는 날것 그대로의 그것으로서, 세
월의 때를 입지 않고 있다. 그래서 싱그럽고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서 현대인들은
익숙하고 진부한 경험에서 벗어나고 정화됨으로써 시
인이 “이제 다시 시작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듯이 생생
한 경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연두빛 발을 담근 오십천은 더 푸르고
바위도 앉은 채로 놓여있는 누각에는
한 천 년 받쳐 든 시간 망울망울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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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귀 물들이는 산수유 눈을 뜨고
첫마음 못 다한 말 홍매화 옅은 기침
파릇한 햇살 속에서 숨바꼭질 한창이다
돌을 찧어 구멍 내며 소원을 빌었다던
옛사람 그 손길이 뜰에 아직 남았는데
절반은 눈물꽃 맺혀 그렁그렁 피어있다
하늘 향해 돛을 단 관동별곡 가사 터엔
송강의 푸른 노래 봄볕 속에 새순 돋고
오십천 아침을 연다 햇살무늬 반짝인다
― .죽서루 편지. 전문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서루는 삼척시의 서
편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자
리잡고 있는데,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자연친화
적인 건축양식을 사용한 누각이다. 봄날 시인은 죽서
루에 올라 그 경관을 조망하면서 감회를 노래하고 있
지만, 시인이 묘사하는 이미지들이 또한 자연의 풍경
묘사에 그치지는 않는다. 이 시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
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첫째 수 종장에서
“한 천 년 받쳐 든 시간 망울망울 부푼다”라고 노래하
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죽서루라는 누각
을 보고 있지만 사실은 시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시인이 보고 있는 것은 과거와 현

재라는 시간의 조응 照應 또는 상응 相應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천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죽서루의 누각에
봄이 오자 “산수유는 눈을 뜨고”, 홍매화는 “옅은 기
침”을 한다. 또한 “돌을 찧어 구멍 내며 소원을 빌”던
“옛사람 그 손길”은 현재에도 여전히 뜰에 남아 있으
며, 과거에 만들어졌던 그 구멍은 현재 “눈물꽃 맺혀
그렁그렁 피어있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면서 서로 조
응하고 있는 현상은 넷째 수에서 절정에 이른다. 즉
“송강의 푸른 노래”가 “봄볕 속에 새순”으로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 송강의 관동별곡이라는 가사를 “푸른
노래”라고 표현하는 대목도 예사로운 것은 아니지만,
송강의 가사가 봄볕 속에서 새순으로 돋아난다는 표
현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경지라고 하겠다.

결국 이 시조를 지배하는 주된 이미지는 발아 發芽
와 개화 開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데, 발아하고 개
화하는 대상이 과거의 시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
가 있다. 과거의 시간이 오늘날 싹이 트고, 꽃이 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죽서루가 품고 있는 천
년의 시간이 봄이 되자 꽃이 되려고 “망울망울 부풀”
고 있다. 옛사람들이 돌을 찧어 만들어 놓은 구멍(실
제로 이를 성혈 性穴이라 한다)은 눈물꽃으로 피어있
다. 그리고 송강의 가사는 봄볕 속에 새순으로 돋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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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과거의 시간과 과거의 유물, 유산 등이 오늘
의 시간에 싹이 되고 꽃이 되어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바람 타고 날던 익룡
이곳 미처 몰랐을까
백악기 붉은 기침
이제 막 터져올 듯
오래된 미래 같은 곳
푸드득 활개친다
태고적 물소리로,
그때 그 바람이
늠름하고 장엄하게
원시림을 키워낸다
물안개 깊은개 적셔
아침을 열어놓고
일렁이는 햇살아래
반쯤 눈뜬 미인폭포
몸을 날린 절세미인
그 전설이 다시 살아
벼랑을 뛰어내린 물결,
긴 잠을 깨워준다
― .심포 협곡. 전문
심포리 협곡을 묘사하고 있는데, “익룡”, “백악기”,

