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식선생의 고택 (홍명희 생가)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1
강동문인의 문학기행 낭송회 제93회
문학기행 겸 강동문인 시와 산문 낭송회
일 시 : 2012년 5월 19일(토)
문 학 기 행 : 괴산화양구곡. 홍명희 생가. 중원 미륵사지
시낭송장소 : 화양구곡 소재 <금사담의 암서재(金砂潭 巖棲齋)>(우암 송시열 유적지)
협 조 : 괴산군 문화체육과
주 최 : 강동문인회(회장 정영기, 사무국장 임기환)
*특별히 강동문인회의 문학기행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고, 시인인 허영란 문화해설사를 파견하는 등의 커다란 편의를 제공하여 주신 괴산군의 배려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문학기행 출발과 귀경길에서 전재동 고문의 홍명희 소설가에 대한 본인의 소견을 자상하게 발표하여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에서 문학의 고충을 개진하였고, 박희 박사는 박식한 식견으로 문학기행을 하는 괴산 지역의 역사지리에 관하여 폭 넓게 설파함으로 강동문인회원들에게 매우 유익하고 감동적인 문학기행이 되도록 하였다.
*이번 괴산지역문학기행이 성사되도록 수고를 아끼시지 않은 정영기 회장과 사무국장 그리고 임원진, 광광버스와 음식물을 준비에 앞장 선 양소정 시인, 떡을 선사한 이신강 고문, 사정상 문학기행에 동행하지 못하면서도 아침과 석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찰밥과 반찬을 마련하여 주신 한상림 시인, 그 밖에 여행경비를 찬조하여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1)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의 전경. 399. 사진/함동진
일완 홍범식(一阮 洪範植 1871년 음력 7월 23일~1910년 양력 8월 29) 선생
홍범식 선생의 본관은 풍산(豊山), 호는 일완(一阮)으로 충청북도 괴산(槐山)이 출생지이다.
홍범식 선생의 가문은 사도세자 비빈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 집안으로 조선후기 대표적인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고 충효의 의리와 절의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익혔다. “부모를 섬기는 데는 효로 하고, 사람을 맞이하는 데는 후덕하게 하며, 성정이 학문을 좋아하여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유교 경전을 읽고 암송하였다”고 전해진다.
홍범식 선생은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902년에는 내부 주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혜민원 참서관 등의 관직에 있을때에 일제의 침략과 그에 따른 망국의 진행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였다.
1907년에 홍범식 선생이 태인군수로 발령을 받았을 당시는 태인군에서는 아전들의 탐학이 심했고, 일반 백성들은 의병전쟁과 관련하여 무고하게 잡혀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때에 군수로 부임한 선생은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무고한 백성들의 피해를 막고,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백성들을 수탈하지 않고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에 앞장서는 등, 선정을 베풀어 이에 감동한 군민들은 마을마다 송덕비를 세워 그 수가 38개에 이르렀다. 이는 홈범식 선생의 높은 인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로 지금도 정주시 산외면 오공리 야정 마을에 <군수 홍범식 선정비>가 남아있다.
1909년 선생은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기었고, 이곳에서도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사정하여 주는 등 위민행정(爲民行政)을 펼침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금산군수로 재직하던 시기에 대한제국의 운명은 망국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2)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출입문인 솟을대문. 347. 사진/함동진
경술국치에 통분, 순국한 홍범식 선생
홍범식 선생은 금산군수 재임 중에 한일병합조약의 조인 소식을 듣고 “아아 내가 이미 사방 백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탄식하면서 자결로서 순국을 결심한 듯 미리 유서를 써 놓았다.
8월 29일 드디어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되자 저녁에 홍범식 선생은 재판소 서기 김지섭에게 상자를 하나 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는 관아의 객사로 갔다. 이어서 시종하는 고을 사령을 밖에 머물게 하고는 객사 안으로 들어가 북향하여 황제에게 예를 표한 뒤 목을 매어 자결하려 하였다. 이를 알아챈 고을 사령이 통곡하며 만류하자 홈범식 선생은 화를 내며 그를 밀치고 다른 곳으로 재빨리 갔다. 이에 고을 사령이 다시 뒤따라가자 선생은 그에게 모래를 뿌려 앞을 못 보게 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고, 집으로 달려간 김지섭은 선생이 맡긴 상자를 열어 보니, 가족에게 남긴 유서와 “나라가 망했구나.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련다. 그대도 빨리 관직을 떠나 다른 일에 종사하라”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에 경악한 김지섭은 선생의 행방을 좇고 있다가 때마침 선생을 찾고 있는 고을 사령 일행들과 만나게 되었다. 함께 객사 주변을 나누어 수색하던 중 시신을 발견하였다는 고함에 달려가 보니 선생은 객사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채로 죽어 있었고 자는 듯 편안한 자세로 발견되었다.
홍범식 선생이 순할국 당시 나이는 막 40세에 들어선 때였다. 선생의 유서 5통은 일본인이 탈취해 갔는데 다행이도 김지섭에게 이미 맡겨 놓은 것은 장남에게 건네져서 유서는 모두 10여 통으로 선생의 조모, 부친과 부인, 여섯 명의 자녀와 장손에게 남겨진 것들이다.