“원시림” 등의 시어들이 시적 대상인 심포리의 협곡을
신비한 태고적 시공으로 옮겨놓고 있다. 심포리는 시
인의 고향이기도 한데, 시인은 자신의 고향에서 시원
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고향 땅을 통해
발견한 태고적 시공의 놀라움과 생동감을 전달하기
위해서 시인은 “백악기 붉은 기침/ 이제 막 터져올 듯”
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오래된 미래 같은 곳/ 푸드
득 활개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오래된 과거의 시
간과 공간이 현재의 고향땅에 현현한 것 같은 실감을
강조하기 위해서 현장감과 생동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이 보기에 고향땅 심포리의 협
곡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는 신비한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수에서도 시인은 과거의 원초적인 시간이 현
재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과
거와 현재의 시간이 중첩되는 장면 묘사를 활용하고
있는데, 과거의 시공이 현재의 시공에 생명력으로 작
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시각의 독특한 성향을 발견
할 수 있다. 즉 시인은 “태고적 물소리로, 그때 그 바
람이/ 늠름하고 장엄하게/ 원시림을 키워낸다”고 진
술하고 있는데, 과거의 물소리와 바람이 현재에 작용
하여 원시림을 키워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과거의
시공이 현재의 시공에 하나의 생명력으로 작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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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물안개 깊은개 적셔/ 아
침을 열어놓고”라고 표현하면서 과거의 시간이 현재
의 자연적 질서에 여전히 관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과거와 현재 시간의 중첩, 그리고 과거
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인식은 우리 삶에 대한 자각으로 연결된다. 시인은 셋
째 수의 종장에서 “벼랑을 뛰어내린 물결/ 긴 잠을 깨
워준다”고 표현하면서 오랜 시간을 담고 있는 지층과
그곳을 뛰어내린 폭포가 현대인의 “긴 잠”을 깨워준다
고 강조한다. 심포리의 협곡은 “오래된 미래”처럼 과
거의 시간이 살아 있는 곳인데, 그러한 과거의 시간은
우리의 미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
의 미래는 과거의 시간에 뿌리를 내리고 뻗어나가는
것이다. 결국 과거의 시간은 우리의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의 풍요로움을 담보하는 원천이 된다고 할 수 있
다. 현대인들이 과거의 시간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음
을 다음 작품은 좀 더 분명히 보여준다.

몽촌의 봄기별이 꽃 피듯 건너오는
붉어진 배롱나무 기대어선 선사시눀
투명한 살결만 같은 그 내력을 읽는다


아리수 물굽이로 경계들은 무너지고
흘러가는 시간 속을 흘러가는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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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돋는 강동마을로 덩굴손을 뻗는다
햇살 따라 얼키설키 엮어가는 역사의 장
그 속에 피던 사랑 배롱꽃에 어리는지
이 아침 한강변 어귀 옛사람의 숨결 깊다
― .움집의 내력. 전문
움집은 원시인들의 삶의 거주지로서 태초의 인류
의 조상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유물이
다. 선사시대의 시간적 표지인 “움집”을 비롯하여 백
제시대의 토성인 “몽촌”, 그리고 고구려시대의 한강을
지칭하던 언어인 “아리수” 등이 “강동마을”을 태고적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현재 서울의 가장 번화한 곳
가운데 하나인 강동마을은 움집, 몽촌, 아리수 등에
둘러싸여 원시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아득한 과거의
시간이 지배하는 태고적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강동마을은 과거와 현재
의 시간이 고스란히 공존하는 그러한 공간이 되고 있
는 셈이다.
시적 논리에 의하면 강동 마을에는 몽촌토성이 있
고, 아리수가 흘러가며 붉은 배롱나무 옆으로 움집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움집을 묘사하면서
“붉어진 배롱나무 기대어선 선사시대/ 투명한 살결만
같은 그 내력을 읽는다”라고 표현하면서 현재 존재하

는 움집에서 과거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고
스란히 읽어내고 있다. “투명한 살결”이라는 표현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눈에 보이듯이 움집
에 새겨져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시인은 움집
옆에서 자라면서 꽃을 피우고 있는 “붉어진 배롱나무”
에서 거기에 어려 있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사랑도 읽
어내면서 “이 아침 한강변 어귀 옛사람의 숨결 깊다”
고 표현하고 있다. 움집 옆의 배롱나무에서 “옛사람
의 숨결”까지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점은 그처럼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선사시대의 살결, 혹은 태고적 시간에서 현대인
들이 살아갈 자양분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
은 “흘러가는 시간 속을 흘러가는 사람들이/ 해 돋는
강동마을로 덩굴손을 뻗는다”고 표현하면서 상대적
이고 유한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현대인들이 근원적
인 시간이 존재하는 강동마을에서 삶의 원동력을 얻
을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강동마을을 향해 덩굴손
을 뻗는 현대인들은 과거의 시간에서 생명의 원천이
자 원동력을 얻고 있는 셈이며, 해가 뜨는 강동마을은
근원적인 생명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
지 견지해왔던 논리대로 말하자면, 현대인들은 역사
의 흐름에서 때묻지 않은 원시적 시공으로 정화되어
언제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생동감과 생명력을 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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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민정 시인의 다섯 번째
시조집에 실려 있는 시조 작품들은 기찻길과 사막, 그
리고 움집, 화석, 유물, 유산 등의 다양한 사물들을 통
해서 현재 속에 숨쉬고 있는 과거의 시간을 복원하려
는 갈망으로 추동되고 있다. 현재의 시간 속에 내재되
어 있는 태고적 시간의 복원은 오늘날 문명의 이기로
인해서 잊어버리고 있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날것의
생동감을 환기함으로써 현대인에게 새로운 경험의 세
계로 이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원적 시
간의 복원을 위한 시적 작업은 시인의 개인적 체험이
녹아 있다는 점에서 진정성眞情性을 지니고 있으며,
현대 사회가 처한 문명의 피로와 병폐에 대해 광범위
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普遍性을 지
니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과 같은 가장 현대적
인 작업을 저 유구한 형식인 시조를 통해 이루고 있다
는 점에서 그것은 경이驚異로움을 지니고 있기도 하
다. 김민정의 제5시조집 ..백악기 붉은 기침..에는 현
대시조가 오늘날 우리 시대의 표현 욕구와 사회적 도
전에 대해서 충분히 응전할 수 있는 문학적 양식이라
는 사실을 웅변해주는 하나의 증거로 제시할 만한 작
품들이 내재해 있다. ▩

김민정
1959년 강원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 출생. 1985년 ≪시조문학≫지상백일
장 장원 등단. 성균관대문학박사,상지대대학원강사 역임,강일중교사. 시
조집 ..영동선의 긴 봄날.., ..사랑하고 싶던 날.. 외, 수필집 ..사람이 그리
운 날엔 기차를 타라.., 평설집 ..모든 순간은 꽃이다.., 논문집 ..현대시조
의 고향성.. 외 다수. 나래시조상, 열린시학상, 철도시인공로상 외 수상.
|한국대표정형시선 028|
백악기 붉은 기침
초판 1쇄 인쇄일 . 2014년 09월 22일
초판 1쇄 발행일 . 2014년 10월 01일
지은이│김민정
펴낸이│노정자
펴낸곳│도서출판 고요아침
편 집│김남규
출판 등록 2002년 8월 1일 제 1-3094호
120-814 서울시 서대문구 증가로 29길 12-27 102호
전화│302-3194~5
팩스│302-3198
E-mail│goyoachim@hanmail.net
홈페이지│www.goyoachim.net
ISBN 978-89-6039-624-1(04810)
* 책 가격은 뒤표지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 지은이와 협의에 의해 인지는 생략합니다.
* 잘못된 책은 교환해 드립니다.
ⓒ 김민정,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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