장남에게 남긴 유서는 아래와 같은 당부의 내용이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1910. 8. 29 홍범식 선생이 아들에게 남긴 유서의 일부)
정부는 홈범식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94. 사진/함동진
시인인 허영란 문화해설사가 강동문인회 회원들에게 열열히 해설을하는 모습
(4)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95. 사진/함동진
강동문인회 회원들이
시인인 허영란 문화해설사의 열열한 해설을 경청하고 있다.(5)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51. 사진/함동진
소설가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 1888.5.23.~1968.3.5)
장편 역사소설 <임꺽정>을 쓴 소설가 홍명희(1888~1968)의 호는 벽초(碧初). 가인(假人:또는 可人). 백옥석(白玉石)이다.
벽초의 생애를 살피면, 한민족의 남북 이질적인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민족의 아픔의 상징일 수 있다.
"그는 1948년 김구 등과 함께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북한으로 넘어 간 후 남한에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1950년 북한 정권의 부수상으로 재임할 당시 6·25라는 민족상잔이 있었으며 1968년 북한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민족 전체의 비극이자 고통스런 역사이며 눈물이요 아픔이다."('벽초 문학비' 중에서)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꺽정(처음에는 <임거정전>)>은 조선 명종때의 도적 임꺽정을 소재로한 소설인데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바 있으나 여러번 중단 되는 등 미완의 상태였다.
특히 민중의 풍속과 언어에 관심을 크게 불어넣었는데 소설 내용에는 봉단(鳳丹), 피장(皮匠), 양반(兩班), 의형제(義兄弟), 화적(火賊)등 5편으로 편성되어있다.
《임꺽정전》이란 제목으로 1928년 11월 21일~1939년 3월 11일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1940년 《조광》 10월에도 발표되었으나 미완으로 끝났다. 조선시대 최대의 화적패였던 임꺽정부대의 활동상을 그린 역사소설로서 일제강점기에 쓰여진 방대한 규모의 대하장편역사소설이다. 봉단편·피장편·양반편·의형제편·화적편 등 5편으로 구성되었다. 봉단편·피장편·양반편에서는 화적패가 출몰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시의 혼란상을 폭넓게 그려나가면서, 임꺽정의 일생을 중심으로 하여 그와 연관된 이봉학·박유복·배돌석·황천왕동이·곽오주·길막동이·서림 등 여러 인물들의 이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리고 의형제편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특정한 계기를 통해 마침내 의형제가 되어 청석골에서 조직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화적편은 그후 이 집단이 벌이는 일련의 활동상이 그려져 있다.
(6)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54. 사진/함동진
(7)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45. 사진/함동진
(8)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48. 사진/함동진
(9)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49. 사진/함동진
(10)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50. 사진/함동진
(11)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58. 사진/함동진
(12)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60. 사진/함동진
(13)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63. 사진/함동진
(14)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67. 사진/함동진
(15)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69. 사진/함동진
(16)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71. 사진/함동진
(17)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74. 사진/함동진
(18)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78. 사진/함동진
(19)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79. 사진/함동진
(20)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 381. 사진/함동진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2
강동문인의 문학기행 낭송회 제93회
문학기행 겸 강동문인 시와 산문 낭송회
일 시 : 2012년 5월 19일(토)
문 학 기 행 : 괴산화양구곡. 홍명희 생가. 중원 미륵사지
시낭송장소 : 화양구곡 소재 <금사담의 암서재(金砂潭 巖棲齋)>(우암 송시열 유적지)
협 조 : 괴산군 문화체육과
주 최 : 강동문인회(회장 정영기, 사무국장 임기환)
*특별히 강동문인회의 문학기행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고, 시인인 허영란 문화해설사를 파견하는 등의 커다란 편의를 제공하여 주신 괴산군의 배려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문학기행 출발과 귀경길에서 전재동 고문의 홍명희 소설가에 대한 본인의 소견을 자상하게 발표하여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에서 문학의 고충을 개진하였고, 박희 박사는 박식한 식견으로 문학기행을 하는 괴산 지역의 역사지리에 관하여 폭 넓게 설파함으로 강동문인회원들에게 매우 유익하고 감동적인 문학기행이 되도록 하였다.
*이번 괴산지역문학기행이 성사되도록 수고를 아끼시지 않은 정영기 회장과 사무국장 그리고 임원진, 광광버스와 음식물을 준비에 앞장 선 양소정 시인, 떡을 선사한 이신강 고문, 사정상 문학기행에 동행하지 못하면서도 아침과 석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찰밥과 반찬을 마련하여 주신 한상림 시인, 그 밖에 여행경비를 찬조하여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21)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386. 사진/함동진
(22)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404. 사진/함동진
(23)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403. 사진/함동진
(24)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409. 사진/함동진
의사홍공범식추모비(義士洪公範植追慕碑)
(25)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414. 사진/함동진
(26)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417. 사진/함동진
(27) 2012. 05. 19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419. 사진/함동진
홍명희소설가의 생가(홍범식선생의 고택) 뒤의 산자락에 세워져 있는 <평화통일 기원탑>